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뜨거운 위로
2018.07.18.
수현은 지연을 안고 슬픔이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미국 가, 일주일 후.”
설마 했던 지연의 손이 수현의 허리에서 툭, 떨어졌다.
분명 1년 후라고 했었다.
바로 어제 1년 후라고 말했었다.
그 1년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혼란스러웠는데 한 달이 당겨진 것도 아니고 한 계절이 빨라진 것도 아니고 바로 일주일 후에 가야 한다니…….
수현은 안고 있던 지연을 떼어냈다.
“어머니가 생각보다 많이 아프셔. 내가 미국 본사에 들어가서 회사를 수습해야 해.”
그의 말에 따르면 회사에선 아직 어머니의 병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장시간 부재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제는 회사 전체가 혼란스러워졌다고.
차라리 육체가 아프면 병환이 있음을 밝히고 수현이 올 때까지 병원에서 모든 업무를 보면 되는데 하필 정신이 흐려지는 알츠하이머니 일을 하기가 힘드신 것.
그런데 이제야 어머니의 병환을 솔직하게 밝히자니 그것도 문제가 있었다.
어느 회사에나 있는 회장의 반대파들이 그녀가 멀쩡한 정신에 했었던 결정들까지 흐린 정신으로 인한 오판이었다고 트집을 잡아 저들 원하는 대로 고치려고 들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내가 나서야 해. 어머니의 병환을 최대한 숨기고 내가 미리 경영 수업을 하는 것처럼 해서 회사의 중심을 잡아야 해.”
그런데 지연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애런이 분명 말했었다. 친아들인 자신이 회사의 후계자라고.
그리고 의붓아들인 수현은 엄마에게 버림을 받음과 동시에 쫓겨났다고.
속초에서 수현이 새엄마와 아직 돈독한 사이고 회사도 그대로 다녀야 한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애런이라는 후계자가 있으니 그 위치가 경영 수업이 필요할 정도로 큰 위치라곤 생각 못 했다.
그런데 왜? 도대체 당신이 왜?
“애런도 아니고 당신이 가야 하는 이유는 뭐죠?”
“그건…….”
수현은 이제 완전히 솔직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애런이 아니라 내가 후계자니까.”
“…… 네?”
지연은 혼란스럽다.
그럼 여태 나와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이 그런 큰 기업의 후계자?
미국의 명망가에 들어갔다가 아빠가 돌아가시며 천덕꾸러기가 된 안타까운 남자가 아니고?
친아들인 동생 애런에 콤플렉스를 느낄 정도로 차별을 받으며 자란 상처 입은 남자가 아니고?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이거였다.
“그럼 그때 제가 회사에서 문태규와 마주쳐 멱살 잡았을 때 오드리 화장품 회장에게 전화해서 절 챙겨달라고 말한 사람이…….”
미선이 그랬었다.
미국의 커다란 기업의 후계자가 특별히 강 회장에게 전화를 했었다고.
그게 애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응, 나였어. 지연이 곤란을 겪을까 봐 그랬어.”
“그런데 왜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어요?”
“그냥…… 뭐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지연은 민망함이 섞인 수현의 얼굴을 보며 알 수 있었다.
‘내가 혹시 부담스러워 할까 봐 고민했겠지.’
누가 봐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
평범한 집의 딸이라도 너무도 다른 배경과 환경의 격차로 넘기 힘든 벽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녀는 심지어 미혼모.
이게 가능한 관계일까?
“어떻게 저랑 만날 생각을 하셨어요?”
조금은 엉뚱하게 들리는 그녀의 질문에 수현의 입에선 헛웃음이 흘렀다.
“바보, 사랑하니까. 드라마에서처럼 집안에서 반대하고 엄마가 여자 찾아가고, 뭐 그런 일은 우리 집안에선 벌어지지 않아. 우리 어머니 그런 분 아니셔.”
“정말…… 요?”
“그럼, 우리 아빠와 어머니도 사랑해서 결혼하셨고 비록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하셨지만 아빠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니 지금까지도 아빠를 가슴에 품고 있는 분이야. 사랑이 뭔지 아는, 아름다운 분이야, 우리 어머니는.”
다행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사랑을 믿는 분이시라는 게.
하지만 그래도 그는 떠나야 한다.
“그럼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미국으로 건너가서 회사를 일단 안정시켜야지. 그리고 돌아올게.”
“그게 얼마나 걸리는데요?”
“그건…… 약속할 수 없어. 하지만 최대한 빨리 오도록 노력할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었다.
지연은 믿기로 했다.
지금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그윽하고 진실됐으니까.
