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혼돈은 끝났다
2018.08.29.
태규가 하늘 높이 올린 손을 가속으로 내리쳤다.
짝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가떨어졌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가떨어진 사람은…… 지연이었다.
아수라 같은 상황 속에서 그녀가 언제 뛰어 들어왔는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지연은 태규의 손에 맞아 넘어진 와중에도 바로 일어나 줄리를 품으로 감쌌다.
“당신 미쳤어?”
그녀가 태규를 향해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그도 지연을 보고 나서야 이성을 찾았다.
금방이라도 줄리를 잡아먹을 듯 거칠었던 얼굴을 걷어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나도 모르게 그만…….”
변호사인 그도 이런 약점을 지연에게 보여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머리를 긁적이며 우발적이었던 것처럼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줄리가 날 깨무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그런 거야. 절대 때릴 생각은 없었어. 내가 어떻게 내 딸을 때리겠니?”
지연은 뻔뻔한 그의 변명에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아냈다.
엄마가 흥분하면 아이가 더 놀란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줄리를 품에 안은 채 차분하지만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으니까 제발 나가줘요, 제발.”
하지만 태규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한 발 한 발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연아,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녀는 줄리를 안은 채 엉덩이를 뒤로 밀며 물러났다.
“다가오지 마!”
경고를 하듯 그에게 손바닥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지연아, 나랑 지금 나가서 무슨 얘기라도…….”
그때 애런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태규가 고개를 돌려 애런을 보자 애런이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만해. 이쯤에서.”
위협적인 표정이나 음성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빛이 너무도 준열했다.
섣불리 거역할 수 없는 눈빛.
할 수 없이 태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친구가 그러라면 그래야지.”
그는 들고 왔던 재킷을 집고 현관으로 향했다.
“애런, 가자.”
태규는 원래부터 함께 온 친구를 부르듯 친근하게 애런을 불렀다.
애런은 알 수 있었다.
태규가 자신을 친구처럼 챙기는 이유를.
그는 지연과 줄리에게 애런은 자신의 편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줄리가 애런을 부르지 못하도록.
그런 태규의 저의를 알기에 애런은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먼저 나가 있어.”
태규는 끄덕 고갯짓하고 밖으로 나갔다.
지연은 그제야 있는 힘껏 감싸고 있던 줄리를 놓아주었다.
“괜찮니?”
줄리는 두 팔로 지연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엄마. 엄마가 왔으니까.”
금화댁은 태규의 손에 맞아 흐트러진 지연의 머리를 손으로 넘겨주었다.
“애기 엄마는 괜찮아? 내가 그놈 손목을 잡으려고 했는데 나도 겁이 나서 그만…….”
아직도 잔뜩 겁을 먹은 채 눈 밑 주름을 덜덜 떨고 있는 그녀에게 지연이 온 힘을 다해 웃어 보였다.
“전 괜찮아요. 줄리만 안 다쳤음 됐죠.”
애런은 몇 발자국 뒤에서 세 사람을 보며 오도카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애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남자가, 그것도 수현의 동생이란 놈이 아이가 그 꼴을 당하고 있는데도 보고만 있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애런도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입과 발이 얼어붙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애런이 갈 생각을 안 하자 지연이 할 수 없이 먼저 애런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문태규랑 같이 왔어요?”
담담한 어조였지만 원망이 섞인 음성.
애런 대신 줄리가 대답했다.
“내가 전화했어.”
“니가 아저씨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지연이 묻자 줄리가 슬쩍 애런을 보았다.
“수현 아빠 미국에 가기 전에 내가 물어봤었어. 수현 아빠 없을 때 태규 아빠 오면 내가 애런 아저씨 부르려고.”
그녀는 쑥스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래서 번호 저장해놨었어. 히어로라고.”
“참나…….”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지연의 입에서 허탈한 바람이 나왔다.
히어로는 무슨!
그녀의 실소에 애런의 하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어이가 없겠지.
‘나 같은 놈을 히어로라고 저장해놓았으니.’
지연이 애런을 싸늘하게 올려보았다.
“이제 그만 가셔도 될 거 같아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는 하지만 뼈가 있는 말, 냉기가 서려 있는 말.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다 못해 얼음이 서려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서 이곳을 떠날 수밖에.
*
태규와 애런 그리고 금화댁까지 떠나고 난 집에는 지연과 줄리만 남았다.
지연은 줄리가 진정할 수 있도록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키고 코코아를 먹였다.
그녀는 줄리를 편안하게 침대에 눕히고 동그란 이마를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주었다.
엄마의 손은 마술사의 마법 같았다.
