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딸의 남자
2018.07.25.
시간의 흐름에 배려란 없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흐르고 또 흐른다.
수현이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주어졌던 일주일이라는 시간 중 벌써 닷새가 지나가버렸다.
그 시간 동안 수현과 지연이 다른 무언가를 하려고 하진 않았다.
무던하고 무난하고 일상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려 노력했다.
우리는 또 만날 테니까.
좀 유별난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줄리?
“비행기 태워주세요.”
“…… 또?”
줄리는 매일 아침, 그리고 잠들기 전, 꼭 수현을 찾아와 자신을 번쩍 들고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요구했다.
맡겼니? 맡겼어?
“약속했잖아요, 매일 비행기 태워준다고.”
여섯 살 아이와의 소통이란 이런 거구나.
수현은 줄리에게 내 딸이 돼달라는 프러포즈를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아빠가 되어줄게. 매일매일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이 말은 매일매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것처럼.
그런데 줄리는 ‘매일 비행기를 태워주겠다’는 말로 자의적 해석을 해 빚쟁이처럼 덤벼들었다.
“남자는 약속을 지켜야 한데요. 금화댁 할머니가 그랬어요.”
그 할머니 참…….
“알았어. 올라타.”
“앗싸~~~~~”
줄리는 수현의 어깨를 계단 밟듯 마구 짓누르며 올라탔다.
그런데 차라리 계단이 낫다.
어쩔 땐 수현을 바닥에 앉히고 소파 위에서 점프를 해서 오르기도 한다.
‘너 몇 킬로니? 여섯 살짜리 맞아?’
잠깐, 잠깐, 그런데 이건 비행기가 아닌데?
“이건 목말이잖아. 비행기는 어깨에 올라타는 게 아니라 안아서 돌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어깨 근육에 위협을 느낀 수현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데 줄리는 또 전지적 줄리 시점으로 이상한 논리를 갖다 붙였다.
“비행기를 태워주신다는 건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는 거 아니었어요? 가끔은 목말 타는 게 더 그런 기분이던데…….”
이렇게 속말을 다 이해하는 애가 ‘비행기 타는 것처럼’은 왜 그렇게 곧이곧대로 해석했을까?
“그래, 그래. 목말 타라, 목말 타.”
수현은 잘근잘근 등을 밟고 올라온 줄리를 어깨에 올려 ‘어이쿠’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는 중심을 잡기 위해 고삐를 쥐듯 수현의 머리를 움켜잡는 줄리에게 부탁했다.
“머리카락은 잡지 마.”
“네, 머리 안 잡을게요.”
그래도 말은 참 잘 듣는다, 싶었다.
“그럼 귀 잡을게요.”
헐!
“노노! 아냐, 그냥 머리 잡아.”
수현은 머리를 잡힌 채 목말을 태워 삼십 분을 뛰어다녔다.
그런데 참, 줄리가 영리한 아이라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쓸 줄 안다고 해야 하나?
목말이든 비행기든 열심히 태워주고 나면 꼭 이런 말을 한다.
“전 오늘 일찍 잠들 거예요. 1층엔 아무리 불러도 못 내려갈걸요?”
또는,
“전 한 번 잠들면 옆방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못 깨요.”
그 말은 즉, 방해 안 할 테니 1층이든 옆방이든 엄마랑 좋은 시간을 보내라?
“줄리야, 이십 분 더 태워줄까?”
아예 곤죽을 만들어버리려고 이렇게 유혹하면 또 샐룩한 새침데기처럼 말한다.
“안 돼요. 아직 뼈가 말랑거리는 어릴 때 그런 거 많이 하면 다리가 ‘O’자가 된대요. 전 그런 다리 말고 엄마처럼 길쭉하게 예쁜 다리 갖고 싶어요.”
갑자기 수현의 귀가 ‘지연의 길쭉하고 예쁜 다리’에서 활짝 열렸다.
