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로맨틱한 밤의 전조
2018.06.30.
지연은 뭔가 큰일이라도 결심한 듯 작은 주먹에 힘을 주고 눈동자를 부릅떴다.
“우리 자요.”
“…….”
그래, 자자고. 졸리니까 자자고.
그 말이지? 제대로 알아들은 거지?
그런데 그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그녀의 말은 산으로 향했다.
“저도 수현 씨랑 그러는 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그 어느 때보다 사뭇 진지한 목소리.
“남자들은 다 그런 걸 원하더라고요.”
이러다간 과거까지 자백할 기세.
“예전에 제 남자친구들도 그랬어요.”
하고 있네, 자백.
“그 말은…… 경험은 있다는 말이에요.”
스톱! 뭘 그런 말까지…….
그런데 일단 속력이 붙은 산행은 가속이 붙었다.
“어쩌면 보통의 여자들보다 더 많은 경험이 있을 수도 있어요.”
점점 자랑처럼 번지고 있는 그녀의 경험담.
“저 뉴욕에서 5년 동안 유학한 거 아시죠? 자유롭기도 했고요.”
“…….”
“물론 수현 씨하고도 언젠간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래도, 그래도…….”
지연이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서 내뱉더니 결론도 못 짓고 머뭇거리고 있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정확한 의도가 파악되지 않아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수현은 허리를 낮추어 그녀의 얼굴과 일직선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말을 제대로 못 하니 눈빛으로 알아볼 수밖에.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와의 시선을 피한다.
‘어라? 귀까지 빨개졌어?’
수현은 가만히 꿰뚫어보듯 그녀를 관찰했다.
피했지만 옆모습으로도 느껴지는 산만한 눈동자, 상기된 얼굴,
그리고 주로 용기 낼 때 하는 행동인 두 주먹을 꾹 쥐고 부르르 떠는 모습.
꿀꺽, 마른침도 삼켜?
이 모든 행동을 종합해볼 때……
너…… 거짓말이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하, 수현이 꾹 참으며 속으로 웃었다.
‘아무것도 해본 적 없지?’
내가 자자고 하니까 혹시 그게 그 뜻인 줄 알고 당황했는데 거절하면 내가 민망해하고 섭섭해할까 봐 그러자고 한 거지?
사실은 겁이 나면서?
그러면서 스물일곱 살까지 아무 경험도 없었던 걸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묻지도 않았는데 센 척하는 거지?
남자들 중에서도 이런 친구들이 있다.
혹시나 자신의 무경험이 약점이 될까 봐 해보지도 않은 일들을 해봤다고 얘기하는.
‘지연이 지금 그러고 있네. 하하하.’
그녀의 착각이 너무 귀여워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는 그녀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그래, 그럼 자자.”
그 정도로 그가 밋밋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고 한 거다.”
“네에?”
그녀의 돌아갔던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부끄러운 고백을 할 때보다 눈동자는 더 확대됐고 동공은 더 활발히 흔들리며.
“허락한 거다, 그럼.”
막상 이렇게 나오니 두려웠는지 그녀의 발이 살금살금 뒤로 물러났다.
수현은 그녀가 물러난 딱 그만큼 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그러는 거다. 정말 그러는 거다.”
지연이 목을 뒤로 빼며 입술을 삐죽거린다.
“어…… 어…… 그렇긴 한데…… 저 잠깐…….”
하지만 결론을 낸 수현의 몸놀림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느리고 처졌던 그의 발걸음이 그녀의 어깨를 스쳐 쾌속으로 방파제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빨리 따라 와!”
지연은 앞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물결처럼 출렁였다.
어쩌지?
.
.
.
조금 전 방파제를 걸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수현은 가볍고 큰 걸음으로 저만치 앞서고 지연은 느릿한 걸음으로 겨우 뒤따르고 있다.
따로 횡보를 하던 두 사람이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에 막혀 다시 만났다.
휘휘 큰 반경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던 수현이 긴 팔을 뻗어 건너편 건물을 가리킨다.
“저기 호텔 있다. 지연아, 저기 호텔 있어.”
함께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일순 정지.
“저기 들어갈까 우리? 같이 자기로 했잖아, 우리.”
광고처럼 떠벌리며 호텔 행을 밝히는 한 남자의 말에 사람들은 키득대기 시작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생각이 들렸다.
‘낮부터 큭큭.’
‘좋을 때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지연은 차마 수현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절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조금 전 호텔을 가리켰던 긴 팔로 지연의 어깨를 감쌌다.
“저기 가면 되겠다. 저기서 자면 되겠어.”
꼭 강조하듯 두 번씩 지르는 말들.
창피한 지연의 어깨가 점점 가슴을 향해 모아진다.
이러다 꽉 찬 B컵 되겠어.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수현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훤칠한 키, 안 그래도 시선을 끄는 반듯한 외모 주제 어디서 저런 소릴 큰 소리로!
