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형 VS 동생
2018.05.19.
문 앞에 수현이 서 있었다.
애런의 형 수현.
그를 보니 애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전 엄마의 회사 줄리아나의 최고 경영자가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 그 누구한테도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형이 상처받을까 봐.’
또 이런 말도 했었다.
‘집안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니까 쫓겨난 거죠, 뭐. 그래서 할 수 없이 한국에 왔고. 그러다 지연 씨가 제 여자라고 오해를 했는데…… 저에 대한 콤플렉스로 뺏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연 씨를.’
에휴, 가여운 사람…….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을 마음으로 빌었다.
‘이 사람이 애런이었다면…….’
그가 엄청난 기업의 후계자이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다.
짠해서, 불쌍해서, 가여워서.
지연의 이런 안타까운 마음도 모르는 그는 자꾸 엉뚱한 말만 해댔다.
“왜? 옷도 입혀줘? 아직도 아파?”
속도 없이…….
가슴으로는 그를 안고 싶었다.
밉지만, 아주 밉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지만 가슴이 시키는 대로 대할 수 없는 남자도 있다.
나쁜 남자는, 태규 하나로, 족하다.
그녀는 촉촉한 눈빛으로 쌀쌀맞은 대답을 했다.
“나가 계세요. 금방 준비하고 내려갈 거니까.”
쾅-
그녀의 마음처럼 문도 함께 닫혀버렸다.
“…….”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
‘장난이 지나쳤나?’
사실 캐릭터에 맞지도 않는 장난스러운 모습은 그에게도 꽤 용기를 낸 연출이었다.
홀로 방에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그녀를 상상하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문태규를 마주한 이상 그녀의 출근길이 편할 리 없다.
강 회장에게 전화해 그녀를 챙겨달라고 얘기했지만 그건 어제 일이고,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곳으로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그래서 되도 않는 익살을 부려봤다.
그녀가 무안하지 않게,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도록.
어차피 내가 지켜줄 테니.
그런데 사람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쌀쌀맞게 받아치다니.
‘섭섭하네…….’
퇴짜라도 맞은 듯 기분이 푹 내려앉았다.
하지만 혼자만의 약속도 지켜야 할 약속.
어제 그는 잠든 지연을 보며 제 자신에게 결심했다.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제자리를 찾을 때까진 있어주기로.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는 지연이 시키는 대로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그러라면 그래야 하니까.
젠장!
*
민희는 다른 날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했다.
이른 아침부터 강 회장의 비밀 호출이 있었다.
“잔말 말고 회장실로 올라 와. 단, 문태규, 그놈 모르게.”
쳇, 어제는 송지연이라는 그 꼴 보기 싫은 직원 앞에서 날 개망신 주더니.
생각 같아선 아빠고 뭐고 노인네 면상에 육두문자를 퍼붓고 싶었지만 아직 회사를 물려받은 게 아니니 그럴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온갖 짜증을 부려가며 부름에 응하긴 했다.
“왜 그래! 어제 그년 앞에서 날 그렇게 병신 만들더니!”
쯧쯧…….
강 회장은 무식과 심술을 덕지덕지 붙인 딸의 얼굴을 한심하게 꼬나보았다.
남들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라는데 제 딸은 눈앞에만 보여도 눈알 빠지게 아프다.
‘빌딩 밖으로 던져버려?’
어디 남자라고는 동그라미 두 쪽밖에 없는 놈을 데리고 와서…….
“여기 와서 앉기나 해!”
민희는 팔짱을 낀 채 강 회장 앞에 앉았다.
“왜!”
“너, 진수현이란 사람, 우리 회사 들어온 거 알았니?”
“알았지, 내가 취직시킨 건데.”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백수라기에 취직시킨 건데.”
‘흠…… 역시 모르고 있군. 하긴, 경제지라곤 라면 받침대로도 안 쓰는 이 녀석이 그분을 알 리가 없지.’
생각 같아선 이 큰 비밀을 까발리고 싶었다.
‘진수현 그 남자, 줄리아나 회사의 후계자다.’
무슨 연유로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회사에 취직했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엎어지라고, 자빠지라고.
“그 사람은 말이야, 그 대단한…….”
그러다 흡, 입술을 다물어버렸다.
진수현 팀장이 경고처럼 말했었다.
‘제 신분에 대해선 절대로 비밀입니다. 절대!’
