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41화 (41/77)

제41화. 바로 이거

2018.06.23.

홍해바다처럼 벌어진 사람들 사이를 수현이 느릿하게 통과했다.

이 통로의 끝에는 태규가 있었다.

지연에게 몹쓸 약을 먹인, 지연을 뻗게 만든, 지연을 어두운 방 홀로 있게 한.

한 발, 한 발, 그의 발걸음이 먹잇감의 숨통을 조이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표정은 살기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차가워 아무 생각 없어 보이기도 하고,

일단 태규는 참을 수 없는 긴장감에 도리어 큰소리쳤다.

“사람 치면 안 되는 거 알지? 고소할 거야. 여기 CCTV 있어.”

한 발 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 부사장이야. 합의 안 해줘.”

드디어 그 앞에 섰다.

“야! 너가 지연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면서 이제 날아올 주먹에 눈을 질끈.

어라? 그런데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다.

‘이크, 때리는 게 아니었구나. 역시 부사장은 무섭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수현이 머리를 내려 낮고 작은 음성으로 그의 고막을 향해 무어라 속삭인다.

‘뭐라고 한 거지?’

다시 한 번 물어볼까 싶어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그때,

퍽-

그의 단단한 주먹이 태규의 오른쪽 볼을 향해 날아왔다.

한 방이면 충분했다. 그가 정신을 잃기까진.

*

“괜찮아?”

눈을 뜨니 미선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뭐지…….

“아픈 데는 없어? 병원 갈 필요 없다 그래서 그냥 방에서 재웠어.”

뭐래…….

“속은 괜찮아? 머리는? 수면유도제라곤 하지만 의사 처방 있어야 하는 전문약이라며.”

뭔 소리…….

한숨 푹 자고 일어났는데 어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미선이 계속 수다 중이다.

‘내가 밤새 아팠나?’

아직 온전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연은 어젯밤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와는 좀 다른 수면을 취했던 건 같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

길고긴 여행을 하다 끝낸 느낌?

그런데 미선의 말대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숙면을 취했으면 맑고 깨끗한 기운이 돌아야 할 텐데.

“너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안 나?”

무슨 일?

미선이 자꾸 몰아쳐 질문을 하니 잠이 덜 깬 몽롱한 잠기운을 즐길 새도 없이 지연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왕따를 당했고, 난처한 동료를 도와주기 위해 그 와중에 진상 변호사의 가발을 벗겼다. 그리고,

‘아, 수현 씨한테 달콤한 고백을 받았지.’

희죽-

그녀의 웃음을 보고 그녀에게 줄 물을 따르던 미선이 동공을 커다랗게 확장했다.

“어머, 어머, 그거 마약이니? 막 웃음이 나와? 막 이유 없이 즐겁고 그래?”

마약 같은 고백을 받았지.

고백을 받고 회식장소로 돌아와서는…… 와서는…….

여기서부터 기억에 하얀 막을 씌운 것처럼 뿌옜다.

‘돌아와서 내가 뭐했지……? 아! 문태규!’

지연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나 문태규랑 나갔어.”

BAR에서 태규가 준 위스키 한 잔을 마신 기억까지 생각났다.

“그래, 그래. 너 부사장이랑 술 마시러 나갔었다며. 바보, 왜 단둘이 나가서 그 꼴을 당하니?”

그 꼴? 그런데 그 뒤론 또 아무 기억이 없다.

“나 무슨 일 있었어? 그런데 여기 어떻게 온 거야?”

“너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

“나 취해서 기어들어왔니? 귀소본능 발휘한 거야?”

지연의 기분을 맞추려는 듯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있던 미선의 눈매가 점점 힘을 잃으며 쳐져버렸다.

“기억이…… 없구나.”

머뭇머뭇,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제 막 정신을 추스른 지연에게 차마 어제의 그 소름 돋는 상황을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연이 더 말하기 곤란한 얘기를 물어보았다.

“수현 씨는? 수현 씨는 별일 없었어?”

“그게 수현 씨는 지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인천공항의 활주로에 세계적 VIP를 태운 전세기가 도착했다.

막 착륙한 비행기 앞으로 의전할 차량과 구급차가 대기 중이었고,

VIP를 모시기 위한 국내 최고의 의료진, 격식 갖춰 옷을 입은 VIP 회사의 한국지사 직원들은 비행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 모든 건 세계적 기업 줄리아나의 수장인 로즈 몬테규를 위한 움직임이었다.

