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51화 (51/77)

제51화. 그들이 화해하는 법

2018.07.28.

수현이 미국으로 떠나기 D-1.

그가 계획한 첫 번째 일정을 끝냈다.

그는 미국으로 가기 전 지연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가 선택한 선물은 ‘아빠와의 화해’.

봉수는 수현과 헤어지는 순간까지 지연을 용서하겠단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눈물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수현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용서하겠단 말보다 더 큰 용서의 말로 느껴졌다.

그는 바랐다. 봉수와의 화해가 지연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됐기를.

이제 두 번째 일정을 치러야 한다.

두 번째 일정은 첫 번째 일정보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를 찾아뵙고 출국 인사를 드리는 것.

‘내가 올 때까지 건강하셔야 할 텐데.’

건강 외에 다른 건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그녀에겐 로버트란 철벽같은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집사가 있었고

한국 최고이자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붙어 있었다.

그러니 수현이 돌아올 때까지 더 이상 건강을 악화시키지 않고 버텨주기만 하면 된다.

‘회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는 믿음직한 장남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로버트와 간단히 회사 얘기를 마친 수현은 로즈의 병실로 들어갔다.

로즈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생각보다 혈색도 밝았고 표정도 편해 보였다.

“어머니!”

수현은 응석받이처럼 로즈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즈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수현과 초점을 맞추지는 못했다.

대신 로즈란 이름처럼 장미 같이 화사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응, 애런 왔니?”

…… 애런?

‘어머니가 청력도 안 좋아지셨나? 아니면 기억이 흐려지면서 목소리 구분도 잘 안 되시나?’

수현은 그녀의 귀로 얼굴을 가져갔다.

최대한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어머니, 저 수현입니다.”

그녀가 장난꾸러기처럼 키득댔다.

“애런, 간지러워. 속삭이지 마.”

“…… 어머니?”

잠깐의 착각은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계속해서 애런으로 아시다니.

어머니가 많이 아프신가?

로버트에게 다시 병세를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려는데 턱! 그녀가 수현의 팔목을 잡았다.

“애런,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얘기다, 니 형에 대해서.”

수현은 돌렸던 몸을 다시 로즈에게 향했다.

‘나에 대해서? 중요한 얘기?’

애런인 척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궁금하긴 했다.

어머니가 하시려는 자신에 대한 얘기가 무엇인지.

그가 로즈의 옆에 다시 앉자 그녀는 이제 진정이 된다는 듯 숨을 돌렸다.

장미의 미소를 거두고 다소 표정에 어두움을 담았다.

“애런…….”

그녀는 애잔한 음성으로 애런을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수현이 아빠, 나 때문에 죽었다.”

“!”

해머로 내리치듯 수현의 머리가 아찔했다.

“어머니, 대체 그게 무슨…….”

확인사살을 하듯 그녀는 충격적인 말로 다시 한 번 그의 머리를 폭격했다.

“수현이 아빠, 나 때문에 죽은 거라고.”

폭격을 받은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

늦은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처럼 굵은 방울은 아니었지만 우산 없이는 나가기 힘들 정도의 빗줄기였다.

이른 봄의 차가운 날씨에 비까지 더하니 하늘 전체가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빨간 지붕 집 부엌에선 뜨겁고 고소한 불향이 가득했다.

마지막 밤, 수현과의 둘만의 식사를 위해 지연이 요리 중이었다.

평생을 미국에서 산 사람이나 다름없는 그를 위해 한식과 분식 메뉴를 선택했다.

“잡채, 갈비, 김밥, 떡볶이, 아, 수현 씨가 좋아하는 미역국.”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써 실력발휘를 했다.

“이 정도면 좋아하려나?”

자주 마셨던 와인 대신 오늘은 소주로 준비.

일부러 술을 많이 사다놓지 않았다.

마지막 밤인데 취하면 곤란하니까 로맨틱한 밤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의 각 1병?

