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고된 밤을 보내고 맞는 아침
2018.08.22.
어젯밤 또다시 천국을 맛본 수현과 지연.
지연은 넓고 단단한 수현의 품안에서 잠들었다가 줄리가 깨어나기 전 얼른 방으로 갔다.
마치 밤새 줄리 옆에서 잠이 들었던 것처럼.
엄마가 자기와 함께 잤다고 생각한 줄리는 여느 때처럼 엄마 옆에서 행복한 아침을 맞이했다.
그런데 뭔가가 좀 이상했다.
평소엔 눈을 뜨면 엄마가 자신을 너무너무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줄리보다 한 발 먼저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햇살보다 먼저 마주치는 것이 엄마의 꿀 떨어지는 눈동자였다.
“피유~~~~~”
그런데 오늘은 살짝 코까지 골며 엄마가 자고 있다.
“엄마?”
어깨를 흔들어 깨워도 시체처럼 뻗어 자는 그녀를 보고 줄리는 작은 머리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엄마가 어제 뭘 했기에 이렇게 피곤하게 자지?’
여섯 살 어린이는 사랑의 행각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모를 수밖에.
줄리는 다시 한 번 엄마의 어깨를 흔들려다…… 생각을 바꾸었다.
대신 다른 계획을 머리에 떠올렸다.
씨익, 도톰한 입술에 어린 악마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 역시 조심스럽게 수현의 방으로 들어갔다.
“드르렁~”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수현도 코를 골며 곤히 자고 있다.
‘미국에서 와서 피곤한가 보다.’
엄마와는 달리 수현의 늦잠은 이해가 됐다.
줄리는 수현의 이불을 살그머니 들어 안으로 쏙 몸을 넣었다.
‘좋다, 아빠 냄새.’
아빠의 사랑에 목메었던 그녀는 조금 더 그의 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헤헤, 따뜻해, 따뜻해.’
그런데 아빠의 품이란 원래 엄마의 품과 비슷한가 보다.
엄마에게서만 맡을 수 있었던 고유의 향기가 아빠 품에서도 난다.
‘히히, 어쨌든 좋다, 좋아, 아빠 품.’
수현의 가슴에 온몸을 밀착해 비비적거렸다.
그녀의 작은 몸부림에 수현의 잠이 깼다.
하지만 눈은 뜨지 않은 채 제 가슴에 들어온 사랑하는 여인의 보드라운 살결을 음미했다.
“흠, 내 사랑.”
수현이 그녀의 머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수현 아빠가 안아주니 줄리의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
‘헤헤, 수현 아빠는 내가 온 게 좋은가 보다.’
수현의 환영 같은 몸짓에 기분이 좋아진 줄리는 그녀의 통통한 볼을 그의 가슴에 비볐다.
그는 간지럽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하, 뭐야, 이거 무슨 신호야?”
그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정수리를 문질렀다.
“하룻밤으로 부족했던 거야? 나의 사랑이?”
‘…….’
줄리는 수현이 하는 소리가 뭔 소린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꼼지락거릴수록 그가 더 좋아한다는 것.
그래서 수현 아빠의 사랑을 받기 위해 조금 더 열심히 비벼댔다.
역시나 그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는지 조금 전보다 더 다정한 소리로 그녀의 정수리에 속삭였다.
“알았어, 이 앙큼한 고양이.”
그러면서 이불 속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뭐지? 앙큼한 고양이란 말은?’
뭔가 이상함을 느낀 줄리가 아저씨, 하고 수현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수현이 감싼 그녀의 얼굴을 위로 올리더니 자신의 얼굴을 뽀뽀를 할 것처럼 가까이 가져왔다.
줄리는 순간적으로 얼굴에 꾹 힘을 주었다.
아무리 수현 아빠를 좋아한다지만 지금 마우스 to 마우스로 뽀뽀까지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수현의 얼굴이 서로 코가 닿을 정도로 붙어버렸다.
그는 막 뽀뽀를 하려는 듯 입술을 내밀더니…….
“으악!”
줄리의 얼굴을 밀어버리고 비명을 질렀다.
“너, 너 누구야!”
그러곤 봉변이라도 당한 여자처럼 이불을 끌어 가슴을 가리고 침대 끝으로 도망갔다.
가만있다가 얼굴을 밀린 줄리도 본능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저씨…….”
두 사람은 멀건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줄리는 이 세상이 무슨 세상인지 모르는 막 태어난 송아지 같은 눈망울로,
수현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혼이 나가서.
그는 침대를 침입한 사랑스러운 여인이 줄리라는 걸 확인했지만 아직 놀란 심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어…… 어…….”
바보처럼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만 내고 있는데,
삐죽삐죽.
