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40화 (40/77)

제40화. 악마의 덫

2018.06.20.

파도 소리마저 무섭게 들리는 어둡고 외딴 방.

지연은 홀로 쓰러져 있었다.

옆에는 오픈된 핸드백에서 쏟아진 그녀의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역시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엔 ‘미선’이라고 떠 있었다.

받지 않자 뚝 끊긴 벨소리. 하지만 곧이어 벨은 다시 울렸다.

창밖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연아! 지연아!”

미선의 목소리도 들리고,

“송지연 씨, 송지연 씨.”

회사 동료들이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잠시 후 건물 안 누군가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더니 쿵쿵, 바닥을 큰 걸음으로 찧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쾅! 문이 열리고, 복도를 비추는 밝은 빛을 등진, 커다란 남자의 실루엣이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휴대폰 벨소리 그리고 거칠게 열린 문소리에 그녀의 무거운 눈꺼풀이 아주 잠시 올라갔다.

남자는 달려와 지연의 상체를 일으켰다.

“송지연.”

남자가 지연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빠져나간 정신에 환청처럼 울릴 뿐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깜박깜박-

큰 폭으로 눈꺼풀을 움직이던 지연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말라버린 입술 사이로 흐린 신음을 토한 그녀는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

지연이 외딴방에 홀로 누워 있기 30분 전.

태규가 데리고 간 술집에서 졸피뎀이 든 위스키를 마신 지연은 희미해져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사라져가는 손끝의 힘으로 겨우 수현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사고로 휴대폰이 박살나며 연결이 되지 않은 것.

절망적인 마음으로 다리에 힘을 잃고 그녀는 바닥으로 몸을 내렸다.

하지만 정신을 잃기 바로 직전, 휴대폰에서 한 명의 이름을 더 터치했다.

“여보세요.”

그녀의 귓가를 울리는 발랄하고 맑은 소리의 주인공은 미선이었다.

“송지! 잘 버티고 있니? 난 우리 애런 고객님 속초 관광시켜드리고 이제 막 회식 장소로 들어가려고.”

“……미선아…….”

“넌 아직 회식장소에 있는 거지? 재밌어? 혹시 안 좋은 일은 없었어?”

“미선아…….”

“…… 응? 지연아, 너 왜 그래? 너 혹시 취했어?”

“미선아…… 나…….”

“지연아? 지연아?”

꺼져가는 촛불 같은 그녀의 음성에 불안감을 느낀 미선이 다급히 불러보았지만 전화는 그만 뚝, 끊겨버렸다.

태규가 화장실로 들어와 그녀의 휴대폰을 꺼버린 것.

그와 동시에 지연의 정신도 꺼져버렸다.

태규는 화장실에 시체처럼 쓰러진 그녀를 흔들었다.

“지연아, 일어나. 일어나.”

어깨를 흔들었지만 제대로 뻗어버린 그녀는 작은 몸짓조차 하지 않았다.

“미치겠네.”

그의 생각보다도 졸피뎀의 효능은 강하고 독했다.

용량을 너무 많이 넣었나?

만취한 사람처럼 잠이 들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지연의 모습은 화장실 바닥에 버려진 시체 같았다.

겁이 덜컥 나면서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거 발각나면 어떡하지?’

하지만 이내 곧 마음을 놓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는 정도의 수면유도제니 죽을 리는 없었고, 다음 날 기억을 못 할 테니 지연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 리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계획대로 가야지.’

계획에 의하면 이제 지연을 들쳐 엎고 회식 장소로 가야 한다.

그리고 치마가 말려 올라가고 엉망이 된 얼굴의 지연을 회사 직원 모두에게 보여주면 끝.

그러면 민희의 명령대로 망신 한 번 제대로 시켜주는 작전은 성공.

지연의 양팔을 잡고 들어 올리려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또 미선인가 싶어 수신 거절을 누르려는데, 액정에 너무도 낯익은 얼굴이 떴다.

“줄리?”

작고 통통한 두 손가락으로 소심한 하트를 그리고 있는 줄리의 사진이었다.

“줄리야, 줄리.”

그래도 아빠라고 딸의 얼굴을 보니 눈동자로 촉촉한 물기가 올라왔다.

목소리라도 한 번 들어볼까?

궁금하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에 슥, 받았더니 생각보다도 훨씬 밝고 낭랑한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온다.

“엄마, 엄마, 재밌어? 나 안 보고 싶고?”

연결되자마자 장난꾸러기처럼 터지는 그녀의 깨방정 목소리.

우리 줄리 잘 자라고 있구나.

그런데 엄마? 지연을 엄마라고 부르나?

