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그럼 맛만 볼까
2018.05.26.
지연은 수현의 마지막 메시지를 보았다.
“풋”
심각했던 그녀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연은 그제야 확신했다. 자신이 원했던 진짜 답이 무엇인지.
그녀는 친절한 선생님처럼 애런에게 웃으며 답을 주었다.
“틀렸네요. 정답이.”
“틀려…… 요?”
그는 그럴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왜요, 왜 틀렸다는 거예요? 지금 지연 씨한테 그 자식한테 복수하는 것만큼 바라는 게 뭐가 있어요? 그렇게 당해놓고?”
“원하긴 하지만…… 사람들은 원하는 걸 다 하고 살진 않아요. 그리고 가장 원하는 일도 아니고요.”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자신만만했던 만큼 실망스러움도 클 수밖에.
“그럼 뭐죠? 지연 씨가 가장 원하는 건?”
“그건요…….”
그는 점점 초조해 보였다.
“집? 직장? 돈? 뭐 그런 거예요?”
지연은 다른 말로 대답했다.
“게임에 지셨으니 우리, 사귈 필요도 없네요.”
끝까지 정답을 주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증을 남겨 그를 아쉽게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다.
어차피 이해받지 못할 답이다.
그럼 굳이 말할 필욘 없지.
*
독일의 뒤셀도르프.
수현의 새엄마이자 애런의 엄마 로즈 몬테규는 뒤셀도르프 대학병원 VIP실에 ‘PRINCESS’란 예명으로 입원 중이다.
병명은 알츠하이머. 설상가상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시력까지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병은 수현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이었기에 오로지 몬테규 집안의 집사 로버트만이 그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신가요?”
의례적 질문 같지만 로버트에겐 진심어린 걱정과 우려가 담겼다.
“점점, 머리가 하얘져 가는 느낌이야.”
그녀의 말대로 하루하루 옅은 핏기 하나 없이 파리해져가는 그녀였다.
“눈은 좀 어떠십니까?”
“글쎄…… 로버트의 머리에서 새치가 보이질 않네. 그래서 그런가? 우리 집에 처음 왔던, 이십 대의 젊은이 같아.”
“그럼 좋아지시는 겁니다.”
심각한 병색을 앓고 있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그녀였고 그런 그녀의 농담을 잘 받아줄 수 있는 로버트였다.
그녀는 오늘도 하얀 막이 낀 것처럼 뿌연 눈으로 베개 밑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까지 이 사진을 볼 수 있으려나…….”
언제 완전히 없어질지 모르는 시력에 그녀의 두려움은 나날이 더해갔다.
매일매일 더해가는 그녀의 그 두려움을 지켜보는 로버트로선 이제 더 해줄 수 있는 위로도 없었다.
“시력을 완전히 잃으시는 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담으셨잖아요. 그럼 매일 보실 수 있는 거죠.”
가망 없는 의학적 희망보단 현실을 알려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게 최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보고 있잖아. 이 사람을.”
그녀는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로버트의 가슴이 아려온다.
단 4년밖에 함께하지 못한 남편을 저토록 평생 가슴에 담을 수 있을까.
그의 안타까움을 그녀가 읽었다.
“변하지 않는 건 보석이 된다고 했어. 내 맘은 보석이 되려나 봐.”
그랬다, 승규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보석이 될 정도로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승규의 사진을 가슴에 품으며 아득한 미소를 지었다.
“로버트, 내가 승규를 어떻게 만났는지 알아?”
알 뿐이랴.
지금까지 백 번 하고도 열 번은 더 들었을 얘기다.
2년 전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서 외울 정도로 들려주었던 추억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로버트는 늘 똑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아뇨, 무척 궁금하네요.”
그녀의 얼굴이 소녀처럼 붉어지며 아름다운 동화를 낭독하듯 이야기는 시작됐다.
“그는 내 발이었어. 항상 같이했었지.”
진승규, 파일럿.
이혼하고 수현이라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몬테규라는 미국의 명망 있는 집안의 개인 조종사로 취직했다.
그렇게 몬테규가의 영애 로즈와 승규는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딱 이 정도의 인연이었다.
하늘 같은 고용주와 그녀에게서 돈을 받는 고용인.
그녀가 가는 곳엔 늘 승규가 있었지만 그들의 자리는 늘 다르고, 닫혔다.
그는 문 닫힌 조정석, 그녀는 전용 비행기 VIP석.
대화도 늘 기내 폰으로 나눌 뿐이었다.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십시오. 이제 곧 이륙합니다.”
그녀의 대답도 늘 한 가지였다.
“알겠습니다.”
특히나 내성적이고 어두운 성격의 그녀는 고용인들에게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승규가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회사의 직원들이나 비행기 안의 승무원들의 수다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그녀는 늘, 미스터리했다.
