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나는 할 수 없지만 너는 할 수 있는 일
2018.09.05.
수현과 애런은 호텔 방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상태로 애런은 자신이 왜 위조 유언장에 도장을 찍으려 했는지 수현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했어. 믿든지 안 믿든지, 이제 나를 죽이든 살리든 형 마음이야.”
애런의 모든 말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수현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하늘만 응시할 뿐.
그렇게 얼마나 적막의 시간을 보냈을까?
형의 침묵이 애런에게 점점 공포로 다가올 즈음 드디어 수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제 끝난 거야?”
“응.”
수현은 바닥에서 일어나 소파로 갔다.
“너도 이리 와서 앉아.”
애런은 수현의 말을 따라 소파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제법 센 주먹을 수도 없이 맞은 여파로 쉽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에구구구구.”
저도 모르게 입에선 신음이 흘렀다.
“엄살떨지 말고 빨리 와서 앉아.”
자비라고는 미세먼지만큼도 없는 냉랭한 수현의 목소리에 애런은 할 수 없이 아픈 몸을 서둘러 일으켰다.
애런이 다리를 끌 듯이 걸어서 수현의 옆에 앉았다.
수현은 애런의 앞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유언장을 밀어주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이걸 진짜로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는 거지?”
애런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당연하지, 어차피 유언장이란 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효력이 발생하는 거야. 내가 아무리 나쁜 아들이라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기만을 바라면서 이걸 들고 있었겠어? 그냥 이걸 이용해 은행이나 투자회사에서 큰돈을 받아낼 생각이었어.”
수현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건 당당한 행동이니? 어차피 똑같은 사기행각이야.”
애런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런데 형이 도장을 주고 가서 그조차도 안 하려고 마음먹었었어. 나를 믿고 도장까지 준 형에게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다시 또 마음이 바뀌었다는 거지? 도장을 찍기로.”
“응, 어제 문태규를 보고 나서.”
애런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그는 도장을 주고 간 수현의 자신에 대한 믿음에 마음이 움직여 유언장을 찢어버리려 했었다.
하지만 어제 태규의 악마 같은 행동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이놈은 절대 그냥 줄리에게서 물러날 놈이 아니다. 나까지 마음을 바꾸어 지연 씨 편을 든다면 줄리를 더 괴롭힐 거야.’
그는 자신을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줄리를 위해 뭔가를 하기로 결심했다.
원래의 계획대로 유언장에 도장을 찍고 은행과 투자 회사를 찾아가 돈을 받아내기로.
“그래서 그 돈으로 문태규를 협박해보려고 했어. 줄리를 포기하라고. 대신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 돈을 주겠다고.”
수현이 물었다.
“문태규가 줄리를 데려가고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
“그럼 그 새끼 앞에서 유언장을 찢어버리려고 했지. 수임료도 한 푼도 주지 않고. 어차피 불법 계약을 맺은 건데 뭐.”
“문태규가 니가 위조 유언장을 작성한 것에 대해 나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면?”
수현의 예리한 질문에 애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도 각오했어. 그런데 알리고 싶으면 알리라고 할 생각이었어. 어차피 난 형한테…… 원래도 쓰레기 같은 동생이었으니까.”
애런을 바라보는 수현의 눈동자에 연민의 그늘이 씌워졌다.
‘짠한 자식……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다니…….’
애런은 부끄러운 고백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고 목소리를 떨었다.
“줄리를 위해서 그 정도는 해주고 싶었어. 히어로처럼…….”
히어로라…….
그는 진심으로 줄리에게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규에게 맞을 뻔한 줄리가 떠오르는지 눈가가 촉촉하게 물들었다.
‘자식…….’
그의 진심도 모르고 이렇게 패버리다니.
수현은 조금 전 자신의 매몰찬 주먹질이 후회로 다가왔다.
맞아 터진 입술, 부어오른 눈두덩이, 그리고 퍼렇게 멍이 든 광대,
자신의 주먹으로 엉망이 된 동생의 얼굴이 형의 눈동자에 슬프게 담겼다.
생각 같아선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오히려 냉정하게 비난했다.
“내 생각보다 넌 더 바보였구나.”
형의 비난에 애런의 고개는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도 알아,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수현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풀이 죽은 그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힘없이 내려간 그의 양어깨를 수현이 단단히 쥐었다.
“고개 들어, 애런. 그리고 지금부터 내 얘길 잘 들어.”
애런은 할 수 없이 턱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직도 형이 무서워 동공을 벌벌 떨면서.
수현은 냉정했던 표정을 풀고 부드러운 어조로 바꾸어 그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잠시 돈으로 그놈을 해결할 생각을 했었어. 그게 나에겐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야. 아마 계속해서 그놈한테 끌려다니는 꼴이 될 거야.”