“엄마 다리가 그렇게 예쁘니? 치마 입으면 무릎 아래만 나오니까 난 잘 모르겠던데.”
뭔가 더 자세한 묘사를 듣고 싶어 줄리를 찔러보았다.
아직 늑대의 시커먼 속이 무언지 모르는 그녀는 해맑게 대답했다.
“엄마 잘 때 바지는 안 입고 허벅지까지 오는 긴 파자마만 입고 자거든요. 자다가 파자마가 올라가면 다리가 다 보이는데 제가 봐도 정말 하얗고 예뻐요.”
꿀꺽-
“파자마가 어디까지 올라가? 막 배도 보이고 그래?”
“그럼요, 우리 엄마 자기 전에 윗몸 일으키기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 걸그룹 언니들한테만 있다는 십일자? 뭐 그런 것도 보여요.”
“십일자?”
수현의 머리 위엔 숫자 ‘11’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연의 배 위에 그런 게 있다는 거지?
“그런데 살결은 또 부드러워요. 전 엄마 배 만지면서 자는데 만지면 막 보들보들하고, 아, 얼마 전 금화댁 할머니가 모찌라는 떡 줬는데 그거 만지는 기분이었어요.”
꿀꺽꿀꺽-
그 모찌 나도 좋아하네.
수현의 머리엔 이제 숫자 ‘11’자에 이어 ‘모찌’가 날아다녔다.
여세를 몰아서 조금 더?
“자다가 보면 파자마가 더 올라가지 않나? 아저씨도 티셔츠 입고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배보다 더 위로 올라가 있더라.”
“아, 맞다. 우리 엄마도 가끔 옷이 더 위로…….”
그런데 수현의 계략에 잘 따라오던 줄리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눈매를 가로로 찢더니 그를 흘겼다.
“뭐가 궁금한데요?”
가…… 슴?
“…… 파자마?”
“거짓말!”
“…….”
필요 없이 똑똑해가지곤.
“진짜야, 티셔츠보다 파자마가 더 잘 말려 올라가나 싶어서.”
엉큼한 속내를 들킬 수 없기에 재빠르게 임기응변을 했다.
그런데 그녀의 찢어진 눈매가 오히려 사선으로 뻗쳤다.
그녀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수현을 쏘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배꼽이죠?”
“…… 응?”
“사실 파자마가 아니라 엄마 배꼽이 궁금했죠?”
배꼽이라…… 그건 생각도 하지 않은 신체 부위인데?
그것보다 궁금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진짜 궁금한 건 안 들켰으니 다행이다.
“그래, 뭐 그것도 궁금했지.”
이쯤에서 어린양을 꾀는 늑대놀이는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줄리야, 목말 더 태워줄까?”
화제를 돌렸는데 이미 꾐에 빠진 어린양은 혼란에 빠졌다.
말해줄까 말까, 말해줄까 말까.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스스로 목소리 볼륨을 은밀하게 줄였다.
“엄마랑 결혼할 아저씨니까 말해줄게요. 엄마 배꼽에 대해서.”
수현은 그다지 배꼽은 궁금하지 않았지만 줄리의 성의를 봐서 같이 은밀해지기로 했다.
“그래, 엄마 배꼽은 어떻게 생겼어?”
그런데 지연의 배꼽을 상상하는 줄리의 얼굴이 꿈을 꾸듯 환해졌다.
“엄마 배꼽, 꽃처럼 예쁘게 생겼어요. 제가 가끔 손가락으로 딩동 하고 눌러요.”
그런데 참 이상하다. ‘딩동’이란 말이 왜 이렇게 섹시하지?
그러니까, 줄리 너는 손가락으로 지연의 11자 근육이 있는,
모찌같이 부드러운 배에 꽃처럼 예쁘게 핀 배꼽을 밤마다 눌러본다는 거지? 딩동 하고?
어우 야~.
갑자기 줄리의 손가락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진다.
수현은 계속해서 은밀하고 음흉하게 물었다.
“딩동 하면 재밌어?”
