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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고 니 형-54화 (54/77)

제54화. 이러고 놀았어? 나 없는 동안

2018.08.08.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연의 머리와 가슴에는 잡지에서 보았던 수현과 그의 비서의 사진, 그리고 그가 한국에 왔었다는 문구만 뱅뱅 돌았다.

편의점에 손님이 와도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쳐다만 봐도 괜히 서러워 눈물을 뚝, 흘릴 것 같았으니까.

그때 봉수가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그는 아빠의 방문에도 잠시 고개만 끄덕일 뿐 시선을 피했다.

봉수는 그녀의 기분을 파악했다.

“요 며칠 계속 기운이 없구나. 어디 아프니?”

아프냐고 물어봤지만 사실 봉수는 그녀가 몸이 아닌, 마음이 힘들다는 걸 알고 있다.

틈만 나면 휴대폰으로 기사를 검색하는 모습,

화장실을 갈 때도 휴대폰을 놓지 않는 모습,

또 지금도 힐끗힐끗 휴대폰을 살피며 한숨 짓는 모습.

이런 모습들은 누가 봐도 멀리 있는 연인에 대한 궁금함과 그리움 그리고 야속함을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답답하겠지, 떠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염려스러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봉수에게 지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프긴요, 일하느라 힘들어서 그렇죠. 아빠는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평생을 했대?”

“글쎄, 해야 하니까 한 거지. 힘들다 아니다 따지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나?”

봉수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지연을 보며 두 달 전 일이 떠올랐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수현은 봉수를 찾아왔었다.

‘지연이가 미혼모로 살지 않게, 줄리가 아빠 없이 크지 않게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지연이, 이제 그만 용서해주세요.’

무릎을 꿇고 다짐을 하듯 지연 대신 용서를 빌었던 수현.

봉수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울컥거릴 만큼 감동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현이 어떤 조건을 가진 남자인지도,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사람인지도 몰랐지만,

그저 그의 듬직하고 진솔한 모습에 이미 그를 지연의 남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연에겐 그날의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수현이 봉수에게 그런 약속을 했다고 말해주면 지연 입장에선 또 부담스럽게 들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바닥까지 떨어진 지연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선 그날의 이야기가 필요해 보였다.

“우리 사위는 잘 있다니?”

앞뒤 다 자르고 훅 치고 들어오는 봉수의 말에 바닥만 파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올라왔다.

“무슨 말씀이세요?”

“진수현, 그 사람 얘기다.”

봉수는 그날, 수현과 있었던 일들을 지연에게 들려주었다.

.

.

.

지연은 편의점 일을 봉수와 교대하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며칠째 들어가지 않았던 수현의 방 들여다보기.

침대 위에 뒤집어놓은 곰돌이가 보였다.

웃고 있는 얼굴이 너무 얄미워 언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엎어두었다.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뒤집어진 곰돌이와 마주 보았다.

오늘은 곰돌이에게서 수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 아빠가 해주었던 수현과의 얘기들이 떠올랐다.

‘내 그 날은 주책없어 보일까 봐 표현은 안 했는데 참 욕심나는 청년이더라.’

수현은 그날 그녀에게도 하지 않았던 그녀와의 미래를 봉수의 눈을 보며 다짐했다고 했다.

‘제가 지연이와 줄리, 책임지겠습니다.’

봉수는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딸에게 그를 믿으라고도 기다리라고도 하지 않았다.

‘막말로 맘이 변했을 수도 있다. 알고 보니 우리 집이랑은 상대도 안 되는 엄청난 집안의 아들이더구나.’

아빠도 당시엔 수현이 그 정도의 조건을 가진 남자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난 그 사람 원망 안 한다. 어쨌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너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으니까.’

‘…….’

그렇지, 아빠가 날 용서했지.

막연히 시간이 흘러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아빠의 말을 듣고 보니 아빠가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 것, 편의점에 나와 달라고 한 것, 힘들면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이 다 수현이 떠난 직후였다.

그 사람 때문에 아빠가 날 용서할 수 있었던 거야.

지연은 참 오랜만에 곰돌이의 반달 입술에 뽀뽀를 했다.

“너무 큰 선물을 주고 갔네, 우리 수현 씨가.”

까만 연필로 칠해놓은 듯 시커멓게 뭉개졌던 가슴이 아빠와의 대화 이후 조금은 하얘진 기분이다.

막 곰돌이를 품에 안으려는데 줄리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엄마!”

