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74화 (74/77)

제74화. 둘째 아들

2018.10.17.

수현과 지연이 막 본격적인 사랑의 행위에 들어가려고 할 때 작지만 존재감은 세상 최고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 마?”

줄리였다.

그녀는 아직 잠이 덜 깬, 안개 낀 호수 같은 눈동자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헉!”

수현과 지연, 두 사람은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몽정을 엄마에게 들킨 소년처럼,

남자 친구와의 어른 놀이를 아빠에게 들킨 소녀처럼,

두 사람은 죄인처럼 얼굴을 붉히며 나란히 섰다.

지연이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는 입술로 물었다.

“줄리, 언제 깼니?”

그런데 줄리의 음성은 의외로 평온했다.

“꽤 됐지…….”

오히려 충격을 받은 사람은 수현처럼 보였다.

“어…… 어…… 흥…… 거…….”

목이 목을 먹어버린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괴기한 음성만 내뱉었다.

줄리는 그런 수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용의자의 눈빛을 읽으려는 형사의 눈처럼 흔들림 없이.

그러더니 마른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제 무슨 말을 하려나 보다.

수현과 지연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발끝까지 내려간 긴장감을 감추고 그녀의 입술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녀가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밥을 짜게 먹었나 봐. 물 마시고 또 잘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 뭐지?

수현과 지연은 서로의 손등을 툭툭 쳤다

충격을 받아 멍해버린 건가?

아님 못 본 척 연기를 할 정도로 영악한 걸까?

먼저 너는 뭘 봤고 어디까지 봤고 그게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게 미스터리한 밤이 흘러버렸다.

*

애런은 호텔 생활을 정리하고 수현이 지연의 이름으로 사두었던 빌라로 이사했다.

수현은 지연과 결혼 후에도 빨간 지붕 집에서 살 거라 했다.

지연도 그걸 원하고 줄리를 위해서도 아담한 정원이 있는 빨간 지붕 집이 좋을 것 같다며.

애런에겐 이 빌라에서의 생활이 참 오랜만에 하는 정착이었다.

집에서 쫓겨나듯 나와 몇 년 동안을 여기저기 호텔들로 전전했으니까.

그런데 정착하게 된 나라가 참 의외다.

1년 전만 해도 그는 새 아빠와 의붓형의 나라 한국에 오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새로운 뇌가 생긴 것처럼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될 줄도.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외부적 환경이든 내부적 가치관이든 갑자기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가끔은 혼란스러워 원래의 자신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조차 안 날 때도 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로버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지금 뭐하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로버트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또 주무시면 오게요?”

“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건 그는 여전히 엄마를 마주치기가 두렵다는 것.

예전에 그는 몬테규 가문의 수치였다.

재벌 집의 돈만 많고 생각은 없는 전형적인 망나니의 행동을 정석처럼 보여줬으니까.

그런 애런을 로즈는 차갑고 따가운 눈빛으로 바라봤었다.

사실 로즈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별로 없다.

줄리아나라는 대기업의 회장으로 전 세계를 소도시 돌아다니듯 하는 엄마 로즈.

찰나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 그녀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애런이 큰 사고를 쳤을 때다.

그 만남도 단둘이 아닌 로버트나 비서들을 대동하고서였다.

만약 로즈가 애런에게 단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내주었다면 어쩌면 그는 좀 더 솔직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관심을 얻기 위해 친 사고예요.’

하지만 아무리 직원들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애런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저 원래 이런 놈이잖아요. 모르셨어요?’

맘과는 달리 늘 입에선 잔인한 칼이 튀어나올 수밖에.

당연히 대화가 따뜻하게 오갈 수 없었고 당연히 대화의 끝은 서로를 향한 비난과 저주, 그리고 독설이었다.

그러니 엄마와의 만남이 편안하고 따뜻하고 즐거웠을 리가 있을까?

만남이 쌓일수록 원망과 분노도 함께 쌓여버렸다.

그런데 최근의 여러 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비록 애런을 수현으로 착각하고 한 말이라지만,

로즈는 폭력적인 생부로부터 애런을 지키기 위해 생부를 죽였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아빠를 뺏었다는 죄책감으로 그에게 오히려 냉정할 수밖에 없었다며.

엄마의 고백으로 그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풀었다.

또한 애런은 로버트로부터 이런 말도 들었다.

로버트는 로즈에게 최근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을 얘기해줬다고 했다.

애런이 위조 유언장을 버리고 형을 도와 위기에 처한 형의 여자 친구와 그녀의 딸을 도왔다는.

그 얘기를 들은 로즈가 이렇게 말했단다.

‘난 우리 애런이 원래부터 착한 아이란 걸 알았어. 내 아들이잖아.’

