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알고 있어요
2018.07.04.
-지연아.
니가 과거에 뭘 했든, 날 만나면서 니 인생은 새로 리셋된 거야.
앞으로 니 과거는 생각도 안 나게 해줄게.
그러니까…… 까불지 마.
오빠는 너무 졸려서 너와 알콩달콩 끈적끈적할 기운이 없다.
연결되는 방으로 하나 더 달라고 해서 지금 옆방에서 코 자고 있으니
아가도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우리 빵빵하게 에너지 충전해서 보자.
-경험 없는 수현.
“…….”
호텔에 비치된 종이에 써놓은 그의 손 쪽지.
지연은 쪽지를 가슴에 품고 눈을 감았다.
로맨틱한 말 하나 없는데, 예쁘단 말 하나 없는데, 사랑은커녕 좋아한단 말도 없는데,
그냥 가슴에 몰랑몰랑 구름이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과거에 뭘 했든 나를 만나 리셋됐다는 그의 말이, 그 어떤 위로보다 따뜻했다.
앞으로 니 과거는 생각도 안 나게 해주겠다는 그의 말이, 그 어떤 화려한 약속보다 든든했다.
“수현 씨…….”
쪽지를 품은 가슴이 뜨거워온다. 핫팩이라도 얹은 것처럼.
지연은 수현이 잘 펴놓은 요 위로 이불도 들추지 않은 채 털썩 몸을 뻗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첫 경험을 해야 한단 사실, 심지어 경험이 많은 여자처럼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빳빳해졌던 신경이 한순간에 말캉하게 녹아버렸다.
잠시 천장을 보며 한숨 돌린 그녀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청각은 더욱 예민해진다.
옆방에서 스르륵, 바닥에 이불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있구나. 바로 옆방에.
털썩.
그 이불 위로 그도 편하게 몸을 뉘였다, 나처럼.
“휴…….”
이불을 펴며 가빠졌던 숨을 그가 규칙적으로 고르고 있다.
잠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 듯.
괜히 지연은 숨을 죽였다. 사소한 소음도 없이 그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잠시 후 잠든 남자의 커다란 숨소리가 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푸우~~~”
푹 잠에 들었구나.
그가 편안히 잠든 걸 확인하고 나니 마음에 평온이 올라왔다.
‘나도 자야겠지?’
가슴이 뜨거워 잠이 올진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잠들고 싶어졌다.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잘 자요.’
가슴 위에 얹은 그녀의 작은 두 손엔 아직도 쪽지가 그대로였다.
쪽지는 따뜻한 이불보다 포근했다.
그가 그녀를 덮은 것처럼.
*
속초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고 있는 민희와 태규의 자동차.
두 사람은 함께 있지만 서로에게 내뿜는 공기는 차갑다 못해 냉랭했다.
태규는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앞만 보고 달렸고 민희는 목이 뻐근하도록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차피 지금은 태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기어이 진수현은 송지연을 만나겠다 이거지?’
민희의 머릿속엔 오로지 수현 생각뿐이었다.
애초에 모든 직원을 동원한 단합회를 기획한 이유는 단 한 사람, 수현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수현을 벌써 좋아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갖고 싶고 뺏고 싶은 존재?
심지어 아빠인 강 회장이 무조건 잡으라고 하니 묻고 따지고 할 것 없이 일단 들이대고 보는?
그런데 자동차 사고로 수현과의 로맨스가 물 건너갔다.
하지만 그대로 참고 있을 순 없어 태규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그녀가 종종 먹던 졸피뎀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원래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함께 있다가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지연에게 가버린 수현의 태도에 화가 나서 ‘내가 안 되면 니들도 안 돼야지’ 하는 억하심정이 들었다.
그런데 그 완벽한 작전이 태규의 멍청함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송지연이 별로야?”
말 한마디 없이 숨소리조차 냉랭하던 그녀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지연의 생각을 하고 있던 태규가 놀랐다.
“무슨 말이야?”
“어떻게 민박집까지 끌고 가서 그냥 나와? 그것도 떡실신이 됐는데?”
태규는 민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나오지 그럼 뭘 해?”
“병신, 여자가 뻗었는데 그냥 두냐? 남자 구실을 못 했잖아.”
남…… 남자 구실?
“떡실신한 여자랑 방 안에 둘이 있었음 뭔 일이 났어야 정상 아냐?”
“……뭐?”
