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그녀를 위한 계략
2018.09.15.
줄리에게 건 전화를 낯선 목소리의 한 남자가 받았다.
“송지연 씨, 맞습니까?”
순간적으로 소름이 정수리까지 올라온 지연은 다급하게 물었다.
“네, 제가 송지연입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우리 줄리는요?”
남자는 정체를 밝히는 대신 외려 지연을 나무랐다.
“왜 전화를 안 받으십니까? 송봉수 씨랑 여기 있는 아주머니께서 얼마나 전화를 했었는데.”
답답한 지연이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누구시냐니까요? 우리 줄리, 어디 있냐고요!”
그녀의 다그침에 남자가 예의 바르지만 위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전 종로 경찰서 김의석 경윕니다. 납치 신고가 들어와서 왔습니다. 아이의 아빠 문태규 씨가 송지연 씨를 납치범으로 신고했어요.”
지연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납치범은 누가 납치범?
“제 딸인데…… 그게 무슨…….”
“등본 확인해보니 문태규 씨 딸이 맞는데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법적 보호자로 임시로 아이를 맡고 있으면서 애 아빠가 찾아도 돌려주지도 않고 행선지도 알리지 않은 채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셨잖아요.”
지연은 이제야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기운을 모아 흐려진 이성을 찾는 데 집중했다.
“경위님, 지금 어디시죠? 계신 데로 가겠습니다.”
“안 그래도 빨리 오시라고 하려고 했습니다. 안 그러면 수배령 내려야 하니까요. 송봉수 씨 댁으로 빨리 오세요.”
지연은 무슨 정신으로 택시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차에 뛰어들 듯 택시를 잡아타고 봉수의 집으로 향했다.
다행이도 줄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바짝 예민해졌던 신경들은 진정됐다.
태규나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은 것보단 경찰이 받았다는 게 차라리 안심이 됐으니까.
다만 떠오르는 의문들을 정리해보았다.
‘문태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경찰에 신고를 했을까?’
그녀는 분명히 태규에게 수현과 헤어지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이별을 통보했다.
오늘은 새로운 직장에 가느라 여유가 없었지만 내일 정도는 연락하려고 했었다.
수현의 집에서 나왔고 확실히 이별을 했노라고 밝히기 위해.
그런데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신고를 했을까?
태규에게 수현과 헤어지겠다고 약속한 지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그리고 아빠의 집은 어떻게 알았을까?’
태규가 알 수 있는 건 오로지 빨간 지붕 집뿐인데.
빨간 지붕 집과 봉수의 집이 한 동네긴 하지만 미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봉수의 집까진 알 수 없다.
‘그런데 경찰까지 찾아왔다고?’
이래저래 미심쩍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사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다.
지금은 무조건 그들이 줄리를 데려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녀는 애원하듯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제발, 제발 빨리만 가주세요.”
야속하게도 오늘 아침 수현과 함께일 땐 뻥뻥 뚫렸던 길이 지금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차들의 긴 행렬이다.
왠지 하늘은 그녀 편이 아닌 것 같았다.
.
.
.
지연은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왔다.
“줄리야!”
그런데 다람쥐처럼 달려 나와야 할 줄리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는 봉수만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
“지연아…….”
지연은 달려가 봉수 앞에 앉았다.
“아빠, 줄리는요?”
지연을 바라보는 봉수의 쳐진 잔주름이 불규칙적으로 떨리고 있다.
떨림이라기보단 경련에 가까웠다.
온몸에 경련이 일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듯.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봉수의 상태가 우선일 리 없었다.
“줄리는 어디 갔냐니까요?”
지연의 넘어갈 듯한 목소리에 봉수가 진정을 시키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 네가 줄리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어서 경찰서에 자진 출두해야 해. 너 신분이 확실한 것 같으니까 경찰이 그냥 돌아갔지, 안 그랬음 기다렸다 수갑도 채울 분위기였다.”
어쩔 수 없이 봉수는 줄리보단 경찰서에 가야 할 딸 걱정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경찰서 갈게요, 갈 테니까 말씀해주세요. 줄리 어디 갔어요?”
차마 그녀의 눈을 보고 말을 할 수 없는 봉수는 고개를 돌렸다.
“제 아빠한테 갔지 뭐. 이제 우리한텐 신경 끄라고 그러더라.”
쭈그리고 있던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어떻게 그런…… 어째서 그런…….”
봉수가 그녀와 수현이 나가고 난 뒤 벌어진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두 사람이 나간 후 봉수는 여느 때와 같이 다시 편의점에 나갈 준비를 했고 금화댁은 지연의 요청에 따라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줄리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경찰이 찾아왔다.
