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36화 (36/77)

제36화. 비밀인데, 좋아한대

2018.06.06.

단합회 출발 아침,

다행히 버스 길 미끄럽게 눈이 내리진 않았지만 하늘은 금세라도 늦겨울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회색이었다.

하지만 지연의 마음은 표백제를 넣어 삶은 빨래처럼 하얗고 개운하다.

‘단합회만 끝나면 모든 게 끝!’

태규는 민희가 의심하지 않도록 잘만 연기해주면 단합회 후 줄리에 대한 모든 서류를 정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죽이고 싶은 원수와 2박 3일이나 되는 시간 동안 다른 직원들처럼 부사장님~ 하면서 콧소리를 낸다는 게 쉽진 않겠지만,

줄리를 위해선 그 정도의 연기는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다.

‘까짓것 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무겁게 생각했던 다른 일들도 새털처럼 느껴지고.

일단 수현.

동생 때문에 접근했고 동생 때문에 자신을 유혹하려 했다는 생각에 가슴에 생채기가 날 정도로 맘이 상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 태규 때문에 힘든 그녀를 어울리지도 않는 코믹 버전으로 웃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 또 수현.

진심이든 아니든 그 정성만으로도 고맙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녀의 마음.

‘내가 좋아한 건데 뭐.’

따지고 보면 먼저 끌린 것도 그녀였다.

시작은 줄리에게 아빠처럼, 삼촌처럼 대해주는 모습에서 비롯됐지만 어찌 보면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만남도 설렜고 손끝도 설렜고 키스도 설렜다.

천천히 싹트기 시작한 감정이 어느새 점점 몸짓을 불려갔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 남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이렇게 함께 밥 먹고 일하고 웃을 수 있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면 된 거지. 응, 그런 거지.’

이번 단합회만 끝나면 맛난 김밥이라도 말아서 아침마다 챙겨줘야지.

아님, 줄리 데리고 소풍이라도 가자고 할까? 아직 추우려나?

그럼 마당에서 참나무 떼서 바비큐라도…….

“무슨 생각해?”

혼자 소풍 갔다 마당 갔다 바빠 죽는 그녀에게 줄리가 물었다.

“어? 어? 아니, 생각은 무슨.”

“뭘, 지금 내 단추 계속 밀려서 잠그고 있잖아.”

앗!

그녀 말대로 줄리의 원피스 단추를 엇박자로 채우고 있다.

“어, 어. 잠깐 돈 생각했어.”

“무슨 돈?”

“어…… 그냥 돈. 너 키울 때 드는 돈.”

“응, 별 거 아니었네.”

보통 애들은 부모님들이 돈 생각한다고 그러면 심각한 분위긴 줄 알고 숙연해지던데.

역시 여섯 살 아이에겐 통하지 않는 말이었군.

그런데 줄리의 입술이 갑자기 삐죽거렸다.

“그런데 엄마…….”

그녀의 참새 같은 입술이 삐죽거린다는 건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는 뜻.

“왜, 무슨 일 있어?”

“아저씨, 엄마 좋아한대.”

“뭐?”

“아 깜짝,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세히 좀 얘기해봐봐.

“아저씨가 얘기하지 말라곤 했는데…… 진짜 그랬어.”

“그럼 싫어한다고 그러겠냐?”

이런 식으로 한 번 떠보고.

“아냐, 말하면서 눈동자를 내렸어. 그럼 부끄럽지만 진심이라며. 엄마가 가르쳐줬잖아.”

내가 그러긴 했는데…….

“그런데 줄리야, 아저씨 거짓말 잘하는 거 같아.”

거짓말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어.

“그래? 이상하다. 나한테 비밀 지키라고 오천 원도 줬는데.”

“오천 원이나?”

“아니었나? 거짓말이었나?”

좀 애매한 액수긴 하다. 오만 원이면 찰떡같이 믿겠는데.

“어쨌든 아저씨한테 내가 말했다는 말 하지 마.”

“그런데 왜 얘기했어? 비밀인데?”

“요즘 엄마가 아저씨한테 쌀쌀맞아서. 엄마가 그랬잖아. 자기를 좋아해주는 친구한테 못되게 굴면 안 된다고.”

아이가 볼 때도 그랬구나. 요즘, 내가 그랬어.

“그렇지, 그러면 안 되지.”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한테는.

설사 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말일지라도, 아니면 줄리가 잘못 전달한 말일지라도, 이상하게 가슴에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오른다.

별것도 아닌 말에, 그냥 애가 하는 말에, 오천 원짜리 말에.

줄리가 전한 진위를 알 수 없는 말 한마디에 온몸의 세포들이 춤을 춘다.

단합회 아침, 시작부터 설렌다.

“단추 다 채웠다.”

이번엔 엇갈리지 않고.