애런이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는 생각했어. 워낙 비열한 놈이니까 한 번 주면 계속해서 요구할 수 있다고. 그런데 만약 그놈이 그런다면 내 미국 친구들을 부르려고 했어. 아직도 미국엔 내 돈 받고 나쁜 짓 해줄 친구들은 많아.”
하지만 수현은 반대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똑같은 놈이 되는 거야.”
애런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그러면 어떡해! 형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수현이 그의 어깨를 쥔 손에 조금 더 강한 힘을 주었다.
“아니, 난 어떻게 하든 그놈을 굴복시킬 거야. 대신 니 도움이 필요해.”
“내…… 도움?”
애런을 바라보는 수현의 눈동자가 불처럼 강해졌다.
“응, 니 도움. 난 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애런의 눈빛에 의구심이 생겼다.
내 도움이 필요해……? 맨날 사고만 치는 내 도움이?
그의 의구심을 불사르듯 수현이 물었다.
“너, 나 도와줄 수 있어?”
도와줄 수 있냐는 형의 말이 애런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나, 널 믿는다.
형이 널 믿는다.
그리고 그 말은 애런의 가슴에 강렬한 메시지를 새기고 있다.
너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너는 정말로 줄리에게 히어로가 될 수 있다고.
애런의 심장이 뜨거운 의욕으로 지펴지기 시작했다.
그는 수현의 강렬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당당히 그를 바라보며 자신감을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뭐든지 할 수 있어. 아니, 뭐든지 할게. 나 뭐 하면 돼?”
애런의 결의를 담은 눈빛을 보며 수현이 말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형은 할 수 없지만?
“너는 할 수 있는 일.”
나는 할 수 있는 일?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형제의 눈이 강렬하게 부딪혔다.
*
태규의 모텔을 빠져나온 지연은 봉수에게 들러 줄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줄리에게 그녀가 말했다.
“줄리야, 너 다시 할아버지네 갈 거야. 엄마 혼자 짐을 챙기면 빠트리는 게 있을 것 같아서 너랑 같이 온 거야.”
줄리가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짐은 왜 챙기는데?”
지연의 기운 없는 눈동자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줄리는 이제…… 여기서 안 살 거야. 할아버지 집에서 살 거야.”
영리한 줄리는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안다.
태규가 또 찾아올 수 있으니 피하자는 것.
줄리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빨간 지붕 집을 떠나는 건 섭섭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만큼 줄리는 똑똑한 아이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준다면.
“엄마는?”
줄리의 눈망울은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혹시라도 지연이 함께하지 못할까 싶은.
어린 그녀도 수현까지 할아버지네 집에 갈 순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엄마는 수현이 있는 빨간 지붕 집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같이 있고 싶을 테니까.
엄마가 혹시 자기만 보낼까 싶어 두려운 줄리의 그 맘이 느껴지기에,
지연의 코끝이 아픔으로 저려왔다.
그녀는 그 아픔을 꾹 숨기고 밝게 웃었다.
“당연히 엄마도 함께지.”
그녀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줄리는 두 팔을 번쩍 올렸다.
“만세!”
엄마와 함께라면 어떤 곳이든 상관없다.
지연과 줄리는 미국에서 들고 왔던 낡은 이민 가방을 다시 꺼냈다.
다행히 짐도 크게 늘지 않아 가방 하나에 모든 짐을 채울 수 있었다.
꼼꼼이 짐을 싸는 동안 어느덧 붉은 노을도 사라지고 까만 밤이 도달했다.
줄리는 오늘 하루 이곳에서 지내며 빨간 지붕 집과 예쁜 이별을 하고 싶어했지만 지연이 허락하지 않았다.
줄리 없이 그녀가 오늘 빨간 지붕 집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지연은 줄리의 손을 잡고 빨간 지붕 집을 나와 봉수네 집으로 향했다.
한 손엔 짐, 한 손엔 줄리,
미국에서 처음 왔을 때 그녀의 모습이었다.
*
수현은 애런의 룸에서 말끔하게 샤워를 하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애런과 주먹다짐을 하며 피범벅이 된 모습을 지연에게 보일 수 없었으니까.
기사를 보내고 직접 모는 차 안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한 번의 벨이 울리기도 전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 나 방금 수현 씨한테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평소보다 밝은 그녀의 목소리에 수현도 높은 톤으로 대답했다.
“저녁 먹었어? 안 먹었으면 오랜만에 밖에서 먹을까 해서.”
까르르, 아기같이 터진 그녀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그의 귀에 흘렀다.
