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가족의 힘
2018.10.10.
수현과 지연, 그리고 줄리는 함께 빨간 지붕 집으로 들어왔다.
수현도 빨간 지붕 집에 잠을 자러 온 건 오랜만이었다.
지연과 줄리가 나간 이후 빨간 지붕 집이 허전하게 느껴졌던 그는 웬만하면 회사 사무실의 개인 휴식 공간에서 잠을 자고 옷가지를 가지러만 잠깐씩 들렀었다.
삼겹살과 계란찜 밥을 실컷 먹고 엄마의 핑크 드레스에 꽂혀 한참을 울었던 줄리.
배가 부르고 피곤한 그녀는 이미 현관문을 넘어서면서 흐물흐물 관절까지 쭉 뻗으며 잠에 빠져버렸다.
지연은 그녀를 오랜만에 제 방에 눕혔다.
작은 등 하나만 켜주고 나오며 쓱 방을 둘러보았다.
‘깨끗하네?’
깨끗할 뿐 아니라 꽂아 놓은 책 한권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방을 보니 이제 알 것 같았다.
‘수현 씨는 내가 돌아올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원래 헤어질 마음도 없었고.
언제부터 이런 연극을 기획하고 있었던 걸까?
어디부터가 벌어진 일이고 어디부터가 만들어진 일일까?
너무도 순식간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질 않았다.
하지만 줄리까지 침대에 누워 있으니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마음으로 방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와 머리를 빨리 벗어던지고 싶었다.
‘난 역시 편한 티셔츠가 최고야.’
.
.
.
샤워를 마친 지연이 베스로브를 입은 채 물을 가지러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수현이 러그가 깔려 있는 마룻바닥에 앉아 있었다. 홀로 와인을 마시면서.
“안 잤어요?”
지연이 묻자 수현이 의외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지연이야 말로 안 잤어? 줄리랑 같이 잠 든 줄 알았지.”
그녀는 수현에게 다다가 똑같이 마룻바닥에 앉았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너무 피곤해서 오히려 잠이 안 올 것 같았는데 그거 한 잔 마시고 자야겠어요.”
수현이 그녀에게 풍성한 산미가 올라오는 레드 와인을 따라주었다.
한 모금의 와인으로 목을 축인 그녀가 밀도 짙은 숨을 토해냈다.
“휴…….”
쌓여 있던 긴장감을 이제야 내려놓은 것.
진한 화장을 벗고 다시 뽀얀 얼굴로 돌아온 그녀의 볼을 수현이 살짝 쥐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한 잔 마시고 들어가서 쉬어. 오랜만에 줄리 옆에서.”
그의 음성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지만 거친 쇳소리가 섞여 까칠하게 갈라졌다.
와인 병을 보니 벌써 바닥까지 비어 있었다.
‘혼자 다 마신 거야?’
지연이 줄리를 재우고 샤워까지 하고 나오는 동안 그는 재킷만 벗은 채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나 보다.
오늘 같은 날 기분이 좋아 한잔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표정도 덤덤했고 눈빛도 풀려 몽롱했다.
정신을 쏙 빼버린 얼굴이라고 할까?
속을 텅텅 비워낸 빈 상자처럼 공허해 보이기도 하고.
지연이 슬쩍 그에게 물었다.
“저보단 수현 씨가 오늘 더 힘들었나 봐요.”
그는 지연을 향해 기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만 힘들었던 게 아니야.’
‘줄리 구하기’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순간부터 모든 일이 해결된 이 순간까지 한 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근 두 달 동안을 벼랑 끝에 매달린 듯 고강도의 긴장감에 시달렸다고 할까?
그가 계획한 일이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줄리를 잃는 건 물론이고 평생 지연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짓는 일이 될 테니까.
다행이 그는 무사히 지연과 줄리를 구해 빨간 지붕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나니 공연이 끝난 무대 위에 홀로 남은 것처럼 공허했다.
진공 상태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멍했다.
털끝에 남아있는 에너지까지 모두 소진해버려 기뻐할 기운조차 없는 것.
그래서 오늘 밤 이 와인 한 잔이 절실했다.
알코올의 기운으로라도 이 공허한 기분을 채우기 위해서.
지연도 수현이 따라준 와인을 홀짝 홀짝 마셨다.
그녀는 그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어디서부터예요?”
주어가 생략된 모호한 질문.
하지만 그는 그녀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어디부터가 벌어진 일이고 어디부터가 그가 기획한 일이냐는 뜻.
아무것도 설명해준 적이 없으니 모든 것이 궁금하겠지.
그도 주어가 생략된 모호한 대답을 해주었다.