*

주룩주룩,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합회에 비가 대수랴.

비가 와도 겨울 바다의 운치는 그 나름의 매력을 발산할 것이고 술은 더 술술 들어갈 테니.

“숙취 음료 몇 개 가져왔어?”

“난, 일단 다섯 개, 자기는?”

이틀 연속 회삿돈으로 질 좋은 안주에 술독에 빠질 생각으로 직원들은 신이 났다.

회사 앞에는 직원들을 위한 대형 버스가 준비돼 있었다.

뷰티 카운슬러 대장으로 보이는 단합회장이 외쳤다.

“임원들, 고객님들, 고객님들 의전할 직원들 빼고 전원 이 차에 탑승입니다.”

다행히 속초까지 가는 차 안에서는 조별 활동이 없기에 자율 착석이란다.

그렇다면 비록 다른 조지만 수현과 함께 앉을 수 있다는 얘기.

아침부터 줄리의 말에 설렌 지연은 두 시간 가까이 되는 버스 안에서 수현과 고속버스 데이트를 해볼 참이다.

삶은 달걀에 사이다 한 컵하며 창밖 풍경이 어쩌고 주저리주저리.

아, 이건 기차가 아니지?

그러다 보면 금방 휴게소에 정차할 테고 또 잔인한 선택의 시간이 오겠지.

‘어떤 걸 좋아하려나?’

핫바, 우동, 감자, 오징어, 호두과자, 떡볶이, 김밥, 찹쌀 순대…….

설마 이 와중에 국밥?

도대체 뭘 먹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해야 하는 세상 어려운 결정.

그래도 꼭 먹던 거 먹게 되더라. 회오리 감자.

‘맥주도 한 캔씩 나눠 마실까?’

끔찍하게 생각했던 단합회가 수현과 함께라고 생각하니 또 즐거워진다.

“이제 출발합니다. 차에 타세요.”

직원들이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지연도 먼저 차에 올랐고 수현은 당연한 듯 똥강아지처럼 그녀를 따랐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수현의 팔을 잡았다.

“진수현 씨.”

뒤를 돌자 과한 눈웃음을 보이는 민희가 서 있었다.

“수현 씨는 저랑 따로 가시죠.”

“왜요?”

“음…… 회장님 얘기를 좀 해야 해서.”

“회장님이요?”

수현의 머리카락이 긴장으로 쭈뼛했다.

얼마 전 그는 지연의 일로 강 회장에게 전화를 했었다.

‘저, 줄리아나 총괄경영팀 팀장, 팀 몬테귭니다.’

업계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나, 줄리아나 후계자야’라고 대놓고 명함을 내미는 것.

문태규를 만나 지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강 회장이 설마 이 여자한테 내 얘기를 했나?’

분명, 비밀이라고 했었는데.

여기서 싫다고 하면 물색없는 이 여자가 어떤 말을 할지 모르겠다.

이 자리에서 신분을 밝히면 그것만큼 난처한 일도 없고.

지연을 두고 다른 차를 타고 간다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내가 벌인 일, 내가 처리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수현은 웬일로 순순히 민희를 따랐다.

버스 안에서 지연은 오도카니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

훵-

버스 안 지연의 주변에선 불지도 않는 바람이 불고 있다.

수현이 없으니 그녀의 옆 좌석뿐 아니라 통로 옆, 뒤, 앞까지 아무도 앉지 않았다.

미선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우수 고객 의전으로 다른 차를 타고 간단다.

짝짓기 좋아하는 중딩도 아니고 버스에 홀로 앉게 된 게 서러운 건 아닌데 주변 좌석들까지 썰렁하니 기분이 슬며시 불안하다.

‘이 정도였었나?’

문태규 멱살을 쥔 이후, 직원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피할 정도라니.

속초까지의 거리는 새로 개통된 고속도로로 약 두 시간 남짓이지만 이제 삼십 분도 안 갔는데 부산까지 달려온 것처럼 등짝이 결린다.

‘이래서 단합회는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수현과 함께할 버스 데이트에 쿵덕거렸던 심장이 싸늘한 동료들의 시선에 묵직해졌다.

그때 단합회장이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아침 일찍 오시느라 속들 허하시죠? 우리 총무님이 오늘 새벽 네 시에 일어나셔서 손수 소고기 김밥 마셨답니다~~”

“이야~~~”

물개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총무는 일어나 직접 한 명씩 눈을 맞추며 김밥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친하게 지냅시다.”

김밥 한 줄과 빨대 꽂은 요구르트 하나씩.

이 완벽한 조합이 앞자리에서부터 배급되니 사람들은 엉덩이를 구르며 기대했다.

긴장감에 역시 아침을 못 먹은 지연은 선물 받는 아이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다렸다.

