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끝내자
2018.06.13.
“쭉쭉쭉쭉쭉~~~~ 술이 들어간다!”
일정을 끝내고 회식을 시작한 직원들은 바다에서 탈 파도를 연신 술자리에서 타고 있었다.
같은 조원끼리 한 테이블에 앉아야 했기에 응급실 들러 타박상을 치료하고 온 민희는 수현과 합석했다.
다친 그녀를 두고 가버린 수현으로 인해 그를 보는 민희의 눈은 곱지 않았다.
“어떻게 여자가 다쳤는데 혼자 가버릴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이유야 어쨌든 같은 차를 타게 됐다면 사고가 났을 땐 끝까지 챙겨줬어야 했다.
그런데 사고가 나기 바로 직전, 미선에게 받은 문자가 수현의 신경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개민희가 단합회장한테 나쁜 짓 시킨 것 같아요. 지연이 좀 골탕 먹이라고요.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버스에 홀로 남게 된 지연이 어떤 분위기에 있을지.
민희가 별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박살 난 그의 휴대폰 대신 민희 걸 빌려서 전화했다.
‘안 다쳤어요? 어흑, 놀라라.’
지연이 사고 소식을 들었나 보다.
이 여자야, 누가 누굴 걱정해.
괜찮다 말해주고 슬쩍 무슨 일 없나 떠봤더니 씩씩한 척 억지웃음을 들려준다.
‘불편한 거? 관광버스춤 추자고 하는 거? 하하.’
그 어색한 억지웃음이 그의 심장을 더 묵직하게 만들었다.
‘추지 그랬어.’
모르는 척 장단은 맞췄지만 심장이 아려왔다.
그래서 빨리 전화를 끊고 굶고 있을 그녀를 생각해 핫바와 핫초코를 사서 버스로 향했다.
별로 맵지도 않은 핫바를 한입 베어 무는 그녀의 눈가가 벌겋게 물드는 게 보였다.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지금도 문태규 앞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그녀의 얼굴이 읽힌다.
생각 같아선 당장 손목을 잡아채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그녀가 직접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수현의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
애런과 미선은 이제 막 속초 시내로 들어섰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저녁을 회식 장소에 가서 사람들이랑 같이 드시겠어요, 아니면 따로 드시겠어요?”
3초 정도 고민하던 그는 수줍게 웃었다.
“지연 씨가 좋아하는 걸로요.”
미선도 3초 정도 생각하고 대답했다.
“그럼 물회를 먹고 가는 게 낫겠네요.”
속초로 오는 내내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수고객 자격으로 단합회에 참석하게 된 애런,
그는 그를 의전하는 미선에게 어떻게 하면 지연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물었다.
미선은 금발 머리에 파란 눈, 만화 캔디캔디에 나오는 안소니 같은 애런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지연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이기에, 기꺼이 춘향이 옆에 향단이, 오작교 위의 까마귀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
미선은 애런에게 지연에게 호감을 얻기 위한 방법을 강의하듯 알려줬다.
“여자들은 사실 물질로 애정 표시하는 걸 좋아하긴 해요. 난 마음의 선물을 더 좋아한다? 그거 다 뻥이에요. 지연이도 비싼 선물 받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하.”
애런은 노트에 받아 적지만 않았지 강의 듣는 학생처럼 운전하는 그녀 쪽으로 몸을 틀어 열심히 경청했다.
“그런데 물질적인 것만으론 여자의 마음을 얻긴 힘들죠. 그건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잘못하면 자존심을 건드려요. 특히 지연이처럼 독립심이 강한 아이한텐 크게 어필이 안 돼요.”
강의가 어려웠다.
“참 어렵네. 돈을 좋아하긴 하지만 또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된다.”
“어렵다면 어려운데 또 너무 어렵지만은 않아요. 뭘 해주던 그 안에 마음이 담겨 있음 돼요.”
“마음?”
“여자들이 흔히 말하는 ‘츤데레’, 그러니까 아닌 척하지만 은근히 잘해주는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아세요?”
애런의 파란 눈이 반짝거렸다.
“나, 너한테 이 정도 해, 내 능력 이 정도야, 하는 과시 없이, 생색 없이, 알고 보니 날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네? 은근히 이 마음을 알 수 있게 하죠.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감동을 주는.”
여기까진 어느 정도 감이 오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요, 어느 순간 드러내놓고 쾅! 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좋긴 해요.”
“…….”
뭘, 어쩌라는 거지?
“사실, 여기까진 좀 두서없는 말이고. 결국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뭔데요?”
