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56화 (56/77)

제56화. 형이 안다

2018.08.15.

수현은 애런을 찾아 그가 묵는 호텔로 왔지만 애런은 없었다.

물론 없을 수도 있다. 볼일이 있으면 나갈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묘하게 불길한 기운이 그의 머릿속으로 퍼졌다.

그런 조짐이 보였던 건 아니다.

그의 룸은 두 달 전 뉴욕으로 가기 전에 들렀을 때보다 상당히 깨끗했다.

술 마신 흔적도 없었고 호텔의 룸이 그렇듯 매일매일 청소를 받아 빛나도록 깔끔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한집에서 형제로 이십 년 이상을 살아온 가족의 촉이라고 해야 하나?

애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 아니면 앞으로 생길 것 같은.

수현은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애런의 룸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그러다 전화기 옆에 끄적거려놓은 메모를 발견했다.

맨 앞 장에는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이름이 쓰여 있진 않았지만 아주 낯선 번호는 아니었다.

휴대폰을 들어 확인을 해보니 역시나 불길한 기운을 뒷받침해주는 번호.

“문태규?”

애런이 왜…….

그리고 띄엄띄엄 낙서처럼 끄적거려놓은 단어들이 이상했다.

법적, 법률, 위조, D 데이 등등…….

그의 예리한 감각이 결론을 내려주었다.

“뭔가를 하고 있군. 문태규와.”

수현은 바로 로버트에게 전화를 했다.

“로버트, 어머니와 함께 있어?”

그런데 그는 외부에 있었다.

“오전에 애런 도련님이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회장님이 심부름을 시키셔서 나왔습니다. 아마 애런 도련님과 두 분만 계시고 싶어서 그러신가 봐요.”

흠…….

어머니도 뭔가를 느끼고 계시는 게 분명하다.

수현이 알기론 로즈는 애런이든 수현이든 누가 온다고 해서 로버트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로버트는 가족과도 같은 집사, 그를 굳이 두 사람의 만남에 빼놓을 이유가 없다.

‘내가 병원으로 가봐야 하나?’

아님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하나?

지연과 환상적인 밤을 보낸 후 이제 겨우 긴 고심의 터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 동생으로 인해 그의 고심은 다시 시작되었다.

*

애런은 어제 미리 로즈에게 전화를 했다.

“저 수현입니다. 낼 찾아뵙고 싶습니다.”

그런데 로즈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전화를 받은 로버트에 의하면 로즈의 컨디션이 지금 굉장히 좋다고 했다.

그래서 불안하긴 했다.

‘내가 애런인 걸 아시는 거 아닐까?’

그런데 바로 로즈가 그의 불안을 불식시켜주었다.

“응, 수현아. 내일 보자.”

휴 다행.

그로서는 심장뿐 아니라 오장 육부가 뒤틀어질 만큼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 위조 유언장의 전제는 어디까지나 로즈가 애런을 수현이라고 오인한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전제가 무너지면 모든 계획이 무용지물.

그런데 다행히 아직도 로즈는 그를 수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태규의 말마따나 쓸데없이 긴장한 모습으로 오히려 의심하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절대 그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을 듯.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VVIP 병동으로 올라갔다.

“너는 잠깐 여기 있어.”

애런은 태규를 밖에 세워두고 로즈의 병실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태규가 잡았다.

“잠깐, 이 유언장 가지고 들어가. 여차하면 날 부르고.”

애런이 망설였다.

“뭘 벌써 유언장을 들이밀어? 일단 어머니와 얘기를 좀 한 다음에…….”

태규가 또 한심하다는 식의 눈빛으로 그를 흘겼다.

“괜히 대화 나누다가 네가 진수현이 아니라 애런이란 걸 눈치챌 수도 있지. 들어가자마자 들이밀어.”

그의 말이 또 맞다.

태규는 그가 망설이거나 갈등할 때마다 이렇듯 정신을 차리게 해준다.

“알았어.”

애런은 태규가 내민 위조 유언장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화분이 가득한 테라스의 문을 열어놓아서일까?

아니면 로즈가 풍기는 그녀만의 향기 때문일까?

병실 안에는 복부와 심장 사이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신선한 풀과 꽃향기가 가득했다.

그 싱그러운 공기와는 반대로 로즈는 움직임 없이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인사를 드렸지만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응…… 왔구나.”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슬쩍 걱정이 됐지만 다시 생각하니 오히려 안도가 되었다.

