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연인의 배신
2018.08.04.
미선이 첨부한 사진은 미국의 한 패션 잡지에 실린 수현.
그런데 사진 속 수현은 지금까지 지연이 알았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 고급 브랜드의 패션쇼 애프터파티에서 그는 중요 부위만 빼놓곤 몸매의 대부분을 시원하게 드러낸 섹시한 모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론 샴페인, 남은 한 손으론 쥐기만 해도 꺾일 것 같은 극세사 같은 모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환한 미소까진 아니었지만 충분히 그가 즐겁다는 건 알 수 있을 정도의 미소를 띠며.
‘모델들과 지금 즐거운 거야?’
어떻게 보면 파티에서 흔히 있을 법한 자연스러운 연출인데 그 주인공이 수현이라고 생각하니 배신감이 올라왔다.
이러느라 바쁜 건가? 미녀들과 파티를 즐기느라?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휴대폰을 덮으려는데 미선이 또 톡을 보냈다.
-패션 회사라 어쩔 수 없을 거야. 유행에 민감한 분야니 감을 잃으면 안 되니까.
그녀는 막상 사진을 보내놓고는 미안했나 보다.
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헤어져 있단 현실에 쨍쨍한 봄 햇살을 봐도 겨울밤 구름에 가려진 흐린 달처럼 느껴지는 건 나 혼자뿐인가 보다.
질투도 나고 화도 나며 얄밉고 서럽고 야속하고.
‘그래, 이렇게 좋은 곳에서 이렇게 대접받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겠어?’
극과 극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일까?
그녀는 단합회 이후 오드리 화장품을 그만두고 봉수의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틈틈이 전공을 살려 제대로 된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입사 원서를 내고는 있지만 아직 정해진 건 없다.
그런데 정규직 사원으로 뽑아주는 데가 있어도 문제는 있다.
줄리를 돌봐야 한다는 현실.
그래서 비교적 근무 시간이 자유로운 곳을 찾다 보니 선택할 수 있는 범위도 좁아 들었다.
‘어쩌면 난 줄리가 클 때까진 계속 편의점에서 일해야 할지도 몰라.’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면 가끔 스스로를 한없이 추락시킬 때가 있다.
반대로 그는 세계에서 제일 화려한 도시에서 섹시하고 멋진 모델들과 엄청난 스케일의 일을 한다.
그와 한 지붕 아래 있을 땐 몰랐다.
그들이 살아온 세계의 간극이 이렇게 크다는 걸.
그런데 그가 원래의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니 여실히 느껴진다.
‘말로만 듣던 신분 차이라는 게 이런 건가?’
뼛속까지 초라함이 스며드는 기분이다.
입고 있는 하늘 빛깔의 편의점 유니폼도 오늘따라 형편없이 누추해 보인다.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담배 하나 주세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손님에게 친절한 미소도 나오지 않았다.
손님이 원하는 담배를 찾는 그녀의 손에 활력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지금 있는 이 자리가 너무도 작아 보였다.
*
‘또 이런 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네.’
지연과 통화를 마친 수현은 가까스로 낸 소중한 시간이 허무하게 날아간 기분이었다.
중요한 회의 시간에 그는 지연과의 통화를 위해 화장실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잠시 잠깐 시간을 내지 않으면 도저히 따로 뺄 시간이 없었다.
그는 지금 로즈가 몇 달 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대신 검토하고 결정하고 추진하느라 숨 쉴 여유조차 부족하다.
그런데 이렇게 중독자처럼 일을 하지 않으면 분명 회사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그녀의 부재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올 게 뻔하다.
그러면 로즈의 반대파들이 그 틈을 이용해 수현을 공격하려 할 테고.
‘절대 그런 일을 만들어선 안 되지.’
그래서 수현은 지금 한숨 한 번 쉴 틈도 없이 일하고 있다.
그는 이 소중한 통화의 시간 동안 그녀의 생기 있는 목소리를 기대했다.
‘수현 씨, 힘들죠?’
낭랑하고 해사한 그녀의 이 한마디면 발바닥까지 내려온 피로가 사라질 텐데.
물론 처음엔 그녀도 그랬다.
그가 아무리 피곤에 전 거친 음색을 내도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아요.’
그의 과로를 걱정해주기도 했다.
‘수현 씨 힘들어서 어떡해요, 옆에 있으면 어깨라도 주물러주고 싶다.’
그러면 그는 오히려 더 피곤한 목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부렸다.