“여자도 남자를 좋아해야죠. 사실 좋아하는 남자가 해주는 건, 뭐든 좋거든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
“좋아하는 남자가 사주는 라면 한 그릇은 관심도 없는 남자와 먹는 미슐랭 3스타 음식보다 달콤하거든요.”
결국엔 난 지연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인가?
혹시나 미선을 통해 지연의 호감을 살 수 있는 핵심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던 애런의 어깨가 실망감에 축 내려앉았다.
그런데 미선의 강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지연이가 아직 애런 씨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는 건 어떨까요? 서두르는 남자, 매력 없어요.”
천천히 다가가라…….
생각해보니 많이 서둘렀던 것 같다.
수현보다 먼저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처음 보는 날부터 화장품 반 트럭을 주문하고 뉴욕까지 찾아가 옷을 사주고 고급 스포츠카로 예고도 없이 집 앞으로 데리러 가고.
단시간에 뭔가를 보여주려는 부담스러운 행동들이었다.
“천천히 다가가는 건 어떻게 하는 거죠?”
“지연이와의 대화 폭을 넓히면서 친구처럼 다가가세요.”
“이를 테면?”
“공유할 수 있는 게 많아야겠죠? 경험이든, 취미든, 좋아하는 음식이나 장소든. 그래야 서로 할 말도 많아지잖아요.”
공통점이라, 같은 경험이라…….
도대체 그녀와 어떤 걸 공유해야 되나 싶은데 그때 창밖을 보며 미선이 탄성을 질렀다.
“와! 울산 바위다. 저기 수학여행 때 지연이랑 올라가 본 곳인데.”
‘지연이’란 말에 애런의 시선도 미선을 좇았다.
울산바위, 병풍처럼 우뚝 솟은 돌로 된 봉우리가 보였다.
야, 진짜 멋지다. 미국 대통령 얼굴을 깎아 놓은 러쉬모어 산만큼 경이로웠다.
“울산바위, 저도 가보면 안 될까요?”
그럼 그녀가 가본 장소를 하나 공유하게 되니까.
“그럴까요?”
그렇게 지연이 가봤던 울산바위, 지연이 먹어봤던 공원의 인절미, 지연이 좋아했던 속초의 카페를 돌아다니다 저녁 시간이 다 돼서야 속초 시내에 도착한 것.
두 사람은 지연이 좋아하는 물회를 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으니 세숫대야만 한 그릇에 멍게, 해삼, 소라, 개불, 오징어회가 그득하게 쌓여 맨 위에 전복으로 마무리한 물회가 등장했다.
어마어마한 비주얼의 물회에 미선이 탄성을 질렀다.
“대박, 대박! 완전히 바다네, 바다야.”
그런데 애런의 눈에는 벌건 개불만 들어왔다.
“이런 걸 지연 씨가 좋아해요?”
“지연인 익히 것보다 이렇게 갓 잡은 해물들 좋아해요. 산낙지 제일 좋아하고요.”
“…….”
스시도 아니고 조리되지 않은 해물들을 좋아하지 않는 애런은 특히 빨간 애벌레처럼 생긴 개불에 입맛을 잃었다.
하지만 눈을 꾹 감고 입에 넣기로 했다.
‘이것은 소시지다, 이것은 싱싱한 분홍 소시지다.’
스스로 마음에 주문을 외우면서.
그런 애런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선의 입가에 환한 엄마 미소가 번졌다.
‘귀엽다.’
미선은 한 국자 더 듬뿍 떠, 그의 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
비록 서로 바라보는 사람은 다르지만, 미선이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녀의 춘향이 지연은 사약을 마시기 일보직전이었다.
“송지연 씨, 내가 주는 술 좀 마시지.”
같은 조가 되어 한 테이블에 앉은 진상 태규가 자연스러운 척 연기한다며 지연에게 자꾸 술을 권했다.
태규가 주는 술을 마시니 토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함께 있는 사람들은 다 감시자.
조별로 앉아 있지만 직원 전체가 그녀를 주시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부사장이랑 저 여자가 과연 어떤 사일까?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닐까?’
심지어 홀로 미니스커트에 가죽 재킷을 입은 지연이 그들 눈에는 뭔가 목적이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
‘부사장 꼬드기려고 그러나? 치마가 손바닥만 하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둥둥 그녀의 귓가를 부유했다.
이쯤 되니 저 멀리서 힐끗힐끗 지연을 보고 있는 수현에게도 창피했다.
‘내가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찌질한 모습.
지연은 한없이 느껴지는 자신의 무능함에 다부지게 쥐었던 주먹에도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조원들이 따라주는 술로 겨우 목만 축이고 있는데,
그때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껄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라면 해!”
“고객님, 술이 좀 과하신 거 같아요…….”
