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그녀만 모르는 밤
2018.07.21.
주고받는 숨결과 숨결은 타오른 본능처럼 뜨거웠고
오고가는 체액은 달콤한 꿀처럼 끈적였다.
온몸은 녹진하게 풀어지고
심장은 단단히 조여졌다.
수현은 지연의 터뜨린 서러움을,
지연은 수현의 가슴 시린 안타까움을,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의 상처받은 내면을 뜨거운 키스로 위로했다.
그리고 마법처럼 상처는 치유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렇듯 서로를 보듬었다.
한편, 먼발치에서 이 아름다운 남녀의 사랑의 행위를 말간 눈의 한 아이가 보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에 색색가지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여섯 살 아이에게도 복잡한 심경이란 건 존재했다.
.
.
.
식사가 끝난 후 지연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수현은 참숯의 마지막 불씨를 정리하고 야외용 테이블을 접고 있었다.
미리 2층으로 올라가 양치질을 약속했던 줄리는 부엌에 있는 지연 몰래 다시 마당으로 내려왔다.
툭툭-
의자를 치우고 있는 수현의 허벅지를 줄리가 힘 있게 두드렸다.
그녀의 도발적인 노크가 귀여워 수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심심해? 양치질 다 했어?”
그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통통한 얼굴을 흔들었다.
“먼저 할 일이 있어서요.”
“뭐?”
“아저씨, 저랑 얘기 좀 해요.”
화난 표정은 아닌데, 그녀의 눈빛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아, 맞다. 아까 못 한 얘기가 있었지?
“그래? 그럼 그럴까?”
수현은 치우고 있던 의자 두 개를 다시 마주 보게 놓았다.
먼저 줄리를 앉히고 건너편에 그도 앉았다.
“아까 나한테 할 말 있다 그랬지? 뭡니까, 우리 공주님?”
수현은 톤을 높여 익살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이 샐룩해졌다.
“나 지금 심각한데…….”
아, 장난처럼 들렸나?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아 양팔을 엑스로 꼬았다.
귀여운 인형을 보듯 동그랗게 뜨고 있던 눈매를 고쳐 진지하게 내렸다.
“이제 얘기해봐. 줄리.”
그녀는 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힘든 속내를 얘기하기 전 숨을 고르고 있는 듯.
이럴 땐 꼭 정말로 지연이 낳은 아이 같다.
지연도 진중한 얘기를 하기 전 꼭 숨을 고르니까.
작지만, 인형처럼 앙증맞지만, 결심을 담은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진정한 남자는 책임감이 있대요. 금화댁 할머니가 그랬어요.”
아직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더 또렷해졌다.
“아저씨도 남자였음 좋겠어요.”
“…… 응?”
“있잖아요…… 할머니가 그러는데 제가 진짜로 엄마 딸이 되려면 엄마가 남편이 있는 게 좋대요.”
“…… 뭐?”
“그래야 입양하기가 쉽대요, 저를요.”
이게 무슨 얘기들인지…….
뜬금없이 책임감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입양?
생각해보니 줄리는 지금 입양 조건을 얘기하는 듯하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혹시 그 말은……?
그녀가 동그랗게 주먹을 쥐더니 도전적인 어조로 물었다.
“아저씨, 저희 엄마랑 결혼하면 안 돼요?”
“…….”
“아저씨가 책임도 져야 하잖아요. 우리 엄마.”
따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이마에 힘도 주었다.
“책임질 그런 일, 했잖아요.”
“…… 응?”
책임질 일?
다른 걸 다 떠나서 줄리가 말하는 그 책임질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수현은 궁금했다.
“내가 언제?”
꿀꺽-
줄리는 마른침을 조그마한 목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삼켰다.
그러다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그런데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점점 출렁대기 시작했다.
눈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
하지만 그녀는 눈가가 붉게 물들 정도로 힘을 줬다.
눈물을 꾹 참아내겠단 의지였다.