놀란 가슴에 딸꾹질까지 했던 줄리는 이제 진정을 넘어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연의 옷 속으로 손을 쏙 넣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히히, 엄마살 모찌살.”
지연은 그녀의 돌아온 장난기가 반가웠다.
“이제 좀 살 거 같아?”
“응…….”
“아깐 너무 놀랐지?”
“응…….”
“그리고 앞으론 엄마랑 연락 안 돼도 애런 아저씨 부르지 마. 차라리 수현 아저씨한테 전화해.”
“아저씨 바쁠까 봐 그랬지. 그런데 엄마…….”
줄리가 곰곰이 뭔가를 떠올리듯 눈동자를 올렸다.
“왜?”
“애런 아저씨 좀 이상했어. 내가 도와달라고 소리 지르면서 아저씨를 봤는데 나보다 더 겁먹은 얼굴로 태규 아빠를 보고 있었어.”
“자기도 맞을까 봐 무서웠나 보지. 치이.”
지연은 비아냥거리듯 입술을 이죽거렸지만 줄리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니야, 예전에 애런 아저씨는 태규 아빠 안 무서워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지? 꼭 자기도 태규 아저씨한테 맞아본 사람처럼.”
지연은 줄리처럼 애런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을 믿고 있는 줄리를 도와주지 못한 사람이다.
엄마의 이기심이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대단히 실망스러운 건 사실.
그녀의 관심은 그것보다 다른 곳에 있었다.
“줄리야…….”
“응?”
“너 혹시 아빠한테 예전에도 맞아본 적 있니?”
모든 사고를 앗아갈 만큼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이란 세포가 제 기능을 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이었다.
줄리는 여태 한 번도 아빠한테 맞았다는 얘길 한 적이 없다.
하지만 폭행도 해본 사람이 하는 법.
태규가 보였던 행동은 부모가 훈육 차원에서 자식을 벌주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른인 지연도 나가떨어질 만큼 성인 남자의 힘이 고스란히 뭉쳐진 강한 주먹이었다.
심지어 그는 줄리를 때리려고 손을 올렸을 때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제 자식을 대하는 아이 아빠의 인내심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바람 소리까지 내며 떨어지던 주먹엔 0.01초의 머뭇거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이게 처음 있는 일일까?
줄리는 큰 눈망울을 잠시 허공으로 보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없어. 때린 적은.”
은근히 지연의 시선을 피하는 줄리의 눈동자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믿기로 했다.
‘줄리가 없다면 없는 거겠지.’
그의 말마따나 줄리가 팔을 물어뜯자 순간적으로 자제력을 잃었나 보지.
만약에 있었다면 오히려 줄리가 지연에게 먼저 말을 했을 테니까.
지연은 줄리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속에 소중하게 품었다.
가슴으로부터 온몸으로 번지는 따끈하고 평화로운 줄리의 숨결이 마음에 안도를 주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론 이런저런 혼돈이 오고 있다.
그녀는 태규와 줄리를 사이에 두고 다툼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줄리는 태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스스로 버린 자식이다.
제 인생을 위해서라도 얼씨구나 하고 그녀에게 줄리를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집으로 찾아온 게 두 번째.
그리고 앞으론 더 자주 찾아올 사람처럼 보였다.
더 무서운 건 그가 줄리를 단순히 보러온 게 아니라 데리고 가려는 액션을 취했다는 것.
지연은 두 눈을 꼭 감았다.
‘뭔가를 해야 할 타임이다.’
그게 무엇인지 지금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지만 확실한 건,
어서 빨리 이 혼돈에서 벗어나 줄리를 그에게서 해방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어떻게든 이 아이를 지켜야 해.’
육탄전의 후유증으로 몸은 쑤셔왔지만 줄리를 품은 심장은 더욱 힘차게 뛰고 있었다.
*
태규와 애런은 애런이 묵는 호텔의 라운지 바에 자리를 잡았다.
“아깐 고마워. 끼어들지 않아줘서.”
애런이 완전히 자기편이 됐다고 확신한 태규는 기쁨에 차 고급 꼬냑을 스트레이트 잔으로 들이켰다.
그런데 막상 애런은 태규가 뭐라고 떠들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딱 한 가지 의문만이 가득 차 있다.
