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그 사랑, 끝내십시오
2018.07.14.
로버트는 냉정한 눈빛으로 수현에게 말했다.
“그 사랑, 끝내십시오.”
지연과의 사랑을 끝내란 말이었다.
“……뭐?”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입니다. 지금 이 사태에서 도련님이 하셔야 할 일은 너무나 많으니까요.”
그건 수현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후계자이자 회사의 후계자.
“알고 있어.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미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가서 회장님의 공석을 메우셔야 합니다.”
예상은 하고 있던 일.
“언제? 내가 언제 미국으로 가면 되지?”
로버트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도, 두려운 것이, 있었다.
*
한여름 밤의 꿈처럼 끝나버린 로맨틱한 여행.
가장 빠른 서울행 버스를 타고 올라오면서 수현과 지연은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니, 지연은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현의 불안정한 모습.
간간히 지연을 생각해 웃어주고 있지만 그의 눈동자는 수심으로 가득했다.
서울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각자 택시를 타기로 했다.
수현은 한국병원 행이었고 지연은 집으로.
“어서 가세요. 별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요.”
먼저 택시에 오른 수현에게 지연은 일부러 밝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수현은 고갯짓으로 대답을 한 후 택시를 출발시켰다.
지연은 곧바로 택시를 타고 가회동 빨간 지붕 집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현실은 시작이다.
줄리의 엄마라는 현실, 싫지만 태규와 부딪혀야 한다는 현실, 난장판이 된 회사에서 잘 버텨내야하는 현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전보단 마음이 많이 굳건하고도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아마 수현 씨 때문이겠지.’
비록 수현의 사정으로 함께 집에 가진 못하지만 현실로 향하는 이 길이 그렇게 두렵지 않다.
속초 단합회에서 끔찍한 경험을 갖게 됐지만 수현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이제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충만함을 얻었다.
‘줄리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줄리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녀는 휴대폰으로 줄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가고 있어. 입구에서 딱 대기했다가 뽀뽀 백 번 해주기.
금세 답장이 왔다.
-대기타고 있을게.
“…….”
이런 여섯 살짜리 같지 않은 말투.
빨리 인터넷을 끊고 어린이집을 보내야 해.
정식으로 그녀의 딸로 입양해서 당당하게 보내고 싶다.
노란 유니폼에 빨간 배낭을 메고 아침마다 등원하는 그녀를 상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귀여워 미치겠다.
‘공부는 못해도 되는데 애들이나 울리지 않았으면.’
또래 아이들이랑 어울리다보면 저도 여섯 살 아이처럼 변하겠지 뭐.
집에 가자마자 그 작은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안아줘야지.
그런데 안아주고 나선 해줘야 할 말이 있다.
수현과 그녀의 관계에 대해서.
물론 줄리 앞에서 대놓고 연인 관계를 드러내진 않겠지만 서로를 향한 애정의 눈빛을 숨길 수는 없을 듯.
차라리 좋은 사이라는 걸 밝히고 건강한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녀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1년 후 수현과 그녀는 헤어질 수도 있다.
그전까진…… 충분히 사랑해주고 싶다. 그만큼 위해주고 싶고.
‘줄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상처받을까? 엄마를 뺏긴 거 같아서?
아니면…… 놀리는 거 아냐?
어떤 반응을 보이든 이해를 구하고 싶다.
줄리, 너만큼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이라고.
‘줄리…… 이해해줘. 엄마가 더 많이 노력할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택시는 가회동 초입을 지나 빨간 지붕 집으로 향했다.
막 집 앞에 정차하려는데 못 보던 자동차가 집 앞에 주차돼 있었다.
‘응? 누구지? 애런 차도 아닌데?’
금화아줌마가 손님을 불렀나?
지연은 택시에서 내려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분명 문소리를 내면서 들어갔는데 줄리가 뛰어나오질 않는다.
혹시 또 드라마?
지연은 현관문을 열며 잔뜩 토라진 목소리를 냈다.
“줄리! 대기타고 있겠다더니 엄마가 왔는데도 나와 보지도 않…….”
