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우리 자요
2018.06.27.
2박 3일로 예정되었던 단합회는 하루 만에 엉망으로 끝나버렸다.
부사장이 직원에게 졸피뎀을 먹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제대로 된 일정을 치를 수 없었다.
VIP를 의전하는 직원들만 빼놓고 다른 직원들은 모두 로비로 집합했다.
당연히 그들은 태규와 지연의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부사장인 건 둘째 치고 강민희 이사 약혼자라며. 그럼 강 회장님 사위 될 사람이란 거 아냐?”
“목적이 뭐였을까? 그냥 재우는 거는 아니었을 것 같아.”
“혹시…… 아니겠지? 뭐 재워놓고 무슨 짓 하려던 건 아니겠지?”
비판과 함께 추측이 난무했다.
다행히 수현이 가서 금방 그녀를 구했고 그녀의 옷매무새나 여러 가지 정황들로 봐서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거란 추측까진 도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 고객에게 추태를 당할 뻔한 동료를 지연이 구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여론은 상당히 동정적이었다.
“송지연 씨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우리라도 좀 챙겼으면 그 꼴은 안 당했지. 혼자 있게 냅둬서 그랬잖아.”
하지만 태규와 지연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한둘씩 생겨났다.
“원래 둘이 아는 사이였던 거 아냐?”
“맞아. 그때 송지연 씨가 부사장 멱살 잡았었잖아.”
“사람 잘못 봐서 그랬다고 안 했어?”
“아니지, 회사에 다니려니까 그냥 덮고 넘어간 걸 수도 있지.”
“그렇다면 무슨 사이였을까?”
직원들이 점점 태규와 지연을 엮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수현과 지연이 함께 로비로 내려왔다.
동료들이 모여 있는 소파로 걸어오는 지연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대놓고 소릴 내진 않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안쓰러워라. 젊은 아가씨가 얼마나 놀랐을까?’
‘솔직히 얘기해봐. 부사장이랑 무슨 인연이야?’
지연은 그들이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죽기보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태규와 조금이라도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그냥 지나갔으면…….’
그런데 어느 사회나 꼭 궁금한 걸 못 참는 사람들이 있다.
한 직원이 위로로 포장된 잔인한 질문을 했다.
“우리 지금 반성하고 있어. 도와주지 못한 거. 그런데…… 부사장이랑은 원래 아는 사이? 단둘이 나가서 술 마실 정도로 친했던?”
아무리 솔직한 성격의 지연이라지만 차마 입술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놈이랑 결혼할 사이였고 지금 키우는 아이가 그놈의 아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질문을 피하면 더한 억측이 난무할 테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데 지연의 뒤에 있던 수현이 그녀의 앞으로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앞을 막았다.
“한 가지 부탁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밤새 경찰 조사로 까칠하고 피곤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터프해서 더 섹시해 보이는 수현의 모델급 포스와 견고한 중저음에 직원들의 시선이 고정됐다.
“원래 피해자에게 가해자 얘기하는 건 금물입니다. 그래서 경찰 조사 때도 절대 피해자와 가해자를 대면시키지 않는 게 원칙이고요. 그러니 송지연 씨 앞에서 문태규 씨에 대한 발언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변호사야?
감정적인 호소가 아닌, 피해자, 가해자, 경찰 조사, 뭐 이런 용어 쓰면서 하지 말라니깐 사람들은 움찔했다.
모두들 입이 쏙 들어갔다.
하지만 수현은 이렇게 경고성 발언으로만 끝내지 않았다.
“여러분~”
다시 목소리 톤을 바꿔 부드럽게 그들을 불렀다.
“제가 동료로서도 부탁드릴게요. 제 여자친구가 아직 심신이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회사 상사한테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같은 동료 입장에서 많이들 위로해주세요.”
이번에는 변호사 같은 말투가 아니라 정중히 동료로서 하는 부탁이란다.
게다가 여자친구래…….
태규를 회사 상사로 규정하면서 든든한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감싸고 있으니 직원들도 더 이상의 추측은 의미가 없었다.
‘과거에 부사장이랑 무슨 사이였음 어쩔 거야. 지금 남자친구가 저렇게 싸고도는데.’
