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30화 (30/77)

제30화. 그녀만의 호위무사

2018.05.16.

거센 힘으로 당겨진 이불과 함께 지연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바닥이, 바닥이 아니었다.

수현의 단단하고도 부드럽고도 넓은 가슴 위로 떨어진 것.

자다 봉창이라고, 놀란 지연이 소리쳤다.

“왜 내 방에서 잠을 자요?”

그런데 가쁘고도 잣은 그녀의 호흡과는 달리 수현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내가 말 안 했었나? 이 방…… 내 방이었어.”

같지도 않은 변명에 지연은 불안정한 호흡마저 턱 막혀버렸다.

“여기가 왜 자기 방?”

그런데 이런저런 연유를 묻고 따지기 전에 일단 수현의 대리석 같은 가슴에서 빠져나오는 게 시급했다.

일어나려고 버둥버둥, 떨어지려고 부비부비,

“아구구구구…….”

앓는 소리까지 내면서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이불은 더 꼬여만 갔다.

하지만 고군분투는 그녀만의 몫.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지?”

수현은 어디 하고픈 거 다 해봐라, 라는 표정으로 두 팔로 머리를 벤 채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 보았다.

그러곤 알 수 없는 소리도 한다.

“이제 살 만한가 봐?”

“네?”

“이상한 소리도 안 내고.”

“무슨 소리요?”

“날 원하는 소리.”

“네~ 에?”

지연은 더 이상 이런 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떻게 좀 해봐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쏘아본 후 팔다리를 휘휘 저었다.

그런데 수현이 몸을 틀어 그녀를 쿵!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렇게 쉬운걸.”

지연은 그 상태로 몸을 돌돌 굴러 다행히 이불에서 해방되었다.

수현도 그제야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서 잤더니 허리가 아프네. 남잔 허리가 생명인데.”

지연은 최대한 이불로 몸을 가린 채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왜 이 방에서 잔 거예요? 무슨 짓이에요, 정말?”

그는 굳은 허리를 휘휘 돌리며 좀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말했잖아. 이 방, 내 방이었다고.”

“언제 수현 씨 방이었어요? 수현 씨 방은 옆방이잖아요.”

“나, 이 집에서 살았었어, 어렸을 때. 여섯 살까지 살았었는데 파일럿이었던 아빠가 출장이 많아서 거의 엄마랑 이 방에서 자곤 했지.”

그가 빨간 지붕 집에서 살았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으니 애런에게 들었던 스토리와 매치되며 정리가 되긴 했다.

이 집에서 태어나 자랐던 수현이 아빠, 엄마가 이혼하자 아빠와 미국에 건너갔고,

그의 아빠가 애런의 엄마와 결혼해서 수현과 애런이 형제가 됐구나.

이후 아빠가 돌아가시고 새엄마에게 버림받자 한국으로 돌아와 옛 추억으로 이 집을 구입한 것이고.

뭔가 애잔한 기억과 추억인 것 같아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말리면 안 되지!

“그래도 이건 아니죠! 여자 혼자 자는 방에!”

지연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자 그는 오른손 검지를 그녀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일 대 일! 됐지?”

그리고 별다른 사과 없이 방을 나갔다.

지연은 커다란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일 대 일은 뭐래?’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다시 쫓아가 되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대신 다른 걱정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기에.

조금 전 그가 말했다.

‘이제 살 만한가 봐? 이상한 소리도 안 내고.’

이게 무슨 뜻이야?

‘나 코 골았어? 이 갈았어?’

혹시 방…… 방…… 방…… 그건 아니겠지!

에휴, 피곤해서 별소리를 다 냈나 보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내려 제 몸을 살폈다.

‘옷은 또 왜 이래!’

전혀 섹시하지도 귀엽지도 않은 평범한 면슬립.

줄리를 안고 자니 야시시한 실크 따위는 엘사 인형이나 입혀야 했으니.

‘내 참, 만일에 사태를 대비해서 예쁜 옷을 입고 자야 하나?’

그러다 휘휘 다시 고개를 도리질했다.

본질이 흐려졌잖아! 본질은 무단침입!

지연은 신경질적으로 애꿎은 이불만 훅훅 털어냈다.

*

수현은 유유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의 방을 나왔다.

하지만 그의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참았던 긴 숨을 뿜어냈다.

“휴…….”

안도의 한숨이었다.

지연은 수현이 그녀의 방에서 잠든 것만 가지고 화를 냈었다.

‘그러니까 다른 건 모른다, 이거지?’

안 들켰어. 안 들켰어.

그건 몰라, 그건 몰라.

다행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다행.

수현은 간밤에 있었던 그녀와의 애잔하고도 에로틱한 밤을 떠올렸다.