아기새 같은 그녀의 입술이 실룩실룩 움직인다.
그러더니,
“으앙~~~~~~~~~”
얼굴의 반만큼 입이 벌어지더니 목젖이 다 보이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으앙~~~~~~”
그녀의 울음소리에 수현의 나갔던 혼이 다시 컴백했다.
수현은 엉덩이를 주섬주섬 끌어 다시 줄리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서러움에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어, 어, 줄리야. 아니야, 줄리야.”
달래보려 했지만 놀란 줄리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진정될 린 없었다.
“아저씨가 나 무서워해. 엉엉~~~~~~”
“아, 줄리야, 그게 아니고…….”
몸을 쓴 것도 아닌데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온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어제저녁에 이어 줄리를 두 번째 울리고 있다.
수현은 자기가 잘못한 건 알지만 도대체 뭐라고 해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니가 엄만 줄 알았단 말이야!’
이렇게 얘기할 순 없잖아!
“그게 있잖아, 그게 있잖아…….”
일단 운만 띄워놓고 어떻게 해서든 변명거리를 생각하려고 모든 에너지를 다 머리로 보내고 있는데,
문이 쾅 열리며 지연이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소리치자 줄리가 수현의 손길을 밀어내고 그녀의 품으로 돌진했다.
“왜? 줄리야, 왜?”
그녀가 묻자 줄리가 눈물과 콧물 그리고 땀까지 체액이란 체액은 모두 쏟아내며 서럽게 얘기했다.
“아저씨가 나 안아주다가 갑자기 내 얼굴을 보고 도망갔어. 내가 무서운가 봐.”
지연은 처음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
그러면서 수현을 쳐다보는데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젓고 있다.
‘몰라, 난 몰라.’
줄리가 다시 한 번 상황을 설명했다.
“처음엔 사랑이라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앙큼한 고양이라 그러더니 갑자기 나한테 뽀뽀하려다 내 얼굴 보고 나 밀쳤어.”
“…….”
이제야 지연이 알아들었다.
곱지 않은 눈동자가 수현을 향했다.
줄리를 품에 안은 채로 그녀가 복화술을 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뭐예요, 진짜! 난 줄 알았어요?’
수현은 두 손을 이용해 수화를 하듯 설명했다.
‘어젯밤 내 옆에서 지연이가 잤었잖아. 그러니까 지연인 줄 알고…….’
‘그래도 그렇지 확인도 안 하고 그러면 어떡해요!’
‘침대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당연히 지연인 줄 알았지, 난 억울해! 억울해!’
얘기가 슬슬 이상하게 돌아갔다.
‘침대 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안아요?’
‘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 집에 여자라곤 지연이밖에 더 있어?’
두 사람의 눈빛과 입술을 이용한 싸움이 계속되자 지연의 품에 묻었던 줄리의 머리가 올라왔다.
“두 사람 뭐해? 내 머리 뒤에서?”
지연이 다시 급하게 시선을 줄리에게 보냈다.
“아저씨가 줄리를 곰돌이로 알았다가 곰돌이가 아니라 줄리라서 놀랐나 봐.”
줄리의 까맣고 말간 눈동자가 느릿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저씨 곰돌이 안고 자?”
다행히 곰돌이가 침대 발치에 아직 존재하고 있었다.
수현이 잽싸게 곰돌이를 품에 안았다.
“어, 나 곰돌이 없음 잠 못 자.”
저 여자 잔머리 잘 굴리는데? 생각하면서.
줄리는 그와 곰돌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엄마의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응…… 내가 곰돌인 줄 알았다고? 그런데 아니라서 놀랐고?”
그녀가 속는 거 같아 지연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앞으론 그렇게 몰래 아저씨 침대로 들어가지 마. 알았지? 그거 되게 사람 놀래는 일이야.”
줄리가 작게 고갯짓했다.
“응…….”
그러더니 뒤를 돌아 두 손을 곱게 배꼽에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상황이 종료됐다.
역시, 아이의 눈물을 멈출 수 있는 건 엄마였다.
.
.
.
“아침 식사 하세요.”
평소보다 지연이 더 낭랑한 목소리로 식사를 알렸다.
하지만 줄리는 그다지 밝지 않은 얼굴로 부엌으로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게 차렸어!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아침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그녀의 기분이 아직 유쾌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떠나서도 배가 고플 만은 했다.
지연이 늦잠을 잤기도 하고 그녀 말마따나 평소보다 밥 차리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데 식탁 위에 차려진 아침밥을 보는 순간 툭 튀어나왔던 줄리의 입술이 세로로 길게 벌어졌다.
“엄마, 오늘 누구 생일이야?”
