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헤어진 남자와의 키스
2018.09.22.
지연과 줄리가 일주일 만에 만났다.
엄마가 올 거란 걸 알고 있던 줄리는 밝은 미소로 엄마를 맞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연은 그녀를 품에 안고서야 실감을 했다.
“줄리야, 줄리야.”
줄리의 엉덩이랑 가슴을 폭 감싸고 그녀의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킁킁, 냄새를 맡듯 줄리의 향기를 확인한 지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꼭 감고 사랑하는 자신의 딸 줄리를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는데…… 한 남자가 보였다.
눈물을 흘린 직후라 동공이 흐릿했다.
‘누구…… 지?’
또렷해진 동공 안에 비친 사람은 수현이었다.
“수현…… 씨?”
언제부터 서 있던 걸까?
그는 팔짱을 낀 채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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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줄리를 옆에 두고 벽 한쪽에 그림을 설치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수현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대화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일단은 줄리와 함께 있는 게 우선.
지연은 서둘러 설치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줄리와 시간을 보내려 그녀를 안았다.
그런데 아무 소리 없이 소파에 앉아 지연을 지켜보고 있던 수현이 다가왔다.
“나가야 해. 오래 있을 수는 없어.”
수현은 눈짓으로 부엌에 있는 도우미 아줌마를 가리켰다.
다른 사람에게 지연과 줄리의 관계를 들키면 안 된다는 의미.
“그래도 이렇게 가버릴 순 없어요. 줄리랑 같이 나가든가…….”
그녀가 줄리의 손을 잡자 수현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줄리를 데려가라고 지연이를 이리로 안내한 게 아니야.”
“두고 갈 순 없어요. 어떻게 만나게 됐는데…….”
지연이 다시 줄리의 손을 잡자 이번엔 조금 거칠게 수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애보다 못해? 줄리는 내 설명을 다 알아듣던데.”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줄리가 또렷한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안 따라간다고 아저씨한테 약속했어. 아저씨가 그래야 또 엄마를 볼 수 있대.”
지연은 수현과 줄리를 번갈아 보았다.
줄리까지 이러니 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오늘은 일단 가요.”
지연은 줄리를 꼭 안았다.
차마 그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거듭된 수현의 재촉에 할 수 없이 안고 있던 그녀를 놓아주었다.
일주일 만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더 큰 만남을 위해 지금은 그렇게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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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다줄게.”
수현은 지연을 위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아직 수현에게 마음이 꽁꽁 얼어 있는 지연은 선뜻 그의 차에 오르지 못했다.
그녀가 차에 타지 않은 채 보고만 있자 수현이 귀여운 협박을 했다.
“줄리를 또 보려면 내 도움이 필요할 텐데?”
“…….”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수현이 열어준 차에 올랐다.
두 사람이 탄 차는 빌라 촌을 빠져나와 가회동의 한 가운데를 지났다.
그녀 옆으로 빨간 지붕 집이 스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빨간 지붕 집을 쳐다보았다.
지연은 수현에게 마음이 많이 상해있다는 걸 까먹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아직 저기 살아요?”
물어보자마자 후회하긴 했다.
‘이제 내가 무슨 상관이람?’
수현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궁금하면 한번 와보든가.”
줄리를 보고 나니 마음이 좀 풀려서일까?
그의 농담 같은 대답에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평생,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저주했으면서.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지자 그녀는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그 집에 왜 수현 씨가 있었어요? 그리고 문태규랑 줄리가 왜 K화장품 사모님 집에 살아요?”
진지한 그녀의 질문에 수현은 딴 말을 했다.
“내가 마법을 좀 부렸지.”
“어떻게요?”
“훌륭한 마술사는 트릭을 가르쳐주지 않아.”
끝까지 대답해주지 않고 빙빙 돌리는 수현.
운전하는 그의 옆모습을 그녀가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만 그는 꾹 입술을 닫아버렸다.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건 아니다.