사실 그녀가 한국에 온다면 일간지 대서특필까진 아니더라도 경제지 헤드라인 정도는 장식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를 위한 프레스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밀 방한이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휠체어에 탄 그녀를 비행기에서 내렸다.

“독일 병원에 있었던 회장님 히스토리는 국내 머무실 병원으로 다 옮겼습니다.”

알츠하이머와 잃어가는 시력으로 투병 중인 로즈는 아들들이 있는 한국행을 고집했다.

그녀에게 병이 있다는 것도 비밀이었기에 오로지 핵심 직원들만이 마중 나왔다.

“옛날과 많이 다르네. 너무 좋아졌어.”

수현의 아빠 승규와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한국.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켜며 사랑하는 남편 태규와 사랑하는 아들 수현의 나라 한국의 공기를 음미했다.

빠르게 입국 수속을 마친 그녀는 한국병원 VVIP실에 입원했다.

“수현과 애런이 한국에 함께 있다고 했지?”

그녀는 얼마 전 로버트로부터 애런이 수현이 있는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에 떨었었다.

폭력적인 아빠의 피, 그런 남편을 죽인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애런이 태생적으로 거친 폭력성이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너무 과한 해석이라고 정신과 의사는 말했지만 애런은 그런 그녀의 생각이 옳다고 증명하듯 마약에, 음주에, 폭행에, 광적인 드라이브까지 즐기며 그녀를 불안케 했다.

그런 애런이, 남편 승규를 빼닮아 태생적으로 온건하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수현의 옆에,

그것도 그를 제어할 로즈도 로버트도 없이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즈는 로버트에게 부탁했다.

‘한국에 가세요. 수현 옆에 있어주세요. 애런에게 다치지 않도록.’

하지만 로버트는 아픈 로즈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애런 도련님한테도 온정의 눈빛을 보내세요. 애런,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나쁜 아들 아닙니다. 회장님의 애정에 목이 마를 뿐입니다.’

그래서 로즈는 차라리 자신이 한국에 가겠다고 했다.

알츠하이머로 점점 잃어가는 정신이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수현을 단단히 지켜주고 애런이 제 앞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해볼까요?”

로버트가 휴대폰을 들고 로즈에게 물었다.

“애런…….”

의외로 수현이 아닌 애런의 이름이 먼저 나왔다.

물론 이유는 애정의 크기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수현은 어디에 있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요. 애런이 항상 문제죠.”

로버트는 애런에게 전화를 했다.

“애런? 저 로버틉니다. 지금 어디 계시나요?”

통화를 하는 로버트의 주름진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경찰서라고요?”

대화를 듣고 있던 로즈의 입에서 그럼 그렇지, 실망의 한숨이 터졌다.

놀란 로버트가 물었다.

“무슨 혐의죠?”

몬테규가의 고문 변호사인 로버트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죄목을 알아야 합의도 가능하니까.

그런데 그의 미간이 더욱 굵게 주름졌다.

“폭행죄?”

로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그렇지, 그렇다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었잖아, 그 아이는 폭력성이 강한…….

그런데 그녀의 귀로 믿기 어려운 소리가 들렸다.

“네? 애런 도련님이 아닌 수현 도련님이요?”

일순 로버트와 로즈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둘 다, 눈빛으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게 뭔 일?

*

“진정한 사과를 하면 합의하겠습니다.”

태규는 경찰관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공손한 태도로 수현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사과는 맞을 짓을 한 사람이 하는 거죠.”

반면, 가해자인 수현은 고고한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단호한 표정이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경찰관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잔지…….

“진수현 씨, 진수현 씨가 이러실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이 지경을 만들어놓으시고…….”

주변 증언에 의하면 수현이 날린 한 방의 주먹에 태규는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수현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눈도 못 뜨는 그의 멱살을 쥐고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게 죽기 직전까지 때렸다고.

그의 살기 어린 눈빛에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을 못 했고 이러다 사람 하나 죽겠다 싶어 할 수 없이 경찰을 불렀단다.

태규의 오른쪽 눈엔 물감을 그려놓은 것처럼 선명한 멍이 들었고,

몸통은 이제 막 생겨난 따끈따끈한 타박상 투성이에 거칠게 스친 스크래치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심지어 심각하진 않지만 내상도 입었는지 태규는 아직도 갈비뼈를 부여잡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제발 그냥 보내주세요.”

