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29화 (29/77)

제29화. 수컷 고양이의 변명

2018.05.12.

지연과 줄리의 뒤로 애런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보는 순간 수현의 머릿속에 의문점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너였구나.’

한 발 앞서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얘기한,

그로 인해 그녀를 화나게 한,

그로 인해 자신을 피하게 한,

바로 그 의문의 남자가.

수현은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맞았다.

“줄리 왔니? 지연이도 왔어? 애런도 오고…….”

지연은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도 절대 수현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표정은 차가웠고 눈빛은 메말랐다.

그저 줄리만 보고 상투적인 엄마의 잔소리를 할 뿐이다.

“줄리야, 먼저 올라가 있어. 엄마도 따라 올라갈게.”

줄리는 달려가 수현에게 안기려다 엄마의 말을 듣고 실망한 듯 입술을 내밀었다.

“네.”

그래도 오랜만에 온 집이 반가운지 작은 걸음으로 2층을 향해 바쁘게 올라갔다.

애런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수현 앞에 섰다.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있는 그의 마음을 꿰뚫듯 보면서, 한편으론 슬쩍 집 안을 둘러보았다.

“혼자 뭐 하고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형식적인 일상의 질문을 했다.

그리고 벽난로 앞에 준비된 보드카와 주스를 발견하곤 떠보듯 물었다.

“술 마시려고 그랬어? 혹시 지연 씨랑? 그랬다면 나랑 줄리 보고 실망했겠네?”

비아냥거림이나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건 수현의 착각일까?

애런이 뭔가 꼼수를 가지고 왔다는 게 느껴졌다.

지연의 눈에도 벽난로 앞에 준비된 술과 음식들이 보였다.

애런의 말마따나 보드카와 주스, 그리고 요기를 할 수 있는 작은 과일들이 예쁘게 트레이에 담겨 있었다.

‘불과 하루 전에 저 트레이를 보았다면 어땠을까?’

안타까움에 드는 생각이었다.

뉴욕에서의 키스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겠지.

그러다가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닌 척, 아니면서 그런 척, 서로의 감정을 떠보기도 하고,

어쩌면 한 번 더 그날의 그 황홀함을 느꼈을 수도.

하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역겨워.’

수현은 자신을 동생이 버린 가문에 수치스러운 여자로 오인해 돈과 협박으로 매수하려 했다.

그것도 모자라 동생에 대한 질투심으로 희롱하려 했고.

‘내가 저런 사람한테 끌렸었다니!’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그에게 서늘한 눈빛을 선사한 채 2층을 향했다.

‘뭔가 대단한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수현은 그런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애런의 시선이 의식되었기에.

대신 뒤돌아 애런에게 말했다.

“술은 너랑 한잔하려고.”

원하던 대작 상대는 아니었지만.

.

.

.

형제는 참 오랜 만에 술잔을 기울였다.

꺼내야 할 말이 있지만 누구도 먼저 꺼내진 않았다.

보드카를 연거푸 세 잔을 마신 후에야 수현은 첫 대화를 시도했다.

“어떻게 된 거니?”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왜 나한테 거짓말을 했니? 지연이가 니 여자였다고.

혹시 지연에게 무슨 말을 했니? 나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지연이랑 같이 들어온 거야? 니가 감히!

의구심과 의심스러움, 결코 다정하지 않은 수현의 시선에도 애런은 여유롭게 딴청을 부렸다.

“그냥 왔지. 지연이랑 줄리랑.”

그는 지금 수현이 뭘 물어보든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생겼으니까. 지연이가 나에게 올 거라는.

애런의 건성 같은 대답에 수현은 진중한 자세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거짓말했어? 지연이가 니 여자고 줄리가 니 딸이라고?”

애런의 눈에는 조금의 미안함도 진중함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어. 재밌더라? 형이 오해하니까?”

“여자와 아이가 장난이야?”

“사실 장난이었었는데 장난 아닌 게 되어버렸어.”

“무슨 말이야?”

그는 선전포고처럼 당당하게 속마음을 얘기했다.

“나, 지연이랑 진하게 한 번 만나고 싶어.”

그녀를 자기편으로 돌려놨다는 확신을 가지니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뻔뻔한 대답에 수현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진하게 만나? 무슨 뜻이야? 너 아직도 지연이 가지고 까불어?”

“에헤이~~~ 흥분하지 말기. 감정을 드러내면 지는 거라고 늘 형이 나한테 말해주던 처세술 아니었어?”

그랬다. 감정을 배제하고 사람을 대하는 게 질투와 배신이 난무하는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형은 동생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나쁜 친구들의 유혹에 약한 동생에게 준 가르침이었을 뿐,

지연처럼 진실한 사람에게 대하라는 태도는 아니었다.

