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77화 (77/77)

제77화. 기적 같은 선물

2018.10.27.

유리알처럼 반짝이던 와이키키 백사장에 까만 밤이 내려앉았다.

사랑의 서약을 끝으로 형식은 간략했지만 뭉클한 감동으로 가득했던 결혼식이 막을 내렸다.

저녁 식사를 곁들인 흥겨운 피로연이 진행됐고 행복으로 취한 하객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단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수현과 지연.

두 사람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산책을 위해 해변으로 나갔다.

프라이빗 해변이기에 순찰을 도는 안전 요원만 간간이 보일 뿐 그들의 산책길엔 아무런 방해자도 없었다.

수현의 손을 꼭 잡고 백사장을 거닐던 지연이 물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끝났지.”

대답하는 수현의 목소리에 후련함이 묻어났다.

“고마워요.”

지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웃었다.

수현도 고개를 내려 그녀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에 밝은 별이 반짝였다.

그 별은 사랑의 별이었고 감사의 별이었다.

수현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맘을 알 수 있었다.

줄리의 맘을 헤아려줘 고맙다는,

아름다운 결혼식을 선사해줘 고맙다는.

하지만 이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여자를 위해 무엇을 못 할까?

“앞으로 계속 고마울 텐데 뭐.”

농담 같은 응답이었지만 사랑과 애틋함이 묻어났다.

인적 없는 해변의 고요함 때문일까, 모든 걸 다 끝냈다는 후련함 때문일까,

지연은 가식 없이, 모든 감정의 경계를 허물고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생각을 그에게 풀어놓았다.

“한때 수현 씨가 저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 깊이 고민했었던 적이 있었어요.”

“어떤 감정?”

“혹시 수현 씨가 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감정이 동정이 아닐까 싶어서.”

동정이라…….

그녀가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수현이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남자에게 버림을 받았고 미국까지 유학 가서 졸업도 못 했고 그런데 낳지도 않은 아이를 맡게 됐고 심지어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그런데 이 상황에선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하지?

사실 그녀에게 처음 느꼈던 감정은 동정이 맞다.

불쌍했고 가여웠고, 때문에 보듬어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솔직하게 말을 하면 그녀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자기가 불쌍했다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으니까.

‘동정’이 아니라 조금 더 어감을 미화시켜 ‘연민’이었다고 포장해도 말이다.

뭐라고 응대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그녀가 먼저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동정이 맞았겠죠. 제가 생각해도 제가 가여웠으니까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동정이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걸 느꼈어요.”

그녀가 먼저 그의 감정이 ‘동정’에서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지금의 그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똑똑한 여자 같으니라고.

‘그런데 언제부터 사랑으로 바뀌었지?’

정확히 언제부터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사랑으로 바뀌었는지 그녀의 질문을 계기로 수현도 한 번 생각해보았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애런이 나타난 이후인 듯.

상식과 논리로 봤을 땐, 또는 당시 지연이 애런의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니 지연을 위해서라도 진정 그녀를 돕고 싶었다면 애런을 통해 돕는 게 맞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애런에게서 떼어내고 싶은?

후에 애런의 여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언젠가부터 지연인 꼭 내가 보호해주고 싶더라. 나 아닌 다른 놈이 네 인생에 끼어든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어. 그게 애런이라도.”

꼭 사랑 고백을 하는 것 같았다.

“뭐든 내가 해주고 싶었어. 나만이, 너에게.”

그가 생각하는 동정이 사랑으로 바뀐 시기는 ‘질투’라는 감정이 생기기 시작할 때였다.

그런데 그녀는 언제부터 내 감정이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걸 눈치챘을까?

“지연인 언제 확신했는데? 내가 지연일 동정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그의 질문을 들은 지연이 고개를 하늘로 들며 깔깔대고 웃었다.

뭐야…….

‘내가 웃을 만한 일을 한 거야?’

한참을 웃던 그녀가 웃음을 멈추고 이제 막 피우려는 꽃처럼 수줍은 미소를 보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나눴을 때?”

“…….”

이런 예상치 못한 답변이…….

“수현 씨가 저를 동정만 했다면 그렇게 배려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상하면서도 그렇게 또 격렬하고 뜨거운 사랑을 해주지는 않았을 거 같았어요.”

내가…… 그랬었나?

“물론 수현 씨가 절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확신을 가졌죠. 이 남자, 날 많이 사랑하는구나.”

한 심리 분석가가 말했다.

연민은 사랑이 아니라고.

연민은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 단지 누군가를 돕고 싶은 선한 감정이 자극된 것일 뿐 연민을 느끼게 한 사람의 고민이 해결되면 그 감정은 끝나버릴 뿐이라는.

하지만 수현이 가진 지연에 대한 연민은 달랐다.