그들은 더 이상 지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확실한 건 태규는 이제 부사장으로서 이 회사에 다니긴 힘들 거라는 것.
민희의 협박 같은 경고로 경찰에 고발만 안 당했지 이미 회사에선 그는 범죄자였다.
단합회장은 하루 남은 단합회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VIP 의전만 담당자들이 맡고 다른 직원들은 남을 사람은 남고 갈 사람은 대절한 버스로 돌아가기로 합의하며 단합회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
.
.
수현과 지연은 하루 더 속초에 있기로 결정했다.
“나랑 하루만 더 있다 가자.”
수현의 제안이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태규에게 그런 험한 꼴을 당했다는 것 자체에 그는 참을 수 없는 자괴감을 느꼈다.
“내가 널 끝까지 보고 있어야 했어.”
왕따인 지연의 든든한 동료가 돼주기 위해서였다지만 어쨌든 그는 단합회장을 비롯해 여직원들과 술을 마시다 그녀가 태규를 따라나서는 걸 놓쳐버렸다.
만약 수현이 지연과 함께 있었다면 그녀에게 졸피뎀 따위를 먹일 생각은 꿈도 못 꿨겠지.
“애초에 강민희란 여자 차도 타는 게 아니었어.”
그랬다면 사고로 휴대폰이 박살 나는 일이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연의 전화도 받았을 테니까.
지연은 그의 자책감을 없애주기 위해서라도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럼 그래요. 우리 속초 구경하고 가요.”
그런데 수현이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지연뿐이 아니었다.
“애런, 너도 함께 있다 갈래? 우리랑?”
함께 온 동생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애런에겐 그다지 좋은 제안처럼 들리진 않았다.
방금 수현은 ‘우리랑’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무심코 한 말이겠지만 애런에겐 신경이 거슬리는 말.
‘난 여기 왜 온 거지?’
지연에게 물질적이 아닌 진심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속초로 따라왔다.
미선의 서두르지 말고 친구처럼 다가가란 조언에 그녀와의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해 지연이 수학여행 때 경험했다는 속초의 관광지도 가보고 그녀가 좋아한다는 먹을거리도 시도했다.
‘심지어 꿈틀대는 개불도 먹었어.’
수현처럼 태규를 패주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뻗게 만든 사람이 태규란 걸 알아내며 나름 그녀를 위해 할 만큼 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녀는 감정을 숨길 수 없다는 듯 애런이 보는 앞에서 한 걸음에 달려가 수현에게 안겼다.
내 남자는 이 남자라는 듯이.
‘이제 난 어떡해야 하지?’
직원들을 따라갈 수도 없고 자존심 상하게 두 사람을 따라다닐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마음을 미선이 읽었을까?
“서두르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저랑 서울에 올라가시면서 또 지연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려드릴게요.”
고맙게도 미선이 그를 챙겨주었다.
‘그래, 서두르지 말자. 조금 더 그녀에 대해 알아보고 다가가자.’
애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미선의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 서울에서 봐요.”
이후를 기약하면서.
*
본의 아니게 자유 일정을 얻은 수현과 지연은 속초의 유명 관광지 대포항을 찾았다.
두 사람은 1박 2일간 주어진 이 소중한 여행을 속초의 맛집 탐방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뭐 먹고 싶어? 지연이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험한 일을 당한 그녀의 기력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속초의 맛난 음식이라면 뭐든지 사주고 싶었다.
“속초에 왔으니 산오징어?”
“오징어도 산 채로 먹어?”
“아니요. 살아 있는 걸 금방 채로 썰어 먹는 거요.”
산 오징어를 금방 채로 썰어 먹는다…….
상상이 가는 비주얼은 아니었다.
수현은 여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평생을 미국 문화에 절어 살았다.
서구 문화권 중 생식에 익숙한 나라는 별로 없기에 고급 일식 레스토랑에서 사시미라 불리는 숙성회, 그리고 오이스터 바에서 생굴 정도 먹어본 게 생식 경험의 전부.
해보지 않은 경험을 무턱대고 시도하는 건 내키지 않아 다른 방식으로 말을 돌렸다.
“물려서 많이 못 먹을 거 같은데? 나 지금 많이 배고프거든.”
