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34화 (34/77)

제34화. 불길한 예감

2018.05.30.

어제의 정황으로 봐선 분명 이불 속 고양이는 지연.

아빠와 한잔한다고 했었고 술 취하면 귀소본능으로 이 방에 오는 버릇이 있으니까.

아싸, 걸렸어! 하면서 획 이불을 들췄는데,

“흐헉!”

예상과는 다르게 줄리가 떡 하니 누워 있다.

사실, 여기까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님.

지연일 거라 기대했, 아니 예상했지만 한편으로는 줄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기에.

그가 정말 놀란 이유는 이불 속 고양이가 줄리라서가 아니라,

이불을 들춤과 동시에 마주친 줄리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줄리야! 왜? 왜 울어?”

느낌으로 봐선 엄마나 할아버지한테 혼난 것 같진 않다.

그녀의 눈물은 삐지거나 서러워서가 아닌,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 공포를 담고 있었다.

“아저씨!”

줄리는 수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말해봐. 어서.”

그의 가슴에서 안정을 찾은 줄리는 끅끅 넘어가는 숨을 진정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빠가 한국에 있대요.”

아빠라면…… 문태규?

“어제 할아버지랑 엄마가 하는 얘기 몰래 들었어요. 엄마 회사에 같이 있대요.”

그거였구나. 우는 이유가.

물론 줄리가 그다지 아빠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아빠를 보는 게 싫어?”

“아빠가 저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해요? 그럼 엄마랑 헤어져야 하잖아요.”

줄리는 아빠와의 만남은 곧 엄마와의 이별이라 생각하는 듯.

“그럴 일 없어. 엄마는 줄리 안 보낼 거야.”

“그런데 어제 할아버지 얘기 들으니까 아빠가 절 완전히 엄마한테 주지 않으면 전 여기서 학교도 못 다니고 아무것도 못한대요.”

맞는 말이긴 하다. 법적인 문제가 있을 테니.

수현은 가늘게 떠는 작은 새의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럴 일…… 없을 거야.”

그가 아는 한, 지연은 줄리를 포기할 여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줄리는 그 정도의 위로로 만족하지 않았다.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얼굴의 반이나 되는 눈망울을 축 내렸다.

“아저씨가…… 도와줘요. 네?”

“…… 내가?”

“아빠가 나 안 데려가게 도와줘요. 소원이에요.”

“…….”

소원이 좀 평범해야지.

여섯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소원’이 참 비참하다.

장난감을 사달라는 것도, 디즈니랜드를 데려가 달라는 것도 아닌, 아빠가 안 데려가게 해달라는 게 소원이라니.

그 소원, 들어주고 싶지만……

“휴…….”

수현의 입에서 바로 ‘그럴게’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선 당연히 그렇게 대답해줘야 하는데 그의 성격상 확실한 책임을 질 수 없는 말은 참 내뱉기가 힘들다.

아이 아빠와 아이 엄마의 일에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책임진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의 주저함에 줄리는 불안함을 느꼈다.

“제가 뭐든지 할게요. 네? 아저씨, 부탁이에요, 네?”

절박하고, 절실한,

구원을 바라는, 구세주를 원하는…….

수현은 그녀의 소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눈물에서 지연이 비친다.

그 눈물을 보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줘야 할 것 같은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아저씨가 어떻게 해서든 도와줄게.”

하고 말았다. 약속을.

그가 약속을 했다는 건, 결심을 했다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커다란 의미.

그의 약속에, 그제야 작은 새의 입술이 웃음을 그린다.

“약속…….”

폈는지 구부렸는지도 모를 짧고 통통한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그도 길고 든든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단단하게 꼬였다.

약속은 이루어졌다.

*

잠시 후 빨간 지붕 집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너 엄마 그렇게 놀래킬 거야?”

줄리가 사라진 걸 안 지연이 부리나케 달려온 것.

