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52화 (52/77)

제52화. 롱디 커플

2018.08.01.

밤새 쏟아지던 비는 수현의 출발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연인을 보내기엔 얄궂을 정도로 화사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하지만 폭풍보다 강렬한 키스로 굳건한 사랑을 확인한 수현과 지연은 헤어짐의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햇살만큼 해사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전화 연락 자주 할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자주 연락하지 마세요. 시차도 안 맞고 일도 바쁠 텐데.”

“그래도 안 하면 삐질 거면서.”

“헤헤, 그런가?”

겨우 일주일 정도 떨어지는 연인처럼 대수롭지 않은 인사를 나누었다.

수현이 지연에게 마지막 키스를 하려는데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줄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아저씨!”

수현과 지연은 급하게 서로의 얼굴을 떨어뜨렸다.

지연과의 키스가 불발된 수현은 애써 섭섭한 얼굴을 감추고 지연 대신 줄리의 볼에 뽀뽀해주었다.

“아저씨 없는 동안 엄마랑 잘 지내고 있어, 알았지?”

그런데 그녀의 눈은 지금 굉장히 다급했다.

“전 지금 아저씨랑 뽀뽀할 여유가 없는데…….”

누군 여유 있어서 했겠니…….

“왜? 무슨 일 있어?”

줄리는 수현의 옆에 서있는 지연의 눈치를 보았다.

“나 있으면 안 되는 얘기야?”

지연이 묻자 줄리는 큼직한 눈망울을 깜박거렸다.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

지연은 수현과 친해진 줄리가 엄마 안 보는 곳에서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엄마는 먼저 밖에 나가 있을게.”

지연이 두 사람을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수현은 쭈그리고 앉아 줄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이별의 인사가 아니었다.

“애런 아저씨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애런 전화번호?”

수현의 입장에선 뜬금없는 요구 사항이었다.

애런이랑 줄리가 친했었나?

“왜?”

“혹시나 아빠가 찾아오면 그때처럼 애런 아저씨 부르게요.”

“아빠가…… 찾아와?”

아빠라면 문태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지연이 태규가 집에 찾아왔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줄리는 꽤 정확한 기억으로 그날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수현과 지연이 속초에서 돌아와 수현은 로즈의 병원으로 가고 지연만 집으로 온 날, 그날 아빠가 찾아왔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출현에 줄리는 놀랐고 태규답지 않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자꾸 안으려고 해서 줄리는 더 겁을 먹었다고.

다행히 그때 지연이 와서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빠가 자꾸 엄마한테 옛날로 돌아가자고…… 막 그런 무서운 말 했어요.”

“…….”

줄리의 말에 수현의 가슴이 저미어 왔다.

아빠가 함께하자는 말이 무서운 말로 들렸다니…….

“그때 애런 아저씨가 왔어요. 제가 보진 못했지만 엄마 말론 애런 아저씨 덕에 아빠가 집에 갔대요. 그리고 애런 아저씨 무서워서 이제 안 올 거래요.”

“애런…… 이?”

상황을 보진 못했지만 애런이라면 충분히 태규에게 겁을 줘 내쫓았을 듯.

그 녀석도 한 번 싫어하는 사람은 죽을 만큼 싫어하는 경향이 있으니.

어쨌든 수현이 없을 때 애런이 지연과 줄리에게 도움을 줬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지연을 가운데 두고 애런과 소원한 기운이 돌았던 건 사실.

하지만 이젠 그럴 일도 없으니 형으로서 챙겨줘도 됐을 텐데.

‘괜히 미안하네.’

수현은 휴대폰을 꺼내 줄리의 휴대폰에 애런의 번호를 저장해주었다.

“아저씨가 없을 때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애런 아저씨한테 연락해. 알았지?”

애런의 전화번호를 받은 그녀의 표정에 안도가 돌았다.

“네!”

볼일을 다 마친 두 사람은 지연이 기다리고 있는 마당으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줄리가 지연을 보며 소리쳤다.

“아, 나 쉬하고 와야겠다.”

그러면서 수현을 향해 되지도 않는 윙크를 한답시고 두 눈을 감고 깜박거린다.

그리고 도톰한 입술을 쭉 내밀고 쪽쪽 뽀뽀하는 시늉을 한다.

‘키스하라고?’

수현은 줄리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그에게 제 뜻을 전달한 그녀는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제 진짜 이별의 시간이 왔다.

수현은 지연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쌌다.

사랑하는 연인들끼리의 격정적인 키스보다는 미래를 함께할 동반자들끼리의 의식을 하고 싶었다.

