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2018.05.09.
지연은 민희와 태규 앞에 서서 고개를 떨궜다.
유리로 된 접견실의 벽으로 모든 직원들이 보는 앞이었다.
지켜보는 직원들의 눈빛이 호기심에 번뜩였다.
‘혹시 부사장이랑 옛날에 사귀던 사이였나?’
‘못 돼도 가문의 원수는 되는 것 같은데?’
그들의 얼굴엔 그랬으면, 하는 바람도 엿보였다.
그래야 인류의 저주 개민희가 한 방 먹을 테니까.
꿀꺽!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긴장된 순간, 드디어 지연의 입이 벌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구경하던 직원들의 입술이 쩍 벌어졌다.
실망스러워서. 어이가 없어서.
“그럼 쟤는 사람 잘못 보고 그 난리를 쳤던 거야?”
“황당하다, 저 여자. 완전 미친년처럼 뛰어가더니.”
그녀의 굴복에 가까운 사과에 태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지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마워.’
지연은 그런 태규를 일직선으로 쏘아보았다.
생각 같아선 다시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 쥐며 꾹 참았다.
그의 협박이 먹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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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이 민희와 태규를 향해 사과를 하기 한 시간 전,
지연은 태규의 취임식장 맨 뒤에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부사장 취임식 따위가 눈과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장내에 ‘문태규’라는 이름이 흐르는 순간 그녀의 모든 신경이 본능적으로 일어났다.
‘문태규라고?’
설마설마하며 얼굴을 확인하니 그는 분명 그놈 문태규였다.
지연은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단상을 향해 소리쳤다.
“야! 문태규!”
순간 모든 직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취임식장 뒷자리의 그녀를 향했다.
태규도 하던 말을 멈추고 자신의 이름을 절규하듯 부르는 한 여성을 보았다.
앉아 있는 직원들 사이 유일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헉!”
그의 외마디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취임식장을 울렸다.
그도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다.
‘지연이가 왜 여기에…….’
눈동자가 요동치며 반사적으로 도망가야 할 탈출구를 찾았다.
그런데 이미 그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맨 뒷자리에서 단상까지 날아오듯 달려온 것.
그녀는 가녀린 두 팔을 뻗어 넥타이가 뽑힐 듯 그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 정면으로 소리쳤다.
“이 개새끼야!”
순간 취임식장엔 얼음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지연은 그의 멱살을 쥐고 그를 단상에서 끌어내리려 했지만 놀란 직원들이 뛰어올라왔다.
민희는 범죄자라도 본 듯 지연을 향해 소리 질렀다.
“뭐하는 거야! 이 여자 끌어내!”
직원들의 만류로 지연은 어쩔 수 없이 잡고 있던 그의 멱살을 놓쳤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는 여전히 태규를 향해 분노했다.
“나 송지연이야. 너 나 알지?”
알지. 송지연. 내가 버린 그 여자.
태규는 빠른 판단을 해야 했다.
‘빌까? 아님 잡아떼?’
이 두 가지가 보통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취하는 태도.
하지만 두 가지 다 문제가 있었다.
빈다면 민희를 비롯해 직원들 앞에서 자신이 지연에게 저지른 일이 밝혀질 테고 잡아뗀다면 지연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태규는 재빨리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잔머리가 탁월한 그는 금세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황했던 태도를 여유롭게 바꾸고 신사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단 둘이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합시다. 여긴 직장이잖아요. 일…… 계속하고 싶죠?”
지연의 약점을 찌른 것.
그녀는 일을 아주 중요시 여긴다.
돈을 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게 그녀 최고의 약점이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잠시 흐트러졌던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 여긴 직장이지.
더 이상의 소동을 벌이면 그녀도 잃을 게 많다.
“그래요, 나랑 얘기 좀 해요.”
두 사람은 홍해처럼 갈라지는 무리를 뚫고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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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의 문이 닫혔다.
태규는 문이 닫히자마자 좀 전의 여유로웠던 태도를 풀고 무릎을 꿇었다.
“지연아, 살려줘. 잘못했어. 제발 살려줘.”
목구멍까지 육두문자가 올라왔지만 지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감정을 다스렸다.
“됐고 돈 갚아. 그리고 이 회사에서 나가. 나 너 같은 놈 밑에서 일할 생각 없으니까.”