“처음부터…… 모두 다…….”
너와 줄리를 태규로부터 구해내야겠다고 결심한 이후 벌어진 모든 일.
똑똑한 그녀도 그의 대답을 알아들었다.
“그렇구나…….”
결과가 좋으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지연은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왜 나한텐 말해주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나에게 말해주었다면 내가 당신을 원망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다시는 줄리를 보지 못할까 두렵고 무서운 밤들을 보내진 않았을 텐데.”
그녀의 원망 어린 표정과 음성에 수현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뻔뻔하면서도 귀여운 여인을 어떻게 혼내주지?
“내가 지연이한테 내 모든 계획을 말해주었다면 이렇게 일이 깔끔하게 해결됐을까?”
“왜요? 전 오히려 수현 씨를 도와서……”
“문태규가 사는 그 집의 명의자가 지연이고 그래서 지연이 자유롭게 그 집에 드나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지연인 어떻게 했을까?”
“그거야…….”
그녀도 대답이 막혔다.
안 봐도 훤히 다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참지 못하고 줄리를 보기 위해 매일 그 집에 드나들었을 테고 그러다 태규에게 들키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고 어쩌면 줄리가 엄마가 매일 온다고 태규에게 말실수를 했을 수도 있고.
그럼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태규를 아동학대로 신고할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잡을 수가 없었을 테니.
그의 말을 들으니 지연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왜 그녀에게 끝까지 비밀로 했는지.
아이가 걸린 일이니만큼 그녀의 감정적이고 순간적인 분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실수 요소들을 아예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수현 씨는 나보다 더 나를 위해 깊은 고민을 했었구나. 내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까지 미리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수현이 혼자 감당했을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동안 그녀의 고통을 말없이 지켜보며 그녀의 원망을 받아내며 홀로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래서 이렇게 축 처져 있는 거예요? 이제 모든 일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그가 피곤에 전 거친 음색으로 말했다.
“응…… 많이 지쳤었거든.”
지연은 지치다 못해 속을 텅텅 비워낸 것 같은 공허한 그의 얼굴을 그윽하게 응시했다.
마음이란 놈은 참 희한하다.
어떤 일에 대해선 평생 변치 않는 의리를 지키면서도 또 어떤 일에 대해선 금방 들었던 마음을 1분도 안 돼 반대로 바꾸어버린다.
조금 전만 해도 감쪽같이 자신을 속였던 수현에게 섭섭함과 야속함을 느꼈던 그녀의 마음은 그의 말 한마디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고맙고도 짠하고도 대단하다는 존경심으로.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잠깐의 이별이 필요하다.
서로 모르고 있던 것, 못 느끼고 있던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와 떨어져 있는 그 두 달이 그녀에겐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과 허전함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녀도 모르게 그에게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줄리가 보고 싶어 몸서리를 치는 순간순간 가장 떠오르고 기대고 싶은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녀는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그에게 연민을 담아 물었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줄까요?”
육체적인 사랑의 의미를 담은 제안이 아니었다.
공허해 보이는 그의 옆에서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다.
여자로서가 아닌, 모성 같은 애정을 담아.
그녀의 제안에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 같아선 격렬한 사랑을 나누자고 하고 싶어.’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치고 힘이 들 때 때로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이 피로를 풀어주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녀를 그렇게 의미 없이 대하고 싶진 않았다.
뼛속까지 사랑하고 또 아껴주고 싶은 여자니까.
그는 조금 흐트러진 지연의 베스로브 앞섶을 촘촘하게 여며주었다.
“샤워하고 머리 바로바로 말리는 습관 들여. 여름이긴 하지만 여긴 지대가 높아서 밤에는 좀 쌀쌀하니까.”
그리고 지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먼저 올라가서 자. 난 좀 더 있다가 올라갈게.”
지연은 그와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그의 눈빛이 간절했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가 그걸 원한다면 그래주고 싶었다.
고독이 때로는 지친 영혼을 달래주긴 하니까.
지연은 수현을 향해 일부러 아주 밝은 미소를 그려주었다.
지금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기에.
“그럼 전 올라가서 잘게요. 과음하지 말고요.”
지연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수현은 다시 홀로 마루에 남았다.
.
.
.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수현은 기어이 남아 있던 와인을 모두 비워냈다.
그리고 욕실로 가 가장 높은 수압으로 물을 틀었다.
매를 맞듯 물을 맞으니 정신이 좀 들긴 했다.
공허하게 빠져나간 영혼도 다시 돌아온 듯하고 소진됐던 에너지도 조금 채워졌다.