“별 탈 없이만 있어줘. 다른 건 돌아와서 내가 다 할 테니.”

그녀도 그에게 애정의 당부를 했다.

“몸 상하게 일하지 말고 건강하게만 지내다 오세요. 다른 건 그다음이니까.”

서로의 볼과 볼을 맞닿는 볼 키스만으로 이별 의식을 마쳤다.

연인 사이의 끈적끈적한 스킨십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건조하고 평온한 이별을 택했다.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

애런이 묵고 있는 광화문에 위치한 6성급 호텔의 스위트룸.

3일째 룸 거실에 있는 암막 커튼은 열리지 않았다.

애런은 햇빛을 싫어하는 괴물체라도 된 것처럼 조금의 빛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둡고 컴컴한 방 안에서 위스키를 주식으로 삼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아침 9시라는 시간을 망각한 채 유리잔에 술을 따랐다.

똑똑-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간간이 태규와 연락을 할 뿐 누구하고도 대화를 하지 않는 그.

혹시나 룸서비슨가 싶어 문을 열었다.

“누구…….”

그런데 문 앞에 수현이 서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풍겨 나오는 술 냄새에 미간을 깊게 구겼다.

“너, 아침부터 술 마시고 있던 거야?”

수현은 막고 있는 애런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열어 햇빛으로 방을 환하게 밝혔다.

어둠이 사라지니 방바닥을 뒹구는 술병과 말라버린 안주들로 불결한 실내가 그대로 드러났다.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청소 서비스도 받지 않고 있는 듯.

수현은 원래 애런에게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싶어 하는 어두운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 없는 칩거는 없었다.

천성은 밝은 아이이기에 그가 이런 행동을 할 때는 늘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로즈에게 말할 수 없는 사고를 쳤거나 잘 해보려고 시도했던 일이 어그러졌거나.

한국에 와서는 사고도 치지 않고 나름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왜 또 이런 행동을 하는지…….

수현은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애런을 보았다.

“무슨 일 있니?”

그는 수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일은 무슨 일? 아무 일 없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잠깐 스친 그의 시선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그와 이십 년 넘게 형제로 살아온 형으로서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무슨 일이 있다.’

보통 때 같았음 애런이 얘기하지 않는다면 로버트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조사해서 알아봐라, 무슨 사고를 쳤는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애런이 스스로 형인 자신을 따르게 하고 싶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애런에게 다가갔다.

계속해서 수현이 아닌 다른 곳으로만 눈동자를 돌리는 그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날 봐, 애런.”

애런은 할 수 없이 축 내린 앞머리로 가려진 거친 눈동자로 수현을 보았다.

“나 지금 뉴욕으로 가는 거 알고 있지?”

“알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수현을 보는 애런의 표정엔 두 가지의 감정이 얽혔다.

하나는 반항의, 하나는 원망의.

무슨 일로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수현은 어머니가 애런에게 해주고자 했던 말을 전했다.

“내가 비록 어머니의 후계자로 지금 뉴욕에 가지만 어머니의 진짜 아들은 너라는 거…… 알지?”

애런의 빗나갔던 시선이 수현에게 꽂혔다.

“뭐?”

별 뜻 아닌 것처럼 내뱉은 말이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수현이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가 아는 수현은 핏줄과 상관없이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어머니의 아들이란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지?

애런의 어깨를 잡은 수현의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점점 더 강해져왔다.

다짐의 또는 경고의 기운이 느껴졌다.

수현은 로즈가 애런에게 전달해주길 바랐던 말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라면서 더 나에게 사랑을 베푸신 건 아들로서 나를 너보다 더 사랑해서가 아니야. 아버지를 잃은 나에 대한 연민, 그리고 책임감이야.”

그리고 그녀가 애런에게 꼭 해주고 싶었을 이야기도 전했다.

“그러니까 진짜 어머니의 사랑은 너라는 거, 넌 그걸 의심하면 안 돼.”

애런은 수현이 왜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말이 되기나 해? 맨날 형밖에 몰랐는데? 심지어 얼마 전에 갔을 때도 날 형으로 알았는데?’

그런데 왠지 지금 형이 하는 말을 믿고 싶어지는 이유는 뭘까?

“형, 정말 그렇게 생각해?”

수현은 조금 더 분명하고 단호한 중저음으로 다시 말했다.

“응, 난 그렇게 생각해. 어머니는 네가 조금 더 강한 남자가 되길 원하는 심정으로 엄하게 하신 것뿐.”

“…….”

그가 혼란해할 틈도 없이 수현은 말을 이었다.

