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57화 (57/77)

제57화. 형이 남긴 선물

2018.08.18.

애런이 없는 호텔 룸에서 홀로 위스키를 마시며 수현도 말 할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을 보냈다.

문태규의 전화번호와 함께 끄적거린 애런의 알 수 없는 메모들.

마치 퍼즐을 맞추듯, 아니면 연상 게임을 하듯 그가 나열해놓은 법률, 위조, 디데이 등등의 단어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보았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아 정답을 생각해냈다.

‘위조 유언장을 작성했구나.’

태규와도 잘 연관이 되었다.

그는 미국 변호사, 그것도 뉴욕의 변호사.

법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다.

‘애런, 겨우 생각해낸 사람이 문태규였니?’

그의 어리석음에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애런에게 지연과 줄리를 맡기고 갔었다. 태규로부터 보호해달라고.

그런데 그는 그의 믿음을 저버리고 가장 멀리해야 할 나쁜 남자와 손을 잡았다.

‘나쁜 자식!’

수현은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가서 태규와 애런을 박살내버리리라.

이건 단순히 유언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형으로서 동생에게 보낸 신의를 잔인하게도 배신해버렸다.

분노에 절어 막 룸을 나가려는데 장식장 위에 형편없이 구겨져 있는 한 권의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패션 잡지 따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 있는데 구겨져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애런의 안 좋은 기사라도 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열어봤더니 그건 애런의 기사가 아닌 수현의 기사였다.

지연도 봤다는 그 기사.

비서와 다정하게 귀엣말을 주고받는 사진과 그가 아시아를 공략하며 회사를 장악했다는 텍스트.

‘혹시 이걸 보고…….’

구겨진 잡지를 보니 이 기사를 읽으며 그가 느꼈던 배신감과 분노가 상상이 됐다.

섭섭했구나, 녀석이.

분명 뉴욕으로 떠나기 전 앞으로 회사의 일에 있어서 역할을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는 수현이 약속을 어기고 혼자 독식했다고 생각했던 듯.

‘그런 게 아닌데…….’

수현은 그에게 줄 커다란 선물을 준비했었다.

그건 그가 좋아하는 값비싼 슈퍼카도 현금도 아니었다.

바로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금만 나를 믿고 기다려줬을 순 없었을까?’

딱 하루만 더 믿어줬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가 뉴욕에서 애런에게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지연에게 하지 않은 이유와도 같았다.

수현의 약점이 지연이라면 몬테규가의 가장 큰 약점은 애런이었다.

망나니란 소리가 오히려 미화시킨 말처럼 들릴 정도로 그는 너무도 크고 작은 사고들을 쳐왔었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회사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아무리 오너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수현처럼 어릴 적부터 제대로 된 경영 수업을 받고 그걸 능력으로 입증해낸 게 아니라면 언제든지 능력 없는 재벌 2세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수현은 그런 비난을 애런이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오히려 철저히 그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뒤로는 애런이 잘해낼 수 있는 일들을 모색했다.

그 어떤 전문 경영인을 모셔 와도 그보다 더 잘해낼 수 없는 일.

그리고 오랜 고심 끝에 그 일을 찾아냈다.

모델들을 관리하는 일.

패션 회사의 특성상 뛰어난 모델들을 발굴하고 데뷔시키고 관리하는 일은 꼭 필요한 분야다.

아직 줄리아나에는 그런 에이전시가 없었다.

늘 이미 톱 반열에 오른 모델들만 최고의 예우로 계약하고 활용해왔다.

때문에 스타 의식에 절어 프로 의식을 상실한 모델에게도 어쩔 수 없이 기대어 상품을 입힐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모델 관리가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숱한 모델들과 만나 데이트를 하고 함께 사고를 쳐왔던 애런이 그녀들을 맡아 관리한다면 이보다 윈-윈은 없다.

범죄자가 범죄자들의 범죄 수법을 가장 많이 알듯, 애런은 그녀들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알고 있으니까.

수현이 타블로이드 잡지에 단골처럼 등장하며 모델들과 어울렸던 이유도 그것이다.

미리 발판을 마련해 그에게 모델 에이전시 회사를 주기 위해.