그의 부탁을 무시하고 소문냈다간 가까스로 얻은 인연, 끊길 수도 있다.
강회장은 민희에게 아무 말 안 하기로 했다.
‘이년이 입이 좀 가벼워야지.’
손가락 걸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를 약속해봤자, 나가는 순간부터 나발을 불 년이다.
다만, 이 정도는 아비로서 딸에게 얘기할 수 있다.
“진수현이랑 결혼해!”
민희로선 뜬금없는 말이었다.
“뭔 소리야? 그럼 태규 씨는?”
“미쳤어! 그 아무것도 없는 거지새끼를!”
“그럼 왜 부사장으로 불러들였어?”
“그 새끼가 협박했으니까 그렇지. 너가 애 못 갖는다는 걸 알고 그걸 선 시장에 알리겠다고 난리난리 쳤었잖아!”
“그래서 아빠가 꼬리 내렸잖아. 이놈한테라도 시집가라며.”
“상황이 바뀌었어. 너한테 그 약점을 받아줄 다른 남자가 생긴다면 그깟 협박, 아무 소용없지.”
“진수현이 그렇다고?”
“그래!”
입양하면 되니까.
미국에서 컸으면 입양에 대해서도 아주 쿨하잖아?
게다가 저도 입양아나 다름없는 재혼 집안 자식.
아빠의 큰소리가 민희는 의심스럽다.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아빠가 왜 이러지…….
그녀의 머리 위에 퀘스천 마크 열 개가 떠서 뱅뱅 돌았다.
하지만 딱히 싫지는 않은 명령이었다.
그녀도 그가 싫은 건 아니잖아?
아니지, 좋아 죽겠는데 진수현이 튕겨서 짜증날 뿐이지.
아묻따 하고 아빠 말을 듣기로 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있었다.
“그런데 태규 씨는?”
강 회장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어제 그 송지연이란 여자하고는 무슨 사인 줄 아니?”
“몰라. 무슨 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아니라던데? 걔 좀 미친 거 같아.”
“그래? 태규랑 그 여자랑 별 사이 아니라 이거지?”
실망스러웠다. 무슨 사이였다면 그걸로 밀어붙이면 되는 건데.
하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수현도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
도대체 몸소 전화까지 해서 챙겨줘야 할 정도로 지연과 무슨 사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는…… 제 팀입니다.’
너무 단편적인 대답에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관계 같진 않다.
알아보니 송지연이란 여자는 별 대단한 것도 없는 스펙.
설마 줄리아나 후계자가 그런 여자랑 특별하겠어?
그렇다면 수현과 민희 사이엔 아무 장애물이 없다는 말씀.
태규만 깨끗하게 정리하면 끝!
“그 여자랑 아무 사이가 아니라도 그렇게 만들면 되지.”
“송지연이란 여자랑 태규 씨를?”
“넌 그냥 이 아빠 시키는 대로나 해.”
강 회장의 머리엔 이미 짱짱한 계획이 꿈틀거렸다.
공장 노동자 출신에 무일푼이었던 그가 오드리 화장품이라는 대한민국 굴지의 회사의 수장이 됐을 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
그는 눈앞에만 보여도 눈알이 시큰거리게 만드는 민희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늘그막에 딸 덕을 보게 생겼구나!
그동안의 시름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
“식사하세요.”
지연은 결코 얌전하지 않은 손길로 수저를 놓았다.
“이야, 아침은 뭐야?”
수현은 아직도 천연덕스러운 콘셉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지금의 지연의 상황에선 제일 그녀를 편하게 해주는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아저씨, 미역국이에요.”
그사이 줄리가 왔다. 금화댁과 함께.
금화댁은 오늘 줄리의 물건들이 있는 지연의 집에서 그녀를 볼 예정이란다.
“줄리 엄마, 줄리 방이 어디야? 나 먼저 그 방부터 가볼라고.”
“아, 저 따라오세요.”
지연이 금화댁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수현과 줄리만 덩그러니 식탁에 남았다.
“몸은 이제 괜찮아? 아픈 덴 없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최대한 친절하게 물어봤지만 그녀의 대답은 아이가 아니었다.
“참 빨리 물어본다.”
“…….”
미안해, 아저씨가 미국에 있었단다.
그래도 전세기는 보내줬잖아!
그런데 이상하게 줄리의 눈초리가 뾰족하다.
“왜? 삐졌어?”