그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봤을 때만해도 줄리는 지연을 내니나 언니라고 불렀었는데.

그래, 어느새 엄마가 돼서 살고 있구나.

“엄마, 왜 말이 없어? 회식해? 폭탄주 휘휘 돌려? 벌써 취한 건 아니지?”

“…….”

똑같다. 여섯 살짜리답지 않게 어른처럼 짓궂은 건.

“엄마, 엄마? 엄……마.”

엄마가 아무 말이 없자 줄리의 목소리에 불안함이 섞였다.

태규는 뚝, 전화를 끊었다.

들고 있던 지연의 휴대폰을 핸드백에 넣어주었다.

계속 들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아빠야’라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눈가에 차오른 물주머니가 터져버렸나?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

굵은 눈물방울이 지연의 얼굴에 뚝 떨어졌다.

‘지연이가 우리 줄리를 잘 키워주고 있었구나.’

목소리에서도 느껴지는 딸의 밝고 건강한 천진함.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여섯 살 아이보다 어쩌면 더 활기찬 딸의 목소리에 태규의 심장은 무거운 돌이라도 매단 것처럼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축 처진 지연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머리가 흔들린다.

‘그런 지연이를 내가 이렇게 만들다니.’

아, 어쩌지? 이제 어쩌지?

이런 지연을 사람들 앞으로 데려가 그녀가 술을 마시자고 먼저 꼬드겼다고 말을 하면 지연은 어떻게 되는 거지?

민희의 바람대로 다시는 회사에 발도 못 붙이는 미친년이 돼버리겠지.

그런데 줄리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도저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내 딸을 자기 딸처럼 키워주는 착하디착한 이 여자한테.

그때 화장실 밖에서 술집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문 닫을 시간입니다.”

얼른 여자를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가라는 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길거리에 두고 간다면 이 추운 바닷가에서 동사할 수도 있고 지나가는 취객한테 못 볼꼴을 당할 수도 있다.

순간 지연과 함께 술집으로 오며 스쳤던 민박집이 떠올랐다.

‘그래, 거기다 두고 가면 별일 안 생기겠지.’

태규는 지연을 둘러업고 근처의 민박집으로 향했다.

그녀를 방에 눕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회식 장소로 돌아왔다.

홀로 들어오는 태규를 보고 궁금한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민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실패했어. 송지연이 갑자기 도망갔어.

술잔을 탁 놓으며 매섭게 쏘아보는 그녀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나쁜 년. 천벌을 받을 년. 다시는 니 명령에 의해 지연이한테 나쁜 짓 할 일 없을 거야.’

씁쓸히 소주 한 잔을 목으로 넘겼다.

*

“지연아! 지연아!”

끊긴 전화에 대고 미선이 지연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애런과 이제 막 회식장소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왜요? 지연 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옆에서 지연과 미선의 통화를 지켜본 애런도 예민해졌다.

언뜻 들은 통화의 내용에서 지연의 상황이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기에.

“일단 안으로 빨리 들어가 봐요.”

미선의 재촉에 두 사람은 급한 걸음으로 회식 장소 안으로 들어갔다.

회식은 한창 흥이 올라 고조된 분위기.

그중 수현과 단합회장이 있는 테이블은 쉴 새 없이 폭탄주가 돌아가는 열정의 도가니였다.

애런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수현의 모습을 보았다.

“단합회장님, 한 잔 더!”

저게 형이야?

수현은 누가 술을 강권하기라도 하면 눈동자로 액화 질소를 분사해 사람을 얼려버리는 재주가 있다.

그런 인간 제빙기 수현이 들어오는 잔 거부 안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폭탄주를 손 바쁘게 나르고 있다니.

“형…….”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낄낄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미선이 여자들로 이루어진 단단한 장막을 뚫고 수현 앞으로 갔다.

“지연이 어디 있어요?”

방금 제조된 폭탄주를 입에 부으려던 그가 급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왜? 왜? 없어?”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야를 높여 지연의 자리를 살폈다.

회식 자리에 오면서 헤어지긴 했지만 자리에 앉는 것까진 확인했었다.

이후 단합회장의 테이블로 오면서 직원들 장막에 가려 중간 체크를 하지 못했지만 홀로 이 외로운 자리를 이겨내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강해 그냥 지켜봐주기로 했다.

이렇게 직원들과 친목을 다지며 뒤에서 말없이 지원사격을 해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지금 불안한 눈빛으로 제 앞에서 지연을 찾는 미선, 그리고 언제 왔는지 우뚝 서 있는 애런을 보니 본능적으로 뭔가가 잘못됐다 싶었다.

미선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한숨을 쉬었다.