로즈에 말을 듣는 순간 애런의 가슴에선 쌓여 있던 원망과 분노의 잔재들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그녀와의 만남이 허물없이 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고 할까?

어색하고 무안하고 부끄럽고 민망하다.

차라리 하던 대로 비난과 욕설을 듣는 게 더 편할 것 같은.

그러면서 또 보고 싶긴 하고.

애런은 로즈가 잠들었을 때, 아니면 깨어 있더라도 지난번처럼 그를 수현으로 착각할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을 때 가서 딱 얼굴만 보고 오기로 했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로버트에게 전화를 하니 다행히 그는 그가 바라는 대답을 주었다.

“막 잠드셨으니까 한두 시간 안에는 안 깨어나실 것 같아요.”

애런은 로즈가 깨기 전에 가려고 서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

터져버린 물주머니처럼 하늘에서 엄청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애런은 막히는 길을 뚫고 힘겹게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늘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로버트가 자리에 없었다.

‘엄마가 아직 잠들어 계신지 로버트가 봐줘야 하는데…….’

애런은 병실 문을 잡고 고민하다 그냥 용기를 내 안으로 들어갔다.

‘깨셨어도 할 수 없지. 그냥 갈 순 없으니까.’

창밖에 굵은 비가 내리치니 불 꺼진 병실은 대낮이지만 우중충한 하늘색을 띠었다.

다행히 그녀는 평온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애런은 침대 옆에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는 사물을 관찰하듯 로즈의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늘 전체적인 모습만 보아왔지 이렇게 그녀 얼굴의 부분 부분을 응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잠든 엄마 얼굴을 관찰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

로즈의 얼굴은 꿈을 꾸는 듯 표정이 조금씩 다양하게 바뀌었다.

닫힌 눈꺼풀 안의 동공도 이리저리 움직였고 입술도 미소를 그렸다가 일자의 무표정도 그렸다가 뭔가에 삐진 듯 삐죽거리기도 했다가.

자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아기처럼 보였다.

로즈를 연상하면 늘 냉정하고 무서운 표정만 떠올랐는데 자는 모습은 너무도 천진했다.

‘원래는 안 무서운 얼굴이었구나.’

그런데 뭔가가 좀 바뀐 것 같다.

‘뭐가 달라졌지?’

분명 그가 생각하는 로즈의 모습과 다른 게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한참을 보다 깨달았다.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얼굴만 봤을 땐 못 느꼈는데 조금 시야를 넓혀 보니 그녀의 머리색이 예전과 달랐다.

‘백…… 발?’

원래 그녀의 머리색은 애런과 똑같은 금빛이었다.

전형적인 금발보다 햇빛을 품은 것 같은 하얀 빛을 띤.

날이 맑아 햇빛이 들어왔다면 그 빛에 반짝이며 잘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우중충한 빛 아래서 보니 예전의 금빛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하얗게 센 백발이 보였다.

‘늙으셨구나…….’

마른 몸으로 수만 명의 직원을 통솔하며 여풍 당당한 모습만 보여줬던 로즈.

평생 늙기는커녕 영원의 약을 먹은 것처럼 차갑고 도도하고 강인한 철의 여인일 것만 같았던 로즈.

그런데 흐르는 세월에, 또 오랜 병세에 이렇게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늙어버렸다.

한 번 그쪽으로 생각이 꽂히니 좀 전까지 아기처럼 보였던 그녀의 얼굴도 다시 보였다.

자느라 안면 근육을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굵은 주름과 그 옆에 가지처럼 이어진 작은 주름들이 피부 전체로 퍼져 있었다.

작은 얼굴에 선이 매끄러웠던 그녀의 턱밑엔 축 처져 늘어진 살들이 보였다.

“엄마…….”

애런의 눈에서 창밖의 빗줄기처럼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차라리 열 남자 부럽지 않은 호방했던 그녀가 그리웠다.

차라리 냉정하고 독기 섞인 그녀의 매서운 눈빛이 그리웠다.

‘언제 이렇게 늙어버리셨을까…… 난 아직 잘해드린 것 하나도 없는데…….’

그는 잔잔한 주름들로 이뤄진 그녀의 마른 손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감히 토해내지 못한 채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삼켰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리 없이 터진 눈물 때문일까?

“우리 아들 왔니?”

그의 정수리로 막 잠에서 깬 로즈의 늘어진 음성이 울렸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시력을 잃은 로즈의 눈엔 보이지 않겠지만 눈물과 콧물로 축축이 젖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아들의 마음을 아는 걸까?

로즈는 애런이 잡고 있는 손을 슬그머니 빼 두 손으로 아들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웃음 섞인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둘째 아들 머리가 언제 이렇게 컸지? 마냥 아기 같았는데.”