“그런데 오늘은 하루 종일 연락도 없네?”

혼자 나가면 보통 못해도 두 번 정도는 문자를 주는데 오늘은 한 통도 없었다.

출국 하루 전날이니까 바쁘겠지 싶었지만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입장에선 지금 그의 위치가 매우 궁금하다.

지연은 수현에게 전화를 했다.

“응? 울리는데 안 받네?”

어머니 병원에 있거나 사무적인 일을 보는 중?

어쨌든 오는 대로 식사할 수 있도록 미역국만 빼놓고는 식탁 위에 예쁘게 세팅해놓았다.

한 시간이 흘렀다. 벌써 시계는 여덟시를 지났다.

“뭐야, 늦으면 문자라도 좀 줄 것이지.”

전화를 해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으응? 이상하다.

다 큰 어른이기에 비 맞을까 걱정, 길 잃을까 걱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락이 닿지 않으니 슬슬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대로 또 두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이제 열 시를 넘어갔다.

이젠 식탁 위의 음식도 다시 데워도 제 맛을 낼 수 없을 만큼 식어버렸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을 만큼 불안해진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을 나와 거실의 통유리 앞에 섰다.

창 앞에 서면 마당이 보이고 담이 보이고 담 너머 가로등과 가로등 밑 도로가 보였다.

물론 수현이 저 비 오는 거리를 걸어오진 않겠지만 밖이라도 보고 있지 않으면 조여 오는 불안감을 참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응?

가로등 밑으로 커다랗게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남자 하나가 앉아 있는 듯.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빗물이 흐르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남자는?

푹 젖어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는데…… 헉!

“수현 씨?”

가로등 밑이라 어두웠지만 전체적인 실루엣, 그리고 흐린 불빛에 비친 윤곽은 분명 수현이었다.

지연은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산을 쓰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급하게 달려 나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확실히 수현.

“수현 씨!”

지연은 수현의 앞으로 달려가 바닥으로 푹 고개를 떨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스르륵, 느릿하게 그가 얼굴을 들었다.

“아…… 지연아. 내가 제대로 왔구나.”

빗속에서도 풍겨지는 술 냄새.

“술 마셨어요? 왜요? 아니, 도대체 어디서요?”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일단 그를 안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쳐진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손에 끌려 집으로 들어가나 싶었는데 그는 다시 대문 앞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대문 위의 처마가 막아주어 빗줄기는 피할 수 있지만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대로 그와 그녀의 머리를 적셨다.

“여기 있음 더 젖을 것 같아요. 어서 들어가요.”

하지만 수현은 떨어지는 빗물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 있고 싶어. 비라도 맞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비를 맞겠다는 그의 목소리가 왠지 분노에 찬 것처럼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냥……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아버렸어.”

“혹시 어머니하고 무슨 일이 있었어요?”

언뜻 오늘 어머니에게 간다고 한 걸 들은 것 같았다.

“지연아…….”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불렀다.

“네…….”

저리도록 아픈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나, 미국 안 가…….”

쓰라린 빗물이 그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

한국병원 VVIP 병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로버트는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던 로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몇 시간째 흘렸던 눈물을 겨우 거둔 그녀가 로버트에게 물었다.

“응, 수현인 갔어?”

“네……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랬겠지, 믿기 힘든 얘기를 했으니까.”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온 기운을 바닥으로 내려놓은 듯 꺼져갔다.

“내가 해야 할 이야기.”

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싶어 한다.

지금 그녀의 모습이 딱 그랬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이해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있다.

“왜 애런 도련님껜 수현 도련님이라 그러시고 수현 도련님껜 애런 도련님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냥 각각의 도련님께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면 될 것을.”

그림자처럼 로즈를 수행하고 있는 로버트는 안다.

그녀가 하는 행동이 알츠하이머로 인한 비이성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정신이 멀쩡할 때 하는 행동인지.

그가 보기엔 애런과 수현을 만났을 때 그녀는 너무도 정상적인 상태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을까?