그리더니 도톰한 입술을 삐죽거리며 쏟아내듯 터뜨렸다.
“울 엄마랑 뽀뽀하는 거 나 다 봤어요!”
울컥울컥.
“내가 다 봤다고요, 다!”
끅끅.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아저씨랑 울 엄마랑 뽀뽀했잖아! 으앙~~~~”
“…….”
말을 마친 그녀는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줄리야…….”
“뺏겼어~~~~~!”
“주, 줄리야…….”
“내 건데~~~~~ 으앙~~~~~~”
“주, 주, 줄리야…….”
“뽀뽀 내 건데, 나한테만 하는 건데. 으앙~~~~~~”
“…….”
봤구나…… 봤어.
나 이거 참……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지.
“줄리야, 일단 진정해봐.”
“엉엉, 책임져. 책임져.”
“줄리야, 먼저 내 말을…….”
“책임져, 책임져.”
내 참……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뽀뽀한 줄 알겠다.
술도 한 잔 안 했는데 수현의 얼굴이 줄리의 빨간 입술만큼 붉어졌다.
대략 난감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
커다란 덩치의 수현이 인형처럼 조그만 그녀 하나 어쩌지 못하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수현의 두 팔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그녀 앞에서 휘휘 허공을 헤맸다.
안아줄라니 뿌리칠 것 같고 가만히 두자니 나쁜 사람 같고.
“미워, 미워, 엄마도 밉고 아저씨도 미워! 으앙~~~~.”
“…….”
나도 너 밉다, 진짜.
수현은 일단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울고 있는 그녀에겐 그 어떤 이성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한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훌쩍훌쩍-
슬슬 마당을 울리던 그녀의 울음소리가 진정 국면으로 들어섰다.
줄리는 작은 두 주먹으로 흐르는 제 눈물을 닦았다.
히뜩, 아직 딸꾹질은 계속됐지만 붉어진 얼굴색이 다시 평온함을 찾았다.
수현은 계속해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딸꾹질도 멈췄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잔잔한 공기가 흘렀다.
한참을 울고 나니 터뜨린 눈물이 부끄러웠는지 줄리는 고개를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키에 맞지 않은 의자로 허공에 쑥 올라가 있는 두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었다.
수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다 울었어?”
그녀는 시선도 올리지 않은 채 작은 턱을 끄덕일 뿐이었다.
수현은 입매에 미소를 그린 채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 보았다.
‘저 작은 머리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있었을까.’
지연이 세상의 전부인 줄리는 그녀가 한 남자와 뽀뽀하는 모습을 보았다.
엄마와의 뽀뽀는 자신의 전유물이라 생각한 그녀에게는 배신과 다름없었을 듯.
하지만 지연이 그녀를 입양하기 위해선 함께할 아빠가 필요하단 말을 금화댁에게 들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고 뺏기고 싶지 않지만 엄마 딸이 되기 위해선 할 수 없이 엄마를 결혼시키긴 해야겠고.
‘딴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에게 엄마를 책임지라는 얘기를 하기까지.’
그런 고민을 했을 여섯 살 아이의 심정을 생각하니,
스멀스멀 웃음이 나오면서도 싸하게 심장은 아려온다.
깨물고 싶을 만큼 귀여우면서도 애잔하게 느껴지는?
‘아, 이 아이에게 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세상 무엇도 돼주고 싶고 세상 무엇도 주고 싶다.
지금 그의 앞엔 작은 지연이 앉아 있는 것 같다.
소스라치게 사랑스러우면서도 심장을 묵직하게 만들 만큼 짠한.
그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순간, 작은 지연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난 무엇이 돼줄 수 있을까.
반짝, 별빛처럼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은 줄리는 수현의 다가옴에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접고 몸을 내렸다.
꼼지락꼼지락 요리조리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한 손을 잡았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달빛 같은 눈동자로 별빛 같은 미소로 그녀에게 말했다.
“줄리…….”
코코아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딸이 돼줄래?”