‘기다릴게요…….’
그녀는 심장에 단단하게 힘을 주었다.
철없는 눈물 따위로 그를 힘들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떠날 그를 위해서.
*
애런은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을 향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프시다!
지연에게 거절당한 고통이 까마득한 옛일 같다.
머릿속엔 온통 엄마 로즈뿐이었다.
‘언제부터 아프신 걸까? 어디가 아프신 걸까? 한국엔 왜 오신 걸까?’
위장이 쓰라릴 정도로 머리가 복잡하고 온몸이 예민해졌다.
그런데 걱정과 동시에 이상한 기대감이 올라오는 건 뭘까?
‘혹시 날 보러 오셨나?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형이 보고 싶었다면 형을 미국으로 부르면 됐지 굳이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으로 올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직접 한국으로 오셨다는 건 벌써 1년 넘게 집을 나가 보지 못하는 그를 보기 위한 행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한국까지 오신 거야.’
화해를 하고 싶다는 제스처?
만약 그렇다면 그래도 엄마는 날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해.
언젠가 누군가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해줬던 게 기억난다.
‘사람이 아프고 힘들 때 핏줄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가장 본능적이 되니까. 아마 애런의 어머니도 연세가 드시고 돌아가실 때가 되면 형보단 애런을 더 찾게 되실 거야.’
그땐 상상이 가지 않는 말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아프시고 나서야 친아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신 거지.’
걱정은 되지만 마음은 가득 차 있던 돌덩이를 덜어내듯 가벼워지고 있었다.
어깨는 날개를 단 듯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야 기회가 왔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기회를.
.
.
.
병원에 도착해 병실로 올라가니 미리 로버트가 병실 앞에 나와 있었다.
“애런, 오랜만입니다.”
“응, 엄마는?”
애런은 로버트를 지나쳐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근데 그가 애런의 앞을 몸으로 막았다.
“왜?”
“뵙기 전에 제 말씀을 듣고 들어가시죠.”
뭔가 묵직한 말이 나올 것 같은 무거운 표정.
“알았어. 뭔데? 나 엄마 빨리 보고 싶은데.”
“회장님 시력이 안 좋으십니다. 거의 사물을 정확히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설마.”
생각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었다.
알츠하이머로 정신이 좀 없으시다는 얘기만 대충 듣고 왔는데 시력까지 잃고 계시다니.
“그래서 혹시…… 아닙니다. 그냥 이 정도만 알고 들어가시죠.”
로버트는 뭔가 말을 하려다 멈췄다.
중요한 말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굳이 그가 멈춘 말을 되묻고 싶진 않았다.
지금 그는 너무나 엄마가 그리우니까.
애런은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갔다.
VVIP 병실답게 한쪽에 화분 가득한 테라스까지 갖춰진 상당히 넓고 고급스러운 룸이었다.
컨디션이 좋은지 로즈는 햇빛을 쐰다며 테라스에 나가 있었다.
이른 결혼으로 애런을 낳아 아직 오십 대 초반인 젊은 엄마 로즈 몬테규.
나이가 들었다지만 명망가의 외동딸로 왕실의 공주처럼 자란 그녀에겐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애런은 자신의 엄마지만 햇살 아래 금발을 찰랑거리며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뒤에 가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엄마, 이제 와서 죄송해요.’
철이 든 아들의 목소리를 들려드리며.
애런은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막 그녀의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찰나, 그녀가 인기척을 느꼈다.
“수현, 수현이니?”
“!”
“수현이 왔구나. 니가 생각해도 아까 너무 일찍 돌아갔지? 나 많이 섭섭했어.”
정말로…… 안 보이는 거야?
그녀의 눈은 열려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고 애런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보낼 뿐 정확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는 애런을 수현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국 햇살이 이렇게 따사로운지 몰랐어. 테라스에 있는 나무 때문인지 공기도 아주 상쾌해. 한국에 온 거 잘한 거 같아. 로버트가 안 된다는 거 수현이 아빠의 나라, 그리고 수현이가 있는 한국에 가고 싶다고 내가 우겼거든. 오니까 너무너무 좋다.”
“!”
실망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심장에서 폭탄이 터진 기분이랄까?
품고 있던 일말의 기대조차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녀는 애런을 보기 위해 한국에 온 게 아니었다.
‘형의 아빠와 형의 나라에 오고 싶었다고요?’
그를 형으로 착각하고 햇살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
형한텐 늘 이런 미소를 보여주셨나요?
나에겐 보여주지 않았던 이 따뜻한 미소?