순간 지연의 눈빛이 산오징어집 사장님처럼 번뜩였다.
“산오징어로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막 잡은 오징어를 채 쳐 초고추장에 꾹 찍어 회로 먹고 그게 물리면 야채랑 육수 넣어 물회로 먹은 다음, 배가 불러온다 싶음 그 위에 삶은 국수 넣어 물국수로 마무리~. 아, 사이드로 회무침도 가능해요.”
미스 산오징어 같으니라고.
이 정도로까지 먹고 싶다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그래, 먹으러 가자. 산오징어.”
산오징어가 살아봤자 오징어지 얼마나 징그럽겠어, 생각하면서.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항구 입구에 즐비한 횟집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자리를 잡고 앉으니 지연은 다른 음식들을 주문했다.
“사장님, 여기 산낙지랑 물회 2인분이요.”
“산낙지? 물회? 산오징어 먹는다며.”
“아, 생각해보니 산오징어 철은 7월에서 11월이에요. 지금은 그냥 물회에 넣은 오징어 먹으면 될 거 같아요.”
점점 더 어려워지는 속초 음식.
산오징어 철은 따로 있고 물회에 넣어 먹는 오징어는 또 다른 건가?
그건 그렇고 산오징어 대신 주문한 산낙지가 이상하게 귀에 걸린다.
어감으로 봐선 산오징어나 산낙지나 비슷할 거 같긴 하다.
심지어 빨판 많은 다리 줄줄이 달린 게 생긴 것도 비슷하잖아?
그런데 뭔가 ‘산낙지’의 느낌이 더 징그러운 건 왜일까?
이번엔 그녀가 산낙지집 알바생처럼 얘기한다.
“산낙지는 수현 씨 때문에 일부러 시켰어요. 쓰러져 가는 소한테 낙지를 먹이면 벌떡 일어난다고 하잖아요. 수현 씨 기력 없어 보여서 그거 먹고 힘내라고요.”
소가 산낙지가 징그러워서 일어난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국 잡지에서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외국인이 싫어하는 한국 음식 베스트 파이브.
1위가 닭발이었고 2위가 번데기, 3위가 개불이었고 오히려 1위일 것 같은 개고기가 의외로 5위였다.
그런데 4위가 뭐였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산낙지였던 거 아냐?
수현이 외국인은 아니지만 식문화로는 외국인과 매한가지.
뭔가가 살아서 나온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수현의 불안함을 모르는 지연의 산낙지 예찬은 계속되었다.
“산낙지는 숙취 해소에 좋고 간 기능도 회복시켜준대요. 수현 씨 어제 술 많이 마셨으니까 지금으로선 딱 맞는 음식 같아요. 아, 혈액순환도 돕는다고 했나?”
이러단 화상도 치료한다고 하겠어.
하지만 뭐가 나오든 맛있게 먹어주기로 결심했다.
‘지연이가 좋아하는 음식이니까. 날 위해 시켜준 음식이기도 하고.’
예쁜 결심을 하고 젓가락을 들고 대기하는데 직원이 산낙지를 가지고 왔다.
기대하고 있던 산낙지가 테이블 위로 딱 놓이는 순간,
“흐헉!”
수현의 엉덩이가 훅 뒤로 빠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산낙지는 예상보다 더 엽기적인 비주얼이었다.
마치 공포 영화 에일리언의 외계생명체 같다고 할까?
꿈틀꿈틀, 허기적 허기적.
원래 한 몸이었을 낙지가 수십 조각으로 토막이 나 각각이 독립체처럼 찐득하게 서로를 엮고 있다.
심지어 몇몇 낙지 다리들은 탈출을 위해 호시탐탐 접시 밖으로 다리를 내린다.
기어이 한 놈은 탈출했어!
그런데 지연이 젓가락으로 탈출한 다리들을 꾹꾹 찔러 다시 접시 위로 회귀시킨다.
“이놈 싱싱한 것 봐.”
죄책감 하나 없이.
그녀는 강력한 빨판의 힘으로 접시 바닥에 굳건히 붙은 산낙지의 다리를 기어이 잡아 떼 휘휘 돌리더니 수현의 눈앞에 내민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쓰러진 소도 일으킨다는 낙지예요. 드셔보세요.”