“내가 분명히 말해둘게. 이제 장난 그만 쳐. 그 말은 즉.”

“그 말은 즉?”

“지연이에 대해 다시 한 번 함부로 말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야.”

“하!”

수현의 경고에 애런이 코웃음을 쳤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현 앞에서 대놓고 그를 비웃기는.

뒤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애런은 수현 앞에선 늘 꼼짝도 하지 못했었다.

형이기도 했지만 엄마가 부여한 그의 위치가 그랬다.

그가 조금이라도 수현에게 대들거나 동등하게 굴면 가차 없이 그녀는 그를 비난했다.

‘감히 니가 누구한테!’

그래서 늘 애런은 수현 앞에선 주눅이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대놓고 ‘하!’라고 비웃어?

“그 비웃음의 의미는 뭐야?”

수현의 물음에 애런의 표정이 오기로 가득 찼다.

“지금까진 내가 원하는 것 모두를 형한테 뺏겨왔어. 엄마도 주변의 관심도 그리고 엄마의 회사 줄리아나도. 그런데 이번엔 안 뺏겨. 그 말은 나도 지연이한테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란 말이야.”

이번엔 수현의 입에서 비웃음이 나왔다.

“니가 진심이라고 말하는 거, 처음 아니야. 넌 늘 진심이었어. 언제나.”

“뭐?”

“넌 뭔가를 하고 싶거나 사고 싶을 때, 그때마다 똑같은 말을 했었어. 이것만큼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거라고. 그런데 끝까지 지킨 건 없지. 진심으로 원해서 사줬던 것들은 다 잃어버렸고 진심으로 원해서 했던 일들은 다 중간에 그만뒀고.”

“뭐, 뭐야…… 다 어릴 때 얘기잖아.”

“지금도 내가 보기에 넌 어려. 누군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 사람의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야. 넌 지연이한테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어.”

“형이 뭔데? 뭔데 그렇게 얘기해? 나 정말 지연이랑 잘해보고 싶다고!”

“그럼 줄리는?”

“!”

줄리라는 소리에 애런의 하얀 얼굴이 파리해졌다.

거침없는 말대꾸를 하던 그의 입이 꾹 막혀버렸다.

반면, 감정을 드러내며 화를 냈던 수현은 점점 차분해졌다. 냉철한 이성을 찾은 것.

“지연이한텐 줄리라는 뗄 수 없는 존재가 있어. 그것까지 다 받아들일 수 있어?”

“그건…….”

“지연이, 지금까지도 상처가 많은 여자야. 그 여자의 모든 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진심 같은 얘기, 하지도 마. 한 번만 더 쓸데없이 나랑 지연이 사이에서 장난치면…….”

그의 입술에 냉정한 바람이 불었다.

“동생이라고 봐주지 않아.”

그 무서운 바람에 애런은 꼼짝할 수 없었다.

그가 애런에게 주는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는 엄마가 심어준 게 아니었다.

수현 그 자체, 그가 가진 자신감과 자존감, 진심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오랜만에 가진 형제의 술자리는 그렇게 훈훈하지 못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저 멀리 계단 뒤에서 새끼 고양이가 보고 있었다.

*

지연은 줄리의 손을 잡고 봉수의 집으로 향했다.

줄리가 퇴원했다고 인사도 드리고 그의 건강 상태도 확인해볼 참이었다.

그리고 드릴 부탁도 하나 있었다.

“우리 거기 들어가 살 수 있을까?”

지연이 줄리를 쳐다보며 푸념하듯 뱉어낸 말이었다.

“왜 엄마? 우리 할아버지한테 가서 살아야 해?”

“몰라, 그 집에서 나와야 할 거 같아서.”

“왜?”

“그냥, 그 아저씨가 좀 솔직한 거 같지 않아서.”

“아저씨가 엄마한테 거짓말했어?”

“응, 알고 보니 거짓말 많이 했더라고.”

“그런데…… 흠……. 거짓말해야 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랬을 수도 있지. 그래도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

“나도 거짓말한 적 있어. 사람들이 엄마랑 나랑 안 닮았다고 그래서 나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기억한다고 그랬었어. 그러니까 나 진짜 엄마 딸이라고.”

줄리는 계속해서 수현의 편을 들었다. 자기의 경험담까지 얘기하면서.

그사이 정이 많이 들었나?

아니면 그 사람한테 느껴지는 동병상련의 감정 같은 그런 게 있나?

물론 애와 어른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수현과 줄리 사이에 교집합적인 정서가 있긴 했다.

애런이 말했었다.