미역국에 계란말이, 소고기 야채 말이, 배추겉절이, 달걀프라이, 고등어구이까지,
저녁상도 아니고 아침상이라고 하기엔 정말로 풍성한 식탁이었다.
수현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대박!”
그는 감탄을 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한 손엔 숟가락, 한 손엔 젓가락을 들고 아이처럼 테이블에 바짝 몸을 붙였다.
“우와~. 너무 맛있겠다.”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지연의 얼굴에도 만족스런 함박웃음이 걸렸다.
“자기도 배고팠구나. 그래요, 우리 어서 먹어요.”
지연이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밥도 크게 한 수저, 반찬도 큼직하게 집은 수현이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시적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혀끝에 천국이 찾아온 것 같아. 이런 밥 먹어본지 정말 오래됐어. 벌써 힘이 다 나네.”
지연이 그의 앞으로 반찬을 밀어주었다.
“미국에서 한식 잘 못 먹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이것저것 만들어봤어요.”
수현은 먹으랴 대답하랴 눈과 입, 두 손이 모두 바빴다.
“고마워. 안 그래도 나 시차도 바뀌고 어젯밤 긴장도 하고 아침에 놀라서 기운도 쭉 빠지고 해서 기력이 없었는데 이거 먹으면 원상복귀 될 것 같아.”
“많이 드세요, 자기.”
수현과 지연은 아침상 하나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그리는 그림을 매의 눈으로 주시하는 한 관객이 있었다.
‘……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어린이용 포크를 든 줄리의 눈동자가 수현과 지연 사이를 이리저리 오갔다.
어릴 적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맡겨졌던 줄리는 보통의 여섯 살 아이들보다 눈치가 빠르다.
그녀가 보기엔 두 달 전 그녀의 눈에 보였던 수현과 지연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생긴 것 같은?
여섯 살 아이의 머리에서 ‘관계의 발전’이란 용어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확실히 달라진 게 있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훨씬 더 친해진 느낌?
‘왜 우리 엄만 아저씨를 자기야, 라고 부르지? 분명 수현 씨라고 했었는데.’
수현의 태도도 변했다.
엄마를 좋아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수현이 지연을 대할 때 줄리가 보기에도 좀 시크하고 무뚝뚝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보 같잖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
보통 엄마는 아침 반찬으로 국 하나에 프라이, 또는 국 하나에 스크램블 정도를 내놓았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지연은 일을 하러 나갔기 때문에 저녁은 맛난 걸 차려주더라도 아침은 늘 간단히 주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상은 그녀의 여섯 살 인생 중 최고로 풍성한 아침이었다.
‘오늘 내 생일도 아닌데…….’
모든 게 다 의문스러웠다.
순간 영리한 그녀의 머리에 금화댁 할머니와 같이 TV를 보다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엄마…….”
수현의 밥그릇에 한 번, 줄리의 밥그릇에 한 번 고등어 살을 발라 놓아주던 지연이 그녀를 보았다.
“왜, 줄리야?”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엄마의 입술이 광대 쪽으로 승천한 채 고정되었다.
“금화댁 할머니랑 같이 본 드라마에서 그러는데 엄마들은 아빠들이 예쁠 때 아침상을 맛있게 차린대. 월급 받아왔거나 아니면 밤에 기분 좋게 해줬거나.”
지연의 입술이 점점 광대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얘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그런데……?”
줄리가 범인의 의중을 알아보려는 형사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빠가 어젯밤 뭐 잘해준 거 있어?”
“쿨럭, 쿨럭!”
수현이 밥풀을 이리저리 튀기며 기침을 했다.
막 밥 한 수저를 넘기려다 줄리의 소리에 캑! 음식이 기도에서 멈춰버린 것.
지연의 얼굴이 갑자기 눈앞에 있는 케첩처럼 빨개졌다.
“줄리야, 그게 아니고…….”
이번엔 임기응변이 나오지 않았다.
“음…… 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두 손만 허공으로 올려 뱅뱅 돌리는데 구세주처럼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줄리야, 할머니 왔다.”
오늘은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금화댁이 그녀의 집으로 줄리를 보러 온 것.
지연은 벌떡 일어나 금화댁에게 향했다.
“오셨어요?”
인사를 함과 동시에 지연은 금화댁을 끌고 마루 구석으로 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천연덕스러운 금화댁이 눈썹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줄리 엄마 왜? 무슨 일 있어?”
지연은 아주 작은 원망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줌마, 죄송한데 줄리 보실 때 일일드라마 너무 많이 안 보시면 안 될까요? 줄리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이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금화댁은 하루에 한 시간 밖에 안 본다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론 40분만 봐야겠군.