‘너무 힘들어. 이러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의 응석에 지연은 호들갑을 떨며 염려해주었다.
‘제발 아프지 않을 만큼만 일해요. 수현 씨 아프면 저 미국으로 날아갈 수도 있어요.’
비록 진짜로 미국으로 날아오진 못하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그를 걱정해주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강한 남자도 때로는 자신의 여자에게 아이같이 응석을 부리고 싶으니까.
그런데 그의 이런 어리광을 받아주던 그녀가 변하기 시작했다.
한 달이란 시간에 이미 지쳐버린 걸까?
여보세요, 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토라진 듯 푸념부터 내뱉는다.
‘아, 정말 힘들다. 통화 한 번 하기.’
얼마나 힘들게 전화했는데…….
그럼 그도 푸념을 하게 된다.
‘이 전화도 겨우 화장실 간다고 빠져나와서 하는 거야. 회의장을 벗어날 수 없어.’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면 생기 지수를 올려 좀 힘이 나는 소리를 해줬으면 좋으련만 따지듯 묻는다.
‘맨날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어요? 저한테 전화 한 통 하기 힘들 만큼?’
할 수 없이 다시 상황을 알려준다.
수도 없는 사람들과 분, 초 단위로 중대한 미팅이 잡혀 있다고.
그런데 안쓰러워하기는커녕 너무 뻔한 질문을 한다. 그것도 떠보듯이.
‘회식 같은 것도 있어요?’
회식은 없지만 파티가 있다는 대답도 얼마나 많이 해줬어!
그럼 또 여자도 있냐고 묻는다.
있다고 그러면 또 예쁘냐고 묻고.
얼마 전부터 같은 패턴의 질문과 대화가 돌고 돌고 또 돌고.
솔직히 그의 머릿속엔 파티에 참석하는 모델들이 ‘여자’라는 개념도 없다.
모델들이 왜 여자야? 어찌 보면 회사가 내세우는 상품이지.
그냥 패션회사라는 특성상 고용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고.
‘왜 자꾸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지? 우리 얘기만 해도 아까운 시간에.’
살짝 짜증이 밀려올 무렵 수현의 비서가 화장실로 들어와 그를 찾았다.
“팀, 사람들이 기다려.”
전화를 급히 끊어야 하는 그는 지연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마무리를 하려 했지만 비서 뒤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할 수 없이 뚝 끊을 수밖에.
그도 답답하다.
상황을 온전히 보여줄 수도, 말해 줄 수도 없으니 오해만 쌓여가는 것 같고.
오늘도 기대했던 지연의 밝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다시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분위기 훈훈한 회의는 오늘도 그른 듯.
*
지연은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센서 등만 잠깐 켜지고 사라질 뿐 불을 켜지 않은 집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하필 오늘은 줄리도 없네.’
줄리가 봉수와 금화댁을 따라 또 낚시회를 갔기 때문이다.
지연은 오늘, 저녁도 먹지 못하고 일을 했다.
너무 바빴다기보다는 배고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모든 감각이 복잡한 머리와 속상한 마음으로만 가 있었다.
‘이럴 땐 맥주 한 캔이 딱이지.’
탄수화물과 알코올을 동시에 공급해주니까.
부엌으로 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들었다.
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니 빈 위장으로 알코올이 빠르게 흡수됐다.
흡수된 알코올은 그녀의 혈관까지 축축하게 적시며 어지럽게 만들었다.
‘맥주 한 캔에도 취하나?’
취기가 올라오는데 그 기분이 그렇게 싫진 않았다.
맥주 한 캔을 더 꺼내 일전에 줄리가 먹다 남은 과자 봉지를 옆구리에 끼고 2층으로 올라왔다.
2층에 올라오면 제일 먼저 수현의 방이 보인다.
그녀는 매일 한 번 정도는 그의 방에 들어간다.
어쩔 땐 청소 목적으로 또 어쩔 땐 그가 그리워.
그런데 오늘은 별로 그 문을 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모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사진 속 그가 떠올랐기 때문.
그냥 스쳐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씻을 기운도 없어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보니 배터리가 10%밖에 남지 않았다.
‘어! 수현 씨랑 전화하다 끊기면 어쩌지?’
불에라도 댄 것처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냥 앉았다.
낮에 통화했으니 어차피 오늘은 전화도 오지 않을 텐데 뭐.
그녀는 다시 바닥에 앉아 가지고 온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그런데 넘긴 술에서 짠맛이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목까지 차오른 눈물이 맥주와 함께 섞여버린 것.