그녀는 그를 둘째 아들이라 그랬다.

아들은 눈물 젖은 목소리를 들킬까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엄마는 어떤 아들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손 한 번 잡고 머리 한 번 쓰다듬으니 오랜 세월 쌓였던 앙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히려 서로를 향한 끈끈한 사랑이 심장 깊숙이 사무쳐버렸다.

아들은 엄마의 늙어감에 눈물 흘리고 엄마는 훌쩍 커버린 아들에 웃음 짓는다.

누가 뭐래도,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들은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진짜 엄마와 아들이었다.

*

줄리는 수현과 지연의 사랑의 행각을 목격했다.

당시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아이처럼 물을 마시고 다시 잠에 들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 동안 수현과 지연은 줄리의 눈치를 보느라 서로의 옷깃 한 번 스치지 않았다.

행여나 줄리가 그날의 일을 떠올릴까 서로를 전염병 환자처럼 멀리했다.

대신 모든 신경을 줄리에게 집중했다.

혹시라도 어른 놀이를 목격한 줄리가 충격을 받아 심리적 카오스 상태가 올까 봐.

하지만 갤러리에 휴가까지 내며 오랫동안 줄리를 주시했던 지연은 이렇게 결론을 냈다.

“줄리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아마 잠에서 덜 깼던 것 같다.

만약 봤다면 그녀가 그냥 모른 척할 캐릭터는 아니니까.

수현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두 손을 맞잡고 큰소리로 웃었다.

줄리도 역시 아이는 아이였어, 안도하면서.

그렇게 수현과 지연의 머릿속에는 그날 그 사건은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이른 아침, 지연은 서둘러 빨간 지붕 집을 나왔다.

항상 갤러리로 먼저 지연을 데려다주고 출근하던 수현이 오늘은 혼자 먼저 출근을 했기에.

지연은 줄리를 유치원에 보낸 후 버스를 타기 위해 가회동 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건너편 인도에서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그녀를 향해 소릴 질렀다.

“축하해요.”

‘…… 뭐가?’

좀 이상했지만 바쁜 출근 시간,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하고 긴 얘기를 나눌 순 없었다.

형식상 목례만 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길목에 있는 빵집 사장님이 그녀를 보고 뛰어나왔다.

“축하해요. 내 금방 구운 빵 좀 줄게. 여기서 잠깐 기다려.”

그러더니 가게로 다시 들어갔다.

“…… 뭐지?”

그때 휴대폰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렸다.

확인해보니 줄리의 유치원 담당 선생님이었다.

‘축하드립니다. 혹시 원하시면 첫째 아이 앞에서 둘째 아이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조언해드릴게요.’

“이게 무슨 소리지? 첫째 아이는 뭐고 둘째 아이는 뭐야?”

그때 빵집 사장님이 양손 가득 빵을 가지고 나왔다.

“아직 입덧 안 하지? 입덧하면 빵 냄새가 싫을 수도 있으니까.”

이쯤 되니 뭔가 착오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장님, 저 임신 안 했는데요? 누가 그래요?”

빵집 사장은 황당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소리야? 어제 내가 줄리가 유치원 차에서 내리는 걸 봤거든. 그래서 새로 구운 빵 줬더니 그러던데? 동생 생겼다고.”

“…… 네?”

“그런데 그 영악한 것이 또 그러더라고. 동생 생긴 거 며칠 전에 알았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시간이 걸려서 이제 얘기해드리는 거라고.”

며칠 전에 알았다고?

며칠 전이라면 줄리가 그 행위를 목격한…….

“나한테 처음 말해주는 거라나? 맛있는 빵 준 보답으로? 다른 사람들한텐 오늘 얘기할 거래.”

그런데 빵집 사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 금화댁이야. 축하해. 그런데 아버진 걱정하시더라. 아직 결혼식도 안 올렸는데 그래도 되냐고.’

‘계집애야! 나 미선이야. 너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 하니? 그런데 너 웨딩드레스 입어야 하는데 배 나와도 괜찮겠니?’

‘아빠다. 이따 퇴근하고 진 서방이랑 들러라.’

‘형수님, 축하드립니다. 저에게 둘째 조카가 생기는 겁니까?’

난리도 이런 난리도 아니었다.

아마 줄리가 지연이 비상으로 줄리의 휴대폰에 저장해준 사람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낸 듯.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그녀에게 화룡정점을 찍듯 수현이 문자를 보냈다.

‘임신…… 했어?’

.

.

.

갤러리에 가서도 놀라움은 계속되었다.

그녀가 갤러리에서 오늘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거였다.

“아니에요, 저 임신 아니에요.”