그는 슥슥 소리가 날 정도로 손바닥을 비볐다.
“돈은 좀 기다려. 내가 민희랑 결혼만 하면 두 배도 줄 수 있어.”
“니가 누구랑 결혼하든 관심 없어. 그냥 나한테 돈 갚고 이 회사만 그만둬.”
“그게 말이 되니? 민희랑 결혼하려면 이 회사에 있어야 해. 니가 그만둬.”
“나도 니가 있는 이 회사 싫은데 당장은 그만둘 수 없어. 줄리 먹여 살려야 하니까.”
지연의 입에서 줄리의 얘기가 나오자 그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줄리, 한국에 있어?”
지연의 입장에서는 참 한심한 소리였다.
그럼 줄리를 두고 혼자서 한국에 왔을까 봐?
“그럼 내가 너처럼 걔를 버렸겠니? 그런데 당분간은 볼 생각 하지 마. 줄리는 아빠라면 아주 몸서리를 치는 아이니까.”
그래도 아빠라고 태규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두 손 모아 빌기 시작했다.
“민희한테 가서 사람 잘못 봤다고 얘기해줘. 그래야 나 그 여자랑 결혼할 수 있어. 니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실수한 거라고. 응?”
“내가 미쳤어? 그 여자랑 결혼을 하든 말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한 번 더 회사에서 마주치면 오히려 그 여자한테 가서 너에 대해 다 까발릴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회사에 나오지 마.”
태규는 빌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를 올려보았다.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견고한 눈동자.
그는 지금 그 어떤 절박한 읍소로도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꿇었던 무릎을 펴고 먼지 묻은 옷을 탁탁 털었다.
그의 눈빛도 조금 전 그녀에게 무릎 꿇던 그 눈빛은 아니었다.
교활했고 영악했다.
그는 지연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줄리는?”
지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줄리가 뭐?”
어리둥절한 그녀의 심장에 태규는 잔인한 비수를 꽂았다.
“그럼 내놔, 줄리.”
박힌 비수에 그녀의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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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지연은 지금 고객 접견실에서 민희와 태규를 마주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태규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고 민희는 분노에 찬 얼굴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지연은 참혹했다.
민희는 고개를 떨군 지연의 앞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의 턱은 좀 전보다 올라갔고 지연을 향한 그녀의 눈빛은 좀 전보다 싸늘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명령처럼 내뱉었다.
“빌어, 무릎 꿇고.”
그녀의 차가운 명령에 지연보다 더 놀란 건 태규였다.
“왜 그래. 뭘 그렇게까지 해. 직원한테.”
“취임식을 망쳤잖아!”
“그래두…….”
“태규 씬 가만히 있어.”
민희는 분노한 척했지만 속으론 오히려 이 순간을 즐겼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지연이 이런 큰 실수를 했으니 말이다.
핑계 삼아 무릎을 꿇리고 직원들 앞에서 기를 죽이면 그동안 그녀 때문에 짜증났던 기분들이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어서 꿇어!”
“민희야, 한 번만 봐주자.”
지연은 자신을 두고 투닥거리는 두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어도 태규와 민희에게 무릎을 꿇고 싶진 않지만 태규의 협박을 생각하면 해야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더 중요한 건 뭘 하든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지옥의 아수라장이니까.
‘무릎을 꿇는 것 말곤 벗어날 방법이 없는 건가?’
그녀의 무릎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
수현은 허망한 눈으로 지연이 버린 그녀의 옷들을 응시했다.
어떻게 보면 그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사준 선물이었다.
‘그런데 저 옷들을 저렇게 보란 듯이 쓰레기통에 버려?’
모든 것이 이상했다.
분명 미국에서 통화할 때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지 않았다.
단걸음에 달려가 지켜주고 싶을 만큼 수현을 향한 그녀의 목소리는 애틋했다.
그런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전화도 피하고 줄리의 병실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그가 사준 옷도 버렸다.
무슨 일일까 알아보고 싶은데 그녀가 피하니 방법을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을 선택했다.
로버트에게 전화했다.
“그때 지연에 대해 알아봤다는 정보, 알려줬으면 좋겠어.”
그는 로버트가 알려주겠다고 한 그녀의 뒷조사를 듣지 않았었다.
