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형제의 혈투
2018.09.01.
수현은 바짝바짝 마르는 입안의 침을 억지로 모아 꿀꺽 삼켰다.
올라오는 긴장감을 그렇게라도 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로버트의 대답이 그의 귀로 들려왔다.
“야속하게도 문태규가 줄리 양을 학대하거나 방치했던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긴장감이 절망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태규가 줄리를 부당하게 대했다는 증거를 찾는 일, 사실 이 조사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런데 전혀 그런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니.
진실이 헛갈리기도 했다.
‘정말 태규는 한 번도 줄리를 학대한 적이 없을까? 그의 말대로 오늘의 일은 우발적이었나?’
아니면,
‘가정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의 마음에 괴상하고 요상한 감정이 오묘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태규가 아주 최악의 아빠는 아니었고 줄리가 최소한 그런 고통은 받고 자라지 않았다는 안도감,
또 하나는 마음은 아프지만 차라리 그런 기록이라도 있어서 줄리를 태규에게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고 나니 떠오르는 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역시 돈인가? 문태규를 설득할 유일한 방법은?’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결코 쓰고 싶지 않은 마지막 보루였는데…….
천장이 점점 그의 머리를 누르며 내려온다.
바닥이 점점 그의 발 위로 솟아오른다.
사방의 벽이 점점 그를 조여오고 있다.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어마어마한 트랩에.
*
다음 날 아침,
“식사하세요~~~~~”
평소와 똑같이 지연은 낭랑한 목소리로 아침 식사를 알렸다.
수현과 줄리는 빠른 동작으로 어느 틈에 룰처럼 정해진 식탁의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수현은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테이블 앞에 바짝 다가갔다.
“우와,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줄리도 깨방정을 떨며 포크를 들었다.
“엄마, 나 밥 많이, 많이, 진짜 많이 주세요.”
지연은 이제 막 냄비에서 퍼낸 국을 두 사람 앞에 놓아주었다.
“원하는 만큼 많이많이 드세요. 국이랑 밥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누군가가 봤다면 너무도 행복한 한 가족의 아침 풍경이었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을 기쁜 마음으로 받는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빠,
엄마가 내어주는 밥상을 예쁜 모습으로 기다리는 말 잘 듣는 딸,
그리고 그런 남편과 딸이 사랑스러워 죽겠는 상냥한 아내이자 엄마.
지연도 자신의 국을 가져와 수현과 줄리의 가운데 자리에 사뿐히 앉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먹읍시다.”
지연의 감사기도 같은 알림과 동시에 세 사람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막상 식사가 시작되자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 반찬이 맛있다, 저 반찬은 미국에서도 먹어봤다, 수현은 계속해서 지연이 내준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며 먹었을 테고,
반면 줄리는 지연이 수저 위에 놓아주는 반찬에 대해 불평도 하고 짜증도 내면서도 소시지 하나 주면 또 막 좋아했을 테고.
그런데 오늘은 굴비와 소시지 볶음, 콩나물과 시금치 무침으로 채워진 풍성한 반찬 그릇에 그 누구도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국 안에 빠진 머리카락이라도 찾으려는 사람들처럼 모두 다 고개를 테이블 위로 고정.
심지어 세 사람 다 약속이나 한 듯 국에 밥을 넣어 대충 휘휘 저은 뒤 수저로 떠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었다.
겉으로만 아침 식사 시간을 반겼을 뿐 사실은 모두 밥맛이 없던 것이다.
수현은 지연과 줄리 모르게 문태규 일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지연은 수현과 줄리 몰래 잠시 후 만날 사람을 생각하니 심장이 조여 오는 듯 괴로웠고 어린 줄리는 어제 태규가 와서 저지른 일이 자신의 잘못 같아 수현과 지연의 눈치가 보였다.
이렇듯 머리와 가슴 가득 걱정과 고민, 아픔과 고통으로 채우고 있으니 밥 한 톨 들어갈 여유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티를 내면 상대방이 슬플까 오히려 오버로 즐거운 척하며 밥그릇을 비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적막한 식탁엔 후루룩 후루룩 국 넘기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맛도 못 느끼는 국그릇을 완전히 비워낸 건 수현이었다.
“잘~ 먹었다. 역시 아침밥을 먹어야 든든해.”
빈 그릇을 밀어내며 그는 만족스러운 식사였던 것처럼 연기했다.
줄리도 작은 목구멍으로 밥을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캑캑.”
그런데 기어이 사달이 났다. 목구멍에 밥이 걸려버린 것.
물을 한 컵 다 마시고 나서야 밥이 넘어갔다.