줄리는 몇 사람에게만 알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몇 사람이 또 몇 사람에게 알리고 또 그 몇 사람이 다른 곳에 알리고 또 알리고.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과 휴대폰으로 연락이 안 되면 갤러리로까지 오는 축하 전화들.

그녀는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금 일찍 퇴근했다.

그런데 집에서도 축하 행렬은 계속되었다.

각종 축하 난과 꽃다발 배달 서비스들로 엉덩이를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초인종이 울려댔다.

누가 뭘 듣고 어떻게 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수현의 회사에도 그녀의 임신 사실이 알려졌다.

수현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직원들과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보낸 것.

다시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일단 마루로 들이긴 했지만 인해전술처럼 채워도 채워도 끝도 없는 밀려오는 꽃들로 인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걸려오는 휴대폰마다 임신이 아니라고 해명하다 지쳐버린 지연은 기어이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녀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수현과의 의논이 필요했다.

할 수 없이 오랜만에 금화댁에게 줄리를 부탁했다.

“수현 씨랑 볼일이 있어요. 오늘 하루만 줄리를 아빠 집에서 재워주세요.”

금화댁이 전화기가 울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볼일이 뭔데? 셋째 만들기? 호호호호호호호.”

“…….”

할! 말! 이 있다고요!

.

.

.

수현도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했다.

지연만큼 하루 종일 축하 전화에 시달렸던 그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마루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이게 뭐야!”

꽃집이나 화원에 온 것처럼 마루 전체가 배달 온 꽃다발과 꽃바구니, 화분 난(蘭)들로 인해 배치된 가구가 안 보일 정도였다.

그걸 보니 웃음도 나오고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앞으로 결혼식도 하고 진짜 둘째도 생기면 이 많은 축하 전화들과 축하 선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수현과 지연은 저녁도 먹지 않고 줄리 사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의논했다.

꽃들은 버리면 된다. 사람들에겐 줄리의 오해였다고 단체 문자를 보내면 된다.

그런데 줄리가 문제였다.

단순하게 엄마가 임신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끝내기엔 걸리는 게 있었다.

처음 줄리가 엄마가 임신했다고 오해했다는 걸 알았을 땐 당황스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아빠 엄마가 사랑의 행위를 하면 바로 아이가 생긴다고 생각했다는 게 얼마나 귀여워?

그런데 빵집 사장이 한 말이 머리 한쪽에서 떠나지 않았다.

‘줄리가 동생 생긴 건 며칠 전에 알았는데 그동안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려서 이제야 얘기해 주는 거라고 하던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밀려오는 축하 전화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줄리가 금화댁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수현 아빠랑 엄마는 아무래도 나보단 새로 태어난 동생을 더 좋아하겠지? 자기 아이니까.”

자기 아이니까……?

이 말을 들으니 빵집 사장의 말과 연결이 되었다.

줄리는 이렇게 생각한 듯.

아빠와 엄마의 사랑의 행위로 동생이 생겼고 아빠와 엄마는 동생을 더 예뻐할 것이라고.

여기까지는 동생을 맞는 일반적인 첫째 아이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다.

첫째들이 동생을 맞는 감정은 남편에게 애인이 생긴 걸 알게 된 아내의 감정과 같다고 하니까.

그런데 줄리의 해석은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다.

아빠 엄마가 동생을 더 예뻐하는 이유가 새로운 아이가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그런 표현을 하지 않아 몰랐는데 줄리는 자신이 수현과 지연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고 있던 것.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건 줄리가 수현과 지연 앞에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못 본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연기를 하며 어른처럼 며칠 동안을 홀로 끙끙 앓은 후,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하고 오늘 아침 주변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동생이 생겼어요. 축하해주세요.’

이 모든 상황을 수현에게 얘기하던 지연은 심장이 죄여와 한쪽 손을 가슴에 놓고 눈물을 흘렸다.

“줄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가슴 아파 죽겠어요.”

아픔과 상처가 있는 아이는 일찍 성숙한다고 했다.

줄리도 겉으로는 버릇없고 맹랑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다.

“동생이 생겨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려주면 되는지 모르겠어요. 해줄 수 있는 건 말로 달래주는 것뿐이니.”

수현은 심장이 아파 끅끅 가슴을 쥐어짜는 지연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연은 문제가 생겼을 때 감정적인 대처보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현명한 여자다.

하지만 줄리의 문제에 있어선 한없이 감정적이 돼버린다.

‘이번에도 내가 해결을 해야 한다. 줄리를 구해냈을 때처럼.’

그는 모든 에너지를 머리로 모았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떠올렸다.

수현은 가슴을 쥐고 있는 지연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지연아,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그는 줄리의 상처를 생각하며 슬픔으로 얼룩진 지연의 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그런데…….”

이어진 그의 말에 지연의 눈빛에서 슬픔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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