앞으론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누기도 전에 찝찝한 일이 생겨버렸다.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선 로버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로버트는 탐정으로부터 알아본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단, 그녀는 애런 도련님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역시 그랬군.
애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그의 추측이 맞은 것이다.
“줄리도 애런의 딸이 아니라는 거지?”
“어떻게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애런 도련님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녀가 애런과 상관없다는 사실이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애런…… 꼭 그래야 했니?’
애런은 분명 그렇게 얘기했었다.
지연은 자신의 여자고 줄리도 자신의 딸이라고.
그런데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니.
‘나를 희롱하고 싶었니? 그 정도로 나를 미워하는 거야?’
그런데 충격과 실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버트가 들려준 그다음 얘기가 더욱 그를 놀라게 했다.
“줄리는 송지연의 딸도 아닙니다.”
“뭐?”
이건 수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애런의 딸이 아니라는 건 어느 정도 추측했지만 심지어 지연의 딸도 아니야?
“문태규라는 남자의 딸입니다.”
아까 의사가 줄리의 보호자라고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 남자?
“그런데 왜 줄리를 지연이 데리고 있지?”
“잘은 모르겠지만 남자가 아이만 맡기고 여자를 버린 것 같습니다.”
“완전 개새끼군.”
“그런데 혹시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그녀는 지금보다 앞으로 받을 상처가 더 많다던 말?”
기억한다. 로버트는 수현이 그녀를 맘에 두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경고처럼 그에게 말했었다.
‘앞으로 받을 상처가 아주 많은 여자입니다.’
당시엔 이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몰랐었다.
로버트가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줄리라는 아이의 부모는 엄연히 문태규라는 남자입니다. 지금 송지연이란 여자는 아이의 법적 보호자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즉 남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아이를 데려갈 수 있다는 뜻이죠.”
남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줄리를 뺏긴다……
아마 지연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아이의 아빠를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은 일일까?
그때 로버트가 의구심을 품은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문태규란 그 남자, 오늘 오드리 화장품 부사장으로 취임한다는데요? 그녀도 그 회사에 다니지 않습니까?”
“!”
지연이…… 문태규를 만난다? 오늘?
불쾌한 전율이 그의 머리를 침투했다.
*
오드리 화장품 고객 접견실.
지연의 무릎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민희가 한 번 더 지연을 다그쳤다.
“뭐해?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빌라니까!”
태규의 눈빛이 느껴졌다.
‘이번만 해. 줄리를 뺏기고 싶지 않으면.’
치졸한 놈.
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줄리를 위해서니까.
줄리를 위해서라면 무릎 정도는 얼마든지 값싸게 버릴 수 있다.
그녀의 무릎이 서서히 내려갔다.
그녀의 무릎이 내려갈수록 태규와 민희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까부는 직원은 어떻게 된다는 완벽한 본보기를 직원들에게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막 지연의 무릎이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누군가 접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민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 못 둬?”
소리의 주체는 민희의 아빠 강 회장이었다.
“아빠! 이 여자가…….”
민희가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강 회장은 막 무릎을 꿇으려는 지연에게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송지연 씨, 죄송합니다. 제 딸이 철이 없어서…….”
회사의 회장이 일개 직원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것도 사위가 될 부사장의 취임식을 망친 직원에게.
민희와 태규, 지연뿐 아니라 지켜보던 모든 직원들의 눈동자엔 같은 빛이 돌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
주말 동안의 폭풍 같은 일을 마친 수현은 드디어 빨간 지붕 집으로 도착했다.
로버트와의 통화 후 그는 많은 미스터리를 풀었다.
그녀는 확실히 애런의 여자가 아니다.
줄리도 애런의 아이가 아니다.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녀도 줄리의 엄마가 아니다.
여기까진 딱 좋은 그림이다. 그런데…….
오는 길에 계속해서 지연에게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추측하건데 그녀가 화가 난 이유는 딱 하나다.
그의 진짜 신분을 알아낸 것.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접근했던 이유도.
간발의 차이다.
그는 알파인 공원에서의 키스 후 직접 얘기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기회를 놓쳐버렸고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다시 시도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누군가가 그녀에게 이미 얘기를 해 준 것 같다.
‘누굴까?’
머릿속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봐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혹시 애런?