그는 지연처럼 베스로브를 입고 욕실을 나왔다.
방으로 가는 도중 그녀의 살짝 열린 방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같이 있어달라고 할걸 그랬나?’
그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그녀와 줄리가 자는 방문을 열었다.
쌔근쌔근-
누가 내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기 같은 숨소리가 은은하게 퍼지는 방.
수현은 살금살금 두 사람이 자고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줄리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고 지연은 줄리 쪽으로 모로 누워 줄리의 손을 꼭 잡은 채 잠들었다.
두 여자의 표정에 달빛만큼 은은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내 여자들…….’
내가 지켜줘야 하는 여자들, 내가 사랑해야 하는 여자들.
달빛에 이끌리듯 수현도 줄리의 옆에 살포시 몸을 뉘었다.
줄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수현과 지연이 누운 것.
그는 줄리의 손 위에 얹어있는 지연의 손 위에 또 그의 손을 얹었다.
수현과 지연 그리고 줄리의 손이 일렬로 하나처럼 겹쳤다.
서로의 온기가 전해져서일까?
세 사람의 손이 겹치는 순간 수현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수혈을 한 것처럼, 아니면 강력한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 것처럼 축 처져 있던 뉴런들이 살아나는 느낌?
전율이 퍼지는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를 누르고 있던 나쁜 피가 반대로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이 기분이 뭔진 모르겠지만, 이 느낌이 뭔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떤 강한 힘이 그를 다시 채우고 있다는 것.
‘혹시 이런 게 가족의 힘일까?’
혼신의 힘을 다한 일이 성사되고 나니 무한한 공허함이 밀려들었었다.
전쟁 후 평화가 찾아왔지만 어느 마을에 살았었는지 길을 잃은 것처럼.
다시는 이런 큰 힘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다시는 이런 큰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연과 줄리, 두 사람이 행복한 미소와 함께 평온한 잠을 누리는 모습을 보니 또다시 힘이 솟는다.
텅텅 비워냈던 에너지 박스가 꾹꾹 채워진 느낌이다.
허허벌판이 됐던 공허한 마음의 땅에 다시 풍성한 나무가 들이차 푸른 숲을 이룬 느낌이다.
수현은 지연의 얼굴, 줄리의 얼굴, 그녀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들의 얼굴을 담은 손을 다시 지연의 손 위에 얹었다.
배터리를 충전하듯 온몸으로 또다시 행복한 전율이 흐른다.
이렇게 잠이 들면 내일 아침이면 어느새 풀파워가 장착될 듯.
그러면 그는 또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두 여자들을 위해.
*
며칠 지나지 않아 로버트를 통해 태규가 연락을 해왔다.
줄리를 지연에게 입양시켜주겠다는 의사를 전하며.
수현은 애초에 태규를 감옥에 넣겠다거나 다시 일어나기 힘들 정도의 타격을 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아무리 미워도 줄리의 친부였다.
그녀의 아빠를 인생의 낙오자로 만들 순 없다.
로버트는 줄리를 지연에게 입양하는 조건으로 태규에게 제안을 했다.
파티에서 위스키 병을 던지며 난동을 부린 폭행 죄, 반납된 차를 탈취해 몰고 간 죄,
이렇게 수현 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없었던 일로 해주기로.
하지만 음주운전과 줄리를 방임, 방치하고 폭행을 가하려 했던 아동학대에 대한 죄는 그의 손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때문에 로버트가 최고의 변호사를 붙여주며 최대한 가벼운 형벌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태규가 범죄 경력이 있지는 않으니 집행유예쯤에서 마무리가 될 듯.
그는 로버트가 내놓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받아들이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연은 태규와 합의서에 사인을 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
물론 로버트가 동석해 법적 절차까지 마무리를 해주기로 했다.
지금 당장 지연이 줄리를 그녀의 딸로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은 당사자들끼리 합의하면 가능한 민간 입양이었다. 그중에서도 일반 입양.
하지만 이런 일반 입양은 줄리를 완전히 지연의 친아이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와 동일한 모든 권한과 의무를 행사하되 친부모의 존재도 인정하고 실질적으로 그녀의 ‘성(姓)’도 문태규의 성을 따라 문씨 그대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원하는 입양은 완전히 줄리를 친생자로 만드는 ‘친생자 입양’이다.
하지만 친생자 입양을 신청하려면 결혼 생활 3년 이상이라는 자격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싱글인 그녀는 아직 법적 자격이 안 된다.
지연은 수현과 결혼 후 3년 뒤엔 완전히 친생자 입양까지 하겠다는 조건을 합의서에 포함시켰다.