갑자기 등줄기로 차디찬 얼음물이 솟구치듯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제야 그녀의 진짜 속내를 알았다.
지연에게 졸피뎀을 먹여 떡실신을 시키고 만취한 여자처럼 만들어 직원들 앞에서 망신이나 주자는 건 돌려서 한 말이었다.
실은 태규가 그녀와 무슨 일이 생기길 바랐던 것.
“…… 원하는 게 그거였어? 내가 지연이를 어떻게 하는 거?”
길길이 뛰며 아니라고 하길 바랐건만 그녀는 아무 부정도 하지 않았다.
‘너 이 정도로 사악한 여자였니?’
그녀의 배경에 끌리긴 했지만 민희는 지연과 줄리를 버리면서까지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였다.
그런데 그런 민희가 자신에게 다른 여자와 어떤 일이 생기길 바라며 직접 판을 깔아주다니.
“그 핑계로 날 차려고 했니? 버리려고 했어?”
태규는 씁쓸하다 못해 슬픈 눈으로 민희를 보았다.
“운전이나 똑바로 해. 나 피곤하니까.”
미안하다, 오해다, 변명조차 안 하는 그녀.
태규는 위기감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내가 개민희 너 하나 잡기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데. 자식까지 버리고 지연이한테 어떤 짓을 했는데.’
미국 변호사란 직업도 버리고, 힘들게 자리 잡았던 미국 생활도 버리고,
오로지 저 하나 믿고 한국까지 와서 어떻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날 버리려고 그런 치졸한 짓을 시키다니.
태규는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지연의 일로 이젠 ‘부사장’이란 자리도 잃을 수밖에 없다.
사실은 민희가 시켰던 일이라고 말해봐야 믿어주는 사람도 없겠지.
‘버림받는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사람 하나 믿고 모든 걸 걸었다가 무참히 버려지는 게 이런 거였어.
순간 자신을 믿고 프러포즈를 받아주었던 지연이 떠올랐다.
그녀도 내가 도망갔을 때 이런 기분이었겠지? 세상이 조각조각 깨지는 기분?
지연에게 전화해 밝은 목소리로 ‘엄마’라 불렀던 깨방정 줄리도 떠올랐다.
‘내가 보석 같은 그들을 버리고 이런 쓰레기를 만나다니.’
모든 것이 후회된다.
동시에 모든 것을 돌려놓고 싶다.
민희를 만나기 전으로 모든 것을.
*
시체처럼 잔다는 게 이런 걸까?
수현은 어떻게 자고 어떻게 깨어났는지도 모르는 꿀잠에 빠졌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네 시간 정도지만 밀도로 본다면 이틀은 잔 것 같은?
‘내가 피곤하긴 했었군.’
사실은 지연의 ‘우리 자요’란 말에 잠이 다 달아났었다.
그녀가 그의 말을 오해하고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경험 많은 여자’ 흉내 내는 걸 볼 때는 졸음은커녕, 없던 에너지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말 나온 김에 그냥?’
조금 엉큼한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이렇게 피곤한 몸으로, 이렇게 준비 없이 그녀와 그 소중한 경험을 나눈다는 것이 싫어 다른 방으로 와버렸다.
함께 있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자신도 모르겠으니까.
그런데 자고 일어나 몸이 쌩쌩해지니 슬쩍 후회가 되네?
‘그냥 한 방에 있을걸 그랬나?’
방은 다르지만 그녀가 바로 문 하나를 두고 옆에 있다.
침대 방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온돌방을 구했는데 오히려 더 두 사람을 야릇하게 이어준다.
문 하나를 경계로 두고 있지만 서로는 같은 바닥에 몸을 뉘였다.
바닥으로 전해오는 작은 서로의 소음까지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특히 청각이 예민해져 그녀의 작은 발소리, 그녀의 몸짓, 그녀의 작은 호흡들까지 전율처럼 온몸으로 흡수된다.
“피유~~~~”
지금도 전해지는 그녀의 숨소리.
왠지 함께 누워 있는 기분?
‘저 문을 한번 열어볼까?’
그의 생각이 들렸는지 그녀가 몸을 움직인다.
부시럭부시럭-
풀 잘 먹여진 이불의 스치는 소리가 이렇게 섹시할 때가.
“으아~~~~~”
그녀가 작은 기지개를 편다.
이제 잠에서 깨려나 보지?
시계를 보니 오후 5시가 넘었다. 해와 달이 바통 터치를 시작하는 시간.