‘이제 겨우 다 만들어놓았는데…….’

아쉽긴 하지만 애런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사랑을 갈구해본 적 없는 사람은 그 기다림이 얼마나 고되고 지루한 일인지 모른다.

수현은 그가 얼마나 힘들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라주고 있었다.

‘내가 참 무심한 형이었군.’

그래서 그는 애런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해하기로 했다.

그가 그렇게 된 건 무심했던 형의 책임도 있으니까.

수현은 일단 이 위조유언장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어차피 로버트가 맘만 먹으면 다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법적 싸움으로 들어가도 감히 태규 따위가 로버트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애런을 낭떠러지로 밀어버리고 싶진 않다.

차라리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주는 건 어떨까?

‘애런, 설사 그렇더라도 난 아쉽지 않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지연이 있다.

그리고 어차피 그가 없었다면 애런이 온전히 가져갈 수밖에 없는 로즈의 유산들이기도 하고.

‘참 이상하다.’

한 여자와의 사랑이 주는 힘이 이렇게 위대한 것이었나?

아무리 동생이라고 하지만 수현도 그에게 뺏기기만 하는 삶을 원한 적이 없다.

그가 이겨내려 했던 삶의 장애물에는 애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도 모르게 친아들인 그를 의식했을지도 모르기에.

그래서 더 독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살아왔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게 된 후 채워도 채워도 목말랐던 마음의 공터가 채워졌다.

세상 모든 것에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걸 잘해낼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

‘그래, 애런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자.’

그는 애런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그는 항상 재킷 깊숙이 가지고 다니는 로즈의 도장을 꺼냈다.

로즈는 거의 모든 결제에 보통 사인을 하지만 유언장에는 도장을 이용했다.

그리고 오로지 그녀의 도장만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문구가 따로 포함되어 있다.

그녀가 수현에게 전권을 넘기며 가장 먼저 건네준 것도 그것.

‘아마 애런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

수현은 호텔에 부탁해 작은 상자를 가져오라 했다.

그리고 로즈의 도장을 그 안에 넣었다.

애런이 쓴 메모지 뒷면에 하고픈 말을 적었다.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놓고 간다.

선택은 그의 몫.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애런이 모든 걸 갖기로 결심한다면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나와야 한다.

그는 묘한 이 기분을 애런이 마시던 위스키 한 잔으로 털어냈다.

취기가 올라오며 한 여자가 떠올랐다.

어쩌면 앞으로 유일하게 그가 갖은 보물이 될지도 모르는 여자.

그 여자를 만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장을 다시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 전에.

.

.

.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니 줄리가 강아지처럼 뽀르르 달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가락으로 코를 쥐었다.

“아잉, 술 냄새.”

안주도 없이 몸속으로 그대로 털어버린 위스키 향이 아직도 남아 있나 보다.

수현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줄리를 번쩍 안아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나 없는 동안 이 비행기가 많이 그리웠지?”

그녀는 까르르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뒤늦게 현관으로 나온 지연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했죠? 어서 오세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지연, 귀엽고 앙증맞은 줄리.

보석처럼 소중한 두 여자를 보니 애런에게 놓고 온 도장이 잊혀졌다.

세상 그 어떤 재산보다 나에겐 이런 엄청난 보물들이 있으니까.

.

.

.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생각이 깨지기까진 미쳐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흐어어어어어어, 내 게 아니었어. 내 게 아니었어.”

줄리는 세상을 뺏긴 것처럼 통곡했다.

나라를 잃었니? 부모를 잃었어?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세 사람은 그가 뉴욕으로 가기 전 함께 했던 마당 바비큐 파티를 다시 한 번 하기로 했다.

붉은 노을의 잔재를 아직 간직한 하늘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불어오는 바람은 두 달 전보다 훈훈했다.

돼지 목살을 감칠맛 나게 양념한 그녀의 요리 솜씨는 두 달 사이에 더 발전했고

두 달 사이에 조금 더 성장한 줄리는 옴팡진 손으로 음식을 날랐다.

늘 줄리 입에만 들어갔던 지연이 직접 싼 쌈은 이젠 그의 입으로도 쏙쏙 들어왔다.