‘형의 아빠가 우리 엄마와 결혼은 했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어떻게 보면 형은 집안에서 전혀 상관없는 아들이 되어버렸죠. 몬테규가의 피라곤 하나도 섞이지 않은 아이였으니까. 어릴 때부터 형은 늘 불안해했어요.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줄리도 그랬다.

아빠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도 없었고 비록 지연이 키우며 듬뿍 사랑을 주긴 했지만 그녀가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모르니 늘 불안에 떨었었다.

‘두 사람에게 그런 공통점이 있었네.’

줄리에게 대입해 수현을 생각하니 그가 자신에게 했던 거짓말들이 이해되기도 했다.

애런은 또 이런 말을 했었다.

‘형이 자신의 신분도 숨기고 지연 씨의 뒤를 캐내 협상하려고 했던 거, 이해해주시면 안 될까요? 어릴 때부터 형은 제 뒤치다꺼리나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거라도 해서 집안에 붙어 있으려고 했죠. 어떻게 해서라도 몬테규가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는, 어쩌면 절박한 몸부림이었던 겁니다.’

절박했구나. 절실했구나.

동생이 친 사고라도 수습하면서 집안에서 버림받지 않으려고 했던 그 마음이.

애런이 해줬던 말 중 제일 안타까웠던 말은 이거였다.

‘형, 한국에 온 거. 어찌 보면 도피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얼마 전, 제가 줄리아나의 후계자가 됐거든요. 공식적으로 설 자리가 없어진 거죠.’

그래서 한국에 오게 됐구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그러다 나를 만나게 됐고.

나를 애런이 버린 여자로 생각했으니 나를 수습하는 것이 그에겐 마지막 기회가 된 거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날 붙잡고 있으려고…….

지연은 세계적 기업 줄리아나의 후계자가 누군지 경제지에나 나오는 그들만의 세상을 알 리 없다.

그러니 애런의 말을 모두 믿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하니 수현에 대한 미웠던 감정이 점점 그럴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으로 변해갔다.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에혀…… 안쓰러운 사람.’

지연이 애런이 준 잘못된 정보로 수현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데 줄리가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 사람의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래.”

“…….”

얜 또 어디서 삼십 년 넘게 산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이런 말을 들었을까?

낚시회 가서 배웠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낚시회에서 이런 연애 철학을 얘기했어?

그녀가 누구에게 들었던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지연의 심장을 꼭꼭 찌르는 말이었다.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래도 안 돼!”

지연은 팩 혼자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그래도 동생에 대한 앙갚음으로 나한테 키스해선 안 됐었어!

엄마가 왜 저러나, 하는 눈으로 올려보는 줄리의 손을 지연은 괜히 거칠게 끌어당겼다.

“빨리 걸어. 할아버지 기다리시잖아.”

괜히 역정 내는 엄마를 따라 줄리도 할 수 없이 작은 걸음을 재촉했다.

*

“애가 참 귀엽구나.”

봉수가 줄리를 보고 말했다.

“은근히 널 닮은 구석도 있고.”

눈가가 붉어지며 피곤한 눈동자에 이슬이 보였다.

“무슨 애 머리에 능구렁이 열 마리는 들었어.”

역정 같지만 애정이 담겼다.

“잘 키워야 할 텐데…….”

드디어 봉수가 줄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지연은 일부러 다부지게 입술을 여몄다.

아빠 앞에선, 줄리 앞에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다는 엄마의 강한 의지만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법적인 건 해결됐니?”

줄리를 지연의 딸로 인정한 다음 제일 처음 봉수가 던진 질문이었다.

봉수의 이런 점을 지연이 닮은 것이다.

이왕 마음을 먹었다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현실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는 것.

“해결해야 해요.”

“해결하려면 애 아빠를 만나야 할 텐데. 못 찾는다고 안 했니?”

“…… 찾았어요.”

순간 봉수의 주먹에 꾹 힘이 느껴졌다.

“어디 있어! 그 자식!”

그러다 꿈쩍도 않는 지연의 얼굴을 보고는 올라간 어깨를 내렸다.

“그 자식 찾았대도 변하는 건 없는 거지?”

“네.”

“그럼…… 좋게 해결해라. 될 수 있음 빨리.”

“네.”

봉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받아들였음, 그게 끝이지.

하지만 지연에겐 한 가지 더 할 말이 남았다.

“저, 이 집 들어와 살아도 돼요?”

모든 걸 받아들인 봉수였지만 뒤끝은 있었다.

“안 돼. 아직 그렇게까지 널 용서한 건 아니야.”

“…… 네.”

“대신 오늘만 놓고 가라.”

“왜요?”

“있으니까…… 좋더라.”

지연은 봉수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일부러라도 정을 들이고 싶은 거다.

그래야, 진짜 손주가 되는 거니까.