수현은 가벼워진 몸을 가뿐하게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뭉그적거릴 시간이 없다.
오늘 밤은 소중하니까.
.
.
.
수현과 지연은 로비에서 다시 만났다.
두 사람 다 단잠 후의 만남이라 네 시간 전보다 훨씬 싱싱한 모습이었다.
특히 수현을 바라보는 지연의 눈동자엔 핑크빛 기운이 충만했다.
쪽지 때문이었다.
수현은 로맨틱한 오늘 밤을 위해 그녀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로비에서 추천을 받았는데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좋은 레스토랑이 있더라. 그곳으로 가자.”
그런데 밝게 웃던 지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흠…… 좋은 레스토랑이요?”
“왜?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해요.”
설마 닭발이랑 번데기를 못 먹게 돼 실망한 걸까?
그녀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게 신경 쓰였지만 일단 그가 계획한 스케줄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수현은 지연을 설악산 바로 앞에 있는 켄싱턴 스타 호텔로 데리고 갔다.
호텔 자체의 위치가 워낙 좋다 보니 가는 길에 보이는 설악산의 전망이 시원했다.
산 아래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호텔 건물도 화려하진 않지만 유럽의 어느 시골 호텔같이 아늑했다.
두 사람은 엔틱한 스타일의 로비를 지나 호텔 2층에 자리한 ‘더 퀸’이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더 퀸은 골드로 프레임 한 액자 안에 여왕의 초상화와 다이애너비 사진을 넣어 레스토랑의 벽면을 가득 메웠다.
마치 영국 왕실의 한 성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오늘 수현의 데이트 콘셉트는 ‘지연을 여왕으로 만들어주기’.
항상 자신보다는 누군가를 챙기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성실하게만 살았을 그녀를 위해 그녀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 콘셉트에 딱 맞는 더 퀸 레스토랑의 격조에 수현의 입매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직원의 안내로 두 사람은 넓은 홀의 한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화였지만 테이블 각각에 놓은 꽃은 나무로 된 벽, 촛불 모양의 샹들리에와 적절히 어우러졌다.
수현은 지연에게 묻지 않고 메뉴로 디너 코스를 주문했다.
직원이 와인 리스트를 건네자 그는 빠른 눈 스캔으로 리스트를 확인한 후 스페인산 와인을 선택했다.
“베가 시실리아 우니꼬 1989로 주세요.”
직원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둘만 남게 되자 지연이 손과 고개를 동시에 가로로 흔들었다. 큰일이나 난 듯이.
“너무 비싼 거 시킨 거 같아요. 제가 와인은 잘 모르는데 오래되면 보통 비싸더라고요. 그냥 하우스 와인이나 한잔해요.”
귀여운 여자. 남자의 주머니를 걱정해주다니.
수현은 넉넉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됐어. 벌써 주문도 했는데.”
잠시 후 직원이 와인을 가져와 시음을 권했고 올빈을 오픈했을 때 풍기는 그윽한 초콜릿 향이 코끝에 닿자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하죠.”
직원이 수현과 지연의 잔에 아름다운 적갈색의 포도주를 채웠다.
비싼 와인을 시켰다며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던 지연은 막상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곤 입꼬리에 반달을 그렸다.
“확실히 제가 마시던 싸구려 와인보단 무게감이 느껴져요. 아, 맛있다.”
그녀는 홀짝홀짝 와인을 목으로 넘겼다.
와인의 첫 잔을 비우는 동안 슬슬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애피타이저는 칼집을 내 토치로 겉을 살짝 태운 관자와 새우였다.
지연은 구운 관자를 입을 큼직하게 벌려 통째로 넣었다.
“흠, 한입 깨물자마자 육즙에서 불 맛이 느껴지네요. 맛있어요.”
와인에 이어 애피타이저도 맛있다는 말을 연발한다.
수현은 얼굴 전체를 움직이며 쫄깃한 관자를 씹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바라보았다.
‘더 자주 사줄걸.’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이 사준 무언가로 인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기쁜 일이다.
특히 지연은 뭐든 해본 척, 먹어본 척, 아는 척하는 여자들보다 훨씬 더 그 행복을 선사해주는 여자다.
뭘 해주든 감사한 얼굴로 맛있게 받고 맛있게 먹어주니까.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이란 게 참 복잡하다.