지연이 그녀의 등을 치며 한소리 했다.
“천천히 먹지 왜 그걸 그렇게 급하게 먹어.”
입안을 비운 줄리가 무안한 듯 배시시 웃었다.
“헤헤, 너무 맛있어서.”
평소 같음 수현이 장난처럼 줄리를 놀렸겠지만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씩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툭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출근 준비할게.”
그는 무심하게 한마디 던지고 식탁을 떠났다.
부엌을 나가며 지연과 줄리,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주치면 주체할 수 없는 이 짠한 감정이 폭발할 것 같았으니까.
지연도 굳이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수현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줄리가 보는 앞에서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았다.
줄리는 그냥 이 모든 상황이 자기 탓인 것 같아 어린 눈망울을 기운 없이 끔벅거렸다.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즐거운 식사 시간은 이렇게…… 끝나버렸다.
*
애런은 태규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두 시간 전에서야 룸으로 들어왔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원두를 네 스쿱이나 넣은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맑은 정신을 갖기 위해서.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멘탈이 깨끗하다.
혼돈을 끝내고 마음에 확실한 결심을 했다는 것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강하게 만드는 듯.
애런은 어제 태규가 줄리를 때리려는 순간 지연이 달려와 대신 그의 손에 맞은,
악마와 그 악마로부터 자식을 지키려는 위대한 엄마를 보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태규와 술을 마시며 깨달았다.
그가 진정 누구 옆에 서야 하는지.
그리고 한 소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그의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애런 아저씨를 히어로라고 저장해뒀어요.’
히어로…….
‘나를 히어로라 했어.’
줄리의 수줍은 그 한마디가 애런의 몸의 미세한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두 깨워놓았다.
그는 신께 맹세하듯 가슴에 그의 결심을 아로새겼다.
‘내가 너의 히어로가 되어줄게.’
이름을 불러줘야 진정한 꽃이 되는 것처럼 줄리가 그를 히어로로 불러주며 그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히어로가 되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히어로가 되는 그 방법이 결코 아름답지 않을 순 있다.
때로는 히어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쁜 사람을 죽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넌 구해준다, 줄리.”
애런은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눈앞에 위조로 만든 유언장과 도장을 나란히 놓았다.
다시 한 번 유언장을 읽어보았다.
로즈가 갖은 모든 회사의 지분과 개인 재산을 애런 몬테규, 친아들에게 넘긴다는 내용.
‘이거면 됐어.’
이번엔 수현이 주고 간 로즈의 도장을 들었다.
아름다운 로즈의 이름이 최고급 품질로 된 상아에 새겨 있었다.
‘이것도 됐어.’
이제 자신이 로즈에게 받아낸 그녀의 친필 사인 옆에 도장을 찍으면 된다.
그러면 법률적으로 그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을 완벽한 유언장의 완성이다.
애런은 도장을 들었다.
그리고 실수가 없도록 유언장을 반듯하게 폈다.
그는 도장을 들어 유언장 위에 놓았다.
그런데 두 손에 힘을 주고 막 유언장에 도장을 찍으려는 찰나,
갑자기 쾅! 하고 문이 열렸다.
고막을 터뜨릴 듯 커다란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수현이 서 있었다.
“…… 형?”
형의 존재를 보는 순간 한 손엔 유언장, 한 손엔 도장을 든 그의 손이 그대로 고체가 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건 수현도 마찬가지.
문 앞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그도 애런의 얼굴과 그가 든 유언장을 번갈아보았다.
“…… 애런?”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에서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허무한 신음소리가 흘렀다.
“아…… 아…… 어떻게 이렇게까지…….”
애런에 대한 티끌만한 신뢰조차 무너져버렸기에.
사실 수현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다.
어제 밤새 생각하고 오늘 아침 억지로 밥을 먹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문태규를 어떻게 처리하지?’
머릿속에 로버트가 전해준 절망적인 말들만 맴돌았다.
‘합법적으로 문태규에게서 줄리 양을 데리고 올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절박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애런이었다.
비록 애런이 태규의 편인 듯 줄리가 맞을 뻔한 걸 보고만 있었다지만 그의 마음속엔 아직까지도 애런에 대한 기대가 있다.
‘애런은 누가 뭐라 해도 내 동생이야, 사랑하는…….’
그는 애런을 설득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태규와 연을 끊고 함께 지연을 도울 생각을 해보자고.
그래서 출근길 애런의 호텔로 먼저 들른 것이다.
지금 그의 손엔 애런을 위해 준비했던 선물이 들려 있다.
애런이 로즈의 회사 줄리아나에서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수현이 발판을 마련해 놓은 모델 에이전시에 관련된 서류.
