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45화 (45/77)

제45화. 사실 어제

2018.07.07.

호흡까지 고르며 뭔가 위대한 비밀이라도 고백할 것 같던 그녀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수현 씨, 저 알아요.”

“뭘?”

“수현 씨의 상황.”

“내 상황?”

그녀가 안다는 내 상황은 뭘까?

그녀를 너무도 좋아한다는 상황?

그녀를 보란 듯이 지켜주고 싶은데 아이가 걸린 문제니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답답한 상황?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수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수현 씨가 미국의 집안에서 쫓겨나고 가진 건 지금의 집 한 채뿐, 돈도 직장도 아무것도 없다는 상황.”

“…….”

황당하지만 그녀의 얘기를 계속해서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제가 모르면 모를까, 수현 씨의 상황을 다 알고 있는데 저 힘들다고 수현 씨한테 많은 부담을 줄 수는 없어요. 월세도 더 올려서 드릴게요, 그리고 데이트 한다고 돈 많이 쓰지 마세요. 저 이런 거 안 먹어도 수현 씨랑…….”

이 부분에선 그녀도 살짝 부끄러운 것 같았다.

“수현 씨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다부진 눈망울로,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나라라도 구할 것 같은 저 용맹한 얼굴.

이 상황에서 수현이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올라오는 웃음의 욕구를 폭발시켜버리는 것.

조용하고 점잖은 레스토랑의 홀이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 터져버린 그의 웃음소리로 진동했다.

“아, 진짜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다, 하하하하하.”

잔잔한 분위기에서 디너를 즐기고 있던 손님들의 눈동자가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현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하하하.”

“…….”

지연은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점점 더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애써 용기 내 말했는데 뭐가 저렇게 웃길까? 혹시 무안함을 웃음으로 넘기려고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기에 절대 웃을 일은 아니었다.

애런이 말했다.

‘형은 우리 몬테규 가문의 진짜 아들은 아니죠. 우리 엄마와 형의 아버지가 결혼해서 법적인 식구가 된 거니까. 그런데 형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부터 집안에선 애매한 사람이 돼버렸어요.’

지연이 들었을 땐 절대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한 번 아들로 삼았음 끝까지 아들이지,

어떻게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사람을 버릴 수가 있지?

지연은 따스한 가슴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미국의 상류층 사람들의 냉정함에 화가 났다.

애런은 또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제가 줄리아나의 후계자로 발표가 된 순간 형은 집을 떠나야만 했죠.’

그래서 수현이 한국에 오게 된 거라고 했다.

집에서도 쫓겨나고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달랑 돈 몇 푼 받아서.

그나마 받은 돈으로 빨간 지붕 집을 사며 월세를 놔야 할 정도로 현금이 필요했고.

그는 지연만큼 한국에서 새로 자리 잡을 직장과 돈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좋은 레스토랑에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불편했고 비싼 와인을 시켰을 때 불안했었다.

그런데 지금 또 다른 레스토랑으로 옮기자고 한다. 맛난 샴페인을 맛보여 준다며.

지연은 이 시점에서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준열하게 반짝거렸다.

“저 되게 현실주의자예요. 꽃도 싫어하고 이런 비싼 음식도 싫어해요. 그러니까 이런 걸로 저한테 잘해줄 생각 말고 우리 같이 돈 모아요. 데이트 통장 같은 거 만들어서 그걸로 지출해도 좋아요.”

이러다간 뒷바라지 해주겠으니 공무원 시험이라도 보라고 할 태세.

누가 그녀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들었는지 알 것 같다.

“우리 애런, 참 귀엽다.”

그녀석이 생각보다 지연이를 많이 좋아하나 보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거짓말까지 했어야 했나?

그런데 이런 애런의 거짓말이 화가 난다기보단 안쓰러웠다.

‘사실은 자기의 얘기를 한 거였어…….’

애런이 몬테규가의 진짜 아들인 건 맞지만 가문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사고들을 치고 다니면서 집안에서 거의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모든 돈 줄도 끊기면서 로버트나 수현에게 간간히 돈을 받고 살고 있는 신세.

공식적인 줄리아나의 후계자가 수현으로 결정되며 아예 집안 명함을 꺼낼 수조차 없는 위기에 몰려버린 비운의 아들.