그녀는 줄리를 향해 매라도 들 요량으로 화를 냈다.

“엄마 기절할 뻔했어, 니가 없어서!”

기가 눌리긴 했지만 줄리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변명을 했다.

“내가 쪽지 써놓고 왔잖아. 여기 올 거라고.”

“알아들을 수 있게 썼어야지. 레드, 아저씨 집, go, 라고 쓰면 내가 어떻게 알아? 퀴즈도 아니고 정말.”

“옆에 아저씨 얼굴도 그려놨자나, 송중기처럼.”

“그게 송중기냐? 눈썹만 시커멓게. 그리고 아저씨가 무슨 송중기야? 말이 돼?”

갑자기 여기서 왜 나를…….

묵묵히 모녀의 싸움을 지켜보던 수현은 이 부분에서 발끈했다.

“내가 송중기 닮았다는 게 왜 말이 안 돼?”

지연이 황당하다는 듯 윗입술을 비틀었다.

“송중기를 뭘로 보고…….”

그녀의 무시하는 것 같은 반응에 가로로 길었던 그의 눈매가 동그랗게 확장됐다.

“어, 어! 내가 말 안 했나? 뉴욕에서 송중기 진짜 본 적 있다고? 나보다 키도 작던데.”

“우와, 아저씨 송중기 봤어요?”

“봤지, 아저씨 회사에서 패션쇼에 초대했었어. 송중기가 다음에도 초대해달라던데?”

“송중기 오빠가 그런 부탁도 했어요? 그럼 아저씨가 오빠보다 더 높은 사람이에요?”

“당근이지. 에휴, 조지 클루니 결혼식도 갔던 사람이야 내가.”

“조지…… 뭐여? 하여튼 아저씨 최고!”

어느새 대화는 이곳에 있지도 않은 송중기판.

대화의 주체들도 바뀌었다.

지연과 줄리에서 수현과 줄리, 송중기 그리고 피처링은 조지 클루니.

투명 인간 지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말려들면 안 되지. 엄마의 위엄을 보여줘야지.

그녀는 주제를 원점으로 되돌리려 더 큰 목소리를 냈다.

“줄리, 너 앞으로 또 말없이 나갈 거야, 안 나갈 거야?”

하지만 지연의 잔소리가 송중기를 이길 순 없다.

그녀는 엄마를 무시한 채 수현 앞으로 다람쥐처럼 뛰어갔다.

“금화댁 아줌마가 그러는데 송중기 오빠는 팔뚝이 단단할 거래요. 군인이라 삽질을 많이 해서.”

“그렇지, 군인은 삽질이지. 그런데 송중기가 군인은 아니야. 맡은 역이 그런 거지.”

“그래도 멋있긴 하죠?”

“말해 뭐해. 허벅지도 엄청 튼튼해 보이던데? 스케이트 선수 출신이라며?”

“팔뚝은 아저씨도 튼튼해요. 저 비행기 태워줄 때 보면.”

“그래? 그걸 눈치챘어? 허허, 예리하긴.”

“나 팔뚝에 한번 매달려봐도 되요?”

“그럼 그럴까?”

줄리는 토끼처럼 수현의 팔을 향해 깡총 뛰었다.

수현은 슈퍼히어로라도 된 듯이 팔뚝에 힘을 꽉 주었다.

두 팔로 대롱대롱 그의 팔에 매달린 줄리가 작은 입술을 최대한 벌리며 감탄했다.

“우와, 단단하다. 돌 같아요.”

“힘도 줄까? 그럼 팔뚝이 더 화가 난다.”

“팔뚝도 화가 나요?”

“그럼, 아저씬 등근육도 화를 낸다?”

“이야~ 아저씨 송중기보다 멋지다!”

부글부글-

지연의 울화통이 끓는 소리다.

“줄리!”

듣다 못한 지연이 두 사람을 향해 소릴 질렀다.