*
수현과 지연은 금화댁과 줄리를 두고 함께 집을 나왔다.
수현은 이제부터 한국을 본거지로 삼아야 하는 줄리아나 화장품의 아시아 공략을 위해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앞으론 더 바빠질 거 같아. 어쩌면 뉴욕에서만큼 얼굴 보기 힘들 수도 있고.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잠은 꼭 집에서 자도록 할게.”
지연은 벌써부터 미안한 얼굴을 하는 그를 다독이고 싶었다.
“제 걱정은 말고 일에만 몰두하세요. 전 줄리랑 제 할 일 하고 있을 테니까.”
서로 떨어져 있으며 생겼던 서로를 향한 불신과 오해가 없어지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하루에 1분을 보든, 아니면 일주일에 한 시간을 보든 이젠 마음 상할 일이 없을 듯.
어차피 두 사람의 보금자리는 같은 빨간 지붕 집이니까.
지연도 수현이 염려하지 않도록 자신의 바쁜 계획을 이야기했다.
“저 요즘 이력서 내고 다녀요. 줄리를 제 딸로 온전히 키우려면 고정된 직장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빠는 편의점을 제 것처럼 말하라고 하지만 그건 제가 싫어요. 유학까지 다녀왔으면 전공을 살려야지.”
그러기 위해 그녀는 편의점에서 일을 하며 연락이 오는 회사에 면접을 다닌다고 했다.
“오늘 면접을 가기로 한 곳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선 꽤 큰 갤러린데 큐레이터로 일할 수 있냐고 해서요. 잘해보고 싶어요.”
수현의 눈엔 너무도 예쁜 여자친구였다.
그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래, 우리 둘 다 힘내고 밤에 보자.”
“네, 그럼 나중에 봐요.”
입으론 헤어짐을 말하지만 수현은 금방이라도 키스를 할 듯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고 있었다.
그녀도 그의 몸에 하체를 밀착한 채 금방이라도 그에게 입술을 내줄 듯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후로도 그들은 한참 후에나 진짜로 헤어질 수 있었다.
낮이고 밤이고, 늘 함께할 시간이 부족한 연인이었다.
*
애런은 어떤 식으로든 이제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가짜 유언장을 찢어버리고 태규를 쳐내느냐,
아니면 수현이 준 도장으로 유언장을 완벽히 마무리하고 이용할 것이냐.
어젯밤부터 성질 급한 태규는 한 시간이 멀다하고 전화를 했다.
‘그 유언장으로 우리 먼저 은행에 가자. 그거면 당장 평생을 쓰고 남을 만한 돈도 대출받을 수 있을걸?’
맞는 말이었다. 그 커다란 유산을 보증하는 유언장만 내밀면 은행이고 투자회사고 돈을 내주지 않을 곳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유언장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었다.
점점 유언장을 폐기하는 쪽으로 마음이 흐른다.
아빠를 죽였다는 엄마의 고백은 충격적이었지만 그 이유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엄마의 그 동안의 냉정함도 혹시나 그가 아빠의 유약함을 닮았을까, 하는 우려에 그를 강하게 키우기 위함이었고.
무엇보다 수현이 그에게 엄마의 도장을 넘겨주었다.
‘형,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내가 이걸 정말 사용하면 어쩌려고.’
수현은 가짜 유언장을 만들어 모든 재산을 가져가려던 자신의 계획을 눈치챘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장을 주며 그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날…… 믿는 거야?’
마음은 이미 유언장을 폐기하는 것으로 기울었는데 태규가 또 그의 맘을 흔들었다.
조금 전 흔들리는 그에게 태규가 문자를 보냈다.
-쓰레기는 모두 똑같은 쓰레기야. 더 좋은 쓰레기란 없어.
맞는 말일까?
‘여기서 내가 형에게 도장을 돌려주고 유언장을 파기한다 해도 난 어차피 쓰레길까?’
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만약 유언장을 파기했는데 형의 맘이 변해서 나한테 한 푼도 주지 않는다면?
또는 내가 형인 척 엄마에게 사인을 받은 걸 형이 엄마에게 이른다면?
그때는 더 이상 엄마와 애런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이 유언장을 행사한다면?
그건 정말로 엄마와 형을 동시에 배신하는 것.
내가 그런 죄를 짓고 살 수 있을까?
갈등의 회오리 속에서 칼끝만 스쳐도 철철 피가 나올 듯 머리의 세포가 예민해졌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 둔 휴대폰이 울렸다.
또 그를 재촉하는 태규의 전활까 싶어 무시하려는데 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혹시나 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아주 다급하고 위태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의 심장이 멈춰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였기에.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