“남편은 왜 한 번도 안 보이지? 영국의 귀족이라며.”
“아들은 왜 한 번도 안 데리고 다니지? 아직 아기일 텐데.”
“그런데 왜 저렇게 항상 어두워? 이유가 뭐야?”
안개처럼 베일에 싸인 그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승규는 그녀가 꽁꽁 감추고 있는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어둠의 비밀을.
그것은 충격적이고 믿을 수 없고 가슴 아팠다.
승규와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주던 그녀가 로버트에게 물었다.
“승규가 알게 된 내 비밀이 뭔 줄 알아?”
로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와 승규의 이야기는 백번도 더 들었지만 그녀의 비밀을 들은 적은 없다.
물론 그녀의 그림자에 뭔가 말 못 할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딱히 궁금했던 적은 없다.
명망가에는 말 못 할 비밀들이 늘 감춰져 있는 법.
“그 비밀이 뭔데요?”
형식적이고 예의상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피식, 작은 실소를 토했다.
그리고 아름답고 소중한 비밀을 속삭이듯 그녀가 말했다.
“내가 죽였어, 애런의 아빠를…….”
“!”
“그 비밀은 오직 우리 집안사람들과 수현의 아빠, 승규만 알고 있지.”
로버트의 머리가 강한 둔기로 맞은 듯 아찔했다.
30년 넘게 모신 몬테규 가문에 그런 엄청난 비밀이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이 집안에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건 들었었다.
영국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자살 사유는 약물 과다와 우울증.
그런데 이런 건 별로 커다란 이슈는 아니었다.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재벌가나 명망가엔 빠지지 않는 가족력과 히스토리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고 살인이었다고?
“그런데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죽였을 거야.”
그녀가 말하길 명백한 정당방위였단다.
하지만 명문 집안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돈과 권력, 모든 걸 갖고 있던 몬테규가에선 그 사고를 자살로 덮었고.
그렇지만 그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그녀는 그렇게 어두웠고.
그녀의 발이었던 승규가 그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녀의 아픔을 감싸 안아주었다.
“당신 잘못 아니에요.”
그 위로가 그들의 위대한 사랑의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불씨가 타오르며 신분 차이도 뛰어넘는 세기의 결혼까지 이어졌고.
그렇게 승규와 로즈, 수현과 애런은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승규는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내 비밀을 알고 있어서.”
소문이 무성하긴 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사 년 후 승규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결론은 비행기 결함으로 나타났지만 사고가 사고가 아니었다는.
“난 승규에게 빚이 있어.”
자신의 비밀을 안 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난 대신 수현에게 그 빚을 갚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자백에 로버트의 풀리지 않던 의문들이 깨끗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렇게 수현을 감싸고 키웠구나.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남자의 아들, 갚을 빚이 있는 아들이라서.
그래서 애런을 그렇게 혼자 뒀구나.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전남편의 자식이니까.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애런의 몸엔 살인자의 피가 흘러.’
당시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 이젠 이해가 간다.
남편을 살해한, 그녀의 핏줄이기에, 살인자의 피가 흐른다는.
모든 의문이 풀리긴 했으나 얘기를 듣다 보니 로버트는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늘 아름다운 스토리만 들려주던 그녀가 오늘은 이런 충격적인 비밀까지 털어놓는다.
이유가 뭘까?
그녀가 핏기 없는 하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한국으로 가자. 가서, 수현을 지켜야 해.”
“지키다니요?”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모든 상속 절차를 마무리해야 해. 안 그러면…… 모든 건 애런 게 될지도 몰라.”
“상속 절차라면 여기서도 저와 함께하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그럴 이유가 있어. 우리…… 한국 가자.”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시체 같은 그녀였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만큼은 강렬했다.
죽어가면서도 완강한 그녀의 의지였다.
*
가회동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연은 수현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또 보았다.
첫 번째 메시지는,
‘안 와? 살아? 거기서?’
질투는……
두 번째 메시지는,
‘거기서 살 거면 짐 빼. 지금 당장 와서.’
유치하기까지……
그런데 세 번째 메시지가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 건 메시지가 아니었다.
줄리와 빨간 지붕 집 부엌에서 함께 저녁을 준비하며 찍은 그림 같은 사진.
그의 표정은 투박했고 줄리의 얼굴은 개구쟁이 같았지만 다른 듯 닮은 듯, 두 사람의 모습이 한 편의 잘 버무린 하모니처럼 어울려졌다.
‘이게 내가 가장 원하는 거지.’
애런의 말마따나 문태규에게 복수도 하고 싶고 집도 직장도 돈도 원하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원하는 건 줄리의 행복.