사실 아직까지도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정리를 하지 못했다.
원래 수현이 짠 시나리오에는 그녀에게 줄리를 보여주는 파트는 없었다.
접근 금지 명령까지 내려진 판국에 태규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수현은 그동안 사람을 시켜 지연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혹여 그녀가 줄리를 잃고 나쁜 생각을 먹지 않을까 겁이 나서.
그녀를 지켜본 사람에 의하면 그녀는 갤러리에 출근은 하고 있지만 거의 혼이 나간 여자처럼 표정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매일 줄리를 찾기 위해 그 허름한 모텔촌을 뒤지고 있고.
급기야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져 경찰서까지 불려갔다.
상태가 이렇게까지 치달으니 수현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연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 지연을 망쳐버리고 있으니까.
‘할 수 없군.’
그래서 그는 계획을 약간 틀었다.
태규에게 본격적으로 덫을 놓기 전까지 생이별을 시키려던 계획을 바꿔 잠시 잠깐이라도 지연이 줄리를 만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든 것.
태규는 애런의 지시로 매일 아침 9시에 회사에 출근한다.
그가 없는 틈을 타 지연을 지금 태규가 묵는 집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혹시나 태규에게 들킬 걸 대비해서 애런이나 수현 자신이 나서지 않고 줄리아나 코리아와 MOU를 맺은 K화장품 사모를 이용하기로 했다.
지연이 다니는 갤러리의 고객인 K화장품 사모는 수현 대신 그림을 매매하고 지금 태규와 줄리가 사는 집에 그림설치를 지시했다.
어차피 태규는 그 집을 애런의 집으로 알고 있기에 집안에 뭘 설치하든 상관하지 못한다.
드나드는 사람이 지연이라는 것만 모르게 하면 끝.
그런데 지연에게 이런 얘기를 다 해주려면 계획 전체를 얘기해 줘야 한다.
‘그럼 일을 그르치게 될 텐데…….’
그래서 대충만 얘기해주기로 했다.
“그 집은 애런 집이야. 그런데 잠시 문태규에게 빌려줬대. 줄리랑 살 공간이 필요하니까.”
수현의 설명을 들은 지연의 표정이 복잡했다.
줄리가 그런 허름한 모텔에서 지내지 않는 건 너무도 다행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라도 줄리를 볼 수 있도록 해준 건 무릎이라도 꿇을 정도로 감사한 일.
하지만 이걸로 이 형제들에 대한 분노를 풀어야 할지 말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애런이 태규와 한통속이 된 게 수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피해는 그녀와 줄리가 고스란히 보고 있고.
결국 줄리와 자신이 헤어지게 된 건 두 형제 때문인데 병 주고 약 주듯 이렇게 또 줄리를 만나게 해준다고 그들을 용서해야 하나?
그녀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애런이랑 연락은 하시나 봐요.”
살짝 비틀린 그녀의 목소리에 수현은 또 한숨만 나올 뿐이다.
달래주고 싶지만 달래줄 수 없는.
“같은 회사에 있으니까.”
그의 대답에 그녀가 또 작은 희망을 품는다.
“그러면 애런에게 얘기해서 문태규의 마음을 좀 돌려달라고 설득해주면 안 될까요?”
상황이 절실하다 보니 그녀가 이미 끝난 얘기들을 또 반복한다.
‘그놈이 설득이 될 놈이면 이렇게 하지 않지.’
수현은 지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답했다.
“복수는 차갑게 식혀야 맛있는 음식이야.”
너처럼 뜨거운 분노의 감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영악한 문태규를 이길 수 없어.
차갑고 이성적인 머리로 냉철하게 처리해야지.
하지만 줄리의 엄마로서 너는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내가 대신 차가워지기로 한 거야.
너를 위해서, 내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새로운 직장 생활 열심히 하면서 조금만 더 버텨줘. 이렇게 가끔 줄리를 보여줄 테니까.”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해대는 수현.