애런은 순간 지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핏줄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줄리와 나 사이엔 교감이 있어요. 누구도 알 수 없는 교감.’
엄마도 형과 그런 교감이 있는 거예요?
핏줄인 나와는 있지도 않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교감?
눈앞에 섬광이 반짝이며 그도 시력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절망으로 눈이 멀어버린 듯.
어찌 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다.
보이지 않으니 착각할 수도 있지.
게다가 그는 1년 넘게 엄마와 연락도 하지 않은 버려진 아들 아니었었나?
하지만 몸이 아프고 시력을 잃은 상황에서도 그녀의 마음이 보인다.
그는 여전히 형밖에 모른다는 걸.
‘엄마에게 내 존재는 없었던 거야.’
잠시 잠깐 가졌던 착각의 시간조차 부끄러웠다.
매일 내리 쐬는 저 햇살보다도 애런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
그는 로즈의 어깨 위에 올리려던 손을 거두었다.
그녀를 향한 다정하고 따뜻한 시선도 거두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병실 밖으로 나왔다.
로버트의 부름도 듣지 않고 바로 광화문의 호텔로 돌아갔다.
스카이라운지 바에서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운 후 그는 꺼져가는 이성으로 생각했다.
‘이대로 바보가 될 순 없어.’
저런 상태에서 엄마가 완전히 정신을 놓는다면 몬테규가의 핏줄은 사라지고 형이 모든 걸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 아마 형은 날 내치겠지.
여태 내가 형에게 한 행태를 가슴에 품고 있을 테니까.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난 할렘가의 거지보다 못한 루저로 살아가야 하나?’
과연 이 순간에 누가 날 도울 수 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흐린 정신 끝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왜 그 사람이 떠오를까?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법칙 때문일까?
어쨌든 그는 암흑 속에 내려진 한 줄기 빛 같은 그 남자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보기로 했다.
‘방법이 없잖아?’
그는 미선에게 문자해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애런은 알아낸 번호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비열한 남자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애런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문태규 씨?”
“넌, 누구야?”
“나 애런 몬테귭니다.”
“무슨 일이야?”
이상하지?
그의 교활한 목소리가 편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
지연은 봉수네 있던 줄리를 데리고 왔다.
참 오랜만에 수현과 셋이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 마당에서 바비큐 할까?”
수현의 제안으로 세 사람은 마당으로 나왔다.
아직 좀 쌀쌀하긴 했지만 바비큐를 하기엔 썩 괜찮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현은 그릴 안에 참숯을 넣어 고기 굽기 좋은 상태로 달구었다.
지연은 돼지 목살과 수제 소시지, 각종 야채까지 바비큐하기 좋게 다듬었다.
줄리도 작고 통통한 손으로 야외 테이블 위에 접시와 포크를 예쁘게 세팅했다.
누가 봐도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든든하고 가정적인 아빠, 예쁘고 요리 잘하는 엄마, 심부름 잘하는 착한 딸.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수현과 지연의 속마음은 그릴 안의 숯만큼 검게 타들어갔다.
수현은 일주일 후면 지연과 줄리를 두고 미국으로 가야 한다.
‘내가 없는 동안 지연과 줄리를 누가 지켜줄 수 있을까?’
그런 수현을 보는 지연의 마음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까? 수현 씨 없이 난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녀는 수현뿐 아니라 줄리를 보는 마음도 무너질 듯 아팠다.
줄리는 오늘 태규를 보았다.
보통의 아이라면 오랜만에 보는 아빠를 보고 행복한 울음을 터뜨렸을 듯.
하지만 그녀가 오늘 태규를 보며 흘린 눈물은 행복의 눈물이 아니었다.
늑대를 본 것처럼 공포를 담고 있었다.
줄리에겐 태규의 출현이 곧 지연과의 이별을 의미하니까.
‘지금 얼마나 불안할까? 마음이.’
계속해서 줄리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는데 다행히 줄리의 표정이 아주 밝았다.
태어나서 처음 가진 바비큐 파티에 태규 생각을 덮어버린 듯.
“나, 나 오늘 소시지 많이. 밥도 한 공기 다 먹을 거야.”
포크를 들고 그릴 옆을 떠나질 않았다.
이런 바비큐 파티를 계획해준 수현에게 고마웠다.
그릴 위에 올린 고기와 야채, 소시지가 먹기 좋게 익었다.
세 사람은 주황빛 조명등 아래 세팅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난 역시 몸 안에 고기 잘 굽는 유전자가 있는 게 분명해. 이렇게 겉은 바싹, 속은 보들보들하게 잘 굽긴 힘들 거야, 그치?”