시작은 동정과 연민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그녀를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그녀에게 위로받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를 아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즉, 뿌리는 연민이었지만 열매는 사랑이 된 것.

그런데 참 이상하다.

지금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데 왜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사랑을 나눌 때 내 사랑을 확신했다는 거지?”

뭔가 불안하다

“네…….”

수현의 눈동자가 은근히 좌우로 움직인다. 주변의 동태를 살피듯.

“그러니까 사랑을 나눌 때 지연인 내 사랑을 확실히 느낀다는 거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여긴 해변인데.

“네…….”

진지했던 그의 눈빛에 야성의 빛이 돌기 시작한다.

“그럼 자주 사랑을 보여줘야겠네?”

흠…… 무슨 뜻일까?

지연은 슬슬 신경세포가 곤두서기 시작했다.

길고 긴 북태평양의 해변을 걷고 있던 그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인적이 드문 밤 해변을 어슬렁대는 야생의 동물처럼 빛을 뿜는다.

그 눈빛을 알아챈 순진한 어린양 지연의 눈동자가 흔들거린다.

“설마 여기서요?”

“여긴 프라이빗 해변이야. 내가 소리를 지르기 전까진 그 누구도 오지 않아.”

“그래도 그건 좀…….”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보여줄게, 내가 지연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니까요…….

이미 다 아는 사실을 꼭 이런 해변에서…….

“흡!”

당황할 겨를도 없이 그의 허리가 그녀의 몸쪽으로 바람 한 결 스쳐갈 수 없이 밀착했다.

그는 한 손으론 그녀의 허리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수현은 수줍음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녀의 눈을 지그시 내려 보았다.

그녀도 자신의 머리를 뒤로 제쳐 사선으로 부딪힌 그의 눈동자를 올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 고요했다.

하지만 태풍의 눈처럼 적막한 고요에 뒤따를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바람이 예상된다.

지금 그들이 머문 공간은 태초의 그것.

산과 바다, 바람 그리고 별빛만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해변의 하얀 모래 위는 어느덧 그들의 침대가 되었다.

수현은 그녀를 천천히 그 침대 위에 눕혔다.

다행히 모래는 실크처럼 보드라워 그녀의 여린 피부와 편안하게 맞닿았다.

센 파도가 밀려오며 누워 있는 그녀의 육체를 하얀 거품으로 훑어냈다.

그녀의 하얗고 얇은 원피스가 촉촉이 젖으며 그녀의 여성스러운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곡선 위로 수현의 몸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사이 또 한 번의 긴 파도가 그들을 스쳐갔다.

이번엔 그녀 위를 감싼 수현의 옷이 축축이 젖었다.

짠 내음을 품은 바닷물이 밀착된 두 사람의 육체를 조금 더 끈끈하게 만들었다.

수현은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얼굴에서 걷어냈다.

별빛에 반사된 그녀의 젖은 속눈썹이 유혹하듯 반짝거렸다.

파도가 스쳐간 그녀의 입술은 조금 더 붉은 빛을 띠며 그에게 속삭였다.

어서, 날, 가지라고.

열대의 습도보다 뜨거운 그의 입김이 그녀의 입술 안으로 침투했다.

태풍의 눈을 벗어난 본능의 기류는 거센 숨결로 바뀌어 거침없이 그녀를 빨아들였다.

본능에는 가식과 부끄러움이 없다.

그들은 어느덧 해변 위에서의 사랑을 당돌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수현과 호흡의 속도를 함께 하며 점점 더 깊고 짙은 키스로 그를 이끌었다.

이렇게 황홀한 세상이 있을까?

철썩, 파도가 밀려왔다.

“하…….”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비음이 파도 소리와 함께 뒤엉켰다.

철썩, 또 한 번의 파도가 밀려왔다.

제법 커다란 파도에 그녀의 허리가 몸부림쳤다.

긴긴밤 파도는 쉬지 않고 밀려와 쉬지 않고 물러났다.

그 파도와 함께……

수현과 지연의 사랑의 행위도 쉬지 않고 계속됐다.

북태평양 위로 붉은 태양이 솟을 때까지.

격렬한 허니문의 밤이었다.

*

3년 후.

빨간 지붕 집 아침엔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 학교 안 가, 안 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줄리는 매일 아침 학교를 안 가겠다며 버티었다.

이유는 자꾸 아이들이 이름이 이상하다고 놀린다는 것.

결혼식 전 줄리를 입양했던 지연은 미혼이라는 자격 때문에 줄리의 양육권만 얻을 수 있었다.

즉, 부모와 똑같은 자격만 있을 뿐 완전한 자기 자식으로 인정되진 않은 것.

때문에 줄리의 이름은 그대로 태규의 성(姓)을 따라 줄리아나 문이었다.

그런데 수현과 결혼을 하고 3년이 지나며 그녀를 친생자로 입양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친생자로 입양된 줄리는 수현의 성을 따 줄리아나 진이 되었다.