차라리 쓰러진 소가 더 당긴다.
아무리 지연이 주는 음식이라지만 도저히 입술이 열리지 않는다.
그는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지연이 내민 젓가락을 밀었다.
“나 이거 못 먹겠어. 먹으면 뱃속에서 괴물체가 뚫고 나올 것 같아.”
동공 지진을 동반하며 그가 강하게 도리질했다.
심지어 뒤로 뺀 그의 엉덩이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지연은 하마터면 음식을 앞에 두고 커다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덩치나 작나?’
이 식당에서 제일 다부진 몸매를 자랑하는 그가 이 작은 낙지 한 마리에 저렇게 겁을 내다니.
수현의 의외의 귀여운 모습에 여러 가지 일들로 사라졌던 그녀의 웃음 세포가 다시 돌아온 기분이다.
‘저런 사람이 문태규를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패줬다지?’
폭력을 쓴 게 좋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그녀를 위해줬다는 사실에 가슴이 찡해온다.
‘이렇게 든든한 사람이 내 앞에 있다.’
비록 낙지 한 마리에 기겁을 하지만 말이야.
지연은 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을 감추려 수현에게 거부당한 산낙지 몸통을 자신의 입속으로 넣었다.
터지려는 눈물과 쫄깃한 낙지를 동시에 씹어 넘겼다.
그런데 지연의 눈가가 붉게 물드는 걸 수현이 놓치지 않았다.
“왜? 매워? 심지어 맵기까지 해?”
큭큭큭큭, 맵긴!
당신 때문에 눈물 나고 당신 때문에 웃겨요.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요.”
지연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수현의 엉덩이가 슬금슬금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때마침 직원이 산낙지와 같이 시킨 물회를 가져왔다.
산낙지 주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지연이 반색을 하며 물회를 받았다.
“그럼 이거 많이 드세요. 제가 사장님한테 얘기해서 일부러 개불을 더 많이 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수현의 눈동자는 흔들거렸다.
개불은 또 뭐야…….
맞다. 외국인이 싫어하는 한국 음식 3위.
“그런데 그걸 왜 더 달라고 했어?”
“미선이가 그러는데 애런이 개불을 잘 먹더래요. 형제니까 식성이 닮았을 거 같아서.”
“…….”
참으로 오랜만에 애런에 대한 측은지심이 돋아났다.
‘너도 나 같은 심정이었겠지.’
분홍색 애벌레를 맛있다고 먹어야 하는 심정.
하고 많은 산해진미 중 왜 이런 걸 먹어야 하는지…….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애런의 얘기를 듣고 자신을 위해 개불을 더 시켰다는 지연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지가 지금 누굴 챙겨줄 때야?’
자기나 걱정하고 자기나 챙기고 자기나 추스르고 쫌!
개불이 맘에 들진 않았지만…….
“나 개불 많이 담아줘. 이건 왠지 맛있을 것 같네.”
마치 굉장히 좋아하는 음식을 마주한 것처럼 테이블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그가 좋아하는 것 같자 지연이 신이 나서 개불 위주로 물회를 한 접시 듬뿍 펐다.
“개불 많이 넣었어요. 다행이다, 이건 좋아해서.”
“…….”
그는 피해도 피해도 수저 안으로 들어가는 개불 가득한 물회를 듬뿍 입에 넣었다.
‘이것은 소시지다, 분홍 소시지다.’
머릿속으로 주문을 외우면서.
맛없으면 대충 씹어 꿀꺽 넘겨버릴 생각으로 먹고 있는데,
“흐음~~~~”
그런데 막상 입에 넣으니 물회의 새콤달콤한 향이 코끝과 혀끝을 자극하며 침샘이 확 열렸다.
“맛있는데?”
심지어 살얼음이 낀 육수는 정신도 번쩍 나게 도와주었다.
수현은 숨도 안 쉬고 지연이 퍼준 물회를 허겁지겁 입으로 넣었다.
금세 한 그릇을 다 비운 그는 검사받는 아이처럼 빈 그릇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너무 맛있다. 잘 먹었어.”