‘종로 경찰서 김의석 경윕니다. 납치 신고가 들어와서 나왔습니다.’
문을 열어주니 경찰과 함께 험상궂은 표정의 한 남자가 뒤에 서 있었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이 아빠거든요?’
문태규였다.
태규는 몸으로 막는 봉수의 어깨를 밀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수색을 하듯 집 안을 뒤진 태규는 금화댁과 놀고 있는 줄리를 발견하자마자 무작정 그녀를 들어 올렸다.
‘싫어! 싫어! 살려주세요!’
줄리가 소리 질렀지만 그를 말려줄 사람은 없었다.
법적으로 확실한 아버지가 딸을 데려가겠다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다만 경찰은 아빠를 보고 좋아하기는커녕 경악을 하듯 울어버리는 아이를 보고 의심은 했다.
‘아이가 왜 이렇게 아빠를 보고 놀라죠?’
그런데 태규의 말이 더 경악스러웠다.
‘아이를 납치한 여자가 저를 미친놈이라고 세뇌시킨 거죠. 원래 정신의학적으로도 인질이 납치범에게 동조하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심지어 납치범은 아이의 베이비시터였어요. 그래서 아이가 납치범 편이 된 것 같아요.’
변호사답게 논리적이면서도 사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해명.
경찰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봉수와 금화댁에게 어서 지연에게 연락을 취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갤러리로 첫 출근한 그녀가 바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경찰은 지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지만 태규가 반대했다.
‘우리 줄리가 그 납치범을 보면 또 정신적으로 이상해질 수 있어요. 납치범 연행은 알아서 하시고 저는 일단 제 딸을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는데 지연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연이 아이를 학대하고 인질로 잡은 흉악범은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경찰은 그녀가 오면 자진 출두해줄 것을 당부하고 태규와 줄리와 함께 집을 떠났다.
“경찰이 애 아빠한테 아이를 데리고 가라는데 금화댁이랑 내가 무슨 수로 말리냐.”
봉수는 어쩔 수 없던 상황을 지연에게 전해주었다.
좋다, 다 좋다.
지연은 모든 정황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태규는 그녀를 납치범으로 신고할 수 있을 만큼 비열한 놈이고 경찰은 신고를 받았으니 당연히 올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경찰이 왔어도 줄리가 그렇게 막 문태규를 따라갈 애는 아닌데요?”
줄리는 여섯 살 아이지만 또래의 아이보다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할 줄 아는 언어 능력을 가졌다.
지연의 생각으론 줄리가 울음 정도로만 의사를 표현했을 린 없다.
태규를 깨물던 누워서 발악을 하던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안 따라가려고 버텼을 듯.
아이가 그렇게 발악에 가까운 거부를 한다면 경찰이라고 과연 데리고 가자고 했을까?
지연의 의구심에 봉수는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 아빠 말고 누구 한 명이 같이 왔었어. 희한하게도 줄리가 그 사람 말은 듣는 것 같더라.”
“누구요? 누가 왔는데요?”
“그게 이상해. 금화댁이 그러는데 그 사람이 진수현 씨 배다른 동생이라고 하던데? 외국 남자.”
“…… 애런이요?”
“어, 그래. 애런. 줄리가 안 따라가려고 하니까 그 사람이 줄리를 방에 데리고 가서 설득했어, 그러니까 바로 눈물 그치고 따라가더라.”
봉수는 또 이런 말을 해주었다.
“문태규란 사람이랑 애런이란 사람은 엄청 친한 사이 같더라. 두 사람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이 집을 알려준 사람도 애런이래.”
하…….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버렸다.
그녀의 최고의 원수인 문태규의 조력자가 애런이라니.
도대체 애런이 왜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하게 됐을까, 그녀는 도저히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애런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벌일 정도로 그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다.
그리고 애런도 충분히 마음을 정리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태규가 찾아와 함부로 줄리를 데리고 가려 했을 때도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다.
그랬던 그가 왜 이렇게 변한 거지?
어떻게 두 사람이 친해진 거지?
그런데 아무리 두 사람이 친해졌다 해도 줄리한테 이러는 건 납득이 안 된다.
애런도 봤잖아. 태규가 줄리에게 어떻게 했는지.
그런 사람이 봉수의 집까지 가르쳐주며 태규가 줄리를 데려가게 만들어?
안 가겠다는 애를 설득시켜가면서까지 태규를 쫓아가게 도와줘?
심지어 줄리는 애런을 좋은 사람으로 믿고 있다.
‘전화에 히어로라고 이름을 적을 만큼 그를 믿고 있었어!’