“애런, 나 뉴욕으로 간다. 지금 어머니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와 나뿐이야. 비록 지금은 경영 수업을 먼저 받은 내가 어머니 대신 전면에 나서겠지만 회사가 안정되면 어머니의 친아들로서 너도 날 도와야 해.”

“…… 진짜? 나도?”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어머니와 형이 그를 믿고 회사를 맡긴다는 건.

혹시 그냥 내 방황을 달래려고 하는 말이 아닐까?

수현은 애런이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

어머니든 수현이든 한 번도 애런에게 이런 책임감을 심어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대신 다른 말로 그를 향한 믿음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부탁? 무슨?”

“애런…….”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수현의 목소리엔 애절함과 함께 커다란 신뢰가 담겨 있었다.

“너에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맡기고 싶다.”

“…… 두 사람?”

“지연이와 줄리. 내가 없는 동안 두 사람을 지켜줘.”

“지연 씨랑 줄리를…… 내가?”

“문태규에게서 꼭 지켜줘.”

“…….”

“부탁한다. 부탁한다. 진심으로 부탁한다.”

부탁한다는 말을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 그는 애런의 어깨를 쥐고 있던 두 손을 그대로 당겼다.

애런은 형의 넓은 품에 그대로 안겼다.

“형…….”

서로의 심장이 닫진 않았지만 수현의 두방망이질 하는 세찬 심장 소리가 그의 가슴으로 울렸다.

진심이 없인 전해질 수 없는 울림이었다.

.

.

.

이른 아침 갑자기 찾아왔던 수현은 애런에게 많은 혼란을 남겨주고 떠나갔다.

온몸에 녹아 있던 알코올 기운이 조금의 잔재도 없이 증발된 기분이다.

맑아진 머리로 그는 수현이 남기고 간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평생 그가 갈구했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 이야기.

‘엄마의 사랑은 친아들인 애런 너야.’

그가 완전히 뺏겨버렸다고 생각한 회사 얘기도 해주었다.

‘때가 되면 네가 나를 도와야 해.’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과 아이를 부탁했다.

‘지연과 줄리를 지켜줘.’

애런의 머릿속에 혼란의 회오리가 불고 있었다.

뭐지? 이게 뭐지?

술이 아닌 혼란에 취할 것 같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문태규였다.

‘어쩌지?’

일주일 전 그는 태규에게 로즈의 유언장을 위조할 것을 부탁했다.

모든 재산과 회사를 친아들인 애런에게 넘긴다는 내용을 담은.

태규는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애런은 형이 지연과 줄리를 위해 멀리 떼어놓고 싶은 상대와 손을 잡은 것.

태규는 지금 위조 유언장과 관련해 전화를 했을 듯.

수현의 방문으로 혼란스러워지긴 했지만 일단은 받아야 했다.

“어, 작성은 잘돼가?”

애런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태규의 목소리는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들떴다.

“생각보다 줄리아나는 더 엄청난 기업이더군. 유언장 위조에 성공하면 애런 당신은 어쩌면 미국 최고의 남자가 될 수도 있겠어.”

‘…….’

미쳐버릴 것 같다.

형의 말을 믿어야 하나?

아님 계획대로 유언장 위조를 밀고 나가야 해?

애런은 휴대폰을 떨어뜨린 채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갈등과 혼란이 그의 머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

수현이 뉴욕으로 떠난 지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롱디 커플의 휴대폰은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커플보다 바쁘다.

특히 시차가 13시간이나 날 때는.

서로 통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니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는 사람처럼 하루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혹시라도 휴대폰을 다른 곳에 놓았는데 벨이 울리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간다.

“여보세요!”

대부분이 수현이 아닌 다른 전화.

“사랑합니다, 고객님~~. OO 보험입니다.”

에이씨, 불쾌지수가 꿉꿉한 여름 장마처럼 올라간다.

오늘도 지연은 휴대폰을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 겨우 수현과 통화가 되었다.

“아, 정말 힘들다. 통화 한 번 하기.”

지연은 받자마자 인사 대신 푸념을 내뱉었다.

하지만 수현은 그녀보다 더 큰 푸념을 한다.

“이 전화도 겨우 화장실 가는 척 빠져나와서 하는 거야. 회의장을 벗어날 수가 없어.”

피곤에 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상황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속한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말보단 말에 가시가 돋친다.

“거기 사람들은 쉬지도 않나?”

“다른 사람들은 쉬어도 난 못 쉬지. 회사 임원들, 협력 회사 직원들, 바이어들과의 미팅이 분, 초 단위로 잡혀 있어. 어쩌다 시간이 비어도 각 부서 직원들에게 보고도 받아야 해.”