지연은 그가 감은 어깨가 부담스러웠다.
그 손을 뿌리치려 하는데 신호등이 터졌다.
신호가 터지자마자 수현은 시위 당긴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지연은 차마 뒤따르지 못하고 묵묵히 서 있었다.
간격을 두고 싶었다. 저 사람과.
수현이 길을 건너던 사람 중 일착으로 건넌 후 뒤를 돌아 지연에게 소리쳤다.
“나 먼저 들어가서 체크인 할게. 천천히 와.”
대답 없이 지연이 손을 휘휘 저었다.
가라고! 얼른 가라고!
그런데 그가 호텔로 들어가기 전 갑자기 획 뒤를 돌았다.
“빨리 와! 급해 죽겠어!”
그러곤 빛의 속도로 회전문을 타고 안으로 사라졌다.
시선을 받고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사라지니 남은 시선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사람들은 힐끗힐끗 이번엔 지연을 보며 키득거린다.
양심 있는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는 척 몰래 웃는다.
또다시 사람들의 속마음이 들려온다.
‘아주 달아올랐어.’
지연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제 얼굴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오뉴월 딸기보다 더 빨갛겠지.’
다리를 묶어 놓은 듯 아직도 길 건너로 출발하지 않은 그녀는 차라리 뛰기로 결심했다.
수현처럼 호텔로 들어가 버리는 게 덜 창피할 것 같으니까.
막 길 건너편을 향해 달리려는데,
젠장, 신호가 바뀌었다.
.
.
.
그런데 얼굴 붉히는 상황은 호텔 안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주말이라 침대 방은 만실입니다. 온돌방만 남았습니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에 수현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침대 체질이라 바닥에서 자면 허리 아플 텐데. 그리고 팔꿈치랑 무릎도 아프고.”
팔꿈치랑 무릎은 왜…….
직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한 눈으로 수현을 보았다.
그가 카드를 내밀며 목젖을 젖혀 웃었다.
“농담입니다. 그럼 그냥 그거라도 주세요.”
그러더니 또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이불은 넉넉히. 제가 좀 돌아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이제야 수현의 농담을 파악한 듯 멍했던 직원의 눈동자에 센스가 어렸다.
“이불,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지금 한 방으로 들어왔다. 이불 넉넉히 챙겨준 온돌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수현이 지연을 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먼저 씻어. 여자가 더 준비할 게 많잖아.”
“…….”
도대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요?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볼 순 없었다.
난 경험 많은 여자니까.
“그럼 먼저 씻을 게요.”
지연은 들고 온 작은 트렁크부터 핸드백까지 몽땅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당당한 여자의 뒷모습으로.
.
.
.
털썩-
욕조 끝에 걸터앉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녀는 사실 한 번도 남자와 에로틱한 밤을 보낸 적이 없다.
일단 삶에 바쁘고 지쳐 그런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꼭 시간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에겐 한 번의 뼈아픈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엔 그 아픈 기억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그 어떤 남자하고도 깊은 스킨십을 나눌 수 없었다.
대학 때 사귄 남자친구들은 너무 어렸기에, 너무 무서웠기에 남자들이 모텔 행을 요구하면 그대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뉴욕으로 유학 가서는 그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도 될 만큼 나이도 먹었고 경험 있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니 육체의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을 더 깊고 소중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도 결심했다. 남자친구와 깊은 사랑을 나눠보기로.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와인도 한 잔 하자 조르며 평소엔 그렇게 거부하던 남자친구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 챈 남자친구가 촛불을 켜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와의 이 밤을. 그런데,
그녀의 옷을 벗기려던 그가 갑자기 미간을 굵게 찌푸렸다.
‘이거 무슨 냄새야?’
‘…….’
‘젖 토한 냄새 같기도 하고…….’
‘!’
당시 그녀는 베이비시터로 줄리를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두 살 아기로 분유를 먹었다.
오늘 밤을 위해 예쁜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갔지만 꼭 품에 안고 먹여야 쭉쭉 분유를 빠는 줄리를 위해 눕혀 먹이질 못했다.
그런데 오늘 따라 줄리의 입에서 분유가 흘렀고 사레가 걸려 토까지 했다.
급히 애벌빨래를 했지만 잔재가 남아 있던 것.
여자친구에게서 결코 에로틱하지 못한 향기를 맡은 남자친구는 올랐던 감정이 식었는지 그녀를 슬며시 밀어냈다.
‘오늘은 기분이 좀 그렇다. 담에 보자.’
그의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는 알았다.
다시는 그 친구에게 전화가 안 올 거라는 걸.
한 번 그런 일이 있고나니 또 다른 누군가와 그런 분위기에 젖는다는 게 그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아무리 옷을 갈아입고 나와도 킁킁, 자꾸 옷 냄새를 맡게 된다.
‘분유 향이 몸에 배진 않았을까?’