어제 그는 지연과의 진솔한 대화, 그리고 그녀의 피곤한 몸을 풀어주기 위해 보드카와 주스를 준비했었다.

그런데 반갑지도 않은 애런이 왔고 그 술자리는 공교롭게도 지연이 아닌 애런과 함께하게 되었다.

곱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동생이니, 그래도 형제 사이니, 술 한 잔 나누며 서로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애런은 끝까지, 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왜 거짓말했어? 지연이가 니 여자고 줄리가 니 딸이라고?

따져 묻는 그에게 애런은 조금의 미안한 기색 없이 오히려 그를 비웃었다.

‘그냥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어. 재밌더라? 형이 오해하니까?’

사람은 바뀌지 않는 걸까?

물론 오해였지만, 여자와 아이라는 큰 존재에 대해서, 그것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대신 해결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뭐? 오해하니 재밌어?

게다가 그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지연이랑 진하게 한 번 만나보고 싶어.’

철없는 자식.

진심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또 일시적인 감정으로 설쳐댄다.

물론 지연을 사이에 둔 질투의 감정도 분명 있다. 이건 인정.

대화를 나누다 그녀에게 화장품을 많이 사주었던 고객이, 그녀에게 빨간 미니드레스를 사줬던 남자가 그였다는 걸 알았다.

‘변태 같은 자식!’

순간적으로 지연이 빨간 미니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녀석이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상상되면서,

‘벽난로에 넣어 빨간 고구마로 만들어?’

‘보드카와 토마토 주스를 섞어 빨간 피를 토하게 해?’

‘아님 그냥 빨간 드레스 입혀서 트랜스 젠더를 만들던가!’

미저리, 링, 사탄의 인형, 큐브…….

가장 끔찍하게 보았던 호러물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질투심은 차치하고,

녀석이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렇게까지 말을 하진 않았을 거다.

‘한 번만 더 쓸데없이 나랑 지연이 사이에서 장난치면 동생이라고 봐주지 않아.’

그가 생각해도 참, 모진 말이었다.

하지만 지연을 위해선 꼭 했어야 하는 말.

씁쓸하게 술자리를 끝내고 애런이 돌아간 뒤 그는 홀로 남은 술을 마셨다.

참 슬펐다. 형제가 이렇다는 게.

부모의 재혼으로 이루어진 법적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예뻐했는데, 사랑했는데.

처량한 혼술이 시작되었고 마지막 잔이 바닥을 보일 때쯤 지연이 들어왔다.

술 한잔하자고 말 시켰는데도 쌩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제 방으로 올라가버리는 그녀.

‘나쁜 계집애.’

이럴 땐 팀 몬테규였을 때가 그립다.

나하고 술 한잔하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술 한잔이 뭐야, 물 한잔하자는 여자들도 서울에서 뉴욕까지 줄을 세운다, 내가.

거짓말은 했지만, 뒷조사는 했지만, 오해는 했지만, 그래도 잘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애런의 말만 듣고 이러는 거야? 혹시 그놈한테 관심 있어?’

‘빨간 드레스가 그렇게 좋았니?’

취기는 사람을 어리게 만든다. 그래서 유치해진다.

거부당한 술 한잔이 억울해졌고 싸늘한 그녀의 눈빛에 화가 났다.

‘따지고 보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수현은 쿵쿵거리며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취기를 이용해 한 판 할 생각이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몬테규가 문태규가 되고 문태규가 몬테규로 들릴 수도 있지 뭐!

그래서 오해한 거뿐인데, 그래서 착각한 거뿐인데.

그래도…… 그래서 너와 내가 만날 수 있었잖아.

난 그래서 이 오해가 아주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넌, 아니니?’

그녀가 이렇게 나온다면 그도 할 말이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먼저 애 아빠 얘기를 해줬다면 이렇게까지 얽히고설키며 꼬일 일은 아니었잖아?

“이봐, 송지연!”

똑똑똑똑똑-

거칠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벌써 잠들었을 리 없잖아! 문 열어봐!”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멋대로 문을 열까 하다 차마 매너남의 이미지를 포기 못 하고 그냥 가려는데 아주 희미한 신음 소리가 그를 잡았다.

“응응…… 응응…….”

밖에서 들으면 꼭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혹시 울고 있나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

“끙끙, 끙끙.”

잠든 지연이 내는 앓는 소리였다.

“휴…….”

아프겠지. 힘들겠지.

지난 주말부터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가 겪은 일들은 웬만한 사람들이 평생 겪지 않았을 수도 있는 모질고 고통스러운 것들.

자신이 받고 있는 허무맹랑한 오해에 대해 알게 됐고,

사랑하는 딸이 죽을 수도 있었던 사고를 당했고,

자기를 버린 남자와 부딪혔고…….

‘안 아프면 그게 이상한 거지.’