그녀는 로버트에게 자신의 연기를 들킨 게 부끄러운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래야 가감 없이 내 죄를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정말 내가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이번엔 수현 도련님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로즈는 로버트에게 애런에게 고백하는 척, 사실은 수현에게 전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일단 그녀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수현의 아버지는 나 때문에 죽었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영국의 귀족과 이루어졌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에 의한 결실이 아닌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었다.

사랑 없는 결혼이었지만 그녀는 애런을 낳고는 세상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행복했다.

그런데 애런을 낳은 후 가문에서 쉬쉬했던 남편의 병적인 폭력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매일이 부수고 던지고 때로는 그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잘 버텨보려고 했다. 사랑하는 아들의 아버지니까.

하지만 어느 날, 또다시 시작된 남편의 폭행에 그녀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됐다.

죽고 싶지 않아 스스로와 애런을 보호하려다 그만 남편을 죽이고 말았다.

엄연히 사고였고 분명한 정당방위였다.

그렇지만 살인은 살인,

가문에 흠이 될 걸 염려한 몬테규가에선 사건을 감추고 자살로 위장했고

그녀는 그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가야 했다.

‘내가 그 비밀을 처음이자 유일하게 털어놓은 사람이 수현의 아빠야.’

그녀의 전용기 기장이었던, 그녀의 발이 되어 그림자처럼 함께 다녔던 수현의 아빠는 그녀의 고통을 따뜻하고 자상한 손길로 달래주었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고 수현과 애런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며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

그런데 수현의 아빠가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물증은 없지만 난 확신해. 그는 나 때문에 죽은 거야.”

가문에선 언젠간 수현의 아빠가 애런이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로즈의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배신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내가 수현의 아빠를 죽인 거나 다름없어.”

이 모든 비밀을 수현에게 털어놓은 로즈는 마치 애런에게 말하듯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형에게 너보다도 더 사랑을 쏟아부은 이유는 죄책감과 책임감이었어. 결코 너보다 더 사랑해서는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이야기도 전했다.

‘하지만 내 모든 유산은 형을 줄 수밖에 없어. 그래야 나 때문에 아빠를 잃은 수현이에게 빚을 갚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부탁하듯 당부했다.

이 부분에서 그녀의 음색은 단호했고 분명했다.

‘형을 따라라. 그래야 너도 모든 걸 누릴 수 있어. 형은 너를 보듬을 수 있는 큰 사람이다. 난 니 형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다. 난 니 형을 믿어.’

수현과 로즈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버트는 그녀의 의도를 이해했다.

수현에게 죄를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애런을 챙겨달라는 부탁을 한 것.

역시 현명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우려는 있었다.

“수현 도련님이 회장님이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혹시 회장님의 사랑을 죄책감이나 책임감으로만 오해하진 않았을까요?”

그녀는 확신에 찬 듯 목소리를 깊게 눌렀다.

“난, 수현일 믿어.”

*

쏟아지는 빗속, 빨간 지붕 집 대문의 처마 밑에서도 같은 얘기가 흐르고 있었다.

수현은 어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지연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원망과 분노가 깃든 음성으로 결론을 내듯 말했다.

“나, 미국에 가지 않을 거야.”

담담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있던 지연이 물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어머니 때문이라서요?”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버지가 선택한 운명이었다고 생각해. 살인을 자살로 위장할 수 있는 집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음모가 당신에게도 올 수 있다는 걸 아셨을 거야. 아버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선택한 거지.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그럼 뭐가 당신을 이렇게 화나게 했죠?”

“무한한 애정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어.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빚을 갚는 마음이었어. 그런 뜻으로 나에게 기업을 맡기는 거라면 난 받고 싶지 않아.”

“그게…… 미국에 가지 않겠단 이윤가요?”

“응, 지연이까지 두고 가는 미국이야. 어머니를 위해, 기업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그런 의미로 가라고 하신다면 가지 않을 거야.”