야속하기도 하면서 또 뭔가 이상하기도 하면서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댈 수밖에 없는.
지연은 일단은 이렇게 줄리를 보여준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고마워요, 어쨌든.”
가시 같던 그녀의 음색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사이 차는 지연이 근무하는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내리기 전에 물었다.
“저, 줄리 또 언제 볼 수 있어요?”
“아마 K화장품 사모가 그림을 몇 개 더 주문할 거야. 그때마다 지연이 가서 설치해.”
그녀도 눈치는 있다.
K화장품이라면 얼마 전 수현의 회사와 협력 계약을 체결한 회사.
한 번도 본 적 없는 K화장품 사모가 지연을 찾는 배경엔 수현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래, 이 남자가 그렇게까지 나쁜 남자는 아니었어.
그녀는 아주 흐린 미소로 인사했다.
“고마워요…….”
아까는 목소리만 풀리더니 이번엔 표정도 풀렸다.
이 미소 한 번 보려고 그 비싼 그림도 사고 도대체 머리를 얼마나 굴렸는지.
지연이 너, 나중에 이 모든 사실을 알면 얼마나 미안해하려고 그러니?
확!
안아버릴까 보다.
“그뿐이야?”
농담 반 진담 반 던져봤다.
혹시나 그녀가 손이라도 잡아줄까 싶어서.
그런데 지연이 눈치 없이 다른 말을 했다.
“줄리를 보고 나니까 이제 밥이라도 한입 들어갈 것 같아요. 힘을 내볼 희망이 생겼어요.”
줄리 얘기한 건 아닌데…….
지연이 냉정하게 차에서 내렸다.
갤러리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아주 씩씩해 보였다.
줄리를 보고 나니 메말라 없어져버렸던 생기가 다시 돋아난 듯.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니 수현도 살 것 같다.
고통스러워하는 지연의 얘기를 들으며 그도 함께 고통스러웠으니까.
그녀가 한 번 정도 뒤돌아 봐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는데…….
힘차게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다.
야속한 여자.
젠장, 짝사랑인가?
*
애런은 그사이 모델 에이전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직원도 모두 들어왔고 줄리아나 코리아를 대표할 모델들 후보도 대략 추려놓았다.
그리고 태규와의 사이도 친구 관계에서 사장과 직원의 종속 관계로 완전히 만들어놓았고.
태규는 예상대로 돈으로 귀속시키기 아주 쉬운 사람이었다.
애런이 내어준 고급 빌라에, 역시 그가 내어준 고급 차, 그리고 줄리를 봐줄 수 있는 도우미 아줌마까지 직접 보내주니 태규는 이제 애런이 시키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애런, 평생 난 네 뒤만 쫓아다닐 거야.”
이렇게 비굴한 말도 서슴지 않고 해댈 정도니.
다만 태규도 애런에게 한 가지 불만은 있었다.
“우리 집에 보내주는 아줌마 말이야, 돈을 좀 더 줘서 늦게까지 줄리를 봐달라고 할 순 없을까?”
애런은 일부러 도우미 아줌마에게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칼퇴근하도록 지시했다.
때문에 태규는 아줌마 퇴근 시간에 맞추어 6시에는 집에 가야 한다.
혹시나 있을 경찰 조사에서 여섯 살 아이를 혼자 집에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되기에.
그런데 술과 유흥을 좋아하는 태규에겐 그런 바른 생활이 감옥에 갇힌 것처럼 끔찍하다.
“매일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 가야 하니까 돌아버릴 지경이야.”
태규가 읍소하듯 부탁했지만 애런이 들어줄 리는 만무했다.
“안 돼. 그 아줌마는 일반 도우미가 아니야. 우리 직원이나 다름없어. 저녁 6시 이후엔 내가 다른 일을 시키거든.”
“그럼 나한테 미리 월급을 주면 안 될까? 내가 내 돈으로 사람을 구해볼게.”
