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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고 니 형-55화 (55/77)

제55화. 깊고 뜨거운 재회

2018.08.11.

지연은 곰돌인 줄 알고 안고 있던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녀가 안고 있던 건 곰돌이가 아니었다.

바로 그, 수현이었다.

그는 당황하며 빼내려는 지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지연과 수현의 얼굴이 마주했다.

오늘따라 그 방엔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어둑한 공간에서 지연이 확인할 수 있는 건 그의 따뜻한 숨결뿐.

“나 없는 동안 재밌게 살았네. 인형놀이 하면서.”

하지만 그는 분명 수현이었다.

지연은 느껴지는 오감으로 그의 얼굴을 찾아 감싸 쥐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수현 씨, 맞아요?”

웃음을 섞은 그의 음성도 울렸다.

“그럼, 곰돌이가 말을 하고 있을까 봐?”

“하…….”

잔뜩 차올랐던 긴장을 한숨으로 토해냈다.

그가 맞구나, 그가 맞아…….

수현도 두 손을 올려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감쌌다.

“많이…… 기다렸지?”

“하…….”

막상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목구멍이 꽉 막혀버렸다.

많이 기다렸냐고요?

“하, 정말…….”

생각 같아선 화라도 내고 싶은데, 두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이라도 패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쭉 빠졌다.

“어떻게…… 어떻게…….”

토해내고 싶은 말이 안 나오니 답답함에 숨만 거칠어진다.

가슴을 들썩대며 그녀는 더듬더듬 알아들을 수 없는 원망의 단어만 내뱉었다.

“진짜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로 올라갔다.

보이지도 않으면서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긴 손가락을 쓸어 뒤로 넘겨주었다.

“미안해…… 그럴 일이…… 있었어.”

미안하단 말에 그녀가 터져버렸다.

“흐흐흐흑, 흐흐흐흑.”

그 말 한마디에 서러움과 억울함, 섭섭함과 야속함이 터져버렸다.

“흐어어어어어어, 흐어어어어어.”

우는 그녀를 달래주려 그는 잡은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흐어어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아아.”

이건 아니라고, 이런 식은 아니라고, 더욱더 큰 소리로 울어버리며.

수현은 저항하는 그녀를 큰 팔로 안아 가슴에 넣었다.

그녀도 힘을 줬지만 강인한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밀어내다 밀어내다, 기어인 그의 가슴에 스스로 얼굴을 묻고 말았다.

“너무해, 진짜…… 흐어어어어어어.”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감미로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미안해, 내가 다 말해줄게. 미안해.”

미안하단 말을 할수록 그녀의 어깨가 더욱 들썩였다.

“흐어어어어어어어어, 흐어어어어어어어.”

받아주면 받아줄수록 더욱더 울어대는 아이처럼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그의 가슴속에 파묻혀 긴 시간의 서러움을 토해냈다.

수현은 점점 더 커지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

.

.

누르고 참았던 울음을 모두 다 토해냈다.

이제 좀 진정이 된 지연은 곰돌이 대신 수현의 굵직한 팔에 머리를 누이고 아직 남아 있는 울음의 잔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히뜩, 히뜩.”

그는 지연이 베고 있는 팔을 굽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어루만졌다.

그녀가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그저 기다려주면서.

완전히 울음을 그친 그녀가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그동안 연락도 없고 한국에 와서도 안 들르고 그러다 이렇게 갑자기…….”

“큭!”

그가 갑자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에도 내 기사가 나나 보지? 내가 한국에 왔었던 것도 알고. 야, 그건 생각 못 했네. 나 그렇게 유명해?”

“…….”

이 와중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냥 되게 조그맣게 났어요. 대중적인 거 아니고 여자들 보는 패션 잡지 같은데…….”

“아…… 큭.”

또 이 와중에 자존심을 세워보겠단 그녀가 귀여워 그는 또 웃어버렸다.

지연은 은근히 부아가 올라왔다.

제대로 된 변명은 안 해주고 그냥 실실 웃고 있는 그에게.

“답답하게 왜 말 안 해줘요? 왜 연락 안 했는지, 왜 한국 와서도 안 보고 갔는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왔는지, 또 가야 하는지 아님 아예 온 건지…….”

“그래, 솔직하게 다 얘기해줄게. 지금부터…….”

그는 웃음을 거두고 한 달이란 시간 동안 그녀에게 연락하지 못했던 이유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

.

미국에 가자마자 수현은 로즈가 병환으로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건 이미 지연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지난번, 긴 음성 메시지를 남긴 이후 이런 일이 생겼다.

휴대폰 소리가 좀 이상하다 싶어 알아보니 도청 앱이 깔려 있던 것.

사실 전쟁 같은 기업 경쟁에 있어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기에 그다지 당황하진 않았다.