친아빠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한.

눈동자를 돌려 줄리를 보니 그녀가 짧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할아버지랑 있을게.’

지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 파이팅!

.

.

.

줄리를 두고 빨간 지붕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밤, 깜깜한 하늘은 낮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바람은 또 왜 이렇게 매서운 건지.

그런데 그 바람이 자꾸 지연의 귀에 쓸데없는 말을 전해준다. 애런의 말을 빌려서.

‘형, 한국에 온 거. 어찌 보면 도피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얼마 전, 제가 줄리아나의 후계자가 됐거든요. 공식적으로 설 자리가 없어진 거죠.’

바보. 그깟 후계자가 뭐라고 그거 가지고 도피를 해?

그래도 그렇지 있는 사람들이 더 하다더니.

그 큰 기업에서 집 한 채 값만 주고 쫓아내?

갑자기 미움의 주체가 수현의 집안을 향했다. 몬테균지 문태균지.

그런데 왜 하필 수현은 빨간 지붕 집을 샀을까?

그 돈으로 작은 집을 사고 나머지는 저축을 하든지 작은 사업체라도 세우든지…….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해? 난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주제.’

바람이 또 지연의 귀에 말을 전한다. 이번엔 줄리의 말을 빌려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 사람의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래.’

그 말이 꽁꽁 얼어붙은 심장을 간질인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그 비틀어진 동생에 대한 콤플렉스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키스는 왜 해 가지고.

사람은 왜 흔들어 가지고.

그런데도 막 그가 이해되는.

‘이 몹쓸 놈의 모성애!’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걷다 보니 벌써 빨간 지붕 집에 도착했다.

아직도 애런과 술을 마시고 있나 싶은데 벽난로 앞에는 수현 혼자뿐이었다.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그의 넓은 어깨가 이상하게 움츠러들어 보였다.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넬까 하다가, 쌀쌀맞은 걸음으로 2층을 향했다.

그가 먼저 알은척을 했다.

“왔어?”

“…….”

왔지 그럼.

“와서…… 한잔할래?”

지연은 저도 모르게 계단을 오르던 발길을 멈췄다.

갈등이었다.

가서 그와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눠볼까, 아니면 모른 척 올라갈까.

술 한잔하며 그의 입으로 직접 그의 얘기를 듣고도 싶었지만 또 더 이상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그의 사정이 어쨌든, 입장이 어쨌든, 그녀에게 그 키스는 아픔으로 남았으니까.

얘기를 나누다 보면 원망으로 끝이 날 것 같았으니까.

‘왜 나 가지고 장난했니?’

그런데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기에.

그녀는 음성 없이 고개를 가로로 젓고는 다시 2층으로 향했다.

오늘의 상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난, 쉬어야 한다.

.

.

.

까무룩.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이틀 동안 십 분도 자지 못했다.

생각 같아선 조금 더 자고 싶은데 이불 밖 찬 공기가 코끝을 괴롭혔다.

주말에 집을 떠나면서 꺼놓았던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

아, 추워.

“아, 추워.”

…….

이상하다. 난 속으로 한 말인데?

분명히 음성으로 내뱉지 않았는데 누군가 대신 그녀의 속마음을 얘기했다.

그것도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로.

아직 피곤이 안 풀렸군. 헛소리가 들려.

이불을 머리 위까지 올리려는데 그녀의 속마음이 또 소리를 냈다.

“아, 추워.”

뭐야…… 왜 자꾸 소리를 내?

그 음성에 코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그때 그녀의 속마음이 조금 더 긴 문장으로 말했다.

“이불, 이불, 아, 이불.”

엥? 이게 뭔 소리!

그녀가 자신의 속마음이 뱉고 있는 중저음의 소리를 의심하는 순간,

그녀가 잡고 있던 이불이 어떤 힘으로 인해 휙 당겨졌다.

“어머머!”

비명과 동시에 지연은 잡고 있던 이불과 한 몸 되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그런데 이건 또 웬 기시감?

그녀가 떨어진 바닥이, 바닥이 아니었다.

수현이 그녀의 이불을 손에 쥔 채 바닥이 되어 누어 있던 것.

그의 가슴 위에서 세로로 마주한 그의 눈을 보며 지연이 소리쳤다.

“뭐예요!”

그도, 그제야 지연을 발견했다.

“아…….”

그도,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는 공간을 인지했다.

“이 방…….”

엉켜버린 이불 탓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의 품 위에서 그녀가 소리쳤다.

“왜 내 방에서 잠을 자요?”

그의 입매에 오묘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말 안 했었나?”

뭘?

“이 방…….”

이 방 뭐?

“내 방이었어.”

엉큼한 수컷 고양이의 변명이었다.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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