“그래서 밥도 잘 못 먹어요?”

“회의실에서 도시락으로 때우거나 아님 이동하는 차 안에서 하거나. 저녁은 거의 미팅이고.”

점점 질문의 포인트가 걱정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한다.

“저녁 미팅이면 술도 많이 마시고 그래요? 우리나라 회식처럼?”

“한국 회사 회식보단 좀 자유롭지. 패션 회사다 보니 좀 파티 같은 분위기?”

지연은 수현의 파티라는 말이 왠지 귀에 걸렸다.

‘파티라면 노는 거 아닌가?’

하지만 최대한 뾰족한 음색을 숨기고 담담하게 물었다.

“파티라면 뭐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들도 오고 그런 건가요?”

“그렇지. 거의 다 모델들이니까. 잘 차려입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잖아.”

“모델이요? 아…… 그럼 진짜로 예쁘겠다.”

지연은 그녀가 이렇게 말하면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하나도 안 예뻐. 너만큼 예쁜 여잔 없어, 내 눈에.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그럼 예쁘다는 거야? 그 여자들이?

서먹한 공기가 휴대폰 사이에서도 느껴진다.

얘기가 마무리도 안 됐는데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별일 없지?”

매번 습관처럼 묻는 질문.

별일이 있을 게 뭐람…….

난 화려하고 버라이어티한 일을 하는 수현 씨와는 달리 심심하게 늘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녀도 늘 똑같은 대답을 했다.

“별일 없어요.”

이어갈 말이 없기에 지연은 다시 그 전 화제로 돌렸다.

“그런데 그 파티에 온다는 모델들이요, 그 여자들은 다 수현 씨한테 잘 보이려고 하겠네요? 고용주니까.”

이번에는 이런 대답을 기대했다.

잘 보이려고 애써도 소용없지, 나에겐 지연이가 있는데.

그런데 그는 또 원치 않는 말을 했다. 심지어 약간의 짜증을 섞어서.

“그렇겠지, 내가 우리 회사 모델을 최종 결정하니까.”

어떻게 아니라는 소리가 안 나와, 신경 쓰이게.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팀, 사람들이 기다려. 어서 와.”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였다.

“어, 알았어.”

수현은 친근하게 답하고 지연에게 인사했다.

“나 빨리 가봐야 할 거 같아. 나중에 또 통화해.”

“수현 씨, 다음 전화는 언제…….”

벌써 전화는 끊겨버렸다.

지연은 끊긴 전화를 들고 멍하니 굳어버렸다.

뭐야, 사랑한단 말도 안 해주고.

바쁘다는 건 이해하지만 1초면 될 사랑의 인사도 이렇게 야속하게 생략해버리나?

섭섭한 감정이 느껴지다 보니 아주 사소한 것도 거슬린다.

“남자 화장실에 왜 여자가 찾으러 와?”

그 정도로 아주 친한 사인 거야? 아니면…… 화장실이 아니었나?

별 게 아닌 줄 알면서도 자꾸 안 좋은 쪽으로 신경이 쓰이네…….

이게 롱디 커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인가?

얼굴을 보지 못하니 자꾸만 의심하게 되고 사소한 오해는 쌓여만 가고.

수현이 뉴욕으로 가고 처음 한 3주 정도는 이렇지 않았다.

누가 보면 쑥스러울 정도로 대화가 끈적끈적하고 야릇했다.

‘우리 마지막으로 한 키스, 그 입술이 자꾸 떠올라.’

‘저도 수현 씨 품이 그리워요.’

그런데 점점 통화의 횟수도 줄고 시간도 줄어들면서 그나마도 연결이 되면 이런 식이었다. 끊고 나면 찝찝한 기분이 드는.

물론 금방 반성을 한다.

‘수현 씨 알면 오히려 섭섭해하겠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는 지금까지 지연이 만났던 남자들 중 가장 끈끈하고 묵직한 신뢰를 준 사람이다.

의심하면 안 되지!

“아자, 아자, 아자!”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려 기합까지 내었다.

다시 생기 지수를 올려 그가 또 전화를 하면 밝은 목소리로 받아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때 지연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SNS 톡 소리.

혹시나 그가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톡을 남겼나 싶어 급하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실망스럽게도 미선의 톡이었다.

-이 사진 속 남자 혹시 수현 씨 아니니?

그녀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 한 장을 첨부했다.

그런데 사진을 보는 순간 겨우 끌어올렸던 생기가 처참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남자가 수현…… 씨?’

미선이 보내준 사진은 미국의 한 패션 잡지에 실린 수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엔 그가 아는 수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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