.
.
.
“밖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아주 곤죽이 돼서 잠들었어요.”
지연이 줄리를 재우고 마루로 내려왔다.
“어? 벽난로 피웠어요?”
그사이 수현이 마루에 벽난로를 피워놓았다.
“응, 그래야 할 거 같아서.”
“왜요? 아까 숯 태우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힘들어도 할 건 해야지. 특별한 날인데.”
“무슨 날인데요?”
“뭐 그런 게 있어. 와인 한잔할래?”
“와인이요? 왜요? 안 피곤해요?”
“피곤해도 할 건 해야지. 부엌 가서 간단한 안줏거리 좀 갖다 줘. 와인 오픈은 내가 할게.”
슬쩍슬쩍 질문을 피해가는 그가 좀 이상했지만 지연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부엌으로 향했다.
수현은 지연을 보낸 후 피식피식,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깜찍한 프러포즈를 생각하면 입매가 실룩였다.
‘줄리, 내 딸이 돼줄래?’
무릎 꿇은 그의 프러포즈에 줄리는 스프링 튀듯 고개를 위아래로 마구 흔들며 예스, 를 표현했다.
하지만 엄마를 뺏긴단 생각에 또 입술은 삐죽삐죽.
그는 그런 그녀를 안아 높이 올렸다.
비행기를 태우듯 한 바퀴 돌려 가슴에 폭 안았다.
두 팔로 그의 목을 착 감은 그녀의 귓속에 사랑을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최고의 아빠가 되어줄게. 매일매일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비행기의 힘이었을까?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안은 두 팔에 꼭 힘을 주었다.
조금 전보다 더욱 확실한 예스, 였다.
그는 줄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엄마한테는 우리 사이의 이 프러포즈는 비밀이야.”
“왜요?”
“프러포즈는 이 세상의 모든 여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벤트야. 그걸 줄리가 뺏으면 안 되잖아. 엄마도 받아야지.”
“아…….”
줄리는 금방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도 여자니까.
밖에 너무 오래 있지 말라는 지연의 잔소리로 프러포즈는 그렇게 끝이 났다.
수현은 준비한 와인을 오픈하며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지연은 알까? 오늘 밤 자기도 모르는 프러포즈를 받았다는걸?’
그때 오늘의 주인공 지연이 딸기와 치즈를 곁들인 안주를 가지고 왔다.
“여기 있어요. 안주.”
수현은 그녀가 내민 접시를 받아 벽난로 옆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참나무 향기 은은한 불 앞에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자, 받아.”
그녀의 잔에 붉은빛이 감도는 쌉싸름한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건배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가 건네는 와인 잔을 받았다.
그는 그녀 앞으로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그녀도 별 뜻 없는 눈빛으로 별 뜻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잔을 올렸다.
그녀의 그 아무것도 모르는 청아한 눈빛을 보며 수현은 혼자만의 맹세를 했다.
사랑하는 지연아,
나는 오늘 네가 없는 곳에서, 네가 듣지 못한 목소리로 너에게 프러포즈를 했어.
비록 줄리의 협박 같은 울음으로 시작된 의식이었지만,
맹세코, 그 마음은 진실 됐고 그 의식은 신성했어.
기약할 순 없으나 너무 늦지 않는 어느 날,
나는 네가 보는 앞에서 너의 눈을 맞추며 너의 귓속에 속삭일 거야.
‘내 신부가 되어줄래?’
그날까지……
우리, 조금만 참아내자, 조금만 기다리자.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자.
그래 줄 수…… 있겠지?
그만의 맹세가 끝났다.
수현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쨍-
그는 그녀의 눈을 향해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을 위해서…….”
수현만이 아는, 그녀는 모르는,
핑크빛 밤이 흐르고 있었다.
*
쨍-
서울의 또 다른 일각, 또 다른 두 개의 잔이 부딪치고 있었다.
애런은 태규를 자신이 묵는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로 불렀다.