그런데 앱을 깐 사람을 추적하니 경쟁 기업의 사람이 아닌 타블로이드 잡지의 기자였다.

신제품이나 경영 비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현의 사생활을 캐는 게 목적이었던 것.

‘그들이 쫓는 건 지연이었어.’

기자들에게 지연은 이렇게 무모한 짓까지 하며 취재할 가치가 있었다.

수현은 이제 미국 상류사회에 흔하고 널린 재벌 2세가 아니다.

거대 기업에 새로 등극한 젊은 CEO.

파워풀한 힘을 가진 남자의 여자는 늘 가십의 대상이니까.

다행히 기자들은 지연에 대한 정보가 없다.

하지만 단서 하나라도 찾게 된다면 한국까지 날아가서 그녀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할 테고,

분명 그녀에 대해 악의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낼 것이라는 건 당연한 시나리오.

“그래서 아예 지연과의 연락을 차단해버린 거야. 조금의 빌미도 주지 않으려고.”

그의 얘기를 듣고 있던 지연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수현 씨에겐 가장 큰 약점이 되었네요. 기자들이 알아도 될 만큼 떳떳한 여자였으면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수현은 그녀를 나무라듯 말했다.

“지연이 이런 생각을 할까 봐 내가 얘기하지 않은 거야. 기자들은 지연이 아무리 좋은 조건의 여자라 해도 무조건 악의적이고 자극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을 거야. 그게 더 재미난 기사가 되니까.”

그리고 그가 더 우려한 건 지연보다 그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난 내 여자가 그런 승냥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걸 지켜볼 만큼 참을성이 있는 남자가 아니야. 분명 이성을 잃고 사고를 쳤을 거야.”

때문에 그녀의 옆에서 든든히 지켜줄 수 있을 때까진 그녀를 감추기로 결심한 것.

누군가에게 대신 연락해줄 것을 부탁할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주변 사람들 중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판단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순 없었다.

그저 혼자 모든 걸 감당하고 있을 수밖에.

그런데 지연의 머리에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럼 그 레이첼이란 비서는요? 되게 친해 보이던데…….”

지연의 입에서 여자의 이름이 나오자 수현이 또 놀리기 시작했다.

“큭, 그것도 알고 있었어? 알고 보니 기사가 작게 난 게 아니었나 봐.”

이 와중에도 또 지연은 지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랑 있는 사진 딱 한 장 나왔어요.”

수현은 그녀에 대한 얘기도 해주었다.

“그래도 유일하게 지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레이첼이었어. 같은 한국계 사람이라 그런가? 믿음도 갔고. 그리고 그녀는…….”

그녀는 같은 여성에게만 감정을 느끼는 동성애자.

“내가 발가벗고 덤벼도 레이첼이 밀어낼걸?”

“그랬군요…….”

이제 모든 오해가 풀렸다.

단절된 연락, 그리고 비서와의 스캔들까지.

그래도 섭섭함은 남았다.

“집에 있을 때 몰래 할 수도 있잖아요. 자기 전이라든가, 다른 전화 이용해서.”

그녀의 작지만 원망이 담긴 투덜거림에 그는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내가 살던 집은 이 빨간 지붕 집처럼 안락한 안전가옥이 아니야. 집에서 일하는 사람 누구도 당장 내일 집을 떠나 기자들에게 돈을 받고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야. 난 한 번도 집이 편해본 적이 없어.”

평범하게 살아온 지연은 집이라는 공간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할 불편한 공간이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음성에서, 나지막이 내쉬는 그의 한숨에서,

편히 연인과 통화 한 번 하기 힘든 삶을 살아온 그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안타까워, 그런 그를 원망했던 스스로가 미워, 이번엔 그녀의 두 손이 그의 머리를 감쌌다.

“미안해요…….”

어느 순간 미안한 건 그녀가 됐고,

어느 순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그가 됐고,

어느 순간 그녀는 그를 보듬고 있었다.

헤어졌던 연인이 꼬이고 얽혔던 오해를 푸는 동안,

천천히 자취를 감추듯 창밖에선 칠흑 같은 어둠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어스름한 새벽빛이 물들이듯 두 사람의 공간을 밝혔다.

깜깜한 방, 오직 서로의 향기, 서로의 음성, 서로의 몸으로만 확인됐던 서로의 모습이,

창을 통해 침투하는 새벽빛으로 이제 선명하게 눈동자에 들어왔다.

수현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동그란 이마, 너무 높지 않은 콧날, 그리고 작고 도톰한 입술을 거쳐 턱을 짚었다.

“지연이 맞다…….”

얼마나 그리웠던 얼굴인가, 얼마나 사무쳤던 얼굴인가.

