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59화 (59/77)

제59화. 악의 침공

2018.08.25.

애런이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를 받기 한 시간 전,

태규는 민희와 전쟁에 가까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가, 이 새끼야!”

“그래, 나도 나가려고 했다. 나도 너 같은 여자 필요 없거든!”

속초 단합회 사건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민희는 태규에게 자기 인생에서 꺼져버리라고 막말을 했다.

태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됐다.

‘나쁜 년, 지 때문에 내가 지연이도 버리고 줄리도 버리고 변호사 사무실도 접고 왔는데.’

그런데 그보다 억울한 사람이 민희였을까?

찌르면 파란 피가 나올 것 같은 독종 민희가 울기 시작했다.

“너랑 송지연의 악연 때문에 우리 회사가 망하게 됐다고, 지금!”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울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강 회장은 얼마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미국의 아주 유명한 토털 패션 회사 줄리아나의 후계자로부터 온 전화였다.

‘송지연이란 여자를 챙겨주십시오.’

강 회장은 송지연과 그가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 오드리 화장품을 성공시킨 것과 맞먹는 아주 큰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감히 상대도 못할 거대 회사의 후계자가 먼저 전화를 했으니.

‘이 인연으로 줄리아나랑 오드리 화장품이 회사대 회사로 인연을 맺는다면 우리 오드리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가 시키는 대로 민희의 만행으로부터 송지연을 구해주었다.

비록 단합회에서 송지연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꼬리 자르기처럼 태규만 잘라내면 되는 일이기에.

그는 당장 태규를 회사에서 쫒아내고 그 빌미로 민희에게도 그 미친놈과 헤어지라고 말했다.

‘문태규를 잘랐다고 진수현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 업계에 아주 좋은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진수현이 미국으로 돌아가 줄리아나의 책임경영자로 등극했고,

줄리아나 화장품으로 아시아 쪽을 공략하기 위해 한국에서 함께 협력할 회사를 고르고 있다는.

‘잘됐군. 이제 나에게 은혜를 갚으러 올 거야.’

그는 당연히 수현이 오드리 화장품을 선택할 거라 자부했다.

그래서 줄리아나 회사와 동등하게 MOU를 체결할 수 있도록 회사의 체급을 키우기로 했다.

거의 모든 재산을 걸고 무리한 확장을 시작했는데…….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날아 들어왔다.

줄리아나가 오드리 화장품과 최대 경쟁 회사인 ‘K 코스메틱’과 전격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오드리 화장품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강 회장의 설레발만 믿고 그의 회사에 돈을 넣었던 투자사들이 원금 회수를 요구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오드리 화장품의 회생은 불가능하다는 뉴스까지 터졌다.

민희는 이성을 잃은 여자처럼 태규에게 발악했다.

“우리 아빠 지금 병원에 드러누웠어. 어떡할 거야, 너!”

그녀의 악다구니를 듣는 순간 태규의 머리엔 딱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죽이고 싶다, 진수현.’

모든 공분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민희도 계속해서 자신을 좋아해줬을지도 모르고,

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연도 그에게 다시 올 수 있었을 테니까.

“이게 다 진수현 그 새끼 때문이야!”

그는 지금 겪고 있는 이 불행의 근원이 수현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고심해보니 그는 그 패를 이미 쥐고 있었다.

‘유언장!’

애런이 유언장만 행사하면 그는 거지가 된다!

암울한 그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그는 일단 앞으로 잘 될 확률이 1%도 없는 민희와 끝장을 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드리 화장품이 나락의 길을 걷는다면 그도 그녀 옆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 집 나갈 거야. 이젠 나도 너 같은 미친년이랑 끝이야!”

태규는 트렁크 하나도 채우지 못할 만큼 옷가지 몇 개만 들고 민희의 집을 나왔다.

허름한 모텔에 짐을 넣고 삐거덕거리는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이대로 그냥 애런의 결정만 기다려?’

그런데 그렇게 한가하게만 있지는 못하겠다.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오장 육부가 뒤집어질 것 같으니까.

그는 수현과 지연을 괴롭히기로 했다.