전속력을 다해서 침대로 폴짝 뛰어오르는 장난꾸러기 그녀.

갑자기 지연이 안고 있던 곰돌이를 두 팔로 휙 안아 자기 품으로 가져갔다.

“이거 내 거였네.”

그러더니 지연을 야속한 눈으로 흘겼다.

지연이 다시 곰돌이를 그녀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거 내 거야.”

그녀도 모르게 줄리에게서 곰돌이를 사수.

하지만 줄리도 필사적으로 곰돌이를 잡아당겼다.

“아냐, 금화댁 할머니한테 방금 들었어. 이거 수현이 아빠가 보내준 거라며. 난 또 엄마가 사다놓은 건 줄 알고 보지도 않았었지.”

“수현이 아빠?”

지연이 되묻자 뽀얀 줄리의 얼굴이 자두처럼 붉어졌다.

큰 실수를 한 것처럼 제 손으로 입술을 톡톡 때리더니 무안한 듯 곰돌이의 코를 만지작거렸다.

지연이 다시 물었다.

“너 방금 수현이 아빠라고 했어?”

줄리는 한참을 입술을 삐죽대더니 새처럼 작게 입을 모았다.

“응, 미국 가기 전날인가? 나한테 딸이 돼달라고 했었어. 막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무릎도 꿇고.”

“…….”

“엄마한테 비밀이라 그랬는데. 여자한텐 프러포즈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데 나한테 먼저 한 거 알면 삐질 거라고.”

“…… 하, 프러포즈?”

지연의 당황스러운 기분과는 달리 줄리는 그날의 일들이 꿈같은지 눈망울을 하늘로 올리며 히죽거렸다.

“히히히, 로맨틱했다.”

그러면서 자기 덩치만큼 큰 곰돌이 머리를 소중하게 안아주었다.

“나도 아빠가 사준 인형 생겼다, 히히.”

이 인형이 줄리에겐 ‘아빠’라는 존재에게 받은 첫 번째 선물.

사실 수현 씨가 나한테 보낸 곰돌이지만…….

인형은 당연히 자신에게 보냈을 거라 생각하는 줄리의 얼굴이 놀이공원이라도 선물 받은 아이처럼 행복해 보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줄리한테 보낸 거 같다.”

그녀는 곰돌이를 줄리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그가 일부러 이런 걸 의도했을까?

수현을 기다리다 지친 그녀가 무너지려 하면 자꾸 그가 남긴 사랑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한 달 전엔 곰돌이를 보내 첫 번째 위기를 넘게 하더니,

오늘은 잡지를 보고 무너지기 직전 아빠와 줄리를 통해 그의 사랑을 전해준다.

물론 아빠든 줄리의 이야기든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있었던 스토리다.

그새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변 사람들을 통해 보여준 깊은 사랑에 새삼 감사함이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 나약해질 줄 알고 있었나?’

그깟 잡지 쪼가리 하나, 전화 한 통으로 무너져 내린 그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녀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녀도 뭔가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

“준비는 완벽히 끝났다.”

태규는 애런에게 한 달 동안 공을 들여 만든 위조 유언장을 내밀었다.

애런은 유언장을 쭉 살펴 보았다.

그런데 그가 읽어도 실소가 터져버리는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이렇게까지 티가 나게 편파적으로 작성하면 어떡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형에게는 티끌만큼의 유산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이러면 의심이나 받지!”

애런이 유언장을 맘에 들어하지 않자 태규는 그를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의심은 당연히 받는 거 아냐? 이미 다 작성돼 있을 유언장을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뒤집는 건데.”

그의 말이 맞긴 하다.

로버트가 이끄는 법률팀이 이미 로즈의 유언장을 가지고 있을 게 뻔하다.

그런데 새로운 변호사를 대동한 새로운 유언장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충격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애런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태규는 오히려 당사자인 애런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심을 하든 말든 우린 그냥 뻔뻔하게 나가는 거야. 난 법정 싸움까지 각오하고 있어.”

물론 애런도 알고 있다.

태규가 개인적으로 수현에게 굉장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래서 지금의 이 일도 일이란 생각보단 수현을 엿 먹인단 감정으로 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애런이 그에게 일을 의뢰한 이유도 바로 태규의 이런 분노를 이용하기 위해서이기는 하다.

그런데 막상 유언장을 보니 심장이 작아지고 있다.

‘형이 나한테 이런 짓을 당할 정도로 잘못한 게 있나?’