소시지만 골라 먹던 줄리의 편식은 줄어 이제 제법 고춧가루가 들어간 파무침도 입에 넣을 줄 알았고,

‘완벽해, 완벽해.’

삶이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수현은 이렇게 행복한 가정만 있다면 애런이 고친 유언장처럼 모든 재산을 애런에게 넘기고 평생 빨간 지붕 집에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한 건 그놈의 곰돌이 얘기가 등장하면서부터.

갑자기 줄리가 음식을 먹다 말고 냅킨에 고기 조각을 조금씩 챙겼다.

지연이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줄리야, 너 고기 조각 모아서 뭐하게?”

그녀가 수줍은 얼굴로 고기 조각을 슬쩍 숨겼다.

“내 곰팅이 주려고. 오늘 금화댁 할머니 집에서 동물 나오는 TV 봤는데 곰은 풀만 먹는 거 아니래. 고기도 먹는대.”

지연은 바로 곰팅이가 수현이 사다 준 곰돌이라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어제 집에 도착해 조금 전에서야 줄리를 만난 수현이 알 리는 만무.

그는 곰팅이가 곰돌이와는 다른 곰 새끼라고 생각했다.

한 집에 곰 인형이 꼭 하나만 있으란 법은 없잖아?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걸 그는 또 줄리에게 관심을 준다고 곰팅이에 대해 물었다.

“곰팅이는 누구야? 선물 받았어? 누구야? 창의력 없이 내 선물 따라 한 사람이. 분명 내가 지연이한테 곰 인형 선물한 거 보고 따라서 사줬을 거야.”

수현의 말을 들은 줄리의 눈동자에 물음표 하나가 돌아다녔다.

‘…… 엥? 엄마한테 사준 곰 인형?’

지연이 테이블 밑으로 툭 수현의 발을 쳤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발 신호를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왜? 딸 앞에서 쑥스러워? 나한테 인형 선물 받은 거?”

그거 아닌데……

이번엔 줄리의 눈동자에 물음표 두 개가 돌아다녔다.

‘…… 그럼 정말 수현 아빠가 엄마한테 사준 거야?’

지연은 이번에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어흠, 어흠! 흠, 흠.”

확실히 수현은 뉴욕에 다녀온 후 센스가 떨어진 것 같다.

그릴에 있는 숯을 확인하더니 뒤적거린다.

“매캐해? 연기가 그쪽으로 가나? 하하, 연기는 미인한테만 간다더니.”

줄리의 눈동자에 이번엔 물방울이 맺히고 있다.

‘엄마만…… 미인이야?’

지연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으앙~~~”

예상대로 터지고 말았다.

“으앙~~~ 내 인형 아니었어, 내 인형 아니었어!”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수현은 눈동자를 지연에게 굴렸다 줄리에게 굴렸다, 산만하게 시선을 굴렸다.

“왜…… 왜 우는 거야?”

지연은 지연대로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수현 씨.”

그녀는 수현을 원망하며 줄리를 번쩍 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야, 곰팅이 줄리 거야. 아저씨가 줄리 주려고 보낸 거야. 농담한 거야.”

“아니야, 아니야. 분명 엄마 거라 그랬어. 아저씨 엄마 좋아해. 엄마만 미인이라 그랬어.”

“아니야, 줄리가 더 예뻐. 훨씬 예뻐.”

“아저씨 나빠, 나빠.”

“그래, 아저씨 떼찌! 떼찌!”

앞에 있는 아저씨는 숨소리 하나 못 내고 두 여자의 앞 담화를 듣고만 있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왜 욕먹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연의 윙크와 손짓에 할 수 없이 줄리에게 다가가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만 했다.

“미안해, 아저씨가 잘못했어. 미안해, 줄리야.”

한참을 울어 재낀 줄리는 수현이 똑같은 곰 인형 두 개를 사주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풀어졌다.

그리고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잘못한 벌로 디즈니랜드를 데려가기로 했다.

그것도 심지어 어디서 들었는지 ‘우리만 탈 수 있다는 전용 비행기’를 타고.

.

.

.

두 달 사이에 먹어본 저녁 식사 중 가장 정신없는 식사였다.