재밌겠지, 짜릿하겠지, 황홀하겠지.
그런데 줄리의 입에서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딩동 하면 거기서 동생 나올 거 같아요.”
“풋!”
수현의 입에서 잔뜩 고여 있던 침이 분사했다.
도, 도, 도, 동생이라고?
예기치 못한 침 공격을 받은 줄리가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 더러워.”
졸지에 수현은 더러운 남자가 되었다.
더럽긴 더럽지, 순수한 동심을 이용해 음흉한 상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궁금했다.
“줄리야, 배꼽 누르면 동생 나온다고 누가 그래?”
상상만으로도 좋은지 줄리의 오동통한 볼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엄마가 그랬어요, 나중에 제 동생이 엄마 배꼽에서 나올 거라고.”
귀여운 지연, 아이에게 그런 깜찍한 거짓말을 하다니.
동생은 절대 배꼽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면서.
그런데 동생 얘기가 나와서 그런가?
더 이상 지연의 신체 부위를 생각하며 19금 상상이 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도 동글동글 귀여운 줄리의 동생이 떠올랐다.
‘언젠가 정말로 지연과 내가 줄리의 동생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행복하다.
나와 지연, 줄리 그리고 줄리의 동생이 있는 행복한 가정.
얼마나 완벽한 인생인가.
줄리도 머릿속에 네 사람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동생 생기면 전 해달라는 거 다 해줄 거예요. 제 인형도 다 주고 장난감도 다 주고.”
어떻게 이렇게 깜찍할 수 있을까?
프러포즈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수현에겐 줄리가 지연만큼 소중하고 예쁘다.
가끔 당돌하고 되바라진 말대꾸로 깜짝깜짝 놀라게도 하지만 요즘은 그것마저도 귀여워 미쳐버릴 것 같다. 막 깨물고 싶고.
게다가 이런 당돌한 말투를 고쳐주기는커녕 오히려 지켜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긴다.
누구에게도 당당하고 어디에서도 주눅 들지 않도록.
오히려 기죽어 있으면 속상할 것 같은?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비행기 탈만큼 다 타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줄리의 손을 수현이 잡았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인형 사줄까? 인형의 집 사줄까? 아님 옷 사줄까?”
너무 예쁘다 보니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
신이 난 줄리가 막 뭔가를 말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턱 그녀의 입을 막았다.
지연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뒤에 서 있던 것.
“줄리, 어제도 아저씨랑 백화점 가서 양손에 들고 올 수 없을 정도로 쇼핑했잖아. 이제 절대 안 돼. 아무것도 사달라고 하지 마.”
그래도 엄마 말은 무서운지 줄리가 금방 꼬리를 내렸다.
“네…….”
그런데 지연의 무서운 눈초리가 이번엔 수현을 향했다.
“수현 씨도 그러면 안 돼요. 애 버릇 나빠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 아무것도 사주지 마세요.”
“응…….”
그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그에게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지연이니까.
오늘도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버릇없는 아이와 그 버릇을 부추기는 아빠, 그리고 그 버릇을 잡으려는 엄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의 모습,
하지만 바로 이것이 소확행(小確幸).
*
또 하루가 흘렀다.
수현의 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딱 하루,
내일이면 수현은 빨간 지붕 집을 떠나 뉴욕으로 떠난다.
언제가 될지, 기약 없는 이별이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수현으로선 오늘은 무척 바쁜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
그 첫 번째 일정을 위해 수현은 가지고 있는 슈트 중 가장 점잖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아주 중요한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가세요?”
행선지를 묻는 지연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다른 당부를 했다.
“오늘 밤은 줄리를 금화댁이나 아버님 댁에서 재울 수 있을까?”
이유를 묻지 않아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 밤은 그와 그녀에게 마지막 밤이다.
그는 마지막 밤만큼은 지연과 단둘이 보내고 싶은 것.
“좋아요. 저녁 만들어 놓을게요. 저녁도 단둘이 먹고 밤 시간도 단둘이 보내요.”