비록 무인도처럼 홀로 분리됐지만 김밥을 핑계로 사람들과 교감을 해볼 요량이었다.

‘다년의 알바 인생으로 수더분한 수다는 또 자신 있잖아?’

드디어 지연의 앞의 앞까지 총무가 왔다.

바로 앞의 좌석이 비었으니 이제 곧 그녀의 차례.

일어서서 받으려고 안전벨트까지 풀고 벌떡 몸을 일으켰는데,

“어머, 강유지 씨, 여기 앉았었네.”

갑자기 지연을 건너뛰고 그녀의 뒤, 뒤로 향하는 총무.

혹시나 일어선 자기를 놓쳤을까 지연은 두 손 모은 그대로 뒤로 돌았지만 총무는 보란 듯이 그녀를 외면했다.

“…….”

누가 봐도, 엄연한 고의적 건너뛰기.

공허한 두 손이 성냥팔이 소녀처럼 가련했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모두 다 받으셨죠?”

“네~~~~”

그녀가 손을 들세라 사람들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무안해진 그녀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뒤로 갔던 총무가 다시 그녀 앞으로 왔다.

“빼먹을 뻔했네. 송지연 씨 건 여기.”

“아, 정말 감사합니다.”

지연은 다시금 벌떡 일어나 배꼽 인사를 했다.

은박지로 싼 김밥을 은메달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조아리며.

‘에휴, 난 또 내가 왕딴 줄 알고.’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김밥과 함께 준 요구르트가 그녀 손엔 없다.

“어, 요구르트가 똑 떨어졌네.”

김밥도 놓칠 뻔했는데 까짓 요구르트 없다고 섭섭할 리가.

“아니에요, 저 목메는 거 좋아합니다.”

공손히 김밥만 받아 생전 처음 먹어보는 수제 김밥인양 기뻐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입을 막고 조심스럽게 터트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향하는 기분?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

‘뭐, 노려보는 것보단 나 보고 웃는 게 낫지.’

그녀는 잘 포장된 은박지를 열었다.

김밥에서 올라오는 참기름의 고소함이 아닌 코끝을 아리는 싸한 냄새가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받은 게 어디야, 받은 게 어디야.

그런데 단무지와 시금치, 게살이 넉넉하게 빠져나온 김밥 꽁지를 집어 입에 넣는 순간,

“흡!”

그녀는 알았다. 이건 소고기 김밥이 아니라는 걸.

까르르르르르-

누군가의 고통은 누군가의 기쁨.

버스 안엔 때아닌 웃음이 터져버렸다.

*

“회장님 얘기라는 게 무슨 얘기죠?”

민희 차에 탄 수현이 이제 막 시동을 걸고 출발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뱉은 첫 마디였다.

민희는 큼큼, 새로 바꾼 차량용 방향제 향을 코로 흡입했다.

“향기 어때요? 재스민 향인데 피로에 좋대요. 대기업 임원 자리, 늘 피곤하니까.”

“저에 대해 말씀하시던가요?”

그녀는 중앙의 컵홀더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커피, 제가 직접 내려 가지고 온 거예요. 드세요.”

“무슨 말씀 하시던가요?”

아 놔, 이 남자, 끈질기다.

회장 얘기는 수현을 차에 태우려 대충 둘러댄 구실이고,

늘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송지연을 떼어내면 단둘이 달달하게 진도를 좀 나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계속 무슨 볼일이냐고 쪼아댄다.

다른 얘기 좀 하자, 다른 얘기.

“다리가 기시니까, 혹시 불편하시면 조절하시구요……”

“말씀 안 하실 거면 택시 있는 곳에 세워주시죠.”

심지어 손잡이를 잡고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진짜 내리겠다는 시늉까지.

그래. 졌다, 졌어. 하자, 해. 일 얘기.

“회장님한테 칭찬받았어요, 수현 씨 때문에…….”

언제라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던 수현은 그제야 몸을 민희 쪽으로 틀었다.

“뭐가요?”

“남자 뷰티 카운슬러 1호 돼주신 거. 사실, 진수현 씨가 할 만한 일은 아니죠.”

“아…….”

난 또 뭐라고 하는, 실망스러운 표정. 아님, 안도하는 표정인가?

“그런데 혼도 났어요. 아빠, 아니 회장님한테. 송지연 씨 때문에.”

“송지연 씨요? 왜요?”

지연의 얘기가 나오니 또 눈빛이 달라진다.

뭐야? 진짜 둘이.

“지연 씨 때문에 뷰티 센터 분위기가 장난 아니에요. 왜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 흐린다는 말 있잖아요. 우리 센터, 분위기 하나는 최고였는데…….”

수현은 일단 강 회장이 민희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아 안도했다.