“전화가 왔었는데, 전화가 왔었는데…… 취한 거 같진 않은데 막 정신이 이상한 것도 같고.”

“전화는! 전화는 다시 해봤어요?”

“안 받아요. 누가 일부러 수신 거부를 하는 것도 같고.”

더 이상 자초지종을 들을 것도 없었다.

켜켜이 쌓인 사람 장막을 뚫고 수현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연아! 지연아!”

그를 선두로 미선에게 상황을 전해들은 직원들도 한 목소리가 되어 지연을 찾았다.

“송지연 씨, 송지연 씨.”

주변 상인들에게 지연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그녀의 옷차림이 아직 이런 바닷가에선 어울리지 않았기에 한 상인이 정확히 지연을 기억했다.

“아, 그 짧은 치마 아가씨? 어떤 남자랑 저기 저 술집으로 들어가던데?”

상인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니 이미 간판 등이 꺼지고 셔터가 내려간 작은 bar가 보였다.

닫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속이 뒤집어지며 미친 듯이 들이켰던 폭탄주가 역으로 솟구치려 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그는 두 주먹으로 부셔버릴 듯 셔터를 계속해서 두드렸다.

“누구세요?”

셔터는 내렸지만 다행히 아직 안에 사람이 있었다.

한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고 수현은 그에게 지연에 대해 물었다.

“짧은 치마 입고 가죽 재킷 입은 여자 보셨어요?”

그런데 남자는 지연의 인상착의를 듣자마자 인상을 구기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 만취한 여자요? 무슨 여자가 위스키 한 잔에 그렇게 맛이 가나? 같이 온 남자가 아주 개고생하며 데리고 나갔어요. 여자가 아주 떡실신을 했더라고.”

지연을 찾았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남자가 뒤이어 해준 말에 수현의 머리엔 더욱더 불안이 엄습했다.

이 야밤에 떡실신?

“차 타고 갔으면 벌써 멀리 갔을 거고 아마 걸어서 갔으면 이 근처에 있을 것 같은데. 엄청 취한 여자 들고 가기 힘들잖아요.”

수현은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미선의 휴대폰을 뺏어들었다.

근처에 있다면 이 고요한 거리에 벨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변을 배회하며 지연에게 전화를 하니 파도 소리와 겹쳐 묻히긴 하지만 어느 집에서 전화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현은 소리가 나는 집을 찾아 지연으로 보이는 여자가 방으로 들어갔다는 걸 확인했다.

그대로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지연이 어두운 방에서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지연을 일으켜 이름을 불렀다.

“송지연!”

죽은 건 아니다. 하지만 깜박깜박 잠시 그녀의 눈꺼풀이 올라가더니,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

다른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지연을 번쩍 들어 어두운 방을 빠져나왔다.

*

모두가 지연을 찾기에 급급한 와중 회식장소에 남은 사람은 딱 두 명, 민희와 태규였다.

태규의 얼굴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언제 미선에게 전화를 걸었지?

그 전화 한 통으로 그의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지연은 내일 아침 스스로 일어났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자신에게 따져 물으면 그녀가 혼자 너무 취해서 쓰러져버렸고,

동료들 앞에 그 모습을 보이면 곤란할까 봐 민박집에 고이 눕혀주었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럼 깔끔해지는 일이었다.

약을 먹은 줄 모르는 지연은 오히려 태규가 자신을 지켜줬다 생각할 테고 그 마음이 고마워 묵었던 감정을 풀 것이라 예상했다.

게다가 태규와 함께 술을 마시다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지연이 오히려 비밀에 부쳤을 것이다.

‘지 얼굴에 침 뱉기가 되니까.’

그런데 이렇게 빨리, 스스로 일어난 게 아닌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면 분명 누구와 있었는지, 누가 민박집에 데리고 갔는지 사람들이 알아내려고 할 텐데.

특히 진수현이.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일이 이렇게 돼서야 민희가 태규 앞으로 다가왔다.

여태 진수현만 바라보며 태규에겐 문자로 지시만 내릴 뿐 한 번도 찾지 않더니.

“걱정 마. 사람들한테 지탄받을 일은 없으니까.”

“확실해?”

“확실해.”

“혹시나 잘못돼도 나랑은 연결하지 않는 거다.”

이 와중에도 지 생각만 하는 민희.

약을 가져오라고 한 것도 자기고 약도 자기 거면서.

“걱정 마.”

정말로 걱정할 건 없다.

지연과 함께 술을 마시고 그녀를 민박집에 눕히고 온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들통나더라도 원래의 계획대로 하면 된다.

테규는 불안함에 오르는 열기로 바싹바싹 입술이 메말랐다.

그때 지연을 찾으러 나갔던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왜 민박집에 쓰러져 있어?”