싹싹 비워진 그의 그릇을 보며 지연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잘 먹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음식 하나로도 그녀의 마음이 전해진다.
그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그런데 늘 조금씩 오버는 한다.
“그럼 점심은 이 정도로 하고 이따 출출해지면 바닷가 포장마차에서 닭발이랑 번데기 먹을까요?”
“…….”
수현은 스스로 물회를 한 접시 더 덜었다.
절대, 출출해선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
.
.
점심을 먹고 나오니 어제부터 계속된 회색 하늘이 사라졌다.
대신 따사로운 봄 햇살이 살갗을 간질인다.
여행은 날씨가 반이라고 대포항을 찾은 관광객들의 입에선 행복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다 색깔 봐, 영롱한 파란색이야.”
“어디서 찍어도 예뻐. 날씨가 다 했네.”
하지만 인생엔 뉴턴이 말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있다.
좋은 날씨가 기분 좋게 작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주 죽을 맛인 사람도 있다는 말씀.
“어제처럼 비나 좀 떨어지지. 제발.”
수현은 맑게 갠 하늘을 보며 주문처럼 투덜댔다.
사실 그는 지금 이런 날씨 따위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간절히 원하는 게 있었으니까.
어제 그는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들과 치사량의 폭탄주를 마셨다.
그 상태로 없어진 지연을 찾느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또 축 처진 그녀를 숙소까지 업어 옮겼고 다시 회식 장소로 가 태규를 격투기 선수처럼 팼다.
맞은 사람도 힘들지만 안 쓰던 근육의 이용으로 때린 사람도 병이 나는 법.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린다.
게다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느라 꼴딱 밤까지 샜으니.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자고 스펙타클한 하루를 보냈는데 어떻게 잠이 안 쏟아져?
밥까지 먹고 나니 눈꺼풀이 바닥을 향해 달리고 있다.
‘졸리다, 졸리다, 나는 졸리다…….’
반면 좁고 긴 방파제를 따라 폴짝폴짝 뛰고 있는 지연의 발걸음엔 활력이 넘쳤다.
쓰러진 소도 일으킨다는 산낙지의 위력이 제대로 발산되는 듯.
그녀는 저 뒤에서 느릿느릿 뒤따르고 있는 수현을 향해 소리쳤다.
“수현 씨, 빨리 오세요. 방파제 끝에 뭐가 있어요.”
그녀의 말에 수현은 상상을 한다.
뭐가 있을까…… 호텔?
“우와, 여기 빨간 등대 있어요.”
이제는 이명을 넘어 환청이 들린다.
‘빨간 침대가 있다고?’
“배 모양으로 된 등대예요.”
‘배 모양으로 된 빨간 침대?’
지금 그에겐 주변 모든 것이 침대로 보였다. 오죽하면 바다가 쿨렁쿨렁 물침대로 보일까.
“후…….”
이제 5분도 버티기가 힘들다. 참을 수가 없어서.
수현은 할 수 없이 지연에게 지금의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기로 했다.
빨간 등대 앞에 서서 셀카의 포즈를 잡고 있는 지연에게 고개를 축 내려뜨린 채 아주 담담히 말했다.
“지연아, 우리 호텔부터 잡을까?”
“호텔이요?”
그는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어 솔직하게 말했다.
“나…… 자고 싶어.”
“…….”
“지연에게 미안하긴 한데 아까부터 계속 그 생각뿐이었어. 나 정말 자고 싶어.”
간청처럼 애절한 그의 말에 지연의 눈동자가 점점 얼어붙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얘길 들은 것처럼.
수현은 아차, 싶었다.
지연이 다른 말로 오해했구나?
그래서 그는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다시 고쳐 말했다.
“아, 내가 자고 싶다고 한 말은 혹시나 이상한 뜻이 아니라…….”
그런데 그녀, 그의 해명이 끝나기도 전에 이런 말을 한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녀는 얼어붙었던 눈동자에 의지를 담았다.
두 주먹을 조심스럽게 쥐고 다시 입을 연다.
“수현 씨가 원하면 그렇게 해요.”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그녀가 동그란 눈동자를 부릅뜨며 입술에 다부진 힘을 싣는다.
“우리…… 자요.”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