태규는 어떻게 해서라도 육아라는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태규의 얼굴을 지켜보며 애런은 구토가 나오려 했다.
키우겠다고 지연에게서 줄리를 뺏어왔으면서 성실한 아빠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지?
그런 태규를 자유롭게 만드는 일에 애런은 동조할 마음이 없었다.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어떻게 월급을 미리 줘? 정 돈이 필요하면 집도 빼고 차도 빼. 그런 것까지 해주면서 돈까지 미리 줄 순 없어.”
애런은 태규에게 아주 냉정하고 칼 같은 상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태규는 그의 싸늘한 말투에 움찔했다.
“아냐, 아냐, 버텨볼게. 미안해, 쓸데없는 얘길 해서.”
수긍하는 척하지만 속으론 화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태규를 자극하는 것이 애런의 목적이었다.
그는 조금 더 태규를 긁기로 했다.
“여자를 만나. 줄리를 봐줄 수 있는.”
태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누가 줄리 같은 애를 밤새 봐줄 수 있겠어? 낮에는 좀 얌전한 것 같은데 밤만 되면 지연일 찾고 아주 지랄 같아. 몇 대 맞고 나서야 울면서 잠든다니까?”
“…….”
매일 밤 때린다는 소리군.
당장이라도 이 사실을 수현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애런은 꾹 참았다.
애런은 역으로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주며 직장 상사가 아닌 가장 친구 연기를 했다.
“우리 친구, 스트레스가 많겠구나? 그럼 내가 위로해줄 겸 한 잔 사줄게. 마침 오늘 모델 후보들을 내 스위트룸에서 보기로 했거든. 어때? 같이 갈래?”
그는 단 1초도 혼자 있을 줄리 생각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가자. 난 술이 필요해. 미녀들이랑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버릴 거야.”
애런은 당장 일어나자는 듯 재킷을 손에 들었다.
“잘 생각했어, 내 친구.”
하지만 속으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넌 덫을 밟게 되는 거야, 문태규.’
*
지연은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 준비를 했다.
줄리 효과라고 해야 하나?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그리고 도우미 아줌마 눈치에 깊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아직도 그녀의 코끝에 줄리의 아기 냄새가 맴돌고 있다.
그 냄새가 영혼을 부르는 마법의 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줄리를 잃고 나가버렸던 그녀의 영혼을 제자리로 불러들였다.
손끝까지 힘이 솟는다.
막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탔는데 수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빨간 지붕 집으로 와.
‘…… 뭐지?’
아무런 설명 없이 빨간 지붕 집으로 오라니.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만나길 바라나?’
생각해보니 오늘 낮 지연을 보던 수현의 눈빛이 마지막 이별을 할 때의 냉정한 눈빛이 아니었다.
자제는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예전에 그녀를 사랑하던 때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웃음에 함께 웃어주고 그녀의 눈물을 따뜻하게 닦아주며,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그녀를 만지고 싶어 하고 틈만 나면 그녀의 입술을 탐하던.
만약에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줄리를 보게 해줌으로써 맘이 좀 풀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만나야 할까?
‘그건 아니지.’
아직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계획이 서지 않아 가만히 있을 뿐 그녀는 어쨌든 다시 태규와 부딪혀야 한다.
그때 아직도 수현을 만나고 있다는 약점을 보여선 안 된다.
수현에 대한 원망은 없앤다 해도 모든 게 다 끝날 때까진 그를 버려야만 한다.
지연은 그에게 그럴 수 없다는 답장을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또 수현에게 문자가 왔다.
‘어? 수현 씨가 아니네?’
수현의 휴대폰이긴 하지만 줄리가 보낸 메시지다.
-엄마, 나 빨간 지붕 집에 있어. 나 보러 와.
둘이 또 같이 있어?
그렇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지.
지연은 목적지를 빨간 지붕 집으로 바꾸었다.
.
.
.