그녀도 그러고 싶었다.
지연은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처럼 가볍게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다녀오세요.”
지연의 뽀뽀에 환한 미소를 그리면서 수현은 집을 나섰다.
택시도 부르지 않고 천천히 가회동 입구로 향했다.
걸음걸음이 빳빳하니 긴장이 올라왔다.
아직은 어려운 그분을 만나야 하니까.
.
.
.
띵동-
문을 여니 출입구에 달린 벨이 울렸다.
손님인 줄 알고 봉수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인사가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 그런데 저 사람은?
수현이 봉수가 있는 카운터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지연 씨와 같은 집에 있는 사람입니다. 저 기억하십니까?”
기억이 뭐야, 금화댁과 줄리를 통해서 매일 얘기 듣는 사람인데.
봉수는 얼른 카운터 밖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정중한 봉수의 태도에 놀란 수현이 그보다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아버님.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하지만 봉수는 빚이라도 갚아야 하는 사람처럼 굽실댔다.
그는 결코 수현이 편할 수가 없었다.
금화댁과 줄리를 통해 지연과 수현이 서로 야릇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는 엄연히 지연이 살고 있는 집의 집주인이다.
요즘 세상, 집주인이라고 직장 상사처럼 윗사람은 아니지만 봉수의 입장은 또 달랐다.
그 좋은 집에 보증금도 안 받고 관리비 정도의 월세만 받으며 딸을 묵게 해주는 사람이다.
쫓아낸 건 자신이었지만 지연이 아이를 데리고 초라한 고시원이라도 들어가면 어쩌나 잠도 못 자고 전전긍긍했었다.
그런데 그 좋은 집, 심지어 예전에 살아서 편히 지낼 수 있는 빨간 지붕 집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게다가 동네에 송중기라고 소문이 쫙 날 정도로 인물 좋고 품성 좋은 집주인과 딸이 요즘 말로 썸을 타고 있다니 내색은 안 했지만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걱정.
‘내가 지연이의 흠이 돼서는 안 될 텐데.’
혹시나 아버지가 작은 편의점이나 운영하는 소시민이라고 내 딸을 무시하면 어쩌지?
안 그래도 둘 사이에 더 이상의 진척이 있단 얘기가 안 들려 불안해하고 있던 중 그가 찾아온 것.
이래 걱정, 저래 걱정인데 어떻게 수현을 편하게 대할 수 있을까?
봉수는 반가움 반, 걱정 반, 여러 가지 생각이 얽혀 있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수현은 정중하게 부탁을 하듯 그에게 말했다.
“저랑 잠시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
.
.
봉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편의점을 맡기고 수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가장 깨끗한 방석을 수현에게 내어주고 그와 마주 앉았다.
급하게 편의점 냉장고에서 꺼내온 배즙 음료를 따 그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거라도 드세요. 드릴 것도 없고 참…….”
두 손으로 배즙을 받은 수현도 면목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가 더 죄송합니다. 뭐라도 사 왔어야 하는데 지연 씨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아무것도 사 오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격식을 갖춰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서로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마쳤다.
이제 나눠야 할 본론만 남았는데 찾아온 사람도, 맞는 사람도 아직 말할 준비도 들을 준비도 되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의 공간을 에워쌌다.
수현은 봉수를 찾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그는 내일 뉴욕으로 떠난다.
1년이라는 예고한 시간보다도 훨씬 앞당겨진 이별이었다.
물론 돌고 돌아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비록 줄리에게 한 프러포즈지만 지연과 미래를 함께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기약 없이 연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지연의 마음은 어떨까?
‘얼마나 불안할까?’
게다가 그녀는 가슴속 깊이 미혼모라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수현이 줄리아나의 후계자라고 말했을 때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난감해하는 눈빛을 보였다.
‘그런데 왜 저를 만나기로 했어요?’
이런 어리석은 질문까지 하면서.