‘나는 왜 태규가 줄리를 때리려고 하는 순간 마취제를 맞은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애런이 제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태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줄리 말이야, 예전엔 내 말에 꼼짝도 못 하더니 지연이랑 살면서 간덩이가 부었나 봐. 감히 아빠가 가자는데 반항을 해?”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줄리 그건 어린 게 보통내기가 아니라 세게 몇 번 맞아야 그담부터 순해지거든. 그런데 하필 그때 지연이가 들어와서…….”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연이가 그 정도로 줄리를 사랑하는 줄은 몰랐네. 번개처럼 몸 날려서 줄리 대신 내 손바닥을 맞던데? 친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데 딱 한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위대한 엄마의 사랑이야, 그렇지? 큭큭.”
“!”
위대한 엄마의 사랑……?
자식을 때리는 사람을 몸으로 막아내는……?
순간 애런의 몸에 손가락 혈관까지 찌릿하게 만드는 전율이 흘렀다.
그거였군.
애런은 이제 알게 됐다.
태규가 줄리에게 윽박지르고 작은 그녀를 때리려 무기 같은 주먹을 올렸을 때,
그가 왜 그 순간 움직일 수 없었는지.
머릿속에 담고 있던 어떤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자신의 생부가 자신을 때리려 하고 로즈가 그걸 막는.
너무도 어릴 적 일이라 기억의 파편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태규가 줄리를 때리려 하고 지연이 대신 맞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의식에는 없지만 무의식의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그 흔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움직일 수 없었어. 내가 그 줄리고 줄리가 바로 나였으니까.’
스스로 줄리로 빙의되며 줄리처럼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는 줄리가 돼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친부라는 존재가 얼마나 끔찍했을지, 로즈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애런은 아직까지도 대단한 무용담을 얘기하듯 떠들고 있는 태규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보인다.
악마라는 존재가.
그 악마에게 애런은 한 가지만 더 확인하고 싶었다.
“니가 줄리 때리는 걸, 지연 씨가 원래 알고 있었니?”
태규가 재밌다는 듯 깔깔 웃었다.
“정말로 희한한 게 뭔 줄 알아? 줄리는 아주 꼬맹이었을 때부터 절대 그 얘기를 남에게 하지 않아. 특히 지연이한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보통의 아이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훨씬 더 언어 감각이 발달된 줄리가 왜 그런 폭로를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줄리의 입을 막은 거야? 애들은 거짓말을 안 하잖아.”
역시 태규답게 비열한 대답이 나왔다.
“미국은 아동 폭력에 더 엄격하니까 무조건 때린 부모와 아이를 격리시키거든. 그래서 내가 협박한 것도 있지. 사람들이 알면 아빠 감옥 간다고. 그럼 너 고아원 간다고.”
“자기를 때리는 아빠가 감옥에 간다면 어린 마음엔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현실을 알려줬지. 날 감옥에 가게 하거나 지연이한테 말하면 평생 지연이 못 만나게 한다고. 줄리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그거니까.”
“…….”
이보다 더 가슴 아픈 협박이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볼모로 여섯 살 아이의 입을 막았다니.
그런데 그 순간 애런의 뒤죽박죽이던 머리가 폭풍 후 맑게 갠 하늘처럼 깨끗해졌다.
나쁜 피를 다 쏟아내고 맑은 피가 돋는 것처럼 개운했다.
그러면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만 있던 그의 갈등들에 명확한 이정표가 세워졌다.
‘그래, 난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버렸어.’
그는 태규가 따라준 스트레이트 꼬냑을 들며 그를 향해 건배했다.
“마시자, 우리의 미래를 위해.”
태규도 웃어주는 동지를 향해 잔을 들었다.
“화려한 미래를 위하여!”
애런은 스트레이트 잔을 입안으로 털어내며 혼자만의 건배사를 가슴에 새겼다.
‘혼돈은 끝났다.’
*
수현은 기사가 모는 차 뒷좌석에서 양손의 검지를 구부려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조금 전 금화댁에게서 전화를 받은 후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문태규는 그렇다 치고 애런은 왜 그랬을까?’
분명 줄리가 말했었다.
‘애런 아저씨가 아빠를 내쫓아줬어요.’
그녀의 눈동자엔 애런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가득했었다.
오히려 수현이 섭섭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런데 그랬던 애런이 태규가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려는 순간에 보고만 있었다니.
게다가 아무런 해명도 없이 태규를 따라 가버렸다니.
이제껏 수현은 애런이 저지른 작고 큰 사고들에 대해 엄마를 대신해 해결을 해줬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그의 죄를 덮어주고 두둔했던 건 아니다.
그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나름의 상황이 있었고 최소한의 정의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다.
그는 태규와 주먹다짐을 하고서라고 줄리를 지켰어야 했다.
‘역시 위조 유언장 때문인가?’
그걸 활용하든 아니든 어쨌든 태규에게 약점을 잡혔고 동시에 그와 한 편이 된 거니까.