뾰족한 눈초리가 금세 새침하게 바뀌었다.
“나 다 아는데…….”
“뭘?”
줄리는 갑자기 두 손가락으로 제 눈매를 위로 찢더니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소리쳤다.
“한 번만 더 쓸데없이 나랑 지연이 사이에서 장난치면 동생이라고 봐주지 않아!”
“…….”
이건 애런과 술 한잔하며 나눴던 대화 중 그가 애런에게 했던 경고의 말.
그녀는 올렸던 눈꼬리를 내리고 다시 새초롬한 줄리로 돌아왔다.
“엄마한텐 얘기 안 했어요. 아저씨 창피할까 봐.”
“응…… 고맙다.”
진짜 고맙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 우리 엄마 좋아해요?”
“어……? 아니?”
수현은 부끄러움에 눈동자를 내렸다.
애가 참 별 걸 다 물어. 아침부터.
“맞네, 좋아하는 거.”
수현이 내렸던 눈동자를 재빠르게 올렸다.
“니가 뭘 안다고!”
“어디서 들었어요. 뭔가 질문했을 때 눈동자를 내리면 맞는 거고 올리면 잘 모르는 거고 똑바로 보면 당당한 거래요. 그런데 좀 전에 아저씨 눈동자가 바닥을 향하던데?”
저런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에서나 배우는 독심술을 어떻게 배웠을까…….
들킨 건 인정해야 한다. 어설픈 부인은 더 큰 참사를 초래한다.
“비밀이다……..”
대신 영화에서 본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너와, 아저씨만의 비이~ 밀! 이런 아름다운 연출을 위해서.
그런데 그녀는 새끼손가락 대신 다섯 손가락을 쫙 폈다.
“그럼 오천 원 주세요.”
어미나 딸이나 경제관념 하나는.
그는 할 수 없이 지갑을 꺼냈다.
아직 한국 돈이 많진 않아 저 깊숙이 넣어두었던 지폐 한 장을 꺼냈는데,
그만 함께 있었던 사진이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줍는데 줄리의 얄미운 손이 먼저 그것을 채갔다.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반가운 듯 소리친다.
“어, 이 아줌마, 나 아는 아줌만데?”
“!”
사진 속 인물을 너가 안다고?
알 수도 있지만, TV에서 봤을 수도 있지만, 니 나이에 보긴 힘든…….
“엄마 사진첩에서 본 적 있는데?”
“……뭐?”
“엄마가 옛날 사진 보여줄 때 있던 아줌마예요. 맞다, 이 미역국 끓이는 법, 이 아줌마가 알려줬다고 그랬어요.”
“이 미역국……?”
수현은 제 앞에 놓인 미역국을 바라보았다.
이 미역국은 그를 한국으로 이끈 결정적인 매개체였다.
지연이 뉴욕의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하룻밤 숙박료처럼 끓여놓고 간 바로 그것.
그녀가 남기고 간 그 미역국은 그가 친엄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기억의 맛.
그 맛과 똑 떨어진 그 맛에 홀리듯 한국행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지연이 이 미역국을 이 사진 속 주인공에게 배웠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줄리는 그가 받은 충격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엄마가 그러는데 이 집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여왕님이 살고 계셨대요. 이 넓은 집에 혼자 살았다고 그랬는데. 할미, 할비가 일하셔서 엄마는 학교 끝나고 매일 이 집에 오셨었대요.”
“그게…… 언제쯤이야? 몇 살 때?”
“에이, 그건 저도 모르고 그 아줌마가 이사 가면서 할아버지한테 팔고 갔대요.”
“…….”
순서가 그렇게 됐구나.
수현이 이 집에서 나고 자랐고 여섯 살 때 아빠 엄마가 이혼하며 아빠와 이 집에서 나왔고 엄마는 홀로 이 집에서 지내다 지연의 아빠에게 이 집을 팔았고…….
그렇다면 지연은 내가 모르는 엄마의 삶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
수현은 줄리에게 더 적극적으로 사진을 내밀었다.
“줄리야, 너 혹시 엄마한테 이 아줌마 이야기…….”
그때 지연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쌀쌀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식사하고 오세요. 저 먼저 회사에 가 볼게요.”
그러곤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바꾸었다.
“줄리야, 엄마 갈게. 저녁때 보자.”
그대로 뭔가에 쫓긴 듯 급한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나가버렸다.
수현은 급히 사진을 다시 지갑 속에 넣었다.