지연은 섭섭함을 넘어 실망, 실망을 넘어 충격과 분노가 휩쓸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연민을 담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눈빛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참 실망이네요, 진수현 씨.”

그녀에게서 이해의 위로를 기대했던 수현은 놀랐다.

“뭐?”

그녀의 음성은 떨어지는 빗물보다 더욱 싸늘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인 줄 알았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 전까지 안타깝고 처연한 눈길로 그를 보던 지연이었다.

“무슨 말이야?”

그녀의 입술이 냉소를 띄며 올라갔다.

“줄리도 이렇게 유치하진 않을 거예요.”

“지연아!”

“어머니가 수현 씨를 애런으로 착각하고 하신 고백이라고 했죠? 어머니가 수현 씨를 못 알아보셨을 거라 생각해요?”

“시력을 잃으셨어. 날 애런이라고 생각하시더라고.”

“바보. 세상에 자식의 향기를 모르는 엄마는 없어요. 자식이 열 명이라도 엄마는 각각의 향기를 알죠.”

“향기?”

“네, 이십 년을 넘게 당신을 키우며 당신의 향기를 모르시겠어요? 게다가 과거의 죄를 낱낱이 자백할 정도의 정신이라면 아프실 때 하신 얘기는 아니에요.”

수현도 그게 의심스럽긴 했다.

그를 애런으로 착각하는 것 말고는 너무도 냉철한 이성을 갖고 있을 때의 어머니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왜 날 애런이라고 부르신 거지?”

“확신할 순 없지만 어머님은 애런에게 당부하는 척, 사실은 수현 씨한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겠죠. 직접 대고 말하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질.”

“더 강렬하게 느껴질 당부?”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흐린 초점의 눈으로도 또렷하게 말씀하셨던 것.

‘형을 따라라. 그래야 너도 모든 걸 누릴 수 있어. 형은 너를 보듬을 수 있는 큰 사람이다. 난 니 형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다. 난 네 형을 믿어.’

그건 결국 나에게 애런을 보듬으라는 의미?

그래, ‘난 네 형을 믿어.’란 말이 ‘애런을 보듬어 달라.’보다 더 강렬한 의미로 다가오기는 했다.

믿는다는 말은 명령보다 심장에 강한 여운을 주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의문이 풀리는 건 아니다.

“왜 평생 나에게 주었던 사랑을 죄책감과 책임감이라고 하신 거지?”

지연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수현의 복잡한 눈동자를 로즈가 된 듯이 안타깝게 보았다.

“그 말을 애런에게 대신 전해주길 바라신 거죠. 어머님의 입이 아닌 형의 입을 통해서 하면 애런이 더 받아들이기 쉬울 테니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그 말을 믿는다면? 믿어서 상처받는다면?”

“무슨 말을 어떻게 곡해해도 수현 씨는 알 거라 확신한 거죠. 어머니가 수현 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사랑은 말이 아니라 느끼는 거잖아요.”

내가 알 거라 믿으신다…….

“그런데 이렇게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화를 내는 걸 보니 어머니가 잘못 생각하셨네요. 수현 씨는 모르고 있군요. 바보같이.”

마치 로즈가 된 듯한 지연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수현은 모르겠다.

아직, 너무도 혼란스럽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수현을 보며 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나약한 이유로 미국으로 가지 않겠다는 수현 씨의 말, 저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전 이만 들어갈게요. 감기 걸리면 저는 괜찮지만 줄리에게 옮기면 안 돼요. 수현 씨는 알아서 하세요.”

냉정하게 지연은 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처마 밑엔 수현 혼자 남았다.

아직도 비는 쏟아지고 있다.

바람을 탄 빗물이 수현의 얼굴을 싸늘하게 스쳤다.

그는 싸늘한 비를 오롯이 맞아내며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의 말, 그리고 지연의 말을 떠올리면서.

.

.

.