거나하게 취해서 잘 익은 고구마가 된 고객과 지연을 엿 먹였던 총무가 나누는 불편한 대화였다.
“아따, 고객이 따르라면 따르고 마시자면 마시는 거지, 무슨 직원 교육이 이따위야?”
“어머머, 고객님. 저 소주 반 컵씩 원샷 못 해요.”
“그럼 안주도 먹지 마. 이 안주들, 다 우리 같은 고객이 팔아주는 돈으로 산 거 아니야?”
술이 취해 나오는 주사겠지만 남자의 거침없는 행동을 보니 한두 번 해본 행동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 누구예요?”
지연이 묻자 조장 애란이 허탈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진상 고객인데 우리 총무가 아주 힘들어해. 그런데 직업이 변호사라 아주 딱 고소 안 당할 만큼만 저러나 봐. 총무는 이젠 저 사람한테 화장품도 팔기 싫대. 자꾸 술자리에 부르고 술자리에선 자꾸 저런 식으로 진상 떨고.”
다른 조원들도 분노했다.
“매출도 좋지만 저건 아니잖아? 대머리 새끼. 저 가발을 언제 한 번 벗겨주고 끝내야 하는데.”
“그러다 고소라도 당하면? 요리조리 법망 피해가는 변호산데, 우리가 어디 대응할 힘이라도 있어?”
지연의 눈동자가 자꾸 그 테이블을 향했다.
‘나라도 뭔가를 하고 싶다. 어떻게라도 도와주고 싶다.’
같은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고객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나설 수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 진상 변호사가 갑자기 지연의 테이블을 향해 소릴 질렀다.
“어이, 애란씨도 이리로 와.”
조장 애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동상처럼 굳었다.
“나 걸렸나봐.”
그녀의 입술은 달달 떨렸고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부사장 태규를 보며 절박하게 읍소했다.
“부사장님, 좀 도와주세요. 부사장님이 가서 말리면 들을걸요?”
하지만 태규가 저런 자리에 관심을 가질 리는 없다.
“고객한테 어떻게 그래요? 그리고 뭐 또 그렇게 나쁜 짓이라고. 그냥 술 한 잔 하자는 건데.”
그런 태규를 바라보는 지연의 미간이 굵직하게 구겨졌다.
‘쯧쯧…… 니가 그렇지.’
그 정도로 의리와 의협심이 있었음 제 딸 줄리를 두고 도망가진 않았겠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애란이 팔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지연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요. 제가 대신 가 볼게요.”
“응? 지연씨가? 지연씨가 나대신 왜.......”
“제가 가서 뭐라도 좀 해볼 게요.”
“진...... 짜?”
애란도 고마운지 금방까지도 축 쳐졌던 눈매가 살짝 올라갔다.
지연은 쓱 웃으며 문제의 테이블 쪽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이 여자는 뭘까, 쳐다보는 진상 변호사를 향해 애교 있는 웃음을 날렸다.
“언니 대신 제가 왔어요. 언니가 변호사님 좋은 분이시라고 가서 먼저 인사드리라고 해서요.”
진상 변호사는 은밀하게 천천히 지연을 스캔했다.
그가 부른 여자보다 훨씬 젊은 아가씨, 게다가 초미니스커트에 섹시한 가죽재킷의 지연.
갑자기 그의 눈에서 식용유 한 사발이 떨어졌다.
“그래, 이리 들어와.”
지연이 옆으로 다가가 앉자 그녀 앞으로 맥주잔을 내밀었다.
“우리 뉴페이스랑 한잔할까?”
진상은 소주와 맥주를 4대 6도 아니고 5대 5로 섞으며 두툼한 손으로 빙그르르 돌렸다.
지연도 빈 잔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혼자 마시면 그게 술인가요? 고독이지. 같이 마셔요, 우리.”
그녀도 그의 잔에 5대 5로 섞었다.
그녀의 찰떡같은 반응에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신명났다.
한술 더 떠 잔을 들며 외친다.
“러브샷!”
지연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잔을 올렸다.
“콜!”
세상에.
장내엔 고요하리만큼 정적이 흐르며 모든 사람들의 눈들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고정됐다.
미운 게 미운 짓 한다고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을까.
천 쪼가리 잘라온 것 같은 짧은 스커트도 가관인데 같은 동료들까지 급 떨어뜨리는 천박한 행동을 자발적으로 하다니.
사람들은 입 밖으로 마음의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촌스럽게 러브샷을 팔로 하진 않겠지? 껴안아야 하는 거 알지?”
“당근이죠.”
점점 더 진상의 농도는 진해져갔다.
문제의 변호사가 먼저 지연의 목덜미를 감았다.