울진 않으려 했는데 이젠 눈물샘까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녀는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달빛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서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서러움에 취해 그대로 잠에 들었다.
바닥에 놓은 휴대폰이 진동하는 줄도 모르고.
.
.
.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 상태로 잠에 들었다.
잠을 깨울 정도로 쑤셔오는 허리와 목의 통증이 그녀를 깨웠다.
바닥에 앉은 채 허리만 돌려 침대에 엎드리고 있었으니 몸의 근육이 정상일 린 없겠지.
“에고고고.”
앓는 소리를 하며 빳빳해진 근육을 이완시켰다.
침대에 올라가려다 모르고 휴대폰을 밟았는데 배터리가 나가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냥 잠에 들까 하다가 충전기를 연결해 전원을 켰다.
혹시나 줄리가 새벽에 잠이 안 온다고 전화할 수 있으니.
그런데 전원이 켜지고 액정 위 글씨들이 선명해지니 ‘부재중 전화 5통’이라고 떴다.
수현이었다!
“뭐야, 언제 한 거야?”
마지막 전화가 10분 전이었다.
그녀는 수현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는다. 또 하고 또 하고, 그래도 받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포기하려는데 그가 보낸 음성 메시지가 있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음성을 남겨놓은 듯.
음성 첫 마디가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다.
‘밤에 왜 전화를 안 받지?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들게 시간 낸 줄 알아? 이제 내 전화 기다리지도 않는다는 거지?’
지연은 그의 푸념에 실소가 터졌다.
‘매일 기다리다 이번에 한 번 그랬거든요? 자기는 맨날 전화 안 받으면서.’
그런데 예민하게 따지고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뉴욕 와서 느끼는 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공간보단 사람인 것 같다는 거야. 아무리 좋은 곳을 가도 행복하지가 않네? 지연이 있는 빨간 지붕 집이 그리워.’
뭐야, 갑자기…….
그의 말이 토라진 것 같은 그녀를 달래기 위한 급조된 초콜릿이라 하더라도 일단 기분은 좋아졌다.
그는 잡지에 실린 사진에 대해 언급하듯 파티 이야기도 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모델들과 잡지용 사진을 찍는 것도 짜증나. 그런데 그녀들과 친한 척 연기해야 해. 고용주가 좋아하지 않는 모델을 어느 소비자가 좋아해주겠어.’
혹시 내가 그 사진을 봤다는 걸 아나?
알고 하는 얘긴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해명 한마디에 하루종일 그녀를 괴롭혔던 그 사진 속 영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하긴, 사진 찍는데 인상 쓸 수는 없으니까.’
막 갑자기 이해도 되면서.
그런데 그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지연아, 내 방 가봤어?’
…… 수현 씨 방?
‘매일 한 번씩은 들어가 본다고 그랬지? 봤겠구나. 그럼.’
봐? 뭘 봐?
어제만 딱 하루 안 들어갔는데 고새 뭔가가 달라졌나 보다.
그녀는 바로 일어나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여니 불 꺼진 그의 방으로 복도의 등빛이 침투하며 그의 침대 위로 뭔가가 보였다.
‘어? 저게 뭐지?’
침대 위의 놓인 물건을 확인하는 순간 며칠 동안 한 번도 짓지 않았던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하하하하하.”
침대 위에 사람 덩치만 한 커다란 곰 인형이 누워 있는 것.
이걸 언제 갖다 뒀을까?
음성 메시지에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제 잠깐 백화점에 가서 지연이 줄라고 샀어. 가장 빠른 편으로 한국으로 보내면서 금화댁 아줌마한테 지연이 없을 때 몰래 받아달라고 문자 드렸는데 잘해주셨는지 모르겠다.’
엉큼한 금화댁 아줌마,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요즘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오해가 많은 거 같아. 아무래도 얼굴도 못 보고 서로 만지지도 못하니까 키스 한 번에 풀릴 일들을 일일이 해명을 해야 해.’
맞는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구구절절한 해명들이 뭐가 필요할까?
진하고 달콤한 키스 한 번이면 온몸이 사르르 녹을 텐데.
‘그래서 사봤어. 가끔 그 방에서 지연이가 그 곰 인형을 안고 잠들었으면 좋겠어. 그 곰돌이가 나라고 생각해줘. 그렇게라도 너랑 잠들고 싶어.’
그는 낮에 하지 못했던 사랑의 인사도 해주었다.
‘아까 못했던 인사 지금 할게. 사랑해.’
‘…….’