그런데 국제 학교가 아닌 한국 초등학교에 들어가며 이름이 좀 이상하게 불리게 됐다.

진줄리.

“애들이 자꾸 진줄리가 뭐냐고, 완전 이상하다고 놀린단 말이야!”

그런데 지연은 그런 그녀에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줄리가 아침마다 왜 이렇게 떼를 부리는지 알고 있기에.

물론 정말로 이름 가지고 놀리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줄리가 미국에서 와서 원래는 ‘줄리아나 진’이란 걸 알고 있다.

오히려 ‘줄리아나’라는 이름이 너무 예뻐 그녀의 이름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줄리에게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생겼다.

하지만 그 남자 친구는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따로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상아’.

줄리는 어린 마음에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모든 것이 부러운 것.

때문에 어느 날은 그녀가 입은 옷을 똑같이 사달라고 조르고 또 어느 날은 그녀가 신은 신발을 사달라고 난리다.

그러더니 급기야 이름을 바꿔달라고 한다.

“나도 ‘상아’로 바꿔줘. 나 그 이름 하고 싶어.”

기도 차지 않은 요구.

지연은 어이가 없어서 달래주고 싶지도 않았다.

“너 그럼 진상아 되는 거야, 진상아. 너 진짜 그렇게 진상짓 할래?”

안 그래도 열이 올라 죽겠는데 줄리까지 진상을 부리니 지연의 이마에선 땀이 뻘뻘 흘렀다.

지연은 낙엽이 무르익는 10월, 에어컨을 트는 것도 모자라 부채로 얼굴에 바람을 부쳤다.

36.5도의 체온을 가진 아이를 뱃속에 넣고 사니 열이 오를 수밖에.

눈치 빠른 줄리는 잠시 엄마의 모습을 스캔했다.

열이 올라 시뻘게진 얼굴, 이전보다 20킬로는 찐 것 같은 몸, 배는 남산만 하고 다리는 코끼리처럼 퉁퉁 부었다.

‘한마디만 더 했다간 엉덩이 맞겠는데?’

아무래도 엄마에게 더 이상 떼를 쓰면 안 될 듯.

아직 분은 안 풀렸고 줄리는 할 수 없이 만만한 수현에게 달려갔다.

“아빠는 왜 성이 ‘진’ 씨라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

“나도 ‘이’ 씨였으면 이상아가 됐을 거 아냐!”

“…….”

“아 진짜 진줄리란 이름 너무 싫어.”

“…….”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아무것도 안 들린다.

이제 곧 출근해서 수백만 달러짜리 계약을 해야 하는데 지금 같은 정신 상태론 계약서도 못 읽을 것 같다.

어젯밤 내내 다리가 저리다는 지연이 때문에 밤새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느라 한숨도 못 잤다.

심지어 다리 주무르느라 수고했단 소리는커녕 지연이한테 혼까지 났다.

“내가 아직은 셋째 가질 생각 없다 그랬잖아! 그런데 그날 밤 왜 준비도 없이 무책임하게!”

결혼이란 사랑해도 죄가 되는 거였어.

안 그래도 밤새 다리 주무르고 혼나느라 컨디션이 엉망인데 아침부터 또 줄리에게까지 혼나고 있다.

왜 성이 ‘진’ 씨냐고…….

결혼이란 ‘성’ 가지고도 혼나는 거였어.

빨리 회사로 도망가 버려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금화댁이 들어왔다.

그녀의 품 안에는 하와이 해변에서 생긴 줄리의 동생 연우가 있었다.

연우 동생의 출산 시기가 다가오자 지연이 힘들까 봐 금화댁은 어제 연우를 봉수네로 데리고 갔었다.

“연우가 밤새 엄마 찾았어. 모유를 늦게 떼서 그런가? 엄마 젖 없이 잠을 잘 못 자는 거 같아.”

금화댁도 밤새 힘들었는지 이제 곧 출근해야 하는 수현에게 연우를 덥석 안긴다.

“으앙~~~~~”

옆에서 금화댁이 수현을 놀렸다.

“호호호, 아빠한테 안겨도 우네. 아빤 젖이 없어서 그런가 봐.”

그러면서 연우를 달랜답시고 수현을 혼내는 시늉을 한다.

“아빠는 왜 젖이 없어가지고! 나빠! 나빠!”

“…….”

결혼이란 젖이 없어도 혼나는구나…….

이쯤 되니 그도 폭발 직전이었다.

누군가에서 퍼붓지 않으면 이렇게 억울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가 화풀이할 대상이 집에 있다.

“야! 넌 그 넓은 네 집 놔두고 맨날 왜 우리 집에서 자고 난리야!”

뻔뻔하게 자기 집처럼 식탁에 앉아서 아침을 먹고 있던 애런이 툴툴거렸다.