그들을 괴롭히는 방법은 딱 하나, 줄리에게 가는 것.

그런데 줄리에게 가는 것이 꼭 그들을 괴롭힌다는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진심으로 지연을 되찾고 싶다.

제가 버린 여자 옆에 다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참을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진수현이랑 잘되는 꼴은 내가 못 보지.”

지연을 찾는 방법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줄리만 옆에 두고 있으면 지연은 온다.

“지연인 줄리 없이 살 수 없거든.”

그래서 그는 오늘 또 다시 지연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지연은 없고 그날과 똑같이 어떤 늙은 아줌마와 줄리만 있다.

그를 보자마자 줄리가 마루 한 편으로 도망가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저예요 줄리. 저한테 와주시면 안 돼요?”

그는 당연히 줄리가 수현에게 전화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주먹을 하늘 위로 올리며 쾌재를 불렀다.

‘진수현, 어서 와라. 줄리를 앞에 두고 지연이 누굴 택하나 한 번 보자.’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소파에 앉았다.

편히 앉아서 수현이 달려오기를 기다리면서.

*

애런은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아주 다급하고 위태로운 음성으로 울먹거렸다.

“아저씨, 저 줄리예요.”

뭐? 줄리?

“아, 줄리? 그래, 무슨 일이야?”

그녀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눈물을 가득 머금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와주시면 안 돼요?”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을 들어봤을 땐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순간적인 판단으론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에게 달려가는 게 나을 듯.

“줄리야, 지금 내가 갈게. 기다려.”

겉옷도 집지 않고 그는 급하게 호텔 룸을 나섰다.

*

수현은 오늘의 일정을 타이트하게 몰아두고 일부러 두 시간 정도의 공백을 두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어서 오세요, 로버트.”

그는 로즈의 병원이 아닌 한국에 있는 줄리아나 회사로 로버트를 불렀다.

바로 지연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다.

지연은 오늘 오전엔 편의점 일을 보고 오후엔 이력서를 낸 갤러리로 면접을 간다고 했다.

혼자서 뭐든 일구려고 애쓰는 모습, 또 줄리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짠하고 안쓰럽고 가끔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겉으로는 그냥 그녀를 두고만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수현은 실제로는 늘 만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조금의 시간 낭비도 하지 않고 바로 도울 수 있도록.

그리고 이제 조금씩 그가 움직여줄 타임이 왔다고 판단했다.

30년 이상 몬테규가의 집사로 있는 로버트는 이미 수현이 그를 부른 이유를 알고 있다.

“드디어 지연이라는 아가씨에게 문제가 생긴 건가요?”

로버트를 맞는 수현의 얼굴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아직 문제가 생긴 건 아닌데 이제 곧 생길 것 같아. 아니, 문태규 쪽에서 먼저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먼저 움직여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아이의 일을 너무 오래 끌 수는 없으니까.”

“정확히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될까요?”

“분명 법적 문제가 생길 거야. 그걸 미리 알아보고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알아봐달라고 한 것들은 알아봤어?”

그는 수현이 부탁했던 자료들을 꺼냈다.

“줄리아나 문이라는 아이의 친권, 양육권은 문태규라는 사람이 단독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는 아마 아이만 놓고 떠난 것 같습니다. 6년 동안 서로 연락을 취한 기록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럼 지금 지연이는 어떤 자격으로 줄리를 데리고 있는 거지?”

“임시적인 법적 보호자의 자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이에 비해 똑똑한 아가씨예요. 미국에서 문태규가 아이를 맡기고 사라졌을 때 무작정 데리고 있지 않고 아이 아빠가 아이를 맡겼다는 증거 등을 가지고 법적 보호자의 자격은 받은 것 같습니다.”

법적 보호자는 부모가 위임해준 아이를 맡을 수 있는 자격이었다.

지연은 갖은 돈을 모두 투자해 변호사를 사서 법적인 자격을 받아두었다.

“그 자격이 아이 아빠와 법적으로 붙을 수 있을 정도로 의미가 있는 건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한 수현의 질문에 로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말 그대로 임시입니다. 친부모가 나타났을 땐 자동으로 사라지는. 그 어떤 자격도 친부모를 대신할 순 없죠.”