하지만 미스터코리아놀이, 아니 슈퍼히어로놀이에 빠진 두 사람에게 이미 지연은 존재감 제로.

“다리도 들어볼까? 다리에도 매달려볼래?”

“아저씬 다리도 튼튼해요?”

“니네 엄마 같은 여자 열 명도 앉혀.”

“우리 엄마 앉혀본 적 있어요?”

“들고 뛰어도 봤다. 얼마나 무거운지 폐에 구멍 날 뻔…….”

“야!”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끓어오른 울화통이.

.

.

.

수현과 지연은 어제에 이어 또 함께 버스를 탔다.

‘택시 타자니까…….’

지연의 고집에 오늘도 또 버스행.

얄밉게 또 지연이 창가를 차지해버린다.

가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한 번도 봐주지 않을 거면서.

치, 난 어디 보라고.

동그랗게 공기를 넣은 그녀의 뾰로통한 볼이 차창에 비쳤다.

‘삐졌겠지.’

줄리가 없어져서 놀란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아이를 혼내기는커녕 팔뚝 얘기만 하다 끝나버렸으니까.

그런데 사실 수현은 일부러 끼어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곤경에 처한 딸을 구제해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랄까?’

아이가 없어져 혼비백산 달려온 지연을 생각하면 줄리를 혼내는 게 당연하지만,

그녀가 수현에게 달려온 데에는 다 그녀만의 이유가 있었으니까.

줄리는 아빠의 출현에 불안해했다. 엄마를 뺏길까 봐.

아이에게 엄마를 뺏길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더한 게 있을까?

몰래 할아버지와 엄마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말은 못 하고 묵묵히 기가 죽어 혼나고 있는 줄리의 모습이 얼마나 짠하고 가여운지.

그래서 구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장난이 너무 길었던 걸까?

쌩한 얼굴의 지연이 도통 풀릴 생각을 안 한다.

‘화나니까 엄청 무섭네. 칼부림도 하겠어.’

풀어주긴 해야 되는데…… 그게 또 쉽지 않다.

‘뭘 좋아하는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또 팔뚝 보여줘? 송중기보다 튼튼하다고?

웃기면 좀 웃어주나?

아이 참, 어제 같이 사진 찍을 때만 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여자 마음 풀어주는 건 너무 힘들다.

수현이 꽈배기처럼 돌돌 꼬여버린 지연의 화를 어떻게 풀어주나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를 했다.

끼이이이이익-

그만 무방비 상태로 창문만 바라보고 있던 지연의 머리가 앞으로 쏠렸다.

“으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앞좌석을 향해 돌진했다.

가만히 두면 그녀의 머리 위로 스파크가 튈 상황.

순간 수현이 재빨리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비록 지연의 가슴을 스치며 뻗쳤지만 그래도 다행.

아슬아슬하게 지연의 머리와 앞좌석은 5센티 간격을 두고 멈춰 섰다.

휴, 다행이다.

지연도 말은 안 하지만 고맙다는 눈짓이다.

내 팔뚝이 관상용이 아니란 건 알아챘겠지.

그런데 갑자기 버스가 한 번 더 출렁.

“어, 어!”

이번엔 그가 놀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쏠렸다.

‘무언갈 잡아야 한다. 무언갈 의지해야 한다.’

그는 필사적으로 의지할 어떤 것을 찾았고,

다행히 빛나는 운동신경을 이용해 잽싸게 잡았다. 덥석.

그에게도 앞좌석과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앙~~

급정거를 했던 차는 다시 커다란 엔진 소리를 내며 안정적으로 출발했다.

어쨌든 참사는 없었다. 참사는.

그런데 참사 대신, 문제가 있었다.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목숨 줄로 잡은 건 바로 그녀의 허벅지.

허공으로 휘휘 방황하던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허벅지를 꾹 쥐게 된 것.

심지어 위치도 무릎 가까운 허벅지도 아니고 정중앙으로 떡!