“그 여자애가 우리 집에서 안 나가잖아. 나 걔랑 끝낼 건데!”

사람은 안 바뀐다.

절대 안 바뀐다.

잠깐 쉬었던 애런의 여성 편력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애런이 회사를 다니다 보니 예전처럼 그가 여자를 따라 세계를 전전하는 게 아닌, 여자들이 그 집에서 머물다 나간다.

애런의 건너편에서 함께 밥을 먹던 줄리가 익살스럽게 눈을 번뜩였다.

“삼촌, 내가 또 도와줘?”

애런이 입술에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콜! 에버랜드 하루.”

줄리가 주먹을 내민다.

“에버랜드 하루 받고 엘사 옷 두 벌.”

애런이 주먹을 내밀어 그녀의 주먹을 부딪쳤다.

“딜!”

아마 오늘 저녁 줄리는 애런의 집에 가서 눈물의 연기를 할 것이다.

“아빠, 이 아줌마 누구야? 이제부터 나 키워줄 아줌마야?”

수현은 이제 진짜 출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이 집을 탈출하지 않으면 언제 또 지연에게 잡혀 임신 막달 스트레스의 화받이가 될지 모른다.

수현은 지연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랑해, 자기. 나 회사 갔다 올게.”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다.

조금 전보다 더 뻘뻘 땀을 흘리며 입술을 터트릴 듯 깨물고 있다.

“수현 씨…… 나…… 나…….”

“…….”

연우 때 경험을 해봐서 알 수 있다.

‘지금 이 신호는…….’

수현은 사람들은 향해 소리 질렀다.

“시작됐어요! 시작됐어요!”

.

.

.

로즈가 입원해 있는 한국병원의 분만실.

여섯 시간의 진통, 다섯 번의 힘주기 끝에 4,1kg의 건강한 남아가 태어났다.

연우에 이어 두 번째 아들이었다.

로즈도 잠깐 들르고 봉수도 왔다 가고 애런도 잠시 머문 뒤 병실엔 이제 수현과 지연, 줄리와 연우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기까지 딱 다섯 식구만 남았다.

수현은 연우를 안고 지연은 막 모유를 먹고 잠든 아기를 안고 있었다.

이제 남동생 둘을 갖게 된 줄리는 연우와 새로 태어난 아기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고민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누굴 시켜야 하지?”

수현이 줄리에게 물었다.

“누구한테 뭘 시킬 건데?”

줄리는 진지하고도 진중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둘 중 누굴 내 꼬봉으로 키울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여동생을 낳았으면 걔를 시키는 건데.”

그녀의 말을 아기가 알아들었을까?

연우는 아무 생각 없이 사탕을 빨고 있는 반면 새로 태어난 아기는 갑자기 ‘앙’ 소리를 낸다.

줄리는 새로 태어난 아기가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너 안 시킬게. 너 말고 니 형 시킬게.”

앞으로 연우는 줄리의 꼬봉이 되겠구나.

수현은 품에 안은 연우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인생이 험난해 보이는구나, 연우야.’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연우는 아빠한테 안겨서도 엄마 지연을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있다.

‘이런 엄마 바라기 같으니. 꼭 지 아빠 닮아가지고.’

지연도 연우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미소를 그렸다.

“연우야, 엄마가 막아줄게. 걱정하지 마.”

그리고 품에 안은 아기를 보면서도 속삭였다.

“아가야, 너도 세상에 태어나느라 힘들었지? 우리 같이 잘 살아보자.”

지연은 연우 한 번 아기 한 번 줬던 시선을 이번엔 줄리에게로 향했다.

“줄리야, 동생들 잘 부탁해. 넌 우리 집 첫 번째 보물이니까.”

줄리는 새침한 듯 삐죽거리면서도 ‘첫 번째 보물’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엄마.”

지연은 마지막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아이들 앞이라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환희에 찬 눈빛, 그녀의 기쁨에 찬 입매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나, 너무 행복해요.’

그녀의 그 행복 가득한 표정에 수현은 오늘 하루의 피곤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정체성을 찾겠노라 홀로 떠나왔던 이 한국에서 그는 다섯 명의 가족을 얻었다.

수현은 이제야 그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정체성을 찾았다.

바로 이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수현이었고 수현이 바로 이들이었다.

정체성은 찾는 게 아니었다. 만드는 거였다.

수현은 이 모든 기적을 가능하게 해준 그의 유일한 사랑, 지연을 향해 조용한 키스를 날렸다.

‘사랑해, 지연아.’

다섯 가족이 함께하는 지연의 병실에서 느껴지는 공기가 안락하고 포근했다.

이 사소함이 주는 행복,

진실한 사랑이 가져다준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내일부턴 또다시 험난한 인생의 전쟁이 시작되겠지만,

일단 오늘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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