참 허무하기도 하다.
며칠 동안 누적되며 오늘 절정을 찍었던 섭섭했던 마음이 말 한마디로 녹아버렸다.
사랑한단 말이 뭐라고.
그러면서도 야속한 마음은 남아 있다.
진작 좀 해주지, 사랑한다는 이 말 한마디가 뭐가 힘들어서.
이 말 한마디를 못 들어서 오늘 하루 얼마나 우울했는데.
그래도…… 들으니까 살 것 같다.
지연은 포도알 같은 눈빛으로 수현의 침대 위에 놓여있는 곰돌이에게 다가갔다.
곰돌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어스름하게 들어오는 달빛에 곰돌이의 까만 눈과 코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니가 수현 씨란 말이지?’
날 애먹인 벌로 일단 한 대 쥐어박고 시작.
지연은 곰돌이의 코를 검지와 중지로 가볍게 비틀었다.
왠지 아야, 하고 수현이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이거 재밌는데?’
내친김에 한 대 더?
이번엔 곰돌이의 귀와 귀 사이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그래도 웃고 있는 곰돌이의 얼굴을 보니 더는 때릴 수가 없었다.
지연은 곰돌이의 커다랗고 보송한 얼굴을 손에 쥐고 반달을 그리고 있는 그 입술에 뽀뽀를 했다.
입술을 간질이는 포실한 곰돌이의 털들.
수현의 실크처럼 매끄러운 입술은 아니지만 조금의 위로가 된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곰돌이와 눈을 맞추며 고백을 했다.
‘사랑해요, 수현 씨.’
그녀의 사랑 고백에 곰돌이의 입매가 조금 더 큰 반달을 그리는 듯하다.
이렇게 내가 먼저 하면 될걸.
왜 그가 먼저 해주길 기다리고만 있었을까?
아마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자격지심 때문인 듯.
너무 높은 곳에 있는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으니까.
하지만 수현이 보내준 곰돌이를 보며 다짐했다.
‘앞으론 오해하지 않을게요, 징징대지 않을게요, 그리고 사랑한단 말은 제가 먼저 할게요.’
이 곰돌이만 있음 또 그렇게 버틸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지연은 이불 속으로 곰돌이와 함께 쏙 들어갔다.
그의 팔에 머리를 베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푹 잠들었던 속초의 어느 밤을 떠올렸다.
이번엔 곰돌이를 팔에 올리고 곰돌이의 얼굴을 가슴에 묻고 눈을 감았다.
이젠…… 제가 품을게요.
그녀는 그렇게 수현을 품고 잠에 들었다.
성숙한 연인이 되겠다고 곰돌이에게 약속하면서.
.
.
.
곰돌이를 안고 잘 때만 해도 몰랐다.
그날 수현의 음성 메시지가 그녀가 들은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될 줄은.
*
그날 이후 한 달이란 시간이 더 흘렀다.
그사이 수현에게서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참다못해 그녀가 해봤지만 번호가 바뀐 건지, 무슨 일이 있는지 받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의심하기엔 그는 매번 미국의 타블로이드 잡지 속에 등장했다.
잡지 속 그의 슈트는 모델처럼 세련됐고 그의 주변엔 그림자처럼 여자 모델들이 함께했다.
처음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이미 미선이 보내줬던 잡지 사진으로 면역이 되었고 또 수현이 그에 대한 해명을 해주었기에.
‘고용주가 좋아하지 않는 모델들을 소비자들이 좋아해줄 린 없잖아.’
그녀들과 친해 보이는 건 철저한 연기라는 말.
게다가 곰돌이가 주는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그녀는 매일 밤 줄리를 재우고 수현의 방으로 건너가 곰돌이를 수현처럼 안아주고 때로는 곰돌이 품에 안기기도 했다.
미울 땐 꿀밤, 예뻐 보일 땐 뽀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도 곰돌이가 주는 수현의 향기는 꽤 오래 지연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그런데 곰돌이가 주는 마법이 점점 풀려가는 걸까?
풍성한 향을 뿜어내던 향수도 시간이 지나면 소진되어 바닥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루하루 수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곰돌이에게서 느껴졌던 그의 향기도 무뎌져갔다.
어느 날부터 곰돌이에게 주는 뽀뽀보단 꿀밤이 늘고 늘고 늘고.
나중에는 그 꿀밤도 별로 의미 없어 보이고.
수현처럼 보였던 곰돌이가 이제는 그냥 평범한 곰 인형처럼 보인 달까?