그녀도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보고 있어도 보고팠던 얼굴, 꿈에서도 욕망했던 얼굴.

“자기도 수현 씨 맞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꿈일 것 같아서, 다른 곳을 보면 고새 사라질 것 같아서.

그도 물어보지 않았고 그녀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두 눈동자로 말했다.

이제, 우리, 그만, 사랑할 시간이라고.

수현은 두 손을 단정하게 꼭 채워진 그녀의 블라우스 제일 높은 곳으로 가져갔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렀지만 능숙한 그의 손은 그녀의 첫 단추를 풀었다.

툭, 단추가 풀리자 그녀의 동공이 살짝 떨렸다.

느릿한 그의 손이 그녀의 두 번째 단추로 내려갔다.

또다시 툭, 풀리는 단추 소리에 그녀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수현은 그녀의 그런 하나하나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언제든 그녀가 두려워 한다면 멈춰야 하니까.

툭, 세 번째 단추, 그리고 마지막 단추가 열리며 그녀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수현의 눈동자가 깜박.

그녀의 살결이 보내는 하얀 유혹에 그의 눈동자도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이젠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수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벌어진 블라우스와 블라우스 사이로 자신의 상체를 밀착시켰다.

그의 왼쪽 팔꿈치를 그녀의 머리 옆에 놓으며 그의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다른 한 팔을 그녀의 날렵한 허리 뒤로 넣었다.

툭, 이번엔 그녀의 스커트가 열렸다.

부끄러움에 그녀의 눈이 살짝 깜박였다.

지연을 감추고 있던 옷들은 이제 완전하게 무장해제 되었다.

수현이 천천히 그녀의 몸을 아래로 누르며 두 사람의 가슴과 가슴, 몸과 몸이 완벽히 맞닿았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은 오직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과 얼굴뿐.

지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두려움은 없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사랑을 위해 차오른 숨결을 다듬었다.

수현도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녀의 두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고요한 공간에 야릇한 신음 소리가 퍼지고 있다.

침대 발치에 미뤄둔 곰돌이가 조금씩 리듬을 타며 움직였다.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됐다.

*

수현은 지연을 뒤에서 꼭 끌어안고 은은히 올라오는 그녀의 향기를 맡고 있었다.

누적된 피로로 몸은 무겁지만 기분은 가벼웠고 밤새 나눈 사랑으로 기운은 없었지만 호흡은 평화로웠다.

얼마나 안고 싶은 여자였던가,

매일 밤 그녀의 옆방에서 잠이 들면서 어느 날은 뛰어들어가 그녀를 안고 싶었던 나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뉴욕에서도 오로지 그녀와 함께할 밤만을 생각했다.

후회도 했었다.

내가 뭐 그렇게 신사라고 그녀를 그렇게 지켜줬을까.

한 번만 안아보고 올걸, 한 번만 품어보고 올걸.

그러면 그 밤을 추억하며, 그 밤의 희열을 생각하며,

조금 더 단단하게 이 외로운 밤들을 버틸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간절하던 그녀와의 밤을 보내고 나니 잘 참았다 싶었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다면 오로지 그녀를 안기 위해 회사고 뭐고 그냥 미국에서 돌아왔을 테니까.

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없다. 그녀와 헤어질.

매일 밤, 그녀와 자고 싶으니까, 바로 오늘 밤처럼.

수현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정수리에 따뜻한 키스를 했다.

‘사랑스러운 내 여자.’

속으로 그녀를 부르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눠본 깊은 사랑으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도 알게 됐지만 기대한 것처럼 수현은 배려 있고 부드러운 남자였다.

그 밤, 그녀가 느낀 건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육체와 육체의 만남이 아니었다.

온전한 사랑이었다.

스물일곱이란 나이를 먹으며 그녀도 남자와 이럴 수 있는 순간들이 왜 없었을까?

하지만 늘 두려웠고 늘 겁이 났고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 도망가 버렸다.

그런데 수현이란 남자는 늘 그녀를 애타게 만들었다.

매일 밤 그의 옆방에서 잠이 들면서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남자의 품에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그녀도 욕망이 있는 여자라는 걸 일깨워줬다.

그의 건장한 어깨를 보며 다부진 팔을 보며 그녀도 설렜다. 기다렸다. 애태웠다.

그가 뉴욕으로 떠나고 나선 후회도 했었다.

속초에서 우리는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까,

그가 뉴욕으로 떠나기 전날 밤, 우리는 왜 키스만 나누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배려였다.

그녀를 조금 더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그녀의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 때까지.

그는 기다려준 것이다.

어제 드디어 그의 품에 안겨 사랑의 고통을 즐겼다.

아픔도 짜릿하다는 걸 그가 알려주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부터 발끝까지 그의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주었다.