생각 같아선 태규와 애런을 찾아가 주먹이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그는 일단 로버트의 조언을 듣기로 했다.
“앞으론 조금이라도 상대방이 약점으로 잡을 만한 일을 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법의 사각지대 또는 허점을 잘 이용할 수 있는 변호사입니다. 따라서 수현 도련님이나 송지연 씨가 하는 행동은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것들은 모두 합법적이어야 합니다.”
수행하는 기분으로 꾹 참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일단은 지연과 줄리의 상태를 봐야 하기도 하고.
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줄리와 지연을 향해 그 자식이 들어 올렸던 주먹을 생각하면 머리 위로 피가 끓어올라 폭발할 것 같다.
“개새끼!”
그는 차를 돌려 태규에게 돌진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작은 불 하나 켜져 있지 않고 적막했다.
평소 같으면 그저 지연과 줄리가 일찍 잠에 들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오늘은 다른 생각이 든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마을로 들어온 느낌이랄까?
스산하고 싸늘한 공기마저 감돌았다.
수현은 발자국 소리마저 조심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제 방을 지나쳐 먼저 지연과 줄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지연과 줄리는 잠에 빠져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 있는 작은 등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지연이 잠자리에 들려고 했던 건 아닌 것 같다.
줄리를 재우며 함께 잠이 든 것.
살금살금 다가가 두 사람이 누워있는 침대 끝에 살짝 몸을 내려놓았다.
아이는 아인가 보다.
엄마 옷 속에 손을 넣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자고 있다.
반면 줄리를 한 손으로 꼭 감싸고 있는 지연의 얼굴은 잠을 자면서도 슬퍼 보였다.
“울었었나?”
부어오른 눈두덩이, 까칠한 피부, 괴로운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구겨진 미간.
수현은 흐트러진 지연의 머리카락을 손을 뻗어 아주 조심스럽게 뒤로 넘겼다. 그런데,
“!”
머리카락에 가렸던 그녀의 귀가 그의 눈동자에 충격적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하얗고 작았던 귀가 톡 건드리면 터질 것같이 탱탱 부어 있는 것.
“뭐야! 맞은 거야?”
금화댁은 지연이 태규가 때리는 걸 막았다고만 했지 맞았다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뿐 이렇게 흔적이 남을 정도로 맞았었다.
“미친 새끼!”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엉덩이를 번쩍 들었다가…….
“휴…….”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된다는 로버트의 말이 떠올랐기에.
그런데…… 그런데……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도대체 태규란 놈을 망가뜨릴 방법이 없다.
경찰에 신고하자니 경미한 폭행죄밖에 안 된다.
오히려 그의 성질을 자극해 지연과 줄리만 곤란해질 수 있다.
아이를 볼모로 잡고 있다는 건 이렇듯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버린다.
경찰이 극구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납치범들에게 수억을 주며 협박에 응하는 부모 심정이 이해가 된달까?
‘과연 지금 내가 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뭐지?’
답답하고 괴롭고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처럼 어지럽다.
하지만 수현은 스스로를 믿는다.
그는 절대 위기에 굴복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정면 승부하고 그리고…… 이겼다.
수현은 이번에도 자기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위기가 오면 더욱 강해지고 영민해지는 진수현, 자신을.
수현은 조심스럽게 지연의 옆에 모로 누웠다.
그리고 긴 팔을 뻗어 줄리를 감고 있는 지연의 팔 위에 자신의 팔을 얹었다.
그의 팔 안에 두 사람의 몸이 쏙 들어온다.
그냥 이렇게라도 한 번 안아주고 싶었다.
두 사람을 품으니 그들의 체온이 심장으로 전해지며 한 몸이 된 것 같다.
수현은 흐르려는 눈물을 꼭 참아내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제 마음에 피눈물로 맹세했다.
‘반드시 지켜줄게. 내 팔 안에서, 내 품 안에서.’
세 사람의 숨결이 작은 공간에서 뒤섞였다.
마치 한 사람의 숨처럼.
.
.
.
잠시 후 수현의 뒷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수현은 그들을 안고 있던 손을 접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확인해보니 로버트였다.
“혹시!”
수현은 로버트에게 미국에 있는 사설탐정을 시켜 줄리가 태규와 미국에서 살았을 때 혹시 아이를 학대하거나 방치한 기록이 없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태규에게서 줄리를 데리고 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 전화는 아마도 그 결과를 알리는 전화.
수현은 지연의 방을 빠져나와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였다.
“미국에 있는 탐정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로버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수현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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