‘도대체 왜 전화를 안 하는 걸까?’
아주 잠깐씩 통했던 화장실 통화마저 그리워진다.
‘아까 못했던 인사 지금 할게. 사랑해.’
음성 메시지의 끝인사를 몇 번이고 듣고 들었는지…….
오늘도 지연은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잡지코너에 오늘 배달된 잡지를 꽂고 있는데 한 잡지 표지의 기사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줄리아나 기업의 새로운 CEO, 뉴욕을 접수하다.
미국 잡지를 통해서만 봤던 수현의 기사를 한국 잡지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일상적인 기사가 아닌 큰 이슈가 있다는 의미.
지연은 얼른 잡지를 펴 수현의 기사를 살폈다.
-최근 의류보다 코스메틱 영역에 힘을 주고 있는 패션 기업 줄리아나는 최근 아시아의 중소 화장품 회사를 공격적으로 인수하고 있다. 이주 전의 일본의 중소 화장품 회사 ‘BIG ONE’을 인수함에 그치지 않고 한국으로 건너가 합병할 회사를 타진하는 등……
기사를 읽어 내리던 지연은 수현이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다는 내용보단 다른 것에 신경이 집중됐다.
‘한국에…… 왔었어?’
그런데 그가 지연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아주 잠깐 들렀어도 됐을 텐데,
아니면 그녀에게 잠깐 그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해도 됐을 테고.
그런데 그다음 내용이 그녀의 예민한 신경을 더욱더 자극했다.
-그의 아시아 순방에는 최근 연인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진 수행비서 ‘레이첼 리’가 그림자처럼 함께했다. 그녀는 수행비서의 역할을 넘어 그와 모든 걸 함께 하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그의 모국어인 한국말로 둘만의 대화를 주고받았고……
기사의 밑에는 수현과 그녀가 아주 친밀한 모습으로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는 사진이 함께했다.
‘비…… 서?’
여자의 촉이랄까?
순간 일전에 수현과의 통화 중 그를 찾아 화장실로 들어왔던 한 여자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팀, 사람들이 기다려.’
‘그래, 그때 분명 서툰 한국말로 수현 씨를 불렀었어. 혹시 그 여자?’
당시에도 그녀의 등장이 그렇게 반갑진 않았다.
남자 화장실로 그를 찾아 들어온 것도 걸렸었고 반말로 그를 불렀다는 것도 거슬렸다.
그런데 그녀와 최근 연인관계로 발전했다니.
샐럽들끼리 눈만 마주쳐도 스캔들을 터뜨리는 타블로이드 잡지의 천박한 특성을 알고는 있지만 이 기사는 지연에게도 전혀 터무니없게 보이진 않았다.
모든 게 들어맞았으니까.
한 달 사이 그에게 전화가 없던 것, 한국까지 왔는데 그녀에게 들르지 않은 것,
그와 그의 비서가 다정한 귓속말을 나누는 사진까지.
툭-
지연의 손에 힘이 빠지며 잡지가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떨어진 잡지와 함께 그녀의 엉덩이도 그대로 바닥을 찧어버렸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엔 곰돌이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
광화문에 위치한 한 호텔의 스위트룸.
애런도 지금 지연이 보고 있는 잡지와 똑같은 잡지를 들고 있었다.
수현에 대한 기사를 다 읽은 그는 잡지를 손으로 꾹 구겨버렸다.
분노를 구기는 것처럼.
수현이 뉴욕으로 가기 전, 그는 애런에게 들러 어머니의 사랑과 자신의 믿음을 들려줬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연과 줄리를 지켜달라고까지 하면서.
‘겨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려고 나한테서 지연 씨를 뺏은 거야?’
지연을 배신한 것도 괘씸하지만 한국까지 와서 동생인 자신을 보고 가지 않은 것도 화가 났다.
‘나한테 분명 회사가 자리 잡히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온전히 혼자를 위한 독주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감히 회장인 어머니까지 배제하고!
그는 수현과의 가슴 뛰는 형제의 포옹 이후 태규가 가짜 유언장을 작성하는 걸 멈추게 했었다.
형을 믿어보기로 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증명이 됐다.
그날 애런을 안아주던 수현의 모습은 진심이 아닌 연기였다.
그는 더 이상 위스키나 끌어안고 불 꺼진 스위트룸에 처박혀 있을 마음이 없다.
태규에게 전화했다.
“나야, 애런. 그때 만들었던 그 위조 유언장, 아직 유효해?”
다시 한 번 적의 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