대놓고 뭔가를 바라는 여자를 보면 오히려 마음이 가질 않는다.
심장은 없고 머리만 있는 것 같은, 진심은 없고 가식만 있는 것 같은.
그런데 그가 본 지연은 한 손엔 줄리의 손을 꼭 쥐고 한 손엔 제 몸보다도 커다란 짐을 끌고 씩씩하게 나아가는 여자였다.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고 충분히 기댈 수 있는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게 만든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울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걸 이겨내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더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온다.
그래서 더 아낌없이 주고 싶은 여자.
그녀의 삶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조금이라도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면,
기꺼이 그 길이 안전하고 평안하도록 만들어줄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줄 것이다.
일단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것부터…….
꿀꺽 관자를 넘긴 지연이 빈 제 잔에 와인 한 잔을 더 채우곤 다시 꼴깍꼴깍 잘도 마신다.
완전히 와인과 음식에 심취해 수현의 야릇한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지연.
저렇게 좋아할 거면서 여기 오자고 그랬을 땐 왜 불편한 표정을 지었을까?
애피타이저 이후 식전 빵, 호박 수프, 샐러드가 속도 빠르게 그녀의 앞으로 전달됐다.
그녀는 역시 한입 음식을 품을 때마다 ‘맛있다’를 마침표처럼 내뱉었다.
“그렇게 맛있어?”
수현이 묻자 그녀가 한가득 음식을 입에 물고서 대답했다.
“저 이런 좋은 레스토랑 처음 와봐요. 그 화려한 뉴욕에 있으면서도 5불짜리 햄버거 집만 갔었는데.”
“이런 데가 처음이라고?”
“꼭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줄리가 어려서 좋은 데 가서 먹을 수가 없었어요. 괜히 비싼 돈 주고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를 거 같아서, 하하.”
“…….”
순간 수현의 입에 있던 싱싱한 양상추가 목에 걸렸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아이 때문에 제대로 된 외식을 즐길 수가 없었다니.
조금은 부끄러울 수도 있는 얘기를 솔직하게 말해주는 모습이 귀엽다.
그러면서도 짠하다.
뭐라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괜한 감정을 드러내서 그녀의 즐거운 식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수현은 괜히 안 넘어가는 음식을 맛있는 척 목으로 넘겼다.
드디어 메인 요리인 아스파라거스를 얹은 스테이크가 나왔다.
“우와~ 진짜 부드럽다. 고기도 입에서 녹을 수가 있네요.”
그는 자기 앞의 고기를 먹기 좋게 썰어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다.
“난 개불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지연이가 다 먹어.”
그녀가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하더니 이내 씩 웃으며 수현의 고기를 한 점 물었다.
“그럼 먹을게요. 음식 남기는 건 죄악이니까.”
지연은 두 개나 되는 메인 접시를 싹싹 비웠다.
마지막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마무리한 그녀가 그제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 정말 배부르다. 너무너무 호강에 겨운 디너였어요.”
때마침 와인도 바닥을 보였다.
원래 계획은 여기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속초 시내로 가는 거였으나 수현은 내친 김에 그녀에게 한 가지 더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우리 위로 올라갈까? 여기 9층에 2차로 갈 수 있는 레스토랑이 또 있거든?”
수현은 그녀가 박수를 치며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불안해졌다.
“우리 꼭 가야 해요? 난 이제 그냥 숙소로 돌아가도 좋은데.”
왜 그러지? 새로운 곳을 두려워하는 스타일인가?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가본 곳이 아닌 곳은 식당이든 장소든 별로 내켜 하지 않는.
수현은 이쯤에서 지연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수현이 어디 가자고 할 때마다 불안해하는지.
보통 여자들이라면 남자가 핫플레이스로 여자를 이끈다면 아주 좋아할 텐데 말이다.
돈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해봤는데 그건 아닐 것이다.
애런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몬테규란 집안이 미국에서 얼마나 명망 있는 집이라는 걸 알렸을 테니까.
친형제는 아니더라도 수현이 그의 형이라는 걸 아는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그녀도 짐작하고 있을 듯.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수현은 드러내놓고 그녀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지연아, 왜 그래? 내가 어디 가자고 하면 싫어?”
그녀가 잠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눈동자를 올려 그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수현 씨, 제 말, 이제부터 잘 들어요.”
그녀가 야무진 입술을 열었다.
“저 사실은 알고 있어요.”
……뭘?
그녀의 입에서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스토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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