그녀에게 그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외친들, 마음 한구석엔 달콤함으로 포장된 공허한 속삭임이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를 불안하지 않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지연이에게 선물을 주자.’
선물을 얻기 위해 수현이 찾은 곳은 백화점이 아니었다. 봉수였다.
“아버님.”
수현이 어색한 침묵을 끝내고 봉수를 불렀다.
“네, 네.”
아직도 수현이 불편한 봉수는 그의 부름에 심장이 졸려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저 내일 뉴욕으로 떠납니다.”
“아…….”
봉수의 주름진 눈꺼풀이 실망으로 내려앉았다.
그래서 왔구나.
이제 가야 한다고. 그래서 지연이를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그런데 수현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전에 아버님께 부탁 하나 드리려고 왔습니다.”
“네? 뭐요? 무슨 부탁이요?”
“제가 알기론 아버님께서 줄리를 손녀로 받아들이기로 하셨지만 아직 지연이를 완전히 용서하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봉수는 지연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줄리를 받아는 들이겠지만 부인과 어린 딸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오로지 저 하나만 보고 사는 애비 앞에 미혼모가 되어 돌아온 지연을 아직까지 완전히 용서하진 못하겠다고.
그래서 아직도 지연은 온전히 자유롭게 봉수의 집을 드나들지 못하고 있다.
“아…… 네…….”
수현이 꿇고 있던 무릎 위에 두 주먹을 가지런히 모아 올렸다.
“제가 대신 용서를 빌면 안 될까요?”
“네?”
봉수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딸 대신 용서를 빌다니.
그는 봉수의 심정을 대신 읊었다.
“아버님이 지연이에게 화가 나신 이유 압니다. 예쁘게 키운 딸, 유학까지 보냈더니 낳지도 않은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고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미래가 암울하게 보이셨겠죠.”
봉수의 걱정을 대신 읊었다.
“편견 가득한 세상에서 미혼모로 살아가야 하는 딸의 거친 미래,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해야 하는데 줄리를 데리고 있으니 그 과정에서 넘어야 할 장벽, 이런 걸 생각하면 그런 인생을 선택한 딸이 너무도 야속하셨겠죠.”
봉수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수현의 말들.
“그런데요, 아버님…….”
그는 이제 봉수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제가 그 걱정 덜어드리면 안 될까요? 지연이를 미혼모가 아니라 든든한 남편을 둔 평범한 엄마로, 줄리를 편모 밑에 크는 아이가 아니라 좋은 아빠를 둔 평범한 아이로, 부족함 많은 사람이지만 제가 그렇게 만들어주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우리 지연이와 줄리를 책임지겠다고?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봉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긴 좋은데, 너무나 좋긴 좋은데, 눈물 나도록 좋긴 좋은데,
과연 정말로 그래줄 수 있을까?
“…… 진심이십니까?”
너무 좋아도 믿을 수가 없으니까,
수현은 꿇은 무릎으로 조금 더 바짝 봉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더 단단하고 분명한 음색으로 다짐을 하듯 말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연이,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대리석보다 견고한 수현의 눈빛,
‘이 사람 진심이다.’
봉수의 마음은 이미 용서를 넘어 환희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찾아왔다고 다짜고짜 용서한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봉수를 보며 수현이 그 마음을 읽었다.
“당장 뭐라고 대답을 구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만 더 들어주십시오.”
“부탁…… 이요?”
“제가 내일 뉴욕으로 갑니다.”
지연의 용서를 빌며 또렷이 빛냈던 그의 눈가에 이번엔 슬픔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게 참 지연이를 키워주고 낳아주신 분한테 드릴 말씀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그는 주저했다.
하지만 애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지연이…….”
차오르는 슬픔을 목으로 눌렀다.
“잘 부탁드립니다.”
“…….”
그가 말했다. 우리 지연이라고.
그 말이 뭐라고,
메마른 봉수의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든든한 딸의 남자를 보는 애비의,
환희에 찬 눈물이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