그런데 이런 그의 마음이 무색하게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애런이 위조 유언장에 도장을 찍으려는 모습이다.
“너,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물론 도장을 준 건 그다.
그리고 도장을 주었을 땐 그 어떤 결정도 애런이 내리는 대로 따르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지연과 줄리도 외면하고 커다란 상처까지 준 녀석이 이런 이기적인 결정까지 내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 그의 뼈와 피가 한 줌 모래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이젠 도저히 못 참아!”
그는 애런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분노를 모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날렸다.
“악!”
외마디 비명을 날리며 애런이 붕 떠 바닥으로 떨어졌다.
참았던 어제 일까지 떠올리며 수현은 죽일 듯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애런의 멱살을 잡고 한 번 더 주먹을 날리려는 찰나, 애런이 외쳤다.
“형, 내 말 좀 들어봐, 형! 형!”
하지만 수현의 폭발한 분노는 참을성이 없었다.
함께한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흔한 주먹다짐 한번 없던 형제였다.
수현은 늘 동생의 어리광을 받아주었고 애런도 감히 형에게 대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수현의 눈에 애런은 동생이 아니었다.
미친놈이었고 배신자였고 쓰레기였다.
“너 따위의 말, 이젠 듣고 싶지 않아.”
돌 같은 수현의 주먹이 다시 애런의 얼굴로 날아갔다.
“으악! 제발!”
애런은 피해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수현의 이성은 분노에 가려져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는 올라오는 울분을 그대로 토하며 애런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얼마나 때렸을까…… 혹은 얼마나 맞았을까…….
어느 순간 애런은 모든 걸 포기한 듯 맞고 있었고 어느 순간 수현의 주먹도 힘을 잃었다.
“헉…… 헉…….”
수현의 주먹이 드디어 허공에서 헛돌았다.
더 이상 내리칠 힘도, 더 이상 주먹을 쥘 힘도 없었다.
몸에 있는 작은 힘까지도 소멸해버렸다.
털썩-
그는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애런의 옆에 그대로 몸을 떨어뜨렸다.
주먹이 얼얼하다 못해 감각을 상실했다.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사람의 얼굴과 옷, 손에는 두 사람의 빨간 피가 흥건했다.
애런의 얼굴에서 터진 피가 수현의 주먹을 물들였고 수현의 주먹에서 터진 피가 다시 애런의 얼굴을 물들였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형제의 피가 그렇게 섞여버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공기에 집중하니 코끝으로 피비린내가 올라온다.
입안에 고인 피가 목으로 넘어간다.
두 사람 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라고 했나?
온몸의 감각은 죽은 건지 쉬는 건지 오히려 아무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마음도 이상하리만큼 평화롭다.
전쟁 후 찾아온 고요와 평안처럼.
적막했지만 포근한 공기가 두 사람을 에워쌌다.
잠시 후, 그 평안을 깨고 애런이 먼저 터진 입술을 꿈틀댔다.
“형…….”
“…….”
“형…….”
“부르지 마…… 새끼야.”
“형…….”
“……왜…….”
“내 말…… 이제 들어줄 수 있어?”
“…… 들어야 해?”
“응…… 한 번만…….”
“들으면……?”
“일단 들어봐…….”
“별 말 아님…… 너 죽을 수도 있어…….”
“…… 하지 말까?”
“일단…… 해봐.”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처럼 머릿속을 텅텅 비운 형 수현에게,
모든 걸 내려놓은 동생 애런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지연은 줄리를 봉수네 집에 데려다주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그녀는 며칠 전 면접을 보았던 갤러리에 들러야 했다.
다행히 갤러리 쪽에서 그녀를 큐레이터로 고용할 마음이 있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하지만 그녀가 향한 곳은 새로운 직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광화문 근처의 허름한 모텔 촌.
“이 근처인 것 같은데…….”
빽빽하게 모여 있는 수많은 모텔 중 종이에 적힌 이름의 모텔을 찾았다.
그녀는 그 모텔 입구에 서서 하늘을 올려보듯 건물의 끝을 올려보았다.
몸에서 아주 작은 떨림이 일었지만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
조그마한 주먹을 느릿한 움직임으로 꼭 쥐고서 다짐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방법밖에 없어.’
두 주먹을 쥔채 그녀는 모텔의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똑똑-
그녀는 쪽지에 적힌 403호실의 문을 힘 있게 두드렸다.
잠시 후 낡은 모텔방의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기습처럼 코를 찌르는 독한 술 냄새.
밤새 술을 마신 태규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였다.
“혼자 왔지?”