헉헉대고 빨간 지붕 집의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인사도 없이 속사포로 그녀가 묻자 수현이 가로로 길게 눈을 흘겼다.
“안 오려다가 줄리가 있다니까 온 거지?”
때로는 진실을 말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 그건 아닌데.”
그가 앞장서 2층으로 올라갔다.
“제 방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올라갔어. 아마 내일 아침까진 여기에 있을 수 있을 거야. 예전처럼 줄리랑 같이 자고 가.”
“문태규가 안 찾을까요? 애가 없어졌는데?”
2층을 향한 계단을 오르던 수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지연을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줄리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아마 애런이 부른 여자들이랑 밤새 파티를 즐길 거야.’
이렇게 말을 해줘야 하지만 때로는 진실을 말해주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지연이 들으면 당장이라도 태규한테 가서 멱살을 잡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다는 것 같아. 걱정하지 말고 줄리랑 같이 자도록 해.”
지연은 이제 그에게 뭔가 정확한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늘 빙빙 돌려 알 수 없는 얘기만 해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줄리와 함께 잘 수 있다는 것.
수현과 지연은 줄리의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가져왔는지 수현의 방에 있던 곰돌이를 가지고 와 꼭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
“피유~~~~~”
코까지 골며 아주 제대로 꿈나라 여행 중.
그런데 이런 꿀 같은 잠을 자고 있는 모습조차 수현의 심장을 아리게 만든다.
‘밤마다 운다더니…… 여기에 와서야 푹 잠을 잘 수 있는 걸까?’
수현은 애런으로부터 줄리가 밤마다 지연을 찾으며 운다는 소리를 듣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겨우 씹어 넘겼다.
‘복수는 차갑게 식혀야 제 맛인 음식이다.’
뜨거워지려는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로 눌렀다.
줄리를 푹 자도록 내버려두려는데 이런 사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지연이 줄리에게 달려갔다.
“줄리야, 엄마 왔어. 일어나 봐.”
그녀 입장에서는 줄리가 자고 있는 이 시간조차 아깝다.
하지만 수현의 생각으론 줄리는 재워야 한다.
그렇다면…….
“지연아, 잠깐 나와 봐. 할 말이 있어.”
줄리를 깨우려던 지연이 할 수 없이 수현을 따라 방 밖으로 나왔다.
수현은 바로 옆에 있는 제 방의 문을 열었다.
차마 그의 방으로 따라 들어가지 못하는 지연.
두려움과 어색함 그리고 약간의 거부감을 품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가 물었다.
“무슨 할 말이요?”
그때 수현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윽, 소리할 찰나도 없이 그녀가 그대로 그의 방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결된 동작으로 그는 방문을 닫으며 동시에 방문으로 그녀를 밀어버렸다.
방문과 그의 단단한 두 팔에 그녀는 외마디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한 채 갇혀 버렸다.
‘왜 이러지?’
예상치 못한 일에 그녀의 두 다리엔 힘이 쭉 풀려버렸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게 둬. 딱 한 시간 만.”
“…….”
“그리고 그 한 시간 동안…….”
그가 뿜는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을 휘감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은 언제나 그녀의 심장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향기가 다가오고 있다.
느릿하지만 강압적인 기운으로.
그녀는 그의 가슴에 두 손바닥을 대었다.
‘밀어내야 해.’
거부해야 해.
손가락을 움찔, 움직여보지만 그럴수록 단단한 그의 가슴이 밀착해온다.
기어이 코끝까지 다가온 그의 강렬한 숨결.
‘우린 끝났어. 이래선 안 돼.’
속으로 되뇌어보지만 소용없었다.
밀어내려 해도 밀려나지 않는,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그녀의 갸름하고 뾰족한 턱은 이미 그의 한 손에 잡혀버렸다.
그리고 이미 침투해버렸다.
나쁜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 깊은 곳까지.
그런데 이게 뭐지?
이 치명적 느낌은!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