그런데 그가 왜, 그가 무슨 이유로, 그가 무엇 때문에…….
애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봉수가 자책을 했다.
“다 내 죄다. 내가 죽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말아야 했는데. 애를 안고 도망이라도 갔어야 했는데. 네가 있었으면 그렇게 허망하게 뺏기진 않았을 텐데.”
“…….”
네가 있었으면.
봉수의 자책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 하나를 더 꽂아버렸다.
“내가 있었다면…….”
그러면 줄리도 애런이 무슨 말을 하던 엄마 옆에 있었을 테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장은 줄리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있었더라면…….
분수처럼 솟구치는 후회가 그녀의 온몸을 적셔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한들 이미 일은 벌어져버렸고 줄리는 그녀 곁에 없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딱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도대체 애런이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했을까,
오늘 난 왜 줄리 곁을 지키지 못했을까.
그 의문의 끝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진수현…….”
먹구름이 하늘을 집어 삼키듯 온몸 전체로 살을 에는 아픔, 뼛가루가 녹는 고통이 몰려온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뒤덮은 아픔과 고통의 원인은 슬픔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
줄리아나 코리아 사옥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수현의 집무실.
수현은 밤 열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이곳에서 혼자가 됐다.
방금 전까지도 이어지는 회의 행렬로 인해 사적인 통화 하나 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북적댔다.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일부러 이렇게 끝도 없는 회의를 소집했다.
잠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면 모든 계획을 망쳐버릴 것 같았다.
‘아마 지연에게 달려갔겠지? 아니면 태규에게 달려갔을 수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믿지 못해 하루 종일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이젠 홀로 있어도 된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그가 손을 쓸 수도 없을 만큼 모든 일은 벌어졌기에.
그는 집무실 한쪽에 배치한 미니바에서 위스키 한 잔을 따랐다.
독한 위스키 한 모금이 그의 혈관을 타고 손끝까지 퍼지는 게 느껴졌다.
‘잘 참아냈어, 진수현.’
이 위스키는 오늘 하루 잘 버텨준 그에게 주는 쓰디쓴 선물이었다.
그런데 독한 위스키보다 가슴으로 퍼지는 고통이 더 쓰다.
‘지금이라도 계획을 틀어? 문태규한테 달려가서 줄리를 데리고 와?’
그러다 또 고개를 흔든다.
‘흔들려선 안 돼. 절대 안 돼.’
이래서 혼자 있으면 안 된다.
자꾸 또 흔들리고 자꾸 또 후회하고 자꾸 또 무너지고, 자꾸 또! 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애런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형…….”
휴대폰을 받질 않아 오늘 애런하고도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일부러 그의 전화도 피했다.
애런이 그때그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얘기해주면 계획을 또 어떻게 틀어버렸을지 모른다.
생각 같아선 애런에게 백 가지의 질문을 토해내고 싶었다.
‘줄리는 어떻게 됐어? 문태규는 어떻게 됐어? 지연인 어떻게 됐어?’
태연한 척 위스키를 마시고 있지만 머릿속엔 백 마리의 뱀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그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애런에게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
흔들리는 형의 모습을 본다면 정작 그의 지시를 받고 있는 애런도 흔들릴 테니까.
수현은 최대한 냉정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애런은 수현이 지시한 계획의 첫 단계부터 보고했다.
“형 말대로 태규 그 자식은 지연 씨가 형이랑 헤어져도 절대 줄리를 줄 마음이 없었더라고. 지연 씨를 자기한테 오도록 한 번 더 협박한다나?”
예상은 했지만 태규는 생각보다 더 비열한 남자였다.
“그래서 내가 형이 시키는 대로 말했지. 형이랑 지연 씨, 절대 안 헤어질 거라고. 헤어지는 척, 줄리만 할아버지 집에 데려다 놓고 아마 둘은 빨간 지붕 집에서 계속 같이 살 거라고.”
예상대로 태규는 애런의 말에 분노를 금치 못했고 이성을 잃은 채 흥분했다.
‘송지연, 저거 가만두지 않겠어!’
그는 바로 지연을 경찰에 신고했다.
태규는 경찰을 앞세워 봉수의 집으로 찾아갔고 줄리를 기어이 데리고 가버렸다.
“여기까지가 형이 말한 1단계.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야.”
태규가 줄리를 데리고 가게 만드는 것이 수현의 첫 번째 목표.
애런의 말대로 성공적이었다.
이제 수현이 계획한 그 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
그러기 위해선 가장 물어보기 두려운 질문을 해야 했다.
“지연이는 그래서 경찰서엔 갔어?”