물론 어제 보았던 잡지 속 수현은 그를 배신감에 치를 떨게 했다.

여비서와의 스캔들로 지연에게도 상처를 줬고 회사에서도 혼자 독주하는 모습을 보이며 친아들인 그를 배제했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 아직도 그를 향한 신뢰가 남아 있다.

아무리 그에 대한 신뢰를 씻어내려 해도 마음 한구석 아로새긴 듯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형제로 살아오면서 형으로서 보여줬던 수현의 크고 작은 사랑들 때문인 듯.

그가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자 태규가 조금 누그러진 태도를 취했다.

“일단 이대로 하고, 정 마음에 걸리면 그때 네가 형을 챙기면 되잖아. 네가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살았으니까 의붓형한테도 밀린 거야.”

태규는 상대의 마음속 가장 유약한 부분을 건드릴 줄 아는 영악한 남자였다.

그의 마지막 말이 애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래, 그럼 진행하자.”

애런의 결정에 태규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언제?”

“바로 내일. 내일 우리는 엄마한테 가는 거야.”

태규는 기쁨의 웃음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웃음은 모든 일이 성사된 후에 터져도 되는 거니까.

*

하늘을 보니 노을의 흔적이 아주 조금 남아있다.

이제 곧 거리에 가로등이 눈을 뜨며 어두운 거리를 밝힐 듯.

수현의 방에 한참을 머문 지연은 오늘이 가기 전 꼭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비싼 옷이자 가장 예의를 갖춘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그녀가 탄 택시가 도착한 곳은 한국 병원.

그녀를 알고 있는 로버트를 통해 VVIP 병동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병실을 확인하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막 잠이 드신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깨어계셨는데…….”

잠시 고민하던 지연은 로버트에게 부탁했다.

“그러면 들어가서 얼굴만이라도 뵈면 안 될까요?”

로버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것 아닙니까? 주무시면 말씀 나누기가 힘들 텐데.”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부탁드릴 게 있긴 했었는데…… 그냥 얼굴만 뵙고 갈게요.”

“급한 부탁이시면 깨워드릴까요?”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정말로 잠깐만 뵙고 갈게요.”

얼굴만 보고 가겠다…….

로버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녀가 원하는 걸 해주기로 했다.

이렇게 눈빛이 맑은 아가씨라면 안 좋은 의도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럼 들어가시죠. 전 밖에 있겠습니다.”

로버트는 정중히 병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감사의 목례를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지만 창문의 커튼이 열려 있어 달빛과 밖에서 들어오는 간접 등으로 사물을 보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특히 누워 있어도 높게 솟은 로즈의 콧날은 달빛을 받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지연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드러나는 그녀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담은 아름다움에 지연의 시선은 빨려들듯 그녀를 향했다.

‘이렇게 고운 엄마도 있구나.’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미세한 주름들로 세월의 덧발림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겨지는 그녀의 미모는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올 정도로 수려했다.

‘수현 씨가 이렇게 아름다운 엄마 품에서 컸다는 거지?’

엄마를 일찍 여읜 지연으로선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하고.

적절한 어둠과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신성함 때문일까?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그녀를 지배했던 두려움과 긴장감은 사라지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작은 소리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 송지연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원래의 계획으로는 이렇게 얼굴을 보고 인사만 하고 나가는 것이었는데,

달빛의 힘인지 로즈의 아름다움이 이끄는 힘인지 조금 더 그녀 옆을 지키고 싶어졌다.

‘그래, 조금만 앉아 있다 가자.’

그녀는 침대 옆에 마련된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앉고 나니 오늘이 가기 전 로즈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떠올랐다.

만약 로즈가 깨어 있었다면 그녀는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했다.

“수현 씨한테 제 마음을 전해주세요.”

그녀와는 전화 한 통화 하지 못하고 있지만 엄마와는 연락을 하고 있을 테니까.

지연은 긴 속눈썹을 내리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누워 있는 로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금발에 하얀 얼굴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 여자, 수현은 까만 눈동자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한국남자.

그녀와 수현이 조금도 닮았을 리가 없는데 묘하게도 분위기가 비슷하다.

도도하고 시크하면서도 커다란 아량을 품고 있을 것 같은 품위와 고상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가? 그녀를 수현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님, 제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그녀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뻔뻔스럽게도 어머님이란 말이 나온다.

“어머님 아들이 한 달이 돼가도록 연락을 하지 않고 있어서요.”

툴툴대는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친한 사람한테 얘기하듯.