“떡실신 됐다면서요.”

“남자랑 있었다는데 누구야?”

“남자가 너무 취해서 방에 눕히고 나갔나 봐. 별일 없어 보인다는 거 보니 어떻게 하려던 건 아니고 챙겨준 거네.”

그래, 태규가 하려던 말들도 저거였다.

지연과 같이 나간 남자가 본인이라는 걸 들키더라도 모든 걸 그녀 잘못으로 몰아가고,

자신은 외려 쓰러진 여자에게 손가락 까닥하지 않고 챙겨준 신사로 포장하면 된다.

졸피뎀을 먹였다는 것만 숨기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게 없다.

이제 거의 모든 직원들이 다시 들어왔다.

그중 뒤늦게 들어온 미선이 울면서 태규 앞으로 왔다.

“부사장님, 어떻게 된 거예요? 지연이 왜 저래요? 왜 저렇게 뻗은 거예요?”

자신을 찾아온 걸 보니 함께 있던 남자가 태규였다는 건 발각된 듯.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계산한 대로 이제 연기를 하면 된다.

“지연 씨 이미지를 생각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야. 그런데 이리로 데리고 오면 안 그래도 안 좋은 이미지, 또 행실 나쁜 여자로 보일까 봐 안전하게 민박집에 눕혀주고 나는 나왔지.”

“정말…… 요?”

혹시나 의심을 품고 있던 미선의 눈동자가 서서히 풀렸다.

“지연 씨가 많이 속상했나 봐. 울면서 술을 어찌나 많이 마시던지. 뭐 그럴 만도 하지. 직장 내에서 완전 왕따가 됐으니까.”

미선은 마치 본인의 잘못처럼 자책했다.

“저 때문인 거 같아요. 제가 괜히 이 회사에 데리고 와선. 그런데 저한테 전화하시지 그랬어요. 그럼 제가 챙겼을 텐데.”

태규는 위로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미선 씨까지 불이익 당할까 봐 그랬어. 지연 씨 친구라고 안 그래도 함께 욕먹고 있었잖아. 지연 씨 혼자 술 좀 깨서 숙소로 돌아가면 아무도 모르고 딱 좋았지. 그런데 세상엔 비밀이 없네, 하하.”

생각 외로 사려 깊은 그의 말에 그녀의 눈에서 감사의 눈물이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태규의 설명을 들은 직원들 입에서도 감탄의 목소리가 물결처럼 퍼졌다.

개민희 약혼자지만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다, 생각 있는 사람이다, 매너 있다 등등.

그들의 눈으로 볼 땐 사람 잘못 보고 자신의 멱살까지 잡은 직원의 실수를 책하는 대신 몰래 챙겨준 셈이 되니까.

태규를 보는 눈이 한순간에 호감으로 바뀌는 와중 환한 불빛처럼 금발머리를 반짝거리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애런.

그의 입술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You are a liar.”

태규를 포함 장내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긴 입술이 느릿하게 광대를 향해 올라갔다.

같잖고 우스운 상대를 봤을 때 짓는 애런의 특유의 미소였다.

“넌, 넌 뭐야?”

처음 보는 외국인의 등장에 태규의 두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애런의 파란 눈동자는 재미있다는 듯 반짝였다.

“너 좀 놀았어?”

“무슨 말이야?”

“아니면 밤에 잠이 잘 안 와?”

“!”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태규만은 알아들었다.

‘이 자식이 어떻게…….’

“졸피뎀 먹였지? 송지연 씨한테.”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졸피뎀이 뭐야?

“무슨 말이야?”

도리어 커지는 태규의 목소리를 코웃음으로 넘기며 애런이 손에 든 잔을 들었다.

“얼음이 다 녹긴 했는데 이 밑에 가라앉은 약이 보이네.”

지연이 마셨던 언더록 잔이었다.

“술집 주인이 위스키 한 잔에 쓰러졌다 그래서 난 의심했지. 무슨 약물을 먹었을 거라고. 나도 그렇게 놀아봤거든, 여자들 약 먹이면서.”

“뭐?”

“아직 주인이 잔을 안 닦았기에 보여달라 그랬더니 내 예상이 맞더라? 졸피뎀, 어디서 구했니?”

술렁술렁거리는 사람들, 입을 막고 경악하는 사람들, 믿지 못해 도리질하는 사람들, 장내는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태규는 무조건 소리를 지르며 부인했다.

“나 아냐. 진짜 아냐!”

그때 주변에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술렁대던 사람들의 소리로 어수선하던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무리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리며 길이 열렸다.

태규의 정면으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느릿하게, 서두르지 않고.

수현이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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