‘제 맘이 얼마나 상하면 저런 얘기를 해댔을까? 언젠가는 내 귀에 뻔히 들어올 줄 알면서.’

그는 철없는 아들을 가르치듯 조금은 엄한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는 지연에게 지긋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지연아…….”

애런의 입장을 생각해 그의 말이 다 거짓말이라고 까발리진 못하겠지만,

“니가 걱정할 건 내 경제 사정이 아니야.”

“네?”

“나, 어머니한테 버림받지 않았어. 그분은 굉장히 자애로운 분이셔. 그리고 아직도 날 많이 사랑하시지.”

“진짜……요?”

“그리고 회사도 그래. 아직 줄리아나란 회사 그만둔 거 아니야. 잠시 휴직하고 나온 거야.”

그녀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럼 집에서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쫓겨난 게 아니라는 거죠?”

쫓겨나긴…….

오히려 어머니의 후계자로서, 그룹의 수장으로서, 양 어깨에 무거운 책임감을 장착하고 하루하루 날선 긴장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데 이제.

“응, 안 쫓겨났어. 아마 승진하면서 다시 일하게 될 거야.”

애런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끝까지 후계자가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다.”

귀여운 여자.

“그러니까 니가 해줘야 할 일은 밥값이 얼만가, 술값이 얼만가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주는 맛있는 음식 먹고 볼록한 배 보여주는 거야.”

“피이~~~~~”

익살스러운 그의 농담에 그녀의 입술이 앞으로 모아졌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눈빛은 웃고 있었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던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서 수현은 뭉클해진 심장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모든 걱정이 다 해결됐나? 싶은데,

갑자기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회사엔 언제 복귀해요?”

“!”

그 생각까진 안 하고 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1년…… 후?”

“아…….”

1년 후에 미국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은 연인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녀도 그 의미를 생각해봤겠지.

반달이 됐던 그녀의 입술이 금세 닫혀버렸다.

‘괜한 얘기를 했나?’

든든한 남친의 상황을 보여주려고 시작한 얘긴데 그만 슬픈 마무리를 해버렸다.

1년 후를 상상하는지 그녀의 갸름한 턱이 자꾸 바닥으로 향했다.

풀이 죽었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슬퍼진 눈동자를 수현에게 보여주기 싫어한다고 해야 하나?

“지연아, 저기…….”

1년이란 시간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얘기를 해볼까 하다가……

수현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자, 일어나. 내가 최고로 맛있는 샴페인 사줄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미선과 애런은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주말이라 차가 좀 막히네요. 피곤하시면 한숨 주무셔도 됩니다.”

비행기 승무원처럼 나긋나긋한 그녀의 말투에 애런은 문득 이런 질문을 했다.

“한국 여자들은 다 친절한가요? 말도 참 예쁘게 하는 것 같고.”

“노, 노. 한국 여자라고 다 그런 거 아니에요. 개민희, 아니 강민희 이사처럼 사나운 여자도 있어요.”

그녀의 말이 애런을 웃게 만들었다.

“하하하, 개민희요? 별명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정면만 응시하며 운전하던 미선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어머, 웃었다. 이 차 타고 오면서 처음으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속초를 출발해 휴게소 어디쯤 들러 식사를 하고 다시 차에 올라 서울에 다 도착해갈 무렵까지, 미선과 나눈 대화는 한두 마디 정도였다.

그것도 식사 메뉴를 물어보거나 커피는 어떤 걸 원하는지 묻는.

기본적으로 서구 매너를 몸에 익힌 애런이기에 미선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보여주지 못한 자신의 행동이 미안해졌다.

“죄송합니다. 운전하시느라 안 그래도 졸음도 올 텐데 제가 옆에서 재밌는 얘기도 못 해드리고.”

미선이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전 특히 잘생긴 고객님들에겐 최선을 다해 맞추는 편입니다.”

피식, 음울했던 애런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평생 잘생겼다는 말을 그렇게 들어왔지만 오늘은 처음 듣는 것처럼 그 말이 위로가 됐다.

오는 내내 또 다시 형에게 뭔가를 뺏겼다는 마음으로 힘들었었는데…….