수현은 아는 것이다.
그녀를 빨리 집에 올 수 있게 하는 달콤한 미끼는 바로 웃고 있는 줄리의 얼굴이라는 걸.
기쁜 마음으로 다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니 벌써 집에 다다랐다.
현관문을 열면서부터 혀끝과 위장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흘렀다.
그 냄새가 그녀가 기대하던 것은 아니었다.
수현과 줄리가 앞치마를 하고 난리를 쳐도 할 수 있는 건 고작 계란 요리 정도.
그런데 그녀의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는 뭔가 큼큼하면서도 콤콤하면서도 매콤하기도 한,
“청국장 끓였어?”
걸쭉한 고향의 맛이었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이미 테이블에는 한 상 가득 음식들이 나열돼 있었다.
“엄마, 엄마, 내가 시래기 지짐 했어.”
시, 시래기? 니가?
“아저씨는 미꾸라지 튀기고.”
미, 미, 미꾸라지?
당최 이 집에선 들어보지 못했던 메뉴기에 그녀는 직접 차려진 접시 하나, 하나를 살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그녀가 알 수 없는 음식이 한 가득이었다.
“이게 뭐예요?”
저도 모르는데 줄리는 더욱 알 수 없는 음식들이기에 지연은 그녀가 왔음에도 인사 한마디 없이 싱크대에 기대어 있는 수현에게 물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한국에서 산 사람이 그것도 몰라? 강원도 토속음식들이잖아. 금화댁이 해주고 간 거야. 정선 출신이래.”
“그러니까 이름들이 뭐냐고요, 전도 있고 국수도 있고 막 그런 거 같은데.”
“에휴, 내가 알려줘야겠어? 미국 산 내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
금화댁에게 들은 게 뻔한 데도 그는 마치 원래 알았던 것처럼 자만심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지연의 옆으로 다가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름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능숙한 발음은 아니었다.
“감자붕뎅이, 콧등까기국수, 트름국…… 흠, 또 이건 뭐더라 곤, 곤, 아니다, 드래곤이었나? 안드레? 뭐지?”
“아, 곤드레밥? 이건 알죠.”
“맞다, 맞다 곤드레.”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그가 박수를 쳤다.
“그래도 그것 말고는 내가 다 외웠잖아?”
잘난 체는 했지만 사실은 음식들의 이름을 말하는 게 그에게도 어려웠던 듯.
그의 이마엔 땀방울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지연은 그가 들려준 이름을 듣고 다시 한 번 음식들을 살폈다.
‘뭔가 좀 이상한데…….’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한끝이 부족한?
그러고 보니 예전 기술가정 시간에 배웠던 정확한 이름들이 생각났다.
“감자붕뎅이가 아니고 붕생이 아닌가? 국수도 콧등까기가 아니라 콧등치기, 그리고 트름국이 어디 있어요, 더럽게. 느름국, 느름국.”
“…….”
한껏 잘난 척하고 어려운 이름을 줄줄 외웠더니 그게 아니라니.
수현의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싸늘히 식어갔다.
상처받은 그의 맘도 모르고 지연은 계속해서 놀려댔다.
“콧등치기국수도 그래. 콧등까기는 뭐예요? 알까기도 아니고.”
이해하는 척하면서 결국엔 지적이고.
“아, 감자붕생이는 모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붕뎅이라고 그랬나? 풍뎅이랑 헛갈렸나?”
결국, 하나도 정확한 게 없단 말인가?
자신감에 솟았던 그의 어깨가 점점 바닥을 향했다.
줄리는 그런 수현의 기죽은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 마치 제가 혼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피이…… 아저씨 천잰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나 오늘 아저씨하고 한국말 공부 많이 했는데. 그럼 그것들도 다 틀렸나?”
열심히 외운 단어들이 틀렸을 수도 있단 사실에 엄청 속이 상한 듯.
수현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줄리 앞으로 손을 저었다.
“아니거든, 그것들은 다 맞는 거야. 아저씨가 정확히 가르쳐준 거야.”
“그럼 엄마 앞에서 한 번 말해봐도 돼요? 잘 배운 건지 아닌지?”
그런데 허공을 휘휘 젖던 그의 손동작이 더욱 커졌다.
“아니야, 확인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만 줄리는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아니었다.
적극적인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늘의 복습 시이~작!
“팀을 버리고 혼자 가는 건 ‘배신’, 팀을 버리고 혼자 돈 벌겠다는 건 ‘얍실’, 버스보다 스포츠카 좋아하면 ‘된장녀’, 그리고 또 힘들 땐 들어오더니 돈 벌어서 집을 나가겠다는 건…… 읍!”
마지막 단어를 말하려는데 수현이 달려가 줄리의 입을 막았다.