그녀를 잡아야 한다.
잡아서, 물어봐야 한다.
그녀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지연은 금화댁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었다.
줄리의 용품을 챙겨야 한다는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줄리의 물건을 챙기면서 금화댁의 수다도 시작되었다.
“어머머, 집이 너무 좋다, 호호호. 집주인 총각하고는 옆방 쓰는 거야? 그럼 어제 이 집에 단둘이 있었어? 혹시 한방에서 잔 건 아니지?”
“…….”
CCTV 있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장난으로 던진 농담을 역정을 내며 받아버렸다.
진실은 창피한 거다.
금화댁은 또 다른 수다로 화제를 돌렸다.
“집주인 총각은 동생이 있다며? 그런데 사이가 안 좋다며?”
둘이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줄리가 별 얘길 다 하는 것 같다.
“뭐, 형제라는 게 그렇죠. 싸우기도 하고 친하기도 하고.”
형이 아주 철딱서니가 없거든요.
“동생이 아주 못됐다며. 거짓말도 잘하고. 그래서 형한테 혼났다며.”
줄리가 아무리 영리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반대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동생,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거짓말도 형이 했고 못된 것도 형이에요.
“뭘~. 집주인이 동생한테 줄리 엄마한테 까불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던데? 집주인 아저씨 멋지다고 줄리가 엄지도 내밀었어.”
아무래도 줄리에게 주의를 줘야겠다.
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남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고.
그런데 그때 지연의 휴대폰이 울렸다. 애런의 문자였다.
-지연 씨, 저 오늘 또 지연 씨한테 화장품 구매할까 해요. 호텔로 지금 와줄 수 있죠?
이봐, 동생은 좋은 사람이지.
그런데 발길을 당기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그래도 고마운 사람은 사람이니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서둘러 옷을 챙겼다.
회사에 들러 물건을 가지고 가려면 빨리 서둘러야 하니까.
“아줌마, 그럼 오늘도 줄리 부탁드리겠습니다.”
급한 손짓으로 코트를 들고 방을 나왔다.
2층에서 내려와 부엌을 지나려는데, 왠지 다급한 머리와는 다르게 몸이 머뭇거렸다.
부엌에 있는 수현을 지나 애런에게 가야 한다는 게, 남자친구를 두고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불편했다.
‘안 되겠다, 못 붙잡게 빨리 나가버려야지.’
그래서 식사를 하는 줄리도 못 챙겨주고 두 사람한테 형식적인 인사만 던졌다.
“천천히 식사하고 오세요. 저 먼저 회사에 가 볼게요. 줄리야, 엄마 갈게. 저녁때 보자.”
혹시나 수현이 잡을까 빠른 발걸음으로 현관을 지나쳤다.
그런데 현관문을 여니 집 앞에 눈에 확 들어오는 2인승 스포츠카가 막고 있었다.
뭔가 싶어 슬쩍 운전석을 봤는데 검은 창이 부드럽게 열리며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놀랐죠? 사실 데리러 왔어요.”
방금 통화했던 애런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호텔로 오라고…….”
“지연 씨 혼자 무거운 짐 들고 올 생각하니까 신경이 쓰여서요. 저 방금 집 앞에서 문자 했던 거예요.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분명 서프라이즈한 일이기도 하고 또 한 번 고마워해야 할 일이기도 한데 해사한 미소가 나오지 않았다.
뭔가 좀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동하지 않으니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움직이질 않자 애런이 운전석에서 나왔다.
“우리 지연 씨는 태워줘야 되는 공주님이시구나? 그럼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는 그녀의 손목을 꼭 잡았다.
그리고 차를 돌아 조수석 쪽으로 데리고 갔다.
정확히 말하면 끌고 갔다.
그가 활짝 차 문을 열었다.
“자, 타시죠, 공주님.”
어떻게 해야 하나,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행동이 편하진 않은데 거부할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이왕 집 앞에 온 거, 같이 타고 가는 게 어때서.
할 수 없이 몸을 숙여 차에 타려는데 현관 앞에서 낮고 서늘한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타지 마.”
수현이었다.
그가 좀 전까지 능글능글, 천연덕스러웠던 표정을 벗어내고 한겨울 칼바람보다도 매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지연의 손은 여전히 애런한테 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수현의 눈빛으로 얼어버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타지 마.”
“타세요.”
그녀의 몸과 머리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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