조금은 기분이 풀린 애런이 그녀에게 물었다.

“미선 씨는 형제가 어떻게 되세요?”

그냥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제 밑으로 남동생 둘, 여동생 둘 있어요.”

“와, 그 많은 형제 중 장녀?”

“하늘이 장난으로 만든 운명이죠. 아주 미치겠어요. 그것들 건사하느라.”

“그래도 맏이라 대접받지 않았어요?”

“대접은 무슨, 겉으론 대접해주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사고 처리반이에요. 동생들 사고 칠 때마다 엄마, 아빠 대신 제가 출동했어요. 어후, 말도 마세요. 눈물 나오려 하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이유 없이 부아가 올랐다.

“동생들 사고처리 해주는 게 어렵나요? 다 할 만하니까 해주는 거지.”

늘 자신이 친 사고를 대신 수습해주고 다니던 수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말에 미선이 발끈했다.

“할 만한 사고 처리가 어디 있어요? 가끔은 내 죄도 아닌데 내 죄처럼 대신 머리도 숙여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네요, 진저리가.”

혹시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미선의 ‘진저리’라는 말이 가슴을 꼭꼭 찔렀다.

“그게 그렇게 힘든가요? 다 이득이 있어서 해주는 거 아닌가?”

모든 걸 다 가진 형이라는 사람이 그깟 동생 일 처리가 뭐가 힘들어.

오히려 엄마한테 점수나 땄지.

그런데 미선의 생각은 그와는 달랐다.

“동생들 사고 처리해준다고 알아주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아니, 부모님은 제가 동생들 사고 처리해주는 거 몰라요. 걱정하실까 봐 말 안 하거든요.”

“그럼 왜 해주는 건데요? 동생이 친 사고 대신 수습해주는 건?”

“가족이니까요. 그리고 동생을 사랑하니까요. 밉지만 할 수 있어요? 사랑하는 동생인데?”

“사랑…… 이요?”

애런에겐 사랑이란 말이 세상에서 젤 낯선 말이다.

사랑의 가장 기본인 엄마의 사랑도 못 받았는데 사랑이란 것이 어색할 수밖에.

엄마도 날 사랑하지 않는데 피도 안 나눈 형이 날 사랑할 린 없지.

또다시 기분이 씁쓸해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로버트였다.

“여보세요, 저 애런입니다.”

“혹시 수현 도련님도 함께 계십니까? 어머니가 찾으셔서요.”

“아니. 형 휴대폰 박살나서 못 받아요. 전 혼자 있고요.”

“…….”

수현이 없다고 하니 로버트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다.

이것 봐, 결국 형 찾는 것 때문에 전화 한 거지.

“왜? 나한테 하면 안 되는 말이에요?”

“그건 아닌데…….”

애런은 더 이상 전화를 들고 있고 싶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었지 엄마는.

“형 없으니까 나중에 형한테 전화하세요.”

“애런! 그게 아니라 어머니가 지금…….”

애런은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작 중요한 뒷말을 듣지 못했다.

외려 또 엄마한테 상처를 받았단 생각에 얼굴이 차갑게 굳고 있었다.

*

“대박!”

2차로 간 레스토랑에서 그녀는 생맥주를 털어 넣듯 샴페인 한 잔을 시원하게 원샷했다.

“맨날 빵집에서 파는 8000원짜리 샴페인만 먹었었는데 이런 비싼 샴페인도 먹게 되다니. 이야, 송지연 출세했다.”

처음 마셔보는 고급 샴페인의 맛에 지연은 푹 빠진 듯했다.

그녀는 수현이 따라주기도 전에 연거푸 혼자 따라 마셨다.

“천천히 마셔.”

수현이 제지했지만 지연은 핑크색 크레파스로 칠 해 놓은 것처럼 발그레해진 얼굴로 도리질했다.

“남친이 1년 후엔 좋은 직장으로 승진해서 간다니까 제가 기분이 다 좋아서요.”

“…….”

아무래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다른 대화들 보다는 1년 후에 돌아가야 한단 말이 박혀 있는 듯.

수현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최대한 안정감 있는 톤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 마. 어떻게 하든 지연이랑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볼게. 내가 여기 좀 더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좋고.”