그런데 오히려 피해자인 태규는 겁을 먹어 울먹울먹 비굴하고 가해자인 수현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하다.

경찰관 입장에선 난감했다.

폭행죄는 가해자의 고소가 없으면 그냥 끝내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나 다쳤으면 상해죄가 되며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처벌을 해야 한다.

이들의 말대로 그냥 보냈다가는 나중에 오히려 부실 수사로 덤터기를 쓸까 싶어 경찰은 어떻게 해서든 수현에게 태규에게 사과하라 했지만 이렇듯 요지부동이다.

“혹시 협박 받고 있습니까, 문태규 씨?”

경찰관이 넘겨짚었더니 태규가 슬며시 수현의 눈치를 본다.

그런데 찌릿! 이글이글 이글 아이(eye)가 얼음 공격을 한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협박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태규는 오히려 수현이 입을 뻥긋할까 두려웠다.

자신이 지연에게 졸피뎀을 먹였다는 걸 경찰에 이르면 바로 구속감이기 때문.

그러니까 이렇게 얻어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윽 소리 한 번 못 하고 벌벌 떨고 있다.

반면 더 화가 치미는 건 수현이었다.

생각 같아선 지연에게 졸피뎀을 먹인 이놈을 신고해 철창 안에 가두고 싶지만,

일단 지연이 이런 일로 경찰서를 오가며 진술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고,

혹시라도 태규가 억하심정에 그녀에게 줄리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약을 먹고 이놈한테 질질 끌려 다녔을 지연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 주먹의 힘줄이 서슬 퍼렇게 올라오지만 참아야 하는 이 상황에 화가 났다.

‘좀 더 패줬어야 하는데…….’

뒤에서 수현과 태규를 보고 있던 애런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저 사람이 내가 아는 팀 몬테규, 우리 형이야?’

애런이 아는 수현은 저런 양아치 같은 놈과 시비가 붙을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워낙 차가워 감히 깐죽거리는 놈도 없었지만 혹시나 있다 해도 함부로 주먹을 쓴 적은 없었다.

오히려 분노조절을 못 하고 쉽사리 폭력을 쓰는 애런에게 진짜 복수는 그게 아니라며 집안의 명예를 위해 늘 참으라고 강조한 게 수현이었다.

다만,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철저히 응징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돈으로 깝죽대는 놈에게는 다시는 돈질 못하게 몸담고 있는 기업에 치명타를 줬고,

폭력을 쓰려는 놈에게는 직접 상대하는 대신 악명 높은 마피아를 이용해 겁을 주었다.

이렇게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상대를 무릎 꿇리는 천부적 지략과 인내심이 있는 수현이! 수현이!

애런은 보았다. 아까 수현이 태규를 때릴 때의 그 살기 어린 눈빛을.

다짜고짜 태규에게 달려드는 대신 천천히 다가가기에 역시 형이구나, 했다.

그런데 뭐라 귓속말 한 마디 하더니 그때부터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송지연이 형한테 이 정도의 존재였나?’

사람을 바꿔버릴 만큼, 머리를 돌게 할 만큼.

처음 보는 관경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왠지 모르게 지고 있는 기분이 들어 불안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한 경찰관이 사건을 정리하기로 했다.

“두 분 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수현의 태규를 향한 폭행 사건은 오히려 수현이 태규의 사과를 받으며 이렇게 종결됐다.

*

수현과 애런은 함께 지연이 있는 숙소로 향했다.

미선이 가지고 온 고급차를 애런이 운전하고 수현은 조수석에 앉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갖는 형제간의 호젓한 시간.

시내에 있는 경찰서에서부터 지연의 숙소가 있는 바닷가 도로를 달리며 두 사람은 창문을 열고 바닷바람을 즐길 뿐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침묵이 흐른 후 수현이 파도 높은 동해바다를 보며 무심한 듯 툭 말을 던졌다.

“고맙다.”

운전을 하면서 간간히 수현을 곁 눈짓하던 애런이 반응했다.

“뭐가?”

“지연이…… 너 아니었으면 그 문태규란 놈이 몹쓸 약을 먹였다는 걸 몰랐을 테니까.”

“아…… 가끔은 저질스럽게 놀아본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더라고.”

대화가 끊겼다.

다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며 열어 놓은 창문으로 짠 내음 물씬한 바람만 공유했다.