그런데 마루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결코 이 집에 있어서는 안 될, 줄리를 봐서는 안 될, 어떤 한 사람.
“지연이 이제 왔어? 하루 더 있다 온 거야?”
능글능글한 미소로 그녀를 맞는 사람은 태규였다.
“엄마!”
태규에게 손이 잡혀 있던 줄리가 있는 힘껏 손을 뿌리치고 지연의 뒤로 숨었다.
지연은 두 팔로 줄리를 막고 맞서듯 고개를 올렸다.
“여긴 왜 왔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들어왔어!”
저 멀리 죄인처럼 서있던 금화댁이 대신 대답했다.
“줄리 아빠라기에 반갑게 문을 열어줬는데, 그만 줄리가 저 남자를 보고 울고불고. 그런데 나가라고 해도 저렇게 안 나가고 있네요. 아빠라는데 신고할 수도 없고.”
태규가 한 발 한 발 지연과 줄리를 향해 다가왔다.
“인사부에 알아봐서 주소를 봤지. 줄리도 볼 겸, 지연에게도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왔어. 덕분에 내가 회사를 못 나가게 됐으니 회사에서 볼 수는 없으니까.”
지연은 일단 그녀의 뒤에서 옷자락을 쥐고 벌벌 떨고 있는 줄리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줄리의 손을 잡고 금화댁 쪽으로 끌었다.
“아줌마, 죄송한데 줄리 데리고 2층에 가 계시겠어요? 제가 이분이랑 할 말이 있어서요.”
금화댁은 잰 걸음으로 달려와 줄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줄리를 데리고 2층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태규가 앞을 막아섰다.
“아냐, 줄리도 들어야 해. 줄리도 알아야 하는 얘기니까.”
지연이 다시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법적인 문제는 어른들끼리 해결하면 돼. 전혀 줄리가 알아야 하는 일은 없어.”
태규는 지연과 줄리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 잠시 줄리를 향해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더니 다시 지연에게 눈동자를 올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오묘한 미소가 번졌다.
지연은 그의 그 미소가 불안했다. 무서웠다.
제발 그 말은 하지 말기를, 죽어도 하지 말기를,
기도도 소용없었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
“지연아…….”
설마 설마 했는데.
“나 생각이 바뀌었어.”
“…… 뭐?”
하지만 뻔뻔한 그 입에서 차마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흐르고 말았다.
“우리……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 우리 셋이 있었던 그 시절로.”
피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생각 같아선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발바닥에 단단히 힘을 주고 참아냈다.
줄리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니까.
지연은 큰 숨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금화댁을 보았다.
“아줌마, 죄송한데 줄리를 데리고 아빠 집으로 가시겠어요? 제가 조금 있다가 데리러 갈게요.”
태규가 불처럼 끼어들었다.
“왜 이래! 나 줄리랑 있고 싶어서 온 건데.”
순간 지연이 매서운 눈동자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도 살벌해 태규는 마른 입술을 굳게 닫았다.
지연은 다시 부드러운 손길로 줄리를 금화댁에게 건넸다.
“아줌마, 어서 데리고 가주세요.”
자신의 잘못으로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아 잔뜩 주눅이 들었던 금화댁은 얼른 줄리를 잡고 밖으로 나갔다.
금화댁의 손에 이끌려 나가는 순간까지 줄리의 눈은 지연을 떠나지 않았다.
지연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그녀와 눈을 마주쳐 주었다.
줄리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돌변했다.
차가웠고 냉정했고 원망이 서렸다.
“원하는 게 뭐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지연의 살기 띤 시선에 태규의 눈동자는 겁을 먹고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곧 다시 뻔뻔스러운 얼굴을 되찾았다.
지까짓 게 그래봤자 여자지.
“말했잖아.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고.”
“이제 와서? 니가 버린 딸이야. 나한테 버리고 도망갔지. 다른 여자 찾아서.”
“버린 적 없어. 내가 문자 보냈잖아. 잠시만 맡아달라고.”
“연락처도 안 남기고 어디 간다 말도 없이 심지어 미국에서 한국으로 도망갔잖아. 그건 명백히 버린 거야.”