로버트가 건네준 펜을 들고 합의서에 사인을 해내려가는 순간 그녀의 손끝이 전율이 오르듯 떨려왔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나…….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줄리를 딸처럼 키울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꿈을 꾸듯 실감이 나지 않았다.
태규까지 사인하며 두 사람 다 사인을 마쳤다.
“이제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로버트가 각각의 사인이 완료된 서류를 정리했다.
막상 사인을 하고 나니 태규의 초점 잃는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보다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황망함이 느껴졌다.
비록 좋은 아빠는 아니었지만 딸을 잃은 마음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겠지.
희한하게도 그렇게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그에게 한 방울 동정심이 흘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녀가 퉁명스럽지만 연민의 마음으로 물었다.
독기가 빠져서인지 아니면 모든 걸 내려놓아서인지 그의 목소리에 ‘악의 기운’이 사라졌다.
“미국으로 가려고. 가서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살아볼 거야.”
자업자득이라지만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한국에서 더 이상 버티고 싶진 않은 듯.
“잘 생각했어. 그리고…….”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허공을 헤매던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보았다.
“줄리가 보고 싶을 땐 언제라도 연락해.”
이 정도의 선물은 주고 싶었다.
그래도 줄리의 아빠이니까.
의외의 배려에 태규의 눈가도 시큰해졌다.
“고마워…… 그리고 가끔…… 사진도 한 장씩 보내줘.”
악마에게도 한 줄기 부성애는 남아 있었다.
지연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합의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고 화해의 악수이기도 하고 잘 가라는 인사의 악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줄리의 부모로서 잘해보잔 의미의 악수이기도 했다.
머쓱해하던 그가 허벅지에 손을 쓱쓱 닦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합의는 끝났다.
이제 지연은 줄리의 완전한 엄마가 되었다.
*
수현은 홀로 로즈의 병실을 찾았다.
로버트를 통해 매일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여유를 가지고 그녀를 찾은 건 참 오랜만이었다.
마침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막 잠에 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온 김에 그녀의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해서 병실의 문을 열었다.
아프다는 소리만 하지 않으면 아직도 활짝 핀 장미처럼 아름다운 그녀.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편안함인지, 아님 그동안 그녀가 보여줬던 사랑 때문인지 로즈를 바라보는 수현의 얼굴엔 늘 진득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
“저 왔습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자고 있는 그녀를 향해 혼잣말처럼 한 인사에 그녀가 눈을 떴다.
“어, 저 때문에 깨신 거예요?”
로즈가 애런과 똑같은 코발트처럼 파란 눈동자로 수현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수현을 본다는 건 큰 의미가 있진 않았다.
이제 그녀는 거의 모든 시력을 잃었으니까.
그래도 꼭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사람처럼 그윽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수현은 그녀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드릴 말씀이 참 많은데 말씀을 드릴 수가 없는 게 안타까워요.”
지연에 대한 말도 하고 싶고 결혼에 대한 말도 하고 싶고 무엇보다 애런과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그를 애런이라고 불렀었다.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구분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지연과 애런의 얘기를 한들 무엇 할까.
그런데 그때 그녀가 흐리지만 기분 좋은 미소를 입에 그렸다.
“수현아, 내 큰아들 왔어?”
전기처럼 ‘수현’이란 이름이 귓가에서 가슴으로 흘렀다.
“어머니, 제가 누군지 아세요?”
의구심을 품은 그의 물음에 로즈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어떻게 몰라?”
“절 그때 애런으로…….”
“정신은 니가 잃었나 보다. 아들 구분 못 하는 어미도 있니?”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로즈는 분명 수현을 애런이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명확한 목소리로 그를 수현이라고 부른다.
그때 잠시 정신이 흐리셨던 건가?
아니면 지금도 흐린 정신이지만 그냥 수현이라고 부르기는 하는 건가?
수현이 아직도 그녀의 정신 상태를 확신하지 못하자 그녀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정신이 멀쩡하다는 증거를 대봐? 너 송지연이라는 아가씨를 사랑하지? 얼마 전 그녀의 딸을 위해 아주 좋은 일을 했다며? 그리고 그녀에게 프러포즈도 했고.”
로버트를 통해 두 아들의 소식을 듣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확히 말을 한다는 건 정말로 지금 정신이 괜찮다는 증거?
“저라는 걸 이제 정확히 인지하시네요?”
기쁜 목소리로 묻는 그를 향해 그녀가 조금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럼…… 엄마가 아들을 못 알아볼 리가 있어? 게다가 난 이제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로즈의 말을 들은 수현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알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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