컨디션이 안 좋다면 오히려 그가 이끄는 대로 대화를 진행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두려운 걸음으로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한 떨기 목련 같은 흐드러진 그녀의 하얗고 연약한 모습이 그의 심장을 무겁게 누른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저, 수현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떠보듯 일부러 수현이라는 이름을 꺼냈다.

생각보다 한 템포 늦게 그녀가 반응을 했다.

“그래, 왔구나, 우리 큰아들.”

엄마는 정말 나를 형으로 알고 있구나.

안도감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 느껴지는 섭섭함.

그는 그 섭섭함을 조금 더 끌어올려 분노와 원망의 마음으로 치환시켰다.

그 기분으로 손에 들고 있는 유언장을 그녀의 손 위에 놓았다.

“이게…… 뭐니?”

묵직한 종이 뭉치가 살갗에 닿자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유언장입니다.”

“뭐!”

갑자기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면서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손을 번쩍 올렸다.

많이 놀란 기색이었다.

생각보다도 예민한 그녀의 반응에 애런도 놀랐다.

“아, 제가 어제 가지고 오겠단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내일 오겠다고만 했을 뿐.

하지만 그녀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이용해 일부러 그렇게 몰아버렸다.

그녀가 다시 차분히 두 손을 모았다.

“맞다, 내가 까먹고 있었다. 요즘 내가 이렇단다, 수현아.”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했다.

“그런데 유언장은 왜 갑자기?”

그녀가 눈을 뜬 상태로 허공을 보며 물었다.

그는 태규가 가르쳐준 대로 그녀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기존의 것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요. 제가 후계자가 되고 생각보다 빨리 어머니 일을 맡으면서 회사 지분이나 여러 가지 절차에 있어 수정해야 할 부분이 생겼습니다.”

논리적으로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수현이 더 일찍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예상보다 그녀가 더 빨리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려면 좀 더 쾌속이 유언장을 집행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당연히 수정도 필요하겠지.

그녀는 가녀리고 뾰족한 턱을 힘겹게 끄덕였다.

“네 말이 맞구나. 그래서…… 어떻게 수정했니?”

그녀는 눈이 안 보여 유언장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유언장에 있는 내용과 정반대로 얘기를 했다.

“이전 것과 별 차이 없습니다.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모든 걸 제 앞으로 했습니다. 회사도 집도 엄마의 개인 재산도…….”

“내가…… 원하는 대로?”

“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애런에겐 한 푼의 재산도 주지 않겠다. 그게 애런을 구하는 길이다…….”

“그래…… 그랬지.”

“그러니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시기나 절차 같은 것만 조금 바뀌었을 뿐. 엄마는 그냥 사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사인……을 하라고?”

사인이란 말에 그녀의 목소리에 의구심이 느껴졌다.

왜 그러지? 내가 뭘 잘못했나?

애런이 알기론 로즈의 모든 결제는 그녀의 사인으로 이루어진다.

그녀의 사인은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아주 아름답고 힘이 있는 필체.

유명인들의 사인은 함부로 다른 사람이 대신 위조할 수 없도록 보통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왜 ‘사인’이란 말에 놀라시는 걸까?’

그는 묵묵히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는 보이지도 않는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또다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인해야지.”

다행히 또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일은 생각보다도 더 술술 풀리고 있었다.

그는 유언장 뒷장에 있는 로즈의 사인이 필요한 공간을 맞추어 그녀의 손 바로 밑에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에 펜을 쥐여주었다.

“그냥 여기다 사인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볼펜을 쥔 채 또다시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뚝, 예고도 없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뭐지? 왜 눈물을…….’

예상치 못한 로즈의 눈물에 그의 목이 불꽃처럼 타들어갔다.

누워 있는 그녀의 목젖이 격하게 쿨럭였다.

애런은 당황했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여백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규가 조언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을 땐 오히려 몰아치라고.

“엄마, 사인하시죠. 중요한 일일수록 시간을 끄시면 안 됩니다.”

그의 재촉에 펜을 든 그녀의 손이 막 종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 그녀가 잡았던 펜을 놓았다.

그리고 허공을 향했던 시선을 애런에게로 돌렸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초점 없는 눈동자가 그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애런은 자신의 마음을 로즈가 보고 있는 것 같다 섬뜩했다.

반대로 그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어 보이기도 하면서 복잡한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던 그녀의 목소리는 벌써 평온을 찾아 건조했다.

“사인하기 전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이 얘기를 다 끝낸 후 사인할게.”

로즈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애런도 더 이상 재촉할 순 없었다.

“그러세요, 엄마. 무슨 말씀 하시고 싶은데요?”