수현은 지연이 줄리를 데리고 먼저 안으로 들어간 사이 쓸쓸하게 혼자 바비큐 파티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상상했던 바비큐 파티와는 전혀 다른 형색으로 끝나버린 눈물의 파티.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없는 모녀라 생각했는데 살짝 실체를 알아버렸다.

‘생각보다 꽤 성깔 있는 모녀.’

돈이 없어도 지연과 줄리만 있으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뉴욕의 백화점에서 곰돌이 두 개, 전용기 타고 플로리다에 있는 디즈니랜드를 가서 프리패스를 사려면 최소한…….’

이거 도로 도장 가져와야겠는데?

아이를 달래는 데 이렇게 많은 돈이 들다니…….

별로 힘쓴 일도 없는데 줄리의 울음에 정신 줄을 놓다 보니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집 안에선 지연과 줄리의 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다.

“너 이 안 닦아?”

“아침에 닦았단 말이야.”

“자기 전에도 닦아야지. 안 그럼 이에 벌레 생겨.”

“싫어. 거짓말! 미워!”

수현은 두 사람의 결코 예쁘지 않은 쌈박질 소리를 들으며 순간 궁금한 점이 생겼다.

늘 사랑스럽고 가끔 끔찍한 걸까, 아님 늘 끔찍하고 가끔 사랑스러운 걸까?

누군가가 말했었다.

사랑은 천국을 아주 잠깐 엿보는 거라고.

지연과 사랑을 나누었던 어젯밤 그는 천국을 맛보았다.

‘그런데 설마, 천국은 잠깐 지옥은 계속 맛보는 건 아니겠지?’

사랑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는 동안 집 안이 조용해졌다.

밤이 되니 마당에도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현은 이제 욕실로 가 매캐한 숯 냄새를 씻어내고 쥐죽은 듯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 너무나 피곤한 일이 많았으니까.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지연이 나온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했다.

“마당은 내가 다 치웠어. 내가 뭐 또 해야 할 일 있어?”

지연이 조금 전과는 다른 밝은 웃음을 지으며 이미 오픈한 맥주를 건넸다.

“아까 너무 정신없었죠? 미안해요.”

막 피곤함과 회의감이 몰려왔었는데 지연의 미안한단 말 한마디에 기분이 스르르 움직이려고 했다.

“아니야, 애들이 다 그렇지.”

지연이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아, 시원하다. 사실 아까부터 수현 씨랑 술 한잔하고 싶었는데 줄리 때문에 못 했어요.”

그러더니 애교 있게 수현의 옆으로 와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

이 팔짱이 뭐라고 수현은 또 온몸에 이상한 전율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지연이 수현의 팔뚝에 머리를 기대며 아까와는 전혀 다른 예쁜 목소리로 말했다.

“수현 씨, 줄리가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거예요. 엄마도 좋고 수현 씨도 좋긴 한데 수현 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 또 엄마를 뺏기는 것 같고. 그래서 하루에도 이랬다저랬다 제가 미웠다, 수현 씨가 미웠다 그런 거 같아요.”

그녀가 수현에게 기대고 있는 머리로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수현 씨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줄리가 심술을 부릴 때 제가 일부러 수현 씨를 타박하면서 줄리 편을 들어도 이해해주세요.”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토끼 같은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알았죠?”

애교 넘친 콧소리를 내면서.

“…….”

여기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

이렇게 파고들면서 예쁘게 말을 하면 내가 뭐라고 그래!

그는 그저 두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다 이해해. 내가 뭐 그런 것도 이해 못 하는 남잔가?”

그녀가 눈웃음을 치며 씩 웃는다.

“고마워요, 수현 씨.”

내가 이렇게 일희일비하는 사람이었나?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었어?

갑자기 또 애런에게 주고 온 도장은 겨자씨만큼도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 그의 머리를 꽉 채운 생각이라곤……

“고마우면 나 따라와.”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을 지나 마루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방문을 열었다.

쾅-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하!”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짜릿한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몸으로 퍼지며 그의 혈관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무중력 상태로 붕 뜬 것처럼 황홀에 젖고 있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녀를 가린 얇은 천 조각들을 벗겨내며 그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어도 살 수 있다.’

매일 밤 그녀와 이런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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