지연이 상식적으로 따지고 드니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미국 변호사인 태규는 이럴 때 가장 잘 먹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협박.
“너…… 이러면 안 되지. 어떻게 보면 너 이거 납치야. 줄리 내 딸이잖아.”
“…… 미친놈.”
“그리고 따질 것도 있어. 알아보니까 이 집 진수현 그놈 집이더라. 동거해? 사생활도 문란하네.”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던 지연의 인내가 폭발했다.
“야!”
하늘 높이 올라간 그녀의 손이 막 그의 뺨으로 날아가려는 순간,
“워, 워. 참아요.”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뒤를 돌아보니, 애런이었다.
서로 칼날 같은 대화가 오가는 속에서 태규도 지연도 그가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
그는 잡고 있던 지연의 손을 느릿하게 내려주었다.
“줄리랑 어떤 아줌마가 나가기에 그 문으로 들어왔어요. 아줌마가 절 보시더니 들어가서 지연 씨 좀 도와주라고 울더라고요.”
금화댁은 예전에 줄리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애런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수현의 동생이란 걸 알고 도움을 청한 듯.
갑작스러운 애런의 등장에 태규의 눈동자가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애런은 단합회에서 지연에게 졸피뎀을 먹인 장본인이 태규란 걸 밝혀낸 남자.
그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지연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이놈도 니 남자니? 남자관계 참 복잡하다. 너도 나한테 할 말 없을 거 같은데?”
애런이 같잖다는 미소를 그에게 보냈다.
“한국에도 무단 침입이라는 게 있나요? 미국에선 그런 놈들한테 총을 쏴도 괜찮죠.”
총이란 얘기에 태규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시선을 빠르게 지연에게 돌리며 후들거리는 입술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가. 그런데 나 진심이다. 다시 연락한다.”
그는 지연의 움츠러든 어깨를 스쳐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갔다.
툭-
그가 사라지자마자 지연의 두 무릎이 마루로 떨어졌다.
정신을 잃기 바로 직전이었다.
.
.
.
애런과 지연이 마주 앉았다.
오한을 느끼는 그녀를 위해 애런이 뜨거운 물을 가져다주었다.
지연은 석고처럼 굳어진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단합회에서도 그렇고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뭐, 이유는 아시잖아요? 제가 지연 씨 좋아하는 거.”
애런의 익살에 굳었던 그녀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주셔서.”
예의를 보이려 억지로 웃고 있지만 지금 지연의 모습은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멍해 보였다가 혼자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가 머릿속으로 태규를 생각하는지 독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가 기어이 눈동자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위태로웠다.
애런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 사람 자꾸 찾아올 거 같은데…….”
그녀가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정말 제가 그 사람 죽여버리는 수도 있어요.”
“그런데요, 그 사람이 죽이고 싶을 만큼 싫다면 그냥 줄리만 그 사람한테 보내면…….”
지연이 몸서리치듯 온몸으로 부정했다.
“줄린 제 딸이에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애런에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낳지도 않은 애를 보내는 게 죽을 만큼 힘든 일일까?’
수현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수현도 따지고 보면 엄마의 친자식이 아닌데 친자식인 자신보다 엄마에게 더 사랑받고 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친자식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죠?”
바닥에 떨구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진정성이 담긴 눈빛이었다.
“가슴으로 낳았잖아요.”
“네?”
“줄리는 제 심장, 제 가슴, 제 마음으로 낳은 아이예요. 친자식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왜…… 핏줄이 중요하지 않죠?”
“핏줄보다 더 한 교감이 있어요, 줄리와 저는.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
핏줄보다 더 한 교감이라…….
엄마와 형도 그런 게 있는 건가? 핏줄보다 끈끈하고 핏줄보다 진한 교감?
좋은 마음으로 지연을 돕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한 방 맞은 느낌이랄까?
그냥 다른 말로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실 건가요?”
“설득해봐야죠. 자기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또 자기도 여자가 있으니 제가 싫다고 하면 물러나겠죠. 그 정도는 믿고 싶어요.”
“형한테…… 도움을 청하실 건가요?”
형이라면 현재 그녀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배경일 테니까.