그는 속으로 그녀로부터 나올 얘기를 상상했다.

회사를 잘 부탁한다? 아니면 그녀의 앞으로의 계획? 아니면…….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가 나왔다.

“애런의 아빠…….”

내…… 아빠?

로즈는 한 번도 애런에게 생부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수현아, 애런의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니?”

애런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가 알기론 생부는 우울증이라는 가족력이 있었고 그 병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런데 로즈가 지금 그를 수현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수현이 그걸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애런은 막막했다.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입술을 떼었다.

“내가 죽였어.”

“!”

이건 무슨…… 이게 무슨…….

애런은 자신이 수현이 된 줄 모르고 큰소리로 다시 물었다.

“엄마가 아빠를 죽여요? 왜요?”

아차, 싶었는데 로즈는 별 의심 없이 말을 이었다.

“그가…… 애런을…… 죽일 뻔했으니까.”

“…… 네?”

“그가 나를 때리는 건 참을 수 있었어. 그런데 내 아들 애런을 건드리는 건 난 절대 용납할 수 없었어. 그래서 내가 그를 밀었어.”

“…….”

그때를 상상하는지 그녀의 얼굴엔 독기가 서렸다.

“난 내 아들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했고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난 또 똑같이 그를 밀었을 거야.”

“…… 엄마?”

“애런은 내가 그렇게 지켜낸 자식이야. 그만큼 소중한 자식이라고.”

그녀가 잠시 숨을 골랐다.

올라갔던 감정을 내리고 자백하듯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자식을 키우며 멀리했던 이유는…… 애런이 조금 더 강한 정신을 갖길 원해서. 일생을 우울하게 보냈던 그의 아빠의 유약한 성품을 닮지 않고.”

‘엄마…….’

언제 일어났는지 애런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두 가지의 다른 감정이 회오리가 되어 뒤섞이며 올라왔다.

엄마가 아빠를 죽였다는 원망스러운 마음.

한편으론 엄마가 그런 일을 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었구나, 그 깨달음에서 오는 감동.

뭐가 더 큰 감정인지 그도 잘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그는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막 그녀 옆을 떠나려는데 로즈의 눈에 그런 그가 보였을까?

그녀는 손을 뻗어 멀어지려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수현아…….”

순식간이었다, 그녀에게 손을 잡힌 건.

그녀의 몸에 전기라도 통하는 것일까?

언제인지 기억도 못 하는 엄마의 손길에 그의 몸에 전율이 흐르고 있었다.

.

.

.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애런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를 잡은 그녀의 손에서 크고 작은 진동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손을 떠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전기가 전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흘러오는 건지, 그도 모르겠다.

그녀는 애절했던 목소리를 거두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애런은 내가 그렇게 지켜낸 자식이야. 내가 없더라도 내 아들 애런, 잘 지켜줘. 부탁이다.”

소리에도 데자뷔가 있다.

로즈의 말에 얼마 전 수현이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의 사랑은 애런이라고, 애런은 그녀에게 그렇게 소중한 자식이라고.

“엄마…….”

애런은 로즈에게 손을 잡힌 채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걸 체념한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끝났다. 이제 사인을 할게.”

그녀는 보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더듬지 않고 유언장과 펜을 손에 쥐었다.

종이와 펜을 쥔 그녀의 손이 얼음나라에 온 것처럼 덜덜거렸다.

하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힘을 주어 사인을 했다.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유언장이 완성되기까지.

사인을 끝낸 그녀가 온몸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렸다.

“피곤하다. 이제 가봐. 수현아.”

.

.

.

“대박! 이렇게 쉽게 끝나다니, 하하하하하.”

유언장에 이뤄진 로즈의 사인을 확인한 태규는 함께 탄 애런의 차가 흔들릴 정도로 과한 웃음을 터뜨렸다.

“넌 이제 미국, 아니 세계에서 제일 파워풀한 남자가 된 거야.”

그런데 막상 세계에서 제일 파워풀한 남자가 된 애런의 얼굴은 모든 걸 잃어버린 표정이었다.

아직도 모르겠다.

방금 전 폭풍 같이 흘러간 시간 동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조용히 좀 해.”

그가 낮지만 냉기 가득한 목소리로 경고하자 태규는 금세 웃음을 멈췄다.

“하긴, 지금은 실감이 안 나겠지.”

그는 애런이 너무도 기쁜 나머지 표정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지금의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파티를 제안했다.

“나랑 오늘 좋은 데 가서 술 한잔하는 거 어때? 모델 같은 여자들도 좀 부르고.”