“어머님 아들 참 야속해요. 전화 한 통이 뭐라고.”

한두 마디 내뱉다 보니 깨어 있는 사람한테 넋두리하듯 속내가 터졌다.

“남자들은 변한다더니 그게 맞는 말인가 봐요. 전 수현 씨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속았죠, 뭐.”

목소리에 감정도 가득 담긴다.

“그래놓고 우리 아빠랑 우리 딸한테 프러포즈는 왜 했대? 책임도 못 질 거면서.”

그런데 프러포즈를 상상하니 웃음도 터진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수현 씨가 우리 아빠한테도 줄리한테도 무릎을 꿇었대요, 하하, 그 도도한 사람이.”

듣지 못하는 그녀에게 맞장구도 부탁한다.

“어머님은 상상이나 해보셨어요? 수현 씨가 그럴 거라고?”

그런데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지연은 올라왔던 감정을 정리했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저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었다고요.”

가슴이 들썩거릴 만큼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데…… 연락이 없네요. 이제는.”

눈가가 뜨거워지며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그런데요…… 제가 수현 씨한테 전해달라고 하는 말은 이런 말들이 아니었어요.”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려 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고맙다는 말이었어요.”

목소리가 파르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만도 너무 고맙다고…… 아빠와의 사이를 이어준 것, 줄리에게 ‘아빠’란 존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어 준 것…… 그리고…….”

뚝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절 그렇게 많이 사랑해준 것.”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까지만도 너무 고맙다고……. 이대로 우리가 끝나더라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더 이상의 독백은 하염없는 눈물을 불러올 것 같다.

아무리 보지 못한다지만 수현의 엄마 앞에서 이런 궁상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님…….”

그녀는 목소리에서 슬픔을 걷어내고 담담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합니다.”

보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고쳐 앉았다.

“그런데 버릇없는 말, 한마디만 더 할게요.”

그녀는 모았던 손을 침대 위로 올려 가지런히 놓여있는 로즈의 손 위로 올렸다.

로즈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도가 참 따뜻했다. 진짜 엄마처럼.

“수현 씨,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수현 씨,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꼭 건강하세요.”

그녀는 잡았던 손을 내리고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시 살금살금 걸어 병실 문 앞에 섰다.

그녀는 그렇게 로즈의 방을 나갔다.

로즈의 긴 속눈썹이 깜박거리고 있다는 걸 모른 채.

.

.

.

두서없이 이런저런 말을 털어내고 왔지만 고해성사를 보고 온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잠든 로즈에게 전한 그녀의 마음이 수현에게 전해질 리는 없지만,

어쨌든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큰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그래, 이대로 끝나더라도 후회는 없어. 원망도 없고.”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단단해졌다.

막 집으로 들어오는데 봉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줄리는 오늘 이쪽 집에서 재우마. 오랜만에 줄리 없이 푹 잠들도록 해.

봉수는 지연에게 마음을 다독일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

그녀는 완벽한 가족을 가진 기분이었다.

아빠와 그녀, 그리고 줄리.

‘이거면 됐어. 나에겐 지켜야 할,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수현의 마음이 변했더라도 이런 가족들이 있으니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수현의 방을 지나쳐 방으로 가려는데 그의 방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줄리가 놀다가 방문을 열어놓고 갔나?’

지연은 수현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그냥 닫아주고만 가려다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워낙 익숙한 방이라 침대까지 가는 데 걸릴 게 없다.

항상 이불 위에 놓여 있던 곰돌이가 오늘은 이불을 덮고 있다.

이불이 볼록 튀어나와 언뜻 보면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다.

지연은 이불을 슬쩍 들어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 누워 있는 곰돌이를 뒤에서 안았다.

등진 곰돌이의 귓가에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오늘은 특별히 백허그를 해줄게, 곰돌아.”

두 팔을 쭉 뻗어 곰돌이의 허리를 감았다.

그런데…… 응?

그녀의 가슴에 완전히 밀착시킨 곰돌이의 등에서 포실한 털이 아니고 단단한 사람의 살갗이 느껴진다.

곰돌이를 감은 두 팔엔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이건…… 뭐지?

곰돌이에게 감았던 두 팔을 빼내려는데 곰돌이의 손이 그녀의 두 팔을 꽉 잡는다.

그러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한다.

“이러고 놀았어? 나 없는 동안?”

“!”

이 목소리는…… 이 음성은…… 이 향기는…….?

곰돌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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