향수를 사용해볼까도 생각했는데 그건 줄리에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어른이 맡아도 가끔 독하게 느껴지는 향수를 아직 후각도 여린 그녀에게 맡게 해줄 순 없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남자친구를 피하게 됐다.
그 나이에 남자의 스킨십을 거부하니 그 이유로 지연을 찬 남자도 여럿 생겼다.
나중엔 레즈비언이란 소문이 돌기도 하고.
그 모양 그 꼴로 이 나이를 먹게 되었다.
조금 전 수현이 자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덜컹 겁이 났다.
‘이 남자도 그런 이유로 날 떠나면 어쩌지?’
그와 굽이굽이 어렵고 험한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오해도 있었고 방해물도 있었고 알면서도 서로 빗나가기도 했고.
이제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이제 겨우 그와 정말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그는 직원들 앞에서 ‘제 여자친구’라고 그녀를 칭하며 공식적으로 관계를 밝혔다.
이제 정말 맘 놓고 그를 좋아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기가 빨리 왔다고 해서 그를 거부했다가 그가 실망하면?
게다가 그는 산낙지와 개불도 처음 보고 처음 먹어보는 서양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다.
아무래도 그녀가 생각하는 정서보다 조금 더 개방적이지 않을까?
그래서 그가 바라는 일이라면 맞춰주고 싶었다.
‘남들은 원나이트도 한다는데…….’
예전에 미선이 그녀에게 해준 경고도 생각났다.
‘남자도 경험 있는 여자를 좋아해.’
그래야 더 관능적으로 느낀다며.
두려웠다. 싫다고 했다가 혹시나 그가 실망할까 봐.
그래서 큰 소리치고 호텔까지 따라오긴 했는데…….
‘뭐부터 해야 하지?’
수현이 친절하게도 욕실 문을 열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먼저 씻어. 여자가 더 준비할 게 많잖아.’
뭘 준비해야 해?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휴…….”
지연은 일단 깨끗하게 씻고 난 후 생각해보기로 했다.
샤워기를 최고의 수압으로 올렸다.
*
지연이 욕실로 들어간 사이,
수현은 배치된 이불을 네모난 방의 각에 맞춰 정성스럽게 깔았다.
아직도 욕실에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욕조의 플라스틱 소리가 쿵 하고 난 걸로 봐선 그녀가 그 위로 걸터앉은 듯.
‘지금쯤 아마 머릿속이 가로로 세로로 복작복작할 거다.’
수현은 지금도 터지려 하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중이다.
그러게 거짓말은 왜 해? 쓸데없이.
‘귀여운 여자.’
이 귀여운 여자를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소중하게 안아줘?
어쩌면 그가 너무나 바랐던 일이었을지도.
한집에 살면서, 바로 옆방에 있으면서, 그는 어쩌면 너무도 참아왔을지도.
쏴아-
이제야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샤워를 시작했다.
이제 곧 아기처럼 뽀송한 얼굴로 그를 시험에 들게 하겠지?
‘확 넘어가버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트렁크는 왜 들고 갔어? 핸드백은 또 왜?’
기다렸다가 그녀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그도, 준비할 게 있으니까.
*
나갈까 말까, 나갈까 말까.
지연은 샤워를 끝내고 옷도 갈아입고 벌써 십 분째 욕실 문 앞에서 서성인다.
트렁크를 다 뒤져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섹시하면서도 로맨틱한 옷을 입으려고 했는데,
심지어 깨끗한 옷도 없다.
2박 3일 단합회니 무슨 옷을 그렇게 가져왔을까?
그렇다고 태규에게 질질 끌려 다니며 입었던 미니스커트를 다시 입을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욕실에 걸려 있는 베스로브를 입었다.
머리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TV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수건으로 돌돌 말았다.
묶는 방법도 몰라 대충 말아 올리니 생각했던 모양은 안 나온다.
“평소에 어떻게 해야 예쁘게 묶는지 좀 봐둘걸.”
어쨌든 몸도 깨끗이 씻고 나름 베스로브라는 작업복을 입긴 했는데…….
‘어떻게 나가지? 나가면 뭘 해야 하지?’
또 똑같은 질문들이 머리 위를 맴돈다.
이러단 다시 더러워지겠어!
그래, 경험 있는 여자인 척, 여유로운 얼굴로 빨리 나가자.
지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수현 씨?”
그를 불렀는데 아무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어? 침실에 그가 보이지 않는다.
바닥 위에 요와 이불만 정갈하게 깔려 있고 수현은 방에 없었다.
‘잠깐 나갔나?’
그가 없다는 걸 확인하니 긴장됐던 신경이 누그러지며 요동쳤던 심장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천천히 깔려진 이불로 걸어오니 이불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다.
‘이게 뭐지?’
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수현이 놓고 간 듯.
지연은 반 접힌 종이를 폈다.
잘 못 쓰는 한글을 손 글씨로 직접 쓴 수현의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읽는 지연의 얼굴에 핑크빛 향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로맨틱한 밤의 전조였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