하지만 지금 민희가 말한 지연에 대한 말은 흘려들을 만한 건 아니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지연은 지금 뷰티 센터의 모든 직원들에게 신종 바이러스 취급을 받는다.

별다른 치료법도 없고, 피하긴 피하지만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해야 하는.

입사 첫날부터 그녀는 뷰티 센터 직원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여자들만 가득한 뷰티센터에 수현 같은 잘생긴 청일점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다른 여자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어디 우리 도움 없이 일할 수 있나 보자.’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는데 화장품을 반 트럭씩 사주는 애런이라는 고객을 물어왔다.

‘여우야, 꼬리 아흔아홉 개 달린 여우.’

그런데 어느 날은 뜬금없이 부사장 멱살을 잡는다.

‘여우가 아니라 미친개였어?’

그러더니, 그게 또 사람 잘못 본 거래.

환장하지.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부사장을 건드렸으니 이제 저 여자 죽었다 싶었는데 또 짠, 하고 회장이 나타나 구해준다.

‘개는 갠데 높은 집 개?’

도대체 저 송지연이란 여자, 정체는 뭘까?

친해지고 싶거나 알고 싶은 존재가 아닌, 당최 아군인지 적군인지 가늠할 수 없는, 탐색 불가한 존재인 지연을, 다들 궁금해하면서도 불쾌해하고 있었다.

‘불안하다.’

그걸 잘 알기에, 지금 수현이 불안한 건, 강 회장이나 민희가 아닌 지연과 자신이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차에선 별일 없을까?’

안 그래도 궁금한 참에 미선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금 지연이랑 있으시죠?

우수 고객 의전으로 따로 오기로 한 미선도 지연이 궁금한가 보다.

-아니요, 저 강 이사님과 가고 있습니다.

-헐!

문자로 전달된 짧은 외마디지만 불안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왜요?

-저 친한 카운슬러가 문자 왔는데요, 개민희가 단합회장한테 나쁜 짓 시킨 것 같아요. 지연이 좀 골탕 먹이라고요. 어떡해요, 저는 밤이나 돼서야 도착할 텐데. ㅜㅜ

문자를 마친 수현은 휴대폰을 손으로 꾹 쥐었다.

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운전하는 여자랑 싸울 수도 없고.

“휴게소가 어디죠? 일단 거기에 좀 섭시다.”

그러나 지금 민희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리질 않았다.

늘 기사가 운전하는 차만 타던 그녀는 새로 뚫린 고속도로가 낯설기만 한 듯.

“이쪽으로 가는 게 맞나? 고속도로가 새로 나서…….”

갑자기 훅 핸들을 옆으로 틀어버린다.

미끄덩-

빗길 급차선 변경에 타이어가 미끄러졌다.

“강민희 씨, 조심 좀…….”

위험을 느낀 수현이 경고하는 와중 그녀의 핸들은 다시 반대로 꺾였다.

“아니다, 저쪽 출군가?”

“어, 어, 강민희 씨!”

갑자기 빗길에 차가 갈지자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머머머!”

본인도 놀란 민희가 그만 핸들을 손에서 놓아버린다.

“강민희 씨!”

수현이 급하게 핸들을 잡아봤지만 이미 늦었다.

“꺄악!”

슈우우우우우웅-

민희의 비명과 함께 차가 정지선을 넘어버렸다.

끼이이이이이익- 쿵!

차는 정지했다. 무언가를 받아버리고.

*

“웩! 웩! 욱!”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간 지연은 열 번 넘게 입을 헹궈내야 했다.

총무가 지연에게 준 김밥은 고추냉이를 묻힌 시금치가 들어간 김밥.

“미안해, 우리 딸이 도와준다더니 장난친 거 같아.”

하필 장난친 김밥은 지연에게만 주어졌다.

씻어낸다고 씻어냈지만 아직도 눈에선 눈물이 줄줄.

고추냉이 때문인지 서러워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할까?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직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덥석 김밥 꽁지를 문 제 잘못이지.

지연은 무인도 같은 버스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뉘였다.

단합회에서 극복해야 할 문제는 문태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나였어.’

직장 내 왕따가 바로 내 일이 돼버리다니.

미선이 그리웠다. 수현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순 없다.

‘나 송지연이야.’

어금니에 힘을 주고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응? 누구? 개민희?

액정에 뜬 이름은 업무상 어쩔 수 없이 저장해놓은 개민희.

‘이 여자가 왜 나에게?’

전화를 받으려는데 단합회장이 호들갑을 떨며 버스 위로 올랐다.

“큰일 났어, 큰일 났어. 강 이사님 차, 사고가 났대.”

민희의 차라면…… 수현이 탄?

‘수현이 아닌 민희가 전화를 했다는 것은…….’

우르릉 쾅쾅-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천둥이 친다.

휴대폰을 쥔 지연의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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