“하지만 줄리가 아빠보다는 지연과 살고 싶어해도?”

“송지연 씨는 법적으로 볼 때 줄리 양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입니다. 여섯 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버리고 남이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판결할 판사는 없습니다.”

절망적인 말이었다.

법정에서 붙어볼 수도 없을 만큼 지연이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라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현재로선 별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 송지연 씨한테 보냈다는 문자에도 줄리 양을 잠깐 맡긴다고 돼 있지 계속 키워달란 말은 없으니까요.”

수현도 태규가 지연을 떠나며 그녀에게 보냈다는 그 문자를 본 적이 있다.

-곧 데리러 올게. 잠시만 부탁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연에게 포기하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태규를 만나 줄리를 포기해 달라고 설득을 해야 하나?

그런데 지연의 줄리에 대한 사랑을 운운하며 설득을 해봤자 태규가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줄리의 행복을 우선시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결국 돈?’

그가 돈을 받고 깨끗이 물러난다면 그깟 돈, 얼마든지 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고 그런 물질적인 흥정을 해야 할까?

게다가 문태규는 그가 만나본 인간 중 두 번째도 서러울 만큼 악질 중 악질, 최악 중 최악이다.

한 번 흥정으로 그를 설득하기 시작하면 일생을 끌려 다녀야 한다.

수현은 절대 그런 상황을 만드는 남자가 아니다.

“휴…….”

한숨만 나온다. 정령 그가 지연을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건가?

회색 짙은 그의 표정을 보고 로버트가 한 가지 희망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문태규라는 사람이 아빠의 자격이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를 방치한 증거, 폭력을 행사한 증거, 또는 아이를 전혀 키울 수 없는 환경에 두었다는 증거 등……”

“그 조사를 해줄 수 있나? 그가 그런 적이 있는지 말이야.”

“줄리 양이 문태규와 함께 살았던 곳은 미국이니 사설탐정을 풀어 미국을 조사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조사도 큰 기대가 되진 않는다.

지연에게 태규가 줄리를 사랑해주지 않았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학대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설사 그런 적이 있다고 해도 결코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바라야 하나?”

줄리가 그런 고통을 겪었었다는 거잖아?

상상만 해도 심장에 마취약이라도 놓은 것처럼 묵직하게 조여 온다.

그래도 이게 마지막 희망이라니 바라야 하는 것도 같고…….

황당하고도 가슴 쓰라린 갈등이었다.

제발 학대받은 적이 없길 바라면서도 또 그런 적이 있길 바라는…….

갑자기 그가 가진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패션 업계를 좌지우지할 회사의 책임경영자면 뭐할까?

미국 최고의 변호사 군단을 가지고 있으면 뭐할까?

아이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생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의 소유를 주장하는 비열한 놈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앞으로 닥칠 지연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가 마르는 것 같다.

수현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에 휩싸여버렸다.

바로 자괴감이었다.

*

줄리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애런은 지연의 집으로 달려갔다.

“줄리야!”

큰소리로 줄리를 부르며 들어갔는데 황당하게 그를 맞은 사람은 태규였다.

“뭐야, 올 사람이 너였어?”

태규도 애런이 온 게 황당한 눈빛이었다.

줄리가 전화해서 와달라고 한 사람이 수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애런이었다니.

금화댁과 줄리는 태규를 물리쳐줄 구세주를 맞듯 애런을 반겼다.

줄리는 달려가 애런의 품에 안겼다.

“아저씨, 그때처럼 저기 저 아빠 좀 쫓아내 주세요. 저 너무 무서워요.”

옆에 있는 금화댁도 난감한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저번에 모르고 문을 열어줘서 혼이 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앞으론 안 열어주려고 했는데 제가 들어오면서 문을 잘 안 닫았는지 또 와서 저러네요. 그런데 아이 아빠라 그러니 신고할 수도 없고.”

그런데 정작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줄리야, 너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 아저씨 아빠 친구야. 우리 엄청 친해. 비밀을 공유할 정도로.”