오라고 해서 오긴 했지만 태규는 이 건배의 의미를 모르겠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가택 침입자에겐 총을 쏴도 괜찮다’며 자신을 공격했던 애런이 갑자기 친밀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 술을 마시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나한테 왜 이래?”
다분히 애런의 의도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애런은 그의 뾰족한 시선을 여유 있는 미소로 받아냈다.
“서울에 친구가 없어서요. 친구 하면 좋을 거 같아서.”
뭐? 나한테 친구?
“미친 거 아냐? 내가 왜 당신이랑 친구가 돼?”
태규는 희롱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쾌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애런이 아주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서로 적이 같으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난 생각하는데.”
“누가 니 적이고 누가 내 적인데?”
“진수현.”
“…… 진수현?”
참 황당한 발언이었다.
수현과 애런이 전혀 다른 모습이긴 했지만 형제라고 들었다.
그렇게 친해 보이지 않아 의붓형제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또 지연의 일이라면 두 사람이 한마음으로 덤벼들기에 그래도 형제 사이에 의리는 있어 보였다.
그런데 적이라고? 진수현이?
“왜? 여자 하나 가지고 지금 싸우는 중이냐? 송지연?”
“그건 포기했다. 안 넘어가는 여자도 있더라고.”
“그렇지, 지연이가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여자는 아니지. 그래서 뭐, 넌 송지연을 포기했으니 진수현이라도 못 갖게 날 돕겠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못 가질 바에야 남도 못 갖게 하는.
그런데 애런이 라운지 바가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비웃었다.
“내가 미쳤냐? 널 돕게? 아니면 마는 거지.”
애런의 비웃음이 불쾌해 태규는 언성을 높였다.
“그럼 왜 나랑 친구를 하자는 거야?”
애런이 들고 있던 위스키를 가볍게 한 잔 목으로 넘겼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가 아니고 내 고용인이 돼달라는 거야.”
“고용인?”
“너 미국 변호사라 그랬지? 변호사 자격증은 아직 가지고 있냐?”
“당연하지. 난 엄연히 뉴욕의 변호사였다고.”
“그렇다면 나랑 계약하자. 성공하면 니가 여태 보지 만져보지 못한 최고의 수임료를 주마.”
최고의 수임료란 소리에 태규의 온 신경이 바짝 일어섰다.
한국에 와서 강민희한테 용돈이나 받으면서 비굴하게 살고 있었는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뭐든지 해줄게.”
“유언장 하나 작성하자. 공식적으로, 법률에 입각해서.”
“누구 유언장?”
“우리 엄마…….”
애런의 엄마?
듣기론 애런과 수현의 엄마는 미국의 명망가 몬테규가의 외동딸, 그리고 현재는 줄리아나라는 거대 기업의 회장이라고 들었다.
그런 위치의 여자라면 이미 고문 변호사의 입각 하에 유언장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다시 고쳐?
“불가능하지. 유언장이라는 게 당사자의 사인이 있어야 하는데 니 맘대로 그걸 어떻게 고치냐? 혹시 위조 같은 걸 바란다면 난 거절한다. 난 감옥 가기 싫거든.”
하지만 애런의 얼굴엔 자신감이 확고했다.
“나도 위조 따위는 원하지 않아. 엄마의 고문 변호사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직접 사인한다면 말이 다르지.”
“엄마랑 합의가 된 거야?”
“아니.”
“그럼?”
애런은 자신의 잔에 넘치도록 위스키를 따랐다.
다시 한 잔을 들이켠 그는 분노와 원망과 서러움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엄마가 날, 형으로 알거든.”
태규는 애런과 수현, 그리고 그들의 엄마 사이에 어떤 사연들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애런은 지금 수현을 증오하고 있다.
그리고 엄마를 원망하고 있다.
그의 머리와 심장을 악이 지배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성공한다.
태규는 애런을 향해 친구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래, 그럼 해보자.”
악은, 선보다, 강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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