“나도 밖에서 먹자고 하려고 했었어요. 우리 통했나 봐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줄리 같이 있으면 오늘은 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대답했다.
“줄리 오늘 집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둘만 먹으면 돼요.”
참 희한하다.
그의 생각을 딱딱 아는 것처럼 그녀가 먼저 말을 하니.
이젠 서로 말을 안 해도 통하는 사이가 됐나?
어쨌든 줄리 없이 둘이 먹자는 꺼내기 어렵던 말을 지연이 먼저 해주니 다행이었다.
“나 집에 거의 다 도착했거든?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런데 이런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집 앞에서 그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뭔가의 홀린 듯 이상한 밤이었다.
이런 게 이심전심인가?
수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앞에 차를 세웠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그녀가 차 안으로 들어오며 전화보다 더욱 톤 업시킨 음성으로 인사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오렌지 블로썸과 자스민 냄새가 오묘하게 섞인 고혹적인 향이 풍겼다.
“향수 뿌렸어?”
수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평소엔 줄리에게 안 좋을까 싶어 절대 향수를 뿌리지 않는 그녀기에.
지연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의 데이트니까?”
그러고 보니 속초 여행 이후 처음으로 갖는 두 사람만의 시간이었다.
간만의 데이트에 지연은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하다.
평소에 뿌리지 않던 향수뿐 아니라 평소엔 절대 입지 않는 과감한 스타일의 정장도 입었다.
허벅지가 시원하게 드러나는 미니 원피스, 엉덩이가 노출되는 짧은 재킷 그리고 높은 스틸레토 힐까지.
이 정도 되니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무슨 날이야?”
수현의 어리벙벙한 눈앞으로 지연이 귀엽게 손으로 브이를 내밀었다.
“취직했어요.”
“정말?”
“네, 갤러린데 우리나라에선 꽤 큰 편에 속해요. 다루는 그림의 스케일도 크고요.”
그래서 이렇게 들떴구나.
운전만 아니면 너무도 기특해서 한 번 안아주고 싶었다.
편의점에서 일을 하며 줄리를 돌보며 그 바쁜 와중에도 혼자서 취직 준비를 했다니.
수현은 안아주는 대신 그녀의 볼을 살짝 쥐었다.
“뭐 먹고 싶어?”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전 술이 당겨요. 아주 많이많이요.”
그래, 술이 당길 만도 하다.
취직이라는 건 축하주를 마셔야 될 만큼 좋은 일이니까.
“그럼 우리 좋은 데 가서 먹자.”
수현은 한 손엔 운전대, 한 손으론 지연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차의 속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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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이 지연을 데리고 간 곳은 잠실의 한 초고층 건물 81층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
미리 예약을 한 건 아니지만 운 좋게 잠실대교부터 한강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 쪽 자리를 맡을 수 있었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익숙한 수현은 지연이 혹시 음식 선택에 어려움이 있을까 싶어 코스로 주문했다.
그리고 서빙될 음식과 잘 어울리는 레드 와인도 한 병 오더.
코스로 된 메뉴와 고급 와인을 시키면서 수현은 사실 조마조마했다.
동공이 1.5배는 확대될 만큼 엄청난 가격대를 보고 지연이 혹시 타박하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지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도 오고 싶었던 곳에 온 사람처럼 이리저리 사진도 찍고 여유 있는 자태로 직원들의 서비스를 받고 있다.
‘취직을 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나?’
좋은 곳에 데리고 오면 늘 비용을 신경 쓰거나 불편해하는 그녀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제대로 즐겨주는 모습을 보니 그의 마음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지금도 지연은 셀카도 찍었다가 수현을 걸고도 찍었다가 아이처럼 휴대폰으로 기록을 남기기에 바빴다.
그는 그런 지연의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좋아?”
수현이 놀리듯 묻자 그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너어무 좋아요.”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좋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살짝 눈물이 비친다.
입은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동자는 촉촉하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건가?’
하긴, 생각해보니 그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할 만하다.
이제야 그녀 수준에 맞는 직장을 구했으니까.
한국에서 좋은 미술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비록 끝까지 마치진 못했지만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거의 5년이나 한 사람이다.
그것도 예술적인 의미에서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뉴욕이란 도시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화장품 방문판매원인 오드리 화장품의 뷰티 카운슬러로 들어가고
심지어 지금은 아빠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게 그녀 능력의 전부는 아니다.
줄리만 없었다면 어쩌면 공부도 끝까지 할 수 있었고 그 이력으로 한국이든 미국이든 남들에게 말하기도 버젓한 직장을 구했을지도.
그런데 이제야 전공에 맞게 제대로 길을 찾은 것 같다.
“큐레이터로 일한다고 했지?”