태규의 비웃음에 줄리가 커다란 눈을 부릅떴다.

“거짓말! 이 아저씨 아빠 친구 아니야! 수현 아빠 동생이야!”

순간 태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분노가 스며들었다.

“수현 아빠? 야! 누가 아빠야! 누가 네 아빠야!”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태규의 행동에 줄리는 애런을 붙든 작은 두 손에 더 꽉 힘을 주었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다리 사이에 대고 이렇게 읍소하듯 말을 한다.

하지만 애런은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저번에 왔을 땐 애런에게도 태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어쨌든 자신이 좋아했던 지연을 버린 남자였고 아무리 밉지만 형과도 앙숙인 남자였으니.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태규의 말마따나 그는 지금 애런과 ‘위조 유언장’이라는 엄청난 사기 행각을 함께 벌이고 있는 동지다.

그 유언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함께 범죄를 모의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둘은 함께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때처럼 애런을 내쫓아?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허공으로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태규가 그와 줄리를 향해 다가왔다.

“줄리 너 이리 안 와?”

그러더니 줄리의 한 손을 잡아 채 애런의 품에서 그녀를 끌어냈다.

“이리 와. 아빠가 여기 있는데 누구한테 가는 거야?”

성인 남자의 강한 힘에 연약한 여섯 살짜리의 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싫어! 싫어!”

그런데 그 순간에도 줄리는 남은 한 손을 뻗어 애런의 바지를 붙들었다.

“아저씨! 아저씨!”

절박한 비명까지 지르며.

애런의 머리와 가슴이 그에게 소리쳤다.

‘어서 잡아줘! 어서 줄리를 잡아줘!’

그런데 머리와 가슴과는 반대로 그의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바닥에 박힌 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아무리 태규랑 동지를 맺은 사이지만 이렇게 가만있을 필요까진 없는데.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그를 동여맨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애런이 아무것도 하지 않자 태규는 더 힘을 받았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듯 절박하게 애런의 바지를 쥐고 있는 줄리의 남은 한 손마저 잡아챘다.

그리고 금화댁에게 보란 듯이 소릴 질렀다.

“진수현이랑 송지연 오면 전해. 내 아이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불만 있으면 신고해! 누가 잡혀갈지는 두고 보자고!”

듣고 있던 금화댁도 아무 말도 못 하며 벌벌 떨었다.

그녀 생각에도 태규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줄리가 태규를 향해 소리 질렀다.

“싫어! 싫어! 나 여기 있을 거야. 엄마랑 수현 아빠랑 살 거야!”

“이게 진짜! 수현 아빠란 말 하지 말랬지!”

태규가 죽일 듯 줄리를 노려보며 발버둥치는 그녀를 짐짝 들 듯 번쩍 올렸다.

그리고 정말로 데리고 나갈 것처럼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줄리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애런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살려줘! 살려줘! 아저씨 살려줘!”

비명이 끝남과 동시에 태규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의 팔을 줄리가 있는 힘을 다해 물어버린 것.

쿵-

줄리가 내팽개쳐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물린 자신의 팔을 쥐느라 하늘 높이 들고 있던 줄리를 그대로 놓쳐버렸다.

태규는 바닥에 떨어진 그녀를 걱정하기보단 그녀에게 물렸다는 사실에 머리가 돌아버렸다.

“이게 진짜!”

거친 음성으로 소리치더니 오른 손바닥을 하늘 높이 올렸다.

스파이크를 하듯 그대로 그 손을 내리칠 기세!

달려가서 그의 손을 잡아야 하는데, 잡아야 하는데,

하지만 애런의 머리는 이미 패닉 상태.

‘어떡하지? 어떡하지?’

돌덩이처럼 굳어버려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놀란 금화댁도 그대로 얼어보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꺅!”

할 수 있는 건 외마디 비명뿐.

모두가 주저하는 사이 태규의 커다란 손바닥은 하늘에서 호를 그리며 그대로 줄리를 향했다.

짝-

손바닥과 사람의 살갗이 큰 충격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으악!”

비명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나가떨어졌다.

순간 빨간 지붕 집 마루에 정적이 흘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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