‘형’의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하지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아니요. 걱정만 끼칠 거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이 와중에도 형을 걱정하고 있다.
또다시 화가 나려 했다. 그녀의 이런 형에 대한 진정 어린 배려에.
“그럼 저라도 도와드릴까요? 아시다시피 제가 형보단 입장이 낫죠. 제가 돈이라도 써서 으름장이라도 놓으면 다시는 못 올 거 같은데.”
허세였다.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하지만 이렇게라도 한 번 붙잡아보고 싶었다.
나도 저런 사랑을 받고 싶으니까.
그녀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미소를 띤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그의 눈빛을 읽으려 하는 것도 같고.
지연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려운 말을 꺼내기 전 준비를 하듯.
프러포즈를 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남자처럼 애런은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애런. 지금까지 절 너무 많이 도와주셨는데 전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하지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전 수현 씨를 사랑해요. 애런이 저에게 베푸는 친절이 형의 여자친구에 대한 배려가 아닌, 그 이상이라면 전 앞으로 그 무엇도 받지 않겠어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거절.
형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형의 여자친구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속초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게 분명하다.
결국 넌 끼어들 틈이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렇게 끝나버렸다. 내가 처음으로 진심으로 갖고 싶었던 여자와.
프러포즈를 거절당한 남자는 보통 어떤 방법으로 이 어색하고 민망한 상황을 모면할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그녀가 뭔가가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확대했다.
“아, 맞다. 제가 정신이 쏙 빠져 잊고 있었어요. 지금 형 병원에 있어요.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오셨다고…….”
“어, 어머니요? 진짜요?”
“애런에게 전화했는데 그냥 끊어버리셨다고…….”
기억이 난다. 전화로 로버트가 형을 찾기에 불쾌한 마음으로 끝까지 그의 말을 안 듣고 끊어버렸던.
“어디 계시데요? 병원이시래요? 어디가 아프시데요?”
“한국 병원이라 그랬어요. VVIP실이라고…….”
지연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현관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지연은 사직서를 쓰고 있었다.
태규와 부딪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줄리의 친부 포기 절차를 받으려면 만나긴 해야 할 것 같고.
차라리 강민희를 찾아가 말해볼까?
태규랑 빨리 결혼하라고?
“아, 진짜. 내가 왜 이런 것까지 걱정해야 해?”
수현과의 애틋한 하루를 보내며 핑크빛으로 물들었던 가슴이 검게 오염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태규가 가고 진정이 되며 마음이 좀 가라 앉아 설까?
수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프시다는 건 괜찮을까?’
태규가 한 번 더 찾아온다면 수현에게도 말을 해야겠지만 일단은 아무 걱정하지 않도록 해줘야겠다.
“그래, 난 줄리나 찾으러 가야지.”
태규가 방해한 줄리와의 시간이 아쉽다.
아빠를 만나며 흔들렸을 그녀의 불안한 감정을 다독여줘야겠다.
지연은 줄리에게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나가려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누구지? 줄리가 다시 왔나?”
그런데 집으로 들어온 사람은 수현이었다.
“수현 씨?”
까칠해진 얼굴, 몇 시간 사이 푹 팬 눈동자,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무래도 어머니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듯.
혹시나 슬픈 얘기가 나올까 지연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그도 두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아 지연을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그는 큰 걸음으로 다가와 지연을 안았다.
단단히 들어간 힘으로 그녀를 감아 품에 넣었다.
그녀의 뺨이 그의 가슴과 숨이 막힐 정도로 밀착했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온몸을 울린다.
숨을 토하기도 힘들 만큼 갑갑한 그녀가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완강한 힘으로 그녀를 가두었다.
“왜…….”
그녀가 물었지만 그녀의 정수리로 그의 불규칙한 느껴질 뿐이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흐느끼듯 몸을 떨던 그가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갈라진 중저음으로 말했다.
“나…… 미국 가야 할 거 같아.”
지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미 아는 사실인데.
1년 후 가야 한다고 그랬으면서.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불길한 상상으로 휩싸인다.
혹시……
“일주일 후…….”
그를 감고 있던 그녀의 손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