다행이 수현이 원하는 대답이 애런으로부터 나왔다.
“조금 전 로버트하고 통화했어. 지연 씨,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이제 막 집으로 돌아갔대.”
“별일 없었지?”
애런의 말에 의하면 ‘납치범’이란 무시무시한 죄명에 비하면 지연에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수현의 부탁으로 로버트는 실력 있는 변호사를 미리 경찰서로 보내 지연을 보호했고,
그녀가 줄리의 법적 보호자의 자격을 갖췄다는 증빙 서류와 태규가 그녀에게 아이를 맡겼다는 증거 자료를 변호사가 발 빠르게 경찰에 제출했다.
“다행이군.”
사실 수현은 태규가 그녀를 납치범으로 몰아도 별 탈이 없을 거라는 충분한 사전 조사 후 일을 진행시켰다.
그녀가 경찰에 구속되는 사태는 없어야 하니까.
하지만 변수는 늘 존재하는 법.
혹시 모를 변수로 그녀가 구속이라도 될까 싶어 마음속으론 얼마나 떨었는지.
‘만약 지연이 차가운 철창 뒤로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갔다면 아마 난 평생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거야.’
태규가 지연을 신고하도록 자극하라고 애런에게 지시를 한 건 수현이었기에.
그런데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 방법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면 지연은 절대 태규에게 줄리를 스스로 주지 않았을 것.
그럼 계속해서 태규에게 끌려 다니겠지.
근본적인 해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지만 그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이 모든 비극적 계획의 극본과 감독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날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겠지?’
그런데 그녀의 원망을 받는다는 고통보단 그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니 끔찍하다.
하지만 수현도 그녀도 모두 다 스스로의 고통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어른이다.
지금 그는 지연보다 줄리를 걱정해야 한다.
도저히 맨 정신으론 그녀 얘기를 물을 자신이 없는 수현은 위스키 한 모금을 더 마신 후에야 애런에게 물었다.
“줄리…… 많이 힘들어했지?”
애런은 입가에 반달 같은 미소를 그렸다.
“당연히 안 가려는 거, 형이 시킨 대로 꿈 한 번 꾼다고 생각하라고 내가 설득했어. 그래야 엄마랑 평생 함께 살 수 있다고.”
“니 말은 듣디?”
애런이 수줍은 듯 실소를 터뜨렸다.
“줄리한테 나, 히어로잖아. 그리고 내가 계속 함께해준다고 했어.”
“잘했어…….”
그 작은 게 내 말을 이해하고 따라주었다니…….
고맙다, 고맙다 줄리야.
수현은 기꺼이 태규를 따라가 준 줄리에게 감사했다.
지금까진 모든 게 다 수현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대로 끝까지만 잘 진행된다면 정말로 악몽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듯.
“그래서, 지금은 어디 있어? 줄리랑 문태규?”
“걱정 마. 한동안 경찰도 계속 만나야 하니까 그동안은 아마 좋은 아빠 연기를 할 거야. 다만…… 두 사람이 그 허름한 모텔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
이 부분이 참을 수 없는 비극이다.
그런 말도 안 돼는 곳에 줄리를 둬야한다는 건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일.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이 어두운 터널은 꼭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
“애런, 이제 다음 단계로 나가.”
수현의 지시에 애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 형이 시키는 대로 내가 문태규 옆에 딱 붙어 있을 게. 걱정 마.”
수현이 애런을 베스트프렌드로서 태규의 곁에 있도록 한 이유는 바로 이것.
애런은 의심받지 않고 계속해서 태규를 주시할 수 있다.
여차하면 줄리도 보호할 수 있고.
“애런, 문태규 옆에 있는 게 힘들겠지만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부탁한다.”
애런은 믿음직스럽게 단단히 쥔 주먹을 올려 보였다.
“나만 믿어.”
그리고 나가려는데 수현이 그를 잡았다.
“한 가지 더…….”
“뭐?”
“지연이한테 전화 오면 받지 마. 아직은 그녀가 아무것도 알지 못해야 하니까.”
애런은 지연의 이름을 얘기하며 금세 젖어드는 형의 눈동자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지연 씨 생각하면 많이 힘들지?”
수현은 애런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생이지만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는 대답 없이 퉁명스러운 인사만 했다.
“가, 이제.”
애런도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형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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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런이 집무실을 나간 후 수현은 위스키 잔을 든 채 한참을 창밖을 보며 서 있었다.
까만 밤, 별빛이라도 보면서 자그마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런데…… 투명한 창으로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순간적으로 수현이 뒤를 돌았다.
그녀가 서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을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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