수현은 이불이라도 덮어주려 슬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새된 호흡을 뱉고 있다.

이마를 짚어보니 미열도 좀 있는 것 같고.

‘해열제라도 하나 먹고 자면 좋을 텐데.’

그런데 침대 바로 옆에 줄리가 복용하는 어린이용 해열제 시럽이 보였다.

딱 두 수저만 먹고 자면 될 텐데.

저걸 어떻게 먹이나, 생각하다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용 설명서를 보니 두 스푼이라고 돼 있었다.

그는 줄리의 시럽을 제가 먼저 입에 물었다.

‘어디까지나 그녀를 위한 일이야, 이건.’

전지적 남자 시점으로 절대 음흉한 생각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리고 슬며시 그녀의 입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른 열로 인해 그녀의 입술은 메말라 있었다.

수현의 촉촉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숨결을 내뿜듯 천천히 그녀의 입안으로 시럽을 흘려보냈다.

“꿀꺽.”

잠결이지만 그녀는 입안으로 들어온 달콤한 어린이용 시럽을 삼켜냈다.

“쩝쩝.”

그래, 잘 받아먹네.

수현은 한 번 더 해열제를 입에 물었다.

두 번째는 제법 더 잘 받아먹었다.

어린이용의 특성상 꿀처럼 달콤함이 섞인 해열제가 맛이 있는지 그녀는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핥는다.

‘아기 같네.’

해열제를 먹었으니 이대로 푹 숙면을 취하면 내일 아침엔 새털처럼 몸이 가벼워질 것이다.

이불을 턱밑까지 올려주고 나가려는데…….

‘그런데 어른은 한 수저 더 먹어야 하는 거 아냐?’

복용량 기준이 어린이였잖아.

그의 머릿속 음란천사가 외쳤다.

‘몸무게가 있지. 사실 지연이가 얼마나 무거운데. 아마 한 번은 더 먹여야 할걸? 어쩌면 한 통?’

그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설픈 복용은 복용하지 아니한 것보다 못하니까.

한 번 더 시럽을 입에 물었다.

이번엔 좀 전보다 더 잔뜩.

아직까지도 입술에 묻은 달콤한 해열제를 작은 혓바닥으로 휘휘 젖고 있는 그녀를 향해 몸을 낮추었다.

달짝지근한 그녀의 입술과 더욱 달짝지근한 그의 입술이 하나처럼 맞붙었다.

그는 입안에 담은 시럽을 아주 조금씩, 음미하며, 천천히, 그녀의 입안으로 침투시켰다.

제 입에 남은 시럽까지 혓바닥으로 흡수해 그녀의 안으로 정성스럽게, 서두르지 않고 깊숙이 들이밀었다.

“꿀꺽.”

기어이 그녀가 마지막 한 입까지도 넘겨버렸다.

아쉽지만.

그만의, 그녀를 위한 해열제 투여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달콤한 향기만 입안에 남기고.

이제 더 이상의 핑계는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몇 스푼 더, 아니 이 밤이 새도록 약을 한 통 다 주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된다.

약물 과다는 건강에 좋을 리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함께 복용하게 된 약기운 때문인가?

아니면 아찔한 의료행위 때문인가?

무릎에 힘이 빠지며 잠시, 아주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잠깐의 휴식을 취할 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침을 삼켜도 사라지지 않는다.

달콤한 시럽의 향기가,

촉촉한 입술의 향기가,

그리고 짜릿한 숨결의 여운이…….

“휴…….”

누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한번 해보자고, 다퉈보자고, 구구절절 따져보자고 찾아왔는데,

그는 또 그렇게 그녀를 보고 있다.

하염없이, 짠하게, 그리고 아련하게…….

“내가 졌다.”

그녀에겐.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며.

그렇다면 그녀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지, 날 얼마나 원망하든지,

난 그냥 슈퍼 을이 되어 그녀 옆에 남아야 한다.

그게 약자의 운명이지.

수현은 조금 전보다 조금은 더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며 결심했다.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누굴 좋아하든, 어떤 삶은 선택하든,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켜줄게.’

그리고 떠나줄게.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은 단 1년뿐.

이후엔 다시 팀 몬테규라는 무거운 이름을 가지고 다시 내 자리로, 끔찍한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갇혀야 한다.

혼자만의 넋두리를 끝낸 수현은 그렇게 그녀의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아주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또!

“응…… 응…….”

사실 아무 의미 없는 신음이다.

하지만 왠지 그 소리에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수현에겐 멋대로 들린다.

외롭다고, 힘들다고, 그리고…… 너를 원한다고.

이 밤, 취기 오른 야심한 밤, 그는 그냥 제멋대로 해석해버렸다.

있어달라고.

“그래, 있어줄게.”