“헉!”

자신의 손을 본 그도 놀랐고,

“어!”

허벅지를 잡힌 그녀도 놀랐고.

일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지연이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젠 별의별!”

“…….”

“한 번만 더 해요, 한 번만, 네?”

그녀의 앙칼진 경고는 허공을 타고 버스기사의 귀까지 흘렀다.

더 이상의 급정거는 없었다.

칼부림 난다니까.

*

민희는 아버지 강 회장으로부터 평생 처음으로 가장 맘에 드는 미션을 받았다.

‘진수현이란 남자를 잡아라.’

이게 웬일?

늘 남자들을 정리하라는 말만 듣다 엎어지든 자빠지든 어떻게 해서든 잡아보라는 말은 생전 처음이다.

‘남자 휘어잡는 건 내 전문이지.’

남자를 잡기 위한 첫 단계는 주변 여자를 정리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정리를 해주는 것.

지금 민희가 아는 수현의 주변 여자는 오로지 송지연, 그년뿐.

강 회장은 그녀를 태규에게 붙여주라고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경험상 사랑하는 남녀를 떼어놓긴 쉬워도 사이가 안 좋은 남녀를 붙여주긴 어렵다.

‘취임식날 그런 일이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가 좋을 리 없지.’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두 사람만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

썸을 타든, 봄을 타든, 파도를 타든, 지들 알아서 할 수 있도록.

그녀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뷰티 카운슬러들을 앞에 모았다.

“공지가 아직 안 나갔을 테지만 회사에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겨서 말씀드립니다.”

매니저 미선도 아니고 민희가 직접 사소한 공지를 하는 법이 없기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틀 후, 우리 카운슬러들 전체 단합회를 가게 됩니다.”

엥? 단합회?

직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 했다.

한 번 가서 친목을 도모하자고 건의했을 땐 비용이 어쩌고, 시간이 어쩌고 무시하더니 왜 갑자기?

한 직원이 다른 직원들을 대신해 우렁차게 질문했다.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는 단합횐가요?”

“그건…….”

송지연 남자 붙여주기 대작전?

궁극의 목적은 이러하지만 이런 얘기를 직원들에게 얘기해줄 순 없지.

“새로운 직원들도 있고 하니 조금 더 직원들 사이의 끈끈함을 다지자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계획서를 들었다.

“단합회 장소는 강원도 속초. 겨울 바다를 보고 오는 겁니다.”

우와~~~~~

겨울 바다란 말에 직원들의 눈동자엔 벌써부터 넘실대는 파도와 회 그리고 소주가 한가득.

민희는 처음으로 받는 직원들의 환호 소리를 즐기며 미리 짜온 의미심장한 계략을 발표했다.

“명목이 단합회인 만큼 조별로 활동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번 단합회가 끝나면 같은 조끼리의 사람들은 거의 친구가 돼서 돌아올 겁니다.”

연인이 돼서 돌아오면 더 좋고.

“참, 이번엔 우수 고객님들도 초청했으니까 고객들과의 관계도 단단해지길 바랍니다. 조 배치도는 회의실 뒤편에 붙여둘 테니까 참고하세요. 이상 공지 끝!”

그녀가 나가자 직원들은 우르르 몰려가 조 배치도를 살폈다.

“어머, 너 개민희랑 한 조다.”

“야, 난 부사장이랑 한 조다.”

“우리 변태 고객님도 같이 가네?”

다들 자기가 소속된 조와 같은 조원들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다.

수현과 지연도 그들과 함께했다.

수현이 먼저 자신이 소속된 조원들의 이름을 읊었다.

“김미란, 박현서, 진수현…… 강민희?”

지연도 자신이 소속된 조와 조원들을 확인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배치도를 읽어 내리는데,

순간 땅이 끌어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았다.

“박미선, 송지연, 김애란…….”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애런 몬테규 그리고…… 문태규?”

절대.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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