짜릿한 고통과 야릇한 오싹함에 그녀는 부르르 온몸을 떨어버렸다.

환희의 몸부림이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를 꼭 감고 있는 수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 깍지를 꼈다.

완전히 그와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행복해요, 수현 씨.’

두 사람의 사랑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연인이 된 두 사람 사이에 아직 풀지 못한 대화가 있었다.

‘수현 씨는 또 떠나가겠지?’

그가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닐 테니까.

지연은 언제 돌아가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내일이라면 어쩌지? 아니면 한 시간 후?’

지연의 뒤통수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있던 그가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

“만약 내가 조금 있다가 또 가봐야 한다면, 또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려야 한다면 지연은 어떨 것 같아?”

“…….”

불길한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다더니.

그렇구나…… 또 가야 하는 구나…….

영화에서도 많이 봤던 장면인 것 같다.

뜨거운 사랑 뒤 떠나버리는 남자.

그녀는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어야 하나?

가슴엔 다시 묵직한 통증이 시작됐지만 그녀는 처연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히려 씩씩하고 담대하게.

“뭘 어떨 것 같아요, 그냥 기다리는 거지. 편의점 보면서, 취직 자리 알아보면서, 줄리 키우면서. 저 이제 혼자서도 잘 지내요.”

그녀의 무심한 대답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건 수현이었다.

“뭐야, 너무 씩씩한데? 섭섭하게.”

“섭섭할 게 뭐가 있어요? 일하러 가는 건데.”

수현은 곤란한 듯 혀를 찼다.

“이러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 뭐가요?”

“나…… 안 돌아가. 한동안 한국에 있어야 해.”

“왜요?”

“어머니 명령.”

“네?”

수현은 그가 한국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회사는 아시아를 향한 공격적인 진출을 선언, 그 본거지를 수현이 한국으로 정했는데 로즈가 반대했다.

로즈는 수현이 그녀 곁에 있으려 한국을 고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현에게 옆에서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한국 대신 일본이나 싱가포르를 추천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젯밤 로즈가 마음을 바꿨다.

“어제 한국에 도착해서 여기 오기 전에 어머니랑 잠깐 통화했거든. 정신이 맑으실 때 자주 통화해. 그런데 갑자기 한국으로 본거지를 정하라고 하시더라. 이유는 말씀 안 하시고.”

지연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랑 통화한 게 몇 시쯤인데요?”

“여기 오기 바로 전이니까 밤 열 시 정도?”

열 시라면 그녀가 병원을 나오고 삼십 분 후,

‘혹시나 내 방문과 관계가 있을까?’

그러다 혼자서 도리질했다.

‘설마, 분명 주무시고 계셨고 깨어 계셨다 하더라도 나 같은 여자애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셨을 리는 없지.’

착각을 깨려는데 그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이런 말을 했다.

“아, 끊을 때 이런 말을 하시긴 했어. 나 때문에 한국에 오려고 한 게 아니었구나? 음흉한 놈.”

“…….”

“듣고는 좀 황당하긴 했지.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닌데 말이야.”

어머니가 들으셨다…….

지연은 혼자서 얼굴이 빨개지며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 부끄럽다, 어쩌지?’

눈치 없게 수현이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지연이 나 없는 동안 우리 어머니한테 찾아가서 내 욕하고 그런 건 아니지? 하긴, 그런 걸 용납하실 분이 아니긴 하다. 그런데 왜 마음을 바꾸셨지?”

욕은…… 안 했어요. 귀엽게 원망 정도?

성스러운 밤을 보내고 맞은 이 성스러운 아침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려 한다.

이럴 땐 정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해!

지연은 급히 그의 얼굴을 잡았다.

“수현 씨, 나 또 뽀뽀해주세요.”

*

밤새 격정적인 재회를 한 두 사람은 아침이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수현은 지연이 깊게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그녀를 보았으니 이제 또 다른 소중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는 택시를 타고 광화문에 있는 한 호텔로 향했다.

‘자식, 아직까지 술에 절어 있는 건 아니겠지?’

지연에게 연락을 끊었듯 애런에게도 연락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여기에도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애런을 위한 커다란 선물을 준비했다.

그 선물이 완성될 때까지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식, 좋아할까? 내 얘기를 들으면?”

그가 방황을 접고 이제 형을 따라주면 좋으련만…….

비록 애런이 지금은 보기에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지만 어쨌든 그는 결단력 있고 명석한 로즈의 피를 받은 아들이다.

수현은 그를 믿고 있다.

그는 애런에게 안길 선물을 생각하며 기분 좋은 마음으로 스위트룸에 올라갔다.

“애런!”

큰 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들어갔지만 대답이 없었다.

“애런?”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애런이 또…… 사라졌나?

순간 불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애런과 평생을 함께 한 형의 예감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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