그러곤 상체를 밀착시키려 최대한 감은 팔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지연의 팔도 그의 목덜미를 감았다.
이제 서로를 좀 더 세게 끌어안고 5대 5 비율의 폭탄주를 진하게 마시겠단다.
‘세상에, 세상에. 기어이 할 참이네.’
주변에서 조금씩 우려와 비난의 탄성이 흐르기 시작했다.
진상은 지연의 목덜미를 짧고 두툼한 팔로 말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은밀하게 이 섹시한 러브샷을 즐겨보겠단 심산.
이제 막 서로를 껴안 듯 머리를 잡아당겨 술을 마시려 하는데,
“어머머~~~~~~”
갑자기 지연이 큰소리를 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상들의 러브샷을 라이브로 보던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왜? 왜?”
두 눈을 감고 상황을 즐기던 진상 변호사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잠시 잠깐 눈 감은 사이 무슨 일 있었나, 주변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차가운 공기가 내렸다.
시원하다기보단 허전한 느낌?
헉! 그제야 진상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았다.
“어! 내 가발!”
분명 눈 감기 전까지 그의 커다란 머리를 감싸고 있던 가발이 없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지연이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러브샷 할 때 상대방 머리 잡는 습관이 있어서.”
지연이 러브샷을 하는 척 가발을 벗겨버린 것.
그녀는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떨어진 가발을 주워들었다
진상은 적나라한 자신의 머리가 만천하에 오픈되자 화가 났다.
“이리 내놔!”
한 손으로 확 낚아채 뺏는다는 게 그만 어딘가에 딱 걸림.
어머, 어머.
가발이 벗겨졌을 때보다 더 큰 탄성이 흘렀다.
가발이 튀어 나온 바지 지퍼에 딱 끼어버린 것.
사람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손으로 입을 흡!
진상은 지퍼에 꼭 낀 가발을 억지로 잡아 뜯었다.
생각 같아선 망신을 준 지연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또 할 말이 없었다.
원래 러브샷 할 때 상대방 머리를 잡는다는데 어쩔 거야.
그는 지연 대신 민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나, 오늘부로 여기하곤 다신 거래 안 합니다.”
가지고 온 외투를 챙겨 화난 걸음으로 나가버렸다.
지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깔깔,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는 박수도 치고 누구는 휘파람도 불었다.
진상 옆에 앉아있던 총무는 슬쩍 지연을 흘겼다.
“미안해요. 아까 김밥. 그리고 지금은, 고마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고추냉이 좋아해요.”
총무는 어이없다는 듯 픽, 하고 웃었다.
“다음에 진짜 맛있는 김밥 싸줄게.”
툭 던지는 말이었지만 친근감이 감돌았다.
이제 동료들 중 한 사람 정도는 자기를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의로운 행동이라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다.
“송지연!”
지연이 막 스스로의 행동을 칭찬하고 있는데 등 뒤로 강하고 매서운 레이저가 느껴졌다.
돌아보니, 손가락 까닥까닥, 수현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따라와.”
낮고 작으면서도 아주 무서운 음성.
그 목소리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갔다.
지연은 올라간 치마를 내리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
수현과 지연은 회식 장소 바로 앞 해변으로 향했다.
그는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언뜻 보면 슬퍼 보이기도 하고,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파도와 발끝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바다 앞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지연을 등지고 매섭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
꽤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불러내더니 바다만 응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철퍼덕, 철퍼덕, 발끝까지 밀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수현의 몇 걸음 뒤에 선 지연은 그의 심기가 지금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통수에서도 티가 나.’
분명 조금 전 일 때문인 것 같다.
‘애 엄마로서 적절치 않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나?’
의도야 어쨌든 모르는 남자와 목을 끌어안고 술을 마실 뻔했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좀 해주지.’
침묵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에 점점 주눅이 들었다.
“저기요…….”
그녀의 부름에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기 저 좀 추운데.”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잖아요. 남들과 다르게.
지연은 요지부동인 그를 향해 한 번 더 소리쳤다.
“저기요, 수현 씨. 저 들어가 봐야 해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 그의 고개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바다를 등지고 그는 그녀와 마주했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움츠러든 어깨를 잡았다.
꾹 눌려지는 압력, 아, 하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순간,
그가 그녀의 양어깨를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바람에 빨려 들어가듯 훅 그녀의 어깨가 그의 가슴으로 빨려들었다.
“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눈만 동그랗게 커져버렸다.
그는 그의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내렸다. 그리고 바람처럼 속삭였다.
“우리, 끝내자.”
철퍼덕, 파도를 맞은 듯 그녀의 머리가 얼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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