수현의 너스레에 지연이 받아쳤다.
“제가 고기를 잘 잰 거 아닐까요? 숯에 굽는 건 돌멩이를 구워도 맛있을 거 같은데요?”
“뭔 소리, 숯에 고기 굽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잘못하면 다 타는 수가 있어.”
“타도 맛있는 게 숯에 구운 고기라니까요? 제가 양념을 잘해서 그런 거죠.”
핑퐁처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말간 눈동자로 보던 줄리가 웃었다.
“난 고기보다 소시지가 맛있는데.”
큭, 큭큭큭큭-
수현도 지연도 그녀의 재치 있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더없이 행복한 식사시간이었다.
“줄리, 소시지 더 줄까?”
지연의 물음에 줄리는 세로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릴 위를 보니 소시지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부엌에 더 있어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의 테이블 위에 수현과 줄리, 둘만이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좀 전까지 소시지에 흥분하며 개구지게 웃고 있던 줄리가 시무룩해졌다.
‘나랑 둘만 있어서 그런가?’
둘만 있어도 전혀 어색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공기가 흘렀다.
먼저 말을 시켜볼까?
“줄리야, 바비큐 파티 하니까 재밌지?”
그녀는 기운 없이 끄덕였다.
“네…….”
왜 그러지? 무슨 일이 있나?
“뭐, 불편한 거 있어? 아저씨한테 말해봐. 뭐든 들어줄게.”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말간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아저씨 미국 가요?”
“…… 응.”
“나 그전에 아저씨한테 할 말 있는데.”
“그래? 뭔데?”
그런데 그때 집 안에서 지연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악!”
소리에 놀란 수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줄리도 따라 일어났지만 수현은 그녀를 다시 앉혔다.
“줄리야, 넌 잠깐 여기 있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일이 생겼다면 줄리가 없는 게 나을 테니까.
그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부엌으로 달려가니 그녀가 주저앉아 발등을 쥐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발등에 새빨간 피가 흘렀다.
“어쩌다 이런 거야?”
수현의 흥분된 목소리에 지연이 잔뜩 미간을 구겼다.
“소시지에 칼집을 내다가 그만 칼을 떨어뜨렸어요.”
“조심 좀 하지 않고!”
수현은 바로 뒤돌아 응급 키트를 가져왔다.
칼에 스친 그녀의 발등을 알코올로 소독하고 연고를 발랐다.
그리고 물이 닿지 않도록 밴디지를 붙여주었다.
밴디지의 끝을 마무리하며 그가 타박하듯 말했다.
“이제 이런 거 누가 치료해준다고. 좀 조심하지 않고.”
“…… 그러게요.”
“소시지에 칼집 좀 안 낸다고 큰일 나니? 그냥 가져오면 될걸.”
“…… 그러게요.”
“은근히 보면 꼼꼼한 거 같으면서도 덤벙대는 면이 있어. 애처럼 말이야.”
“…… 그러게요.”
수현은 치료가 끝난 지연의 발을 톡톡 두드렸다.
“이제 됐어. 덧나진 않을 거야.”
“…… 그러게요.”
의미 없이 흐르는 지연의 대답.
툭-
그녀의 발등 위로 굵은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눈동자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많이 아파?”
“아니…… 요.”
“그럼 왜 울어?”
그녀의 작고 가냘픈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굵은 눈물이 비집고 흘렀다.
그녀는 꾹꾹 참아내고 있었던 감정을 터뜨렸다.
“그냥 이렇게 살고 싶어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서글픔의 폭발이었다.
“이게 뭐 그렇게 큰 욕심이라고.”
참아왔던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터져버려,
“그냥 수현 씨랑 줄리랑 고기도 먹고 소시지도 먹고…….”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회오리처럼 몰아닥쳐,
“그냥 이렇게…… 이렇게…….”
뿜어내듯 쏟아진 그녀의 작은 절규.
“…….”
그녀의 눈물이 살을 애이고, 그녀의 서러움이 뼈로 스미고,
그녀의 절규가 심장을 베고.
그는 조그만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한 손, 한 손, 그녀의 얼굴에서 떼어냈다.
서글픔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손등으로 살며시 쓸어주었다.
그리고 꽃잎처럼 모아 그녀의 양 볼을 감쌌다.
그윽하고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망울을 응시했다.
조금은 빨라진 호흡, 거칠어진 그의 숨결이 점점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맞닿았다.
덮었다.
침투했다.
고여 있는 그녀의 서글픔을 힘껏 빨아 그의 목으로 넘겼다.
오늘 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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