아직 술과 잠에서 깨지 않은 그가 거친 음색으로 물었다.
“응.”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모텔 룸의 문이 활짝 열렸다.
“들어와.”
침대 하나, 화장대 하나 있는 초라한 방 안으로 그녀가 들어갔다.
민희에게 쫓겨난 태규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잡은 싸구려 모텔 방.
“내가 이러고 산다, 너 때문에.”
태규는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모든 게 그녀의 탓인 듯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넌 참 좋은 집에서 편하게 살더라, 애 아빠는 이렇게 만들어놓고.”
지연은 대꾸할 말도 대꾸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순진한 척 가면을 쓰고 알고 보면 은근히 여우야. 부자 새끼 꾀어서 살림부터 차린 것 보면.”
그가 뭐라고 지껄이든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연은 그저 시선을 내린 채 최대한 그와 떨어질 수 있도록 네모난 방의 모서리에 섰다.
태규는 서 있기도 힘든지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다리를 꼬며 시비라도 걸고 싶은 사람처럼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왜 전화했어? 쫓아낼 땐 언제고.”
그녀는 태규의 타박을 무시하고 어깨에 멘 가방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직접 그의 손에 건네는 대신 바닥에 놓고 그의 발밑으로 밀었다.
“그게 다야.”
그녀가 밀어준 봉투가 태규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는 접힌 봉투를 펴 내용물을 확인했다.
“뭐야, 돈이야?”
그러더니 미친 사람처럼 몸까지 들썩대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지연도 그가 비웃을 줄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형편없는 액수이기에.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전부야. 하지만 나 곧 취직해. 그럼 더 많이 줄 수도 있어. 일단은 이것만 받아줘.”
그는 터졌던 웃음을 진정시키며 귀엽다는 듯 지연을 보았다.
“내가 줄리 달라 그랬지 누가 돈 달랬니? 그것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돈을? 하하하.”
그녀가 한 발자국 태규의 앞으로 다가갔다.
절박함과 절실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알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게 우습다는걸.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돈으로 부족하다면 내가 강민희라는 여자도 만나볼게. 문태규 당신이 다시 그 여자랑 잘되도록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해볼게.”
태규가 손을 올려 휘휘 허공을 저었다.
듣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였다.
“강민희 얘기는 다신 꺼내지 말아줘. 나도 이제 그 여자 싫으니까.”
지연이 한 발 더 태규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그냥 일단 돈이라도 받아줘. 앞으로 더 줄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그러니까 줄리를…….”
그런데 지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그녀가 준 돈 봉투를 휙 하고 던졌다.
휘리릭-
열린 봉투가 그녀의 앞으로 떨어지며 안에 있던 오만 원짜리 지폐들이 춤을 추듯 허공에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날리는 지폐 사이로 지연의 눈에 태규의 눈동자가 보였다.
“너 내가 우습냐?”
그의 눈동자엔 흩어지는 돈과 함께 악마가 춤을 추고 있었다.
“니 애인 엄청 부잔 건 알아? 그런데 겨우 이딴 돈을 들고 날 찾아와?”
비열하고 졸렬하고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섬뜩한 눈동자.
지연은 그와 눈을 마주친 그 찰나의 시간 깨달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는 그대로 무릎을 바닥에 쿵 찧었다.
‘이것뿐이다.’
두 손을 무릎 앞에 집고 죄인처럼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부탁드립니다.”
“…… 뭐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위에 태규도 놀랐다.
자신을 달래기 위해 뭔가 달콤한 보상을 가지고 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비굴하게 무릎까지 꿇을 줄은 몰랐다.
떨군 그녀의 얼굴에서 흐른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줄리를 저에게 주세요. 어차피 버리고 갔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끝까지 말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지연.
아무리 악랄한 그라고 해도 자기 자식을 향한 그녀의 사랑에 은근히 심장이 묵직해졌다.
하지만 그런 짠한 느낌도 잠시,
다시 질투와 시기, 악의 감정이 머릿속으로 들이차며 제 모습을 찾았다.
그는 고개를 내린 채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닥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에 그의 두 발이 들어왔다.
좀 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렸다.
“고개 들어봐.”
두렵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기대를 해보며.
내려 보는 그의 눈동자가 고개 든 그녀의 눈동자와 수직으로 부딪혔다.
그가 느릿하게 입매를 올렸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그녀는 눈물과 함께 입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무슨 조건이라도…….”
기대의 눈빛을 빛내며 올려보는 그녀를 향해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진수현이랑 헤어져.”
“…….”
“내 조건은 그거 하나뿐.”
시야가 흐려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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