수현은 침대 밑바닥에 그녀와 나란히 누웠다.

차갑고 딱딱한 그곳에서 쭈그리고, 이불도 없이, 불쌍하게.

하지만 수현이 왜 그 방에서 잠들었는지 모르는 그녀는 그에게 화를 냈다.

‘왜 내 방에서 잠을 자요?’

목소리가 우렁찬 걸 보니 해열제가 제대로 효능을 발휘한 모양이다.

그럼 됐지.

그는 툭툭 털고 출근을 준비했다.

오늘부터는 하루도 안 빠지고 회사에 출근할 생각이다.

그녀를 지켜주고 떠나겠다는 어젯밤의 결심을 실천해야 한다.

오늘부터 그의 의무는 호위무사다.

문태규로부터 그녀를 지키는 든든한 호위무사.

빳빳했던 허리에 다시금 불끈 힘이 솟았다.

*

지연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습관처럼 출근 준비를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회사를 나가야 하나?’

문태규가 있는 그 회사로 말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일은 해야 하고 돈은 벌어야 하는데 하필 그 회사가 세상 최고의 원수 문태규가 있는 곳이다.

게다가 어제 그녀는 회사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를 ‘개새끼’ 운운하며 받아버렸다.

어쩔 수 없는 협박으로 사과는 했지만 직원들이 속사정을 알 리가 없다.

미친 여자로 보겠지.

게다가 그 여자, 강민희의 괴롭힘은 어떻게 참아내야 하지?

‘결국 내가 나가야 하나?’

생각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아직 마련한 대책이 없다.

미치겠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미선이었다.

“지연아, 괜찮아?”

괜찮을 린 없지만 이런 말 못 할 속사정을 전화로 얘기할 순 없다.

“괜찮아.”

“혹시 너 결혼 깨졌다는 남자가, 그 남자야? 문태규?”

오랜 친구인 미선은 대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응…… 맞아, 그놈.”

“그런데 왜 잘못 봤다 그랬어? 그놈이 그러랬어? 회사 잘리기 싫으면 그렇게 하라고?”

그사이에 줄리가 연결됐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녀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렇지 뭐…….”

“그런데 어제 회장님이 오히려 자기 딸 혼내면서까지 너 도와줬잖아. 왜 그렇게 된 건지 알아?”

모른다. 알 리도 없고. 그리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누가 도와줬든, 그 자리를 벗어난 후에는 다시는 그 일을 떠올리기 싫었다.

“직원들 앞에서 구설수에 오를 딸 때문에 그런 거지 뭐.”

남의 얘기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는데 미선은 언성을 높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그거 아냐. 그거 아니었어. 엄청난 사람이 전화했었대. 너 쉴드쳐주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회장 비서랑 좀 친하거든. 얘기 들어보니까 엄청 큰 회사의 후계자가 회장한테 직접 전화했었대. 송지연이란 직원, 딱 꼬집어 너를 지칭하면서 무슨 일 생기면 좀 챙겨주라고.”

“…… 엄청난 회사의 후계자?”

“너 누군지 몰라? 우리 회장이 전화하면서도 막 허리를 굽실댔다던데? 누구야? 어떤 회사야? 그리고 너랑 무슨 관곈데 그런 전화까지 해?”

미선의 말을 들으니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는 엄청난 회사의 후계자는 단 한 사람.

수현의 동생 애런 몬테규.

‘그가…… 날 도와줬어?’

그런데 애런을 떠올리는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자신을 도와줘 고맙다는 느낌보단 알 수 없는 불편함?

빨간 드레스를 입었을 때의 어색함?

그때 노크 소리가 조용한 방을 울렸다.

똑똑똑똑똑-

참도 요란하고 시끄럽고 배려 없는 노크 소리.

“송지연! 출근 안 해? 늦으면 또 어쩌려고 그래.”

똑똑똑똑똑-

계속해서 울려대는 노크 소리.

지연은 무뚝뚝한 발걸음으로 벌컥 문을 열었다.

“출근 준비 안 하고 뭐하고 있었어! 얼른 나와.”

문 앞엔 어젯밤의 불청객 수현이 서 있었다.

자신을 도와준 애런 몬테규의 형.

그가 장난스럽고 익살스럽고 진중하지 못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왜? 옷도 입혀줘? 아직도 아파?”

대꾸하기도 민망한 엉뚱한 말들.

정상적인 여자라면, 평소의 그녀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의 그녀라면, 이렇게 답했어야 했다.

‘미친놈!’

그런데 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을 마음으로 바랐다.

‘당신이 그였다면…….’

집안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텐데.

동생에게 밀리지도 않았을 텐데.

그리고…… 나를 도와줘 고맙다고, 확 안겼을 텐데…….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아련해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에.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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