눈동자를 떨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됐어, 됐어. 잘 외웠어. 똑똑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눈치 빠른 줄리가 큰 눈망울을 두 번 깜박거렸다.
알았다고.
수현은 그녀의 막은 입을 놓아주었다.
어쨌든 애가 눈치는 빨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수현의 뒤에서 호랑이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줄리야, 마지막 단어 얘기해봐. 배신, 얍실, 된장녀, 그다음은 뭐야?”
줄리는 안 된다는 수현의 고갯짓을 무시하고 유치원생답게 눈을 감고 소리를 질렀다.
“돈 없을 땐 들어오더니 돈 벌어 집을 나간다는 건, 먹튀! 먹튀!”
먹…… 튀…….
복습이 끝났다. 단어 하나 빠트리지 않고.
조금 전까지 보글보글 청국장이 끓어오르던 훈훈한 부엌에 싸늘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다.
그녀의 말소리가 소름처럼 귀로 꽂힌다.
“애한테 참…….”
수현은 순식간에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게 누가 애런한테 가래?
이 상태에서 저 모녀와 밥을 먹을 자신이 없었다.
“난 올라가 볼게. 밥 차리면서 이것저것 먹었더니.”
그녀와 나노의 시간조차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계단 쪽으로 몸을 향했다.
그때, 그의 양쪽 팔꿈치로 동시에 두 개의 팔이 들어왔다.
지연이 그녀의 오른쪽 팔짱을 끼었다.
“줄리 봐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왼팔은 줄리의 몫이었다.
“아저씨, 우리 같이 밥 먹어요.”
여우 한 마리와 토끼 한 마리가 대롱대롱 그의 양팔을 차지했다.
뿌리칠 수도 있었으나……
“그럼 맛만 볼까?”
어쩔 수 없는 척, 두 여자의 팔에 이끌려 식탁으로 끌려갔다.
질질질질-
그가 식탁 의자에 앉자 줄리가 지연의 휴대폰을 들고 식탁 끝에 세웠다.
“셀카 찍어요. 낮엔 엄마가 없었으니까.”
수현은 강하게 도리질했다.
“난 사진 안 찍어. 난 싫어해.”
하지만 이미 액정 위로 떡하니 카운트다운이 되고 있었다.
5, 4…….
“어, 어, 이게 뭐야.”
그사이 지연과 줄리가 수현의 머리 양옆으로 저들의 작은 머리들을 기울였다.
3, 2…….
“뭐야, 뭐야!”
1!
찰칵!
*
다음 날 아침.
수현은 며칠 만에 따뜻한 숙면을 취했다.
오래된 이층집의 차가운 웃풍으로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도 늘 코끝이 시렸는데 어제는 전기담요를 깔아놓은 것처럼 전신이 훈훈했다.
‘보일러를 세게 틀어놨었나?’
그런데…… 보일러가 아니었다.
36.5도의 따뜻한 베개를 꼭 껴안고 잤던 것.
정신을 차리고 나니 느껴진다.
이불 속에 고양이가 있다!
어젯밤 일을 떠올렸을 땐 어미가 분명하다.
어제 지연은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줄리를 데리고 봉수네 집에 가서 자고 온다고 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줄리 핑계로 가서 자보려고요. 줄리 재우고 아빠랑 술도 한잔하면 점점 더 풀어지시지 않을까요?’
술 얘기에 수현의 등줄기에 기분 좋은 소름이 올라왔다.
그녀는 술을 마시면 귀소본능이 발휘한다.
그녀의 무의식이 기억하는 집은……
바로 이곳, 바로 이 방!
가지고 있던 양주까지 챙겨주며 배웅했다.
‘아빠랑 간만에 진하게 한잔해. 그래야 좋아하시지.’
그리고 혹시나 해서 제 방문을 아주 슬쩍 열어두었다.
어미 고양이가 술 취해 문도 잘 못 열 수 있으니.
자는 도중 잠깐씩 깨서 확인했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포기하고 그냥 푹 잠들었는데…… 언제 건너온 거야?
이불 속으로 손을 넣으니 그녀의 작은 머리가 만져졌다.
‘쪼그맣기도 하지. 그런데 이 작은 머리에 왜 그런 독설들이 많이 들었지?’
그래도 귀여워, 귀여워.
‘날 보면 얼마나 놀랄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면 더 놀라겠지?’
그는 그녀를 더 놀래키고 싶었다.
요즘 자신을 쌀쌀맞게 대한 벌이기도 하고 또 고양이 놀라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보고 싶기도 하고.
천천히…… 그리고 슬며시…… 이불을 내렸는데!
헉! 그만 그의 눈이 쏟아질 듯 놀라버렸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