그녀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림 판매도 하고요.”
“기특하고 예뻐, 우리 지연이.”
정말로 보는 사람들만 없다면 쪽쪽 뽀뽀를 해주고 싶을 만큼 예쁘다.
자신의 도움을 조금도 받지 않고 저렇게 혼자 해냈다는 것에 자랑스럽고,
더구나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버텨주고 있음에 고맙고.
지연도 많이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과하다 싶게 술을 마신다.
수현이 두 잔을 채 못 마시는 동안 그녀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술이 떨어졌다. 나 한 병 더 마시고 싶어요.”
“그럴까?”
수현은 같은 걸로 와인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오늘 같은 날엔 그녀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 한편으론 농도 짙은 한숨이 쏟아진다.
‘오늘은 얘기 못 하겠지?’
사실 수현이 오늘 밤 줄리 없이 둘이 식사를 하자고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태규와 줄리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별로 좋지 않은 얘기들을 해야 하고 어쩌면 지연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까지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취직했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지연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 오늘은 즐기고 내일 얘기하자. 하루 정도야 뭐…….’
하루 정도는 지연을 행복하게 내버려두고 싶었다.
지연은 새로 주문한 와인이 도착하자 냉큼 또 잔을 채웠다.
그러더니 음료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다.
한 병까진 괜찮은데 또 한 병을 저렇게 마셔대니 수현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셔.”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그녀가 고집을 부린다.
“싫어요, 저 오늘 술 많이 마시고 싶다고 예고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신경질, 또는 짜증이 섞여 있다.
‘벌써 취했나?’
수현은 이때부터 오늘 지연이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다고 느껴지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게 된다.
일단 음식.
와인은 격식도 모르는 사람처럼 막 들이켜면서 서브되는 접시는 반도 못 비우고 있다.
코스라 포크질 세 번이면 끝날 만큼 아주 적은 양인데도 거의 남겼다.
“음식은 왜 안 먹어? 입맛에 안 맞아?”
수현이 지적하니 지연이 그제야 음식을 입에 넣는다.
“아니요, 되게 맛나요.”
그런데 음식을 씹는 모습은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 사람처럼 부자연스럽다.
‘왜 저러지?’
지연의 행동 하나하나가 뭔가 되게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한 수현.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이 너무 기뻐도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코스가 끝나기도 전에 지연은 기어이 와인 한 병을 더 비웠다.
수현은 반대로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무래도 취한 지연을 생각해 직접 운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에.
더 이상의 와인이 없자 디저트도 나오기 전에 지연이 핸드백을 챙겼다.
“우리 나가요, 이제.”
수현이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비틀!
풀린 동공, 주체 못 하는 몸짓, 그녀가 많이 취했다.
빈속이나 다름없이 거의 와인 두 병을 쾌속으로 마셨으니 취할 수밖에.
그도 어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연을 부축하고 레스토랑을 나와 속력을 내어 집으로 향했다.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가 차에서 거의 뻗듯이 잠에 들었다.
수현은 안다시피 그녀의 어깨를 잡고 집으로 들어왔다.
겨우 2층까지 데리고 올라와 그녀를 그녀의 방 침대에 눕혔다.
“으이그,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혼자 타박하며 그녀의 재킷을 벗겨 옆에 두고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머리를 풀어주었다.
미니 원피스를 벗겨주고 싶은 유혹이 잠깐 있었으나,
꾹 참고 오히려 올라간 스커트를 밑으로 내려주었다.
“낼 두고 보자, 송지연.”
살짝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 뒤돌아 나가려는데,
“가지 마.”
그녀의 손이 그를 잡았다.
잡힌 손 그대로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눈을 뜨고 있었다.
“잔 거 아니었어? 나는 자는 줄 알고…….”
그가 말하는 순간 그녀가 잡은 손을 훅 잡아당겼다.
힘을 주지 않고 있던 그의 손이 속절없이 그녀의 손에 끌려버렸다.
“흡!”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그녀의 몸 위로 떨어졌다.
“지연…… 아?”
갑작스러운 그녀의 도발에 그는 어리벙벙해졌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의 볼을 감쌌다.
그녀의 취한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훑고 있다.
본능적으로 뒤로 빠지려는 그의 머리를 그녀가 다시 단단히 쥐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홀리듯 벌어졌다.
“함께 있어요…….”
알 수 없는 묘한 기운이 그녀의 눈빛에 흐른다.
“오늘 밤…….”
술기운에 젖은 촉촉한 그녀의 음성이 수현의 귀를 자극한다.
지탱하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대로 그녀 몸으로 내려앉았다.
쌉쌀한 와인의 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입속 깊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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