애런은 당연히 그의 제안이 반가울 리 없었다.

“싫어.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아빠의 죽음, 엄마의 고백, 엄마의 손길…….

그는 오늘 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꼈던 모든 혼란보다 오늘 밤 그에게 닥친 혼란이 제일 크고 충격적이다.

태규를 적당한 곳에 버려두고 그녀는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술보단 휴식이 필요했다.

*

로버트가 병실로 돌아왔다.

애런을 보낸 후 한참을 쏟아냈던 그녀의 눈물은 말라 있었지만 아직 슬픔의 잔재는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생기라곤 조금도 없었다.

“가짜 유언장을 가지고 왔어.”

이 한마디로 로버트는 자신이 없는 사이 벌어졌던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인은…… 하셨습니까?”

“응…….”

로버트는 로즈가 아들들을 분별할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우려에 확인의 질문을 했다.

“수현 도련님이 아니라 애런 도련님이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녀는 별 질문을 다 한다는 듯 슬쩍 웃었다.

“응…… 수현은 날 그렇게 계속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 거의 어머니라 부르지.”

그녀는 아들들의 향기뿐 아니라 말투, 쓰는 단어까지 다 알고 있는 보통의 엄마였다.

로버트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기로 했다.

“법적 절차를 다 거친 유언장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유언장입니다. 저희가 작성한 회장님의 유언장이 그렇게 우습게 파기되진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녀는 로버트가 하고 있는 얘기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아까 오랜만에 애런의 손을 잡아봤어.”

그러더니 애런을 잡았던 손을 소중하게 모아 가슴 위로 올렸다.

로버트는 순간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기만하려 찾아온 아들의 손을 잡고 저렇게 감격하다니,

혹시 애런이 온 충격으로 다시 정신에 혼란이 온 걸까?

그는 지금 그녀의 이성이 의심스러웠다.

“회장님…… 혹시 지금…….”

로버트의 불안함을 눈치챈 그녀가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로버트. 난 바보가 아니야.”

그녀는 후련하게 큰 숨을 토해냈다.

“난 두 명의 남편을 죽였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리고 두 아들들에게 내 모든 죄를 고백했어. 살면서 이보다 더 마음이 평화로울 수 없어.”

그녀의 표정은 정말로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평안했다.

그런데 그 평안 속에서도 애런을 걱정했다.

“나보다 더 정신이 혼란스럽고 괴로운 건 애런일 거야. 내가 시험에 들게 했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애런은 시험에 들었다.

그 유언장을 행사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녀의 말대로 모든 죄를 털어낸 그녀보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애런이다.

로버트는 로즈와 함께 두 아들을 키워낸 집사로서 애런의 갈등을 없애주고 싶었다.

“애런 도련님이 고민하지 않으시도록 제가 완벽하게 그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로즈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애런이 뭘 하든 우린 그냥 가만히 있어.”

이해가 되지 않는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러다가 애런 도련님이 그 유언장을 사용이라도 하면 어떡하죠? 그건 오히려 도련님을 궁지로 몰아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로즈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문제의 해결자로 로버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수현이가 해결하도록 지켜보자. 난 애런도 믿고 수현이도 믿어. 둘 다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들이니까.”

로버트는 이제야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애런을 시험에 들게 하고 그 해결을 수현에게 맡기고,

그리하여 애런이 형을 통해 깨닫게 한다……..

그녀다운 판단이었다.

“회장님은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현명한 분입니다.”

그가 자신이 왜 그녀 곁을 지키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애런이 호텔의 룸으로 들어왔다.

불은 꺼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누군가 왔다 간 것 같은 온기가 느껴졌다.

불안한 생각으로 급히 불을 켰다.

룸 안은 깨끗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지금은 그 누구도 만날 생각이 없으니까.

“어?”

그런데 소파 위에 누군가 위스키를 마신 흔적이 있었다.

“나 술 안 마셨는데?”

스치듯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이 왔었다!

수십 년을 함께 한 형제가 남기고 간 향기가 느껴졌다.

‘뉴욕에서 돌아왔나?’

그런데 마시다 놓고 간 위스키 잔 옆에 뭔가가 보였다.

굉장히 고급스러운 작은 상자와 자신이 끄적거렸던 메모지.

‘이게 뭐지?’

작은 상자를 열어보기 전 그는 먼저 메모지를 들었다.

그 메모지 안에는 수현의 필체로 딱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놓고 간다. 수현.

“!”

메모를 읽은 애런의 머리와 심장에 쇠주먹이 날아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도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형이 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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