수현을 홀로 남겨두고 안으로 들어온 지연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뜨겁게 샤워 물을 틀고 그 밑에 웅크리고 앉아 물을 맞았다.

그녀는 더욱 감정이 격해질 것 같아 서둘러 수현을 떠났다.

키워준 엄마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 수현의 모습을 보니 줄리가 떠올랐기에.

‘나중에 줄리도 혹시 내 사랑을 의심하는 날이 오면 어쩌지?’

죽은 동생에 대한 대역으로 생각한다거나,

지연을 보며 뛰어오다 생긴 사고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를 키우기로 결심했다거나.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줄리를 처음 보는 순간 죽은 동생 지우를 떠올린 것도,

줄리가 사고를 당했을 때 똑같은 사고로 하늘나라로 간 지우처럼 될까 봐 겁을 먹어 그녀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쩔 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젠 줄리를 봐도 지우가 떠오르지 않는다.

원래부터 내 딸이었던 것처럼, 원래부터 내 아가였던 것처럼 그녀가 소중하다.

살을 품고 키워온 정이라는 건 핏줄의 그것보다 지독히도 끈적끈적하다.

지연은 아마 수현의 엄마도 똑같은 심정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수현을 대하는 마음이 설사 죄책감이었대도, 설마 책임감이었대도,

이십 년 넘게 수현이 엄마의 사랑이 무한하다고 느낄 정도로 품어주었다면 그건 진짜 엄마의 사랑이다.

그래서 모질게 퍼부었다. 마치 로즈가 된 것처럼.

그래도 상처받은 수현을 홀로 두고 온 것은 가슴은 저리도록 쓰리다.

‘왜 그렇게 잔인하게 말했을까?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직도 밖에 있을까?

빗물을 맞으며 외롭게 있을 그를 생각하니 뜨거운 샤워 물이 차디찬 가시처럼 따갑게 느껴진다.

안 되겠다.

지연은 다시 그의 옆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를 맞아도 같이 맞고, 울어도 같이 울고, 슬픔도 함께 나누고.

연인에게 했던 잔인한 행동을 후회하며 급하게 샤워를 마쳤다.

베스로브를 걸치고 막 문을 열었는데,

그가 서 있었다.

비를 그대로 몰고 온 것처럼 물을 뚝뚝 흘리며.

그가 어색하게 입매를 올렸다.

“하, 나도 샤워해야 하는데…….”

무안한 변명을 주저리주저리 내뱉었다.

“나도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낼 비행기도 타야 하고…….”

축 처진 앞머리로 가린 눈빛엔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담고 있다.

“음식 많이 해놓은 거 같더라. 어떡하지? 먹지도 못하고 나 때문에 기다리고…….”

화가 난 연인을 달래주려는 서툴고 불편한 그의 음성.

그런데 그녀도 미안해하는 그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진 않았다.

“혼자 들어온 건, 제가 먼저 들어온 건, 수현 씨 혼자 생각할 시간도 좀 주고 싶었고…….”

상처받은 연인을 등지고 들어온 게 못내 걸린 그녀.

“샤워하고 데리러 나가려고 했었는데…….”

끝까지 보듬어주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

“하하, 음식은 괜찮아요, 또 하면 되고 또…….”

쑥스러운지 벌어진 베스로브의 가슴을 움켜쥐고 뛰는 가슴을 느끼고 있는 그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수현은 촉촉이 젖은 머리를 청초하게 내려뜨린 그녀를 보았다.

그녀도 물을 먹고 달라붙은 옷 아래 드러나는 건장한 모습의 그를 보았다.

그는 늘어뜨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환하고 뽀얗게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젖은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뜨거운 본능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느릿하고 감미롭게 그녀의 콧날을 타고 내려왔다.

드디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윗입술에 닿았다.

부드럽던 그의 입술이 돌변했다.

놓쳐버린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그녀의 입술 사이를 강하고 치밀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머금은 빗물이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그의 목을 달궜다.

그들만의 뜨거운 화해가 시작되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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