그녀의 섭섭했던 눈동자가 금세 기운을 찾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

무한 재생된 스피커처럼 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

“남친이 1년 후엔 좋은 직장으로 승진해서 간다니까 제가 기분이 다 좋아요.”

취해서 문장 하나에 제대로 꽂혀버린 것.

알았다니까…….

수현은 할 수 없이 또 대답을 해주었다.

“지연아, 1년 후라고 우리가 꼭 헤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어. 내가 잘 연구해볼게.”

그녀의 섭섭했던 눈동자가 또 금세 기운을 찾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

“남친이 1년 후엔 좋은 직장으로 승진해서 간다니까 제가 기분이 다 좋아요.”

“쫌!”

.

.

.

잠시 후……

덜렁덜렁.

수현은 기어이 정신을 잃은 지연을 업고 호텔로 걸어가는 중이다.

취한 그녀를 업고 옮기는 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이젠 별로 힘이 드는 줄도 모르겠다.

오히려 어떤 자세로 어떻게 업어야 그녀의 팔이 내려오지 않는지, 다리가 빠지지 않는지 요령이 생겼다고나 할까?

업는 건 어렵지 않은데 다른 게 어렵다.

“남친이 1년 후엔 좋은 직장으로 승진해서 간다니까 제가 기분이 다 좋아요, 헤헤.”

테이블에 이마를 찍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녀의 반복은 계속되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은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수현은 취한 그녀를 업고 걸으며 생각을 해보았다.

1년 후에 간다는 그의 말에 그녀가 왜 이렇게 꽂혀 있는지.

그가 충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고 얘기했고 또 요즘 세상에 미국이 안드로메다도 아닌데 떨어지는 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 태규 때문인가?’

예전에 그녀가 이런 말을 했었다.

그냥 이별도 아니고 남자가 야반도주처럼 떠나가는 일을 당하고 나니 더 이상 남자를 믿기가 힘들다고.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1년 후 사라져버린다고?

그래서 다른 좋은 얘기보단 1년 후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만 마음에 담긴 건가?

“휴…… 뭐가 이렇게 가여워.”

내가 이런 너를 두고 어떻게 떠나니.

이런 너를 두고 어떻게 미국으로 가…….

취중에도 그녀가 또 무한 반복을 시작했다.

“남친이…… 1년 후엔…… 좋은 직장으로 승진해서 간다네…… 헤헤.”

“…….”

이번에도 또 대답을 해줘야 하나?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말로 대답해주었다.

“지연아…… 사랑해.”

저 앞에 호텔이 보였다.

*

친구 중 누군가 말했었다.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시고 취하면 담날 머리가 조각조각 금이 간다고.

뭐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시고 취해봤어야지.

그런데…… 지금 내 머리가 딱 그렇다.

그녀는 깨지는 머리를 느끼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런데 앞에 캄캄한 벽이 있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새벽이라 무슨 벽인지 확인이 되지 않지만.

꼼지락꼼지락. 지연은 벽을 빠져나와 몸을 일으켰다.

“물…….”

일단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냉장고를 열기로 했다.

그녀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벽을 훑기 시작했다.

벽을 더듬다보니 겨우 스위치가 손에 닿았다.

스위치를 올리며 불을 켰는데……

“꺅!”

그녀는 그만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불 위에 웬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누워 있는 것.

수현이었다.

그런데 수현이 덮은 이불에 사람 하나가 쏙 빠져 나온 구멍이 있다.

‘저거 저거, 내가 저기서 나온 거야?’

아주 수현과 찰떡처럼 붙어 잔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거예요? 수현 씨가 왜 내 방에서 잠이 들었어요?”

수현은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눈을 뜨지 않는다.

감은 채로 귀찮다는 듯 대답을 한다.

“#@$#%$^%%&”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어제 분명 수현 씨 옆 방 잡았잖아요. 그런데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

“네? 뭐요? 뭐라고요? 아니 옆 방은 어쨌냐고요!”

계속되는 지연의 질문에 등 돌리고 있던 수현이 지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른침을 삼켜 목을 다듬더니 이번엔 알아들을 수 있는 정확한 언어로 말했다.

“사실 어제…….”

그리고 그의 입에서 어이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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