그러다 다시 수현이 말문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할 수 있을까?”

“뭐?”

“나, 지연이, 많이 좋아해. 진심이야. 니가 인정해줬으면 해서.”

“그러니까 형은 나는 지연이한테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네.”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어쨌든 난 너하고 지연일 사이에 두고 나쁜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아.”

“그럼 형이 포기하면 되겠네. 형은 다 가졌어. 엄마도 회사도 사람들의 관심도. 여자 하나 정도는 나를 줄 수도 있잖아?”

“여자 하나라는 말, 용납할 수 없어. 지연이 나한테 그렇게 작은 존재 아니야.”

반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애런은 보았다.

지연을 위해 수현이 회사 사람들과 격의 없이 술을 마시며 망가지는 모습을, 태규 같은 양아치에게 이성을 잃고 주먹을 날리는 모습을.

작은 존재의 여자를 위해 그렇게 했을 린 없지.

“그럼 형한테 한 가지만 물어볼게. 지연일 그렇게 좋아한다면 그녀가 처한 이 어려운 상황들을 왜 보고만 있어? 형이 해줄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있는데.”

“그녀의 자존심, 그녀의 자존감, 특히 독립성이 강한 그녀를 그녀 자체로 인정해주고 싶은 거야. 그게 그녀가 원하는 거니까.”

어디서 들어본 말이었다.

‘물질적인 것만으론 여자의 마음을 얻긴 힘들죠. 그건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잘못하면 자존심을 건드려요. 특히 지연이처럼 독립심이 강한 아이한텐 크게 어필이 안 돼요.’

속초로 오는 길 미선이 ‘지연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강의에서 한 말이었다.

“난 그녀가 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거야. 서두르지 않고.”

이 역시 들었던 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는 건 어떨까요? 서두르는 남자, 매력 없어요.’

미선의 강의를 형도 들었던 것일까?

“대신 도저히 두고 보지 못하겠다 싶을 땐 내 모든 걸 걸어 지켜줄 거야.”

이것도 했던 말인데.

‘그런데요, 어느 순간 드러내놓고 쾅! 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좋긴 해요.’

형은 뭘 이렇게 잘 알아?

연구한 거야? 아님, 나 몰래 한 여자 경험이 많은 거야?

경찰서에서 들었던 씁쓸한 마음에 이어 또다시 그에게 밀리는 느낌이었다.

썩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숙소로 향하는데 애런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지연이라고 떴다.

“애런, 저 지연이에요.”

씁쓸했던 애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어, 지연 씨, 몸은 괜찮아요?”

“네, 미선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문태규 씨가 저지른 일, 애런 아니었다면 몰랐을 뻔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앞에 있었음 수줍게 얼굴을 붉혔을 지연의 모습이 상상됐다.

그래, 형이 아무리 잘났어도 지연의 마음은 모르는 거야.

축 처져 있던 마음의 에너지가 다시 조금씩 채워져 갔다.

“저희 지금 가고 있으니 조금 있다 봬요.”

“네, 조심히 오세요.”

전화를 끊는 순간에도 지연은 수현을 바꿔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애런은 쓱 수현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바다만 응시할 뿐 전혀 섭섭함이나 서운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부러 아닌 척하나? 자존심을 지키려고?’

어쨌든 애런의 마음은 다시 상승 곡선을 타며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며 가벼운 마음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다 보니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수현과 애런은 곧장 지연과 미선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지연이 마루에서 미선과 함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연 씨, 저 왔습니다.”

반갑게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데 지연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애런 쪽을 바라보았다.

좀 전 밝은 목소리로 통화하던 그녀는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지연의 눈동자가 물결친다.

입술이 조금씩 어쩌지 못하고 움직인다.

‘왜 그러지?’

그새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데 갑자기 그녀가 아기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흐음…… 흐음…….”

한 걸음씩 느릿하게 발을 떼더니 점점 속력을 내며 달려온다.

‘어, 어.’

자신에게 달려오나 싶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렀다.

그런데 그녀가 애런의 어깨를 스쳐 뒤로 달려가 멈춘다.

뭐지?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순간 애런의 머리에 미선이 해주었던 말이 또 떠올랐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지연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의 정점을 찍는.

‘여자도 남자를 좋아해야죠.’

바로 이거.

달려오는 그녀에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수현.

그런 그의 목을 끌어안고 두 다리까지 번쩍 들어 지연이 와락 그에게 안겨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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