하지만 지연이 자신의 여자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던 그가 지연에게 먼저 솔직하게 고백했을 린 없다.
도대체 누구야…….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오드리 화장품의 강 회장이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강 회장의 비굴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아이고, 미스터 몬테규,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우리 애가 철이 없어서.”
“부탁드린 일은 잘 처리하셨습니까?”
강 회장을 보낸 사람은 수현이었다.
그는 로버트를 통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태규가 줄리의 친아빠라는 것도, 그가 지연과 줄리를 버린 진짜 개새끼라는 것도.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그는 오늘 오드리 화장품의 부사장으로 부임한다.
하필 그 취임식에 지연은 참석했다.
분명 아무것도 모르고 갔을 게 분명한데.
그녀가 걱정된 수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기로 했다.
오드리 화장품의 강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한 것.
“안녕하십니까? 패션 회사 줄리아나의 총괄경영 팀장 팀 몬테규입니다.”
강 회장은 당연히 줄리아나라는 세계적 기업을 알고 있다.
화장품도 성공적으로 론칭한 줄리아나가 오드리 화장품의 롤 모델이기도 하고.
그런 큰 회사의 총괄경영 팀장, 게다가 차기 수장으로 알려진 후계자가 직접 전화를 하다니.
혹시 기업 협력?
그렇다면 조상님 은혜까지 찾으며 박수칠 일인데…….
하지만 줄리아나 후계자의 볼일은 그가 생각하던 일들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개인적인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회사의 직원 송지연이란 여자가 혹시 안 좋은 일에 빠졌다면 보살펴달라는 것.
강 회장은 앞뒤 잴 것도 없이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부리나케 그녀를 찾았다.
그랬더니 아뿔싸, 자신의 딸 민희가 그녀에게 험한 짓을 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범할 뻔했습니다. 제가 다행히 말리긴 했는데……. 그런데 그 송지연이란 여자가 누군데 이렇게 귀히 전화를 주셔서 별일 없게 챙겨달라고 하셨습니까?”
“그 여자는…….”
생각 같아선 좋아하는 여자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제 팀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사위 되실 분한테 물어보시죠.”
강 회장은 감히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와 통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서전에 넣을 커다란 부제목을 건진 거니까.
“이렇게 먼저 전화를 주신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앞으로도 볼일이 있으시면 꼭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탁드린 건…….”
“염려 마십시오. 한국에 계신 것, 저희 회사에 계신 것, 그게 저희 가족이라 할지라도 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강 회장은 수현이 자신의 회사에 대한 관심으로 신분을 숨기고 취직했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회사 중 오드리 화장품을 선택했다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강 회장과 통화를 마친 수현은 지연이 오길 기다리며 거실의 벽난로를 피웠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든, 진실을 구하든, 뭔가를 하려면 따뜻한 온기가 필요할 것 같았기에.
창고를 뒤지니 투명색의 러시아산 보드카가 나왔다.
오렌지와 크랜베리 주스를 준비해 은으로 된 트레이에 세팅했다.
잠 한숨 못 잔 그녀를 위해 몸이 녹아들도록 독주 한 잔을 권할 생각이다.
벽난로와 보드카로 그녀의 몸이 녹진해지면 깨끗하게 정리한 방으로 올려보내 한숨 푹 자도록 해줘야지.
‘혹시 술 한 잔에 취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그녀의 귀소본능이 능력을 발휘하려나?
그래서 또 지금의 제 방이 아닌 예전에 썼던 내 방으로?
‘풋!’
엉큼한 상상을 하니 갑자기 그의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럼 그렇게 화가 풀리는 거지 뭐.
수현은 그녀의 화를 풀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녀와의 키스에서 느꼈다.
그녀도 아주, 강렬하게, 그를 원한다는 걸.
‘오히려 잘됐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나니 거칠 것이 없었다.
애런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안 이상 오로지 그녀를 향해 독주할 것이다.
거짓 없이, 가식 없이, 열정적으로.
수현은 19세 소년처럼 들뜬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한겨울, 그녀의 몸을 훈훈하게 만들어줄 벽난로와 한 잔의 술을 준비해놓고.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셔츠를 바로 했다.
‘들어오면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안아줘야지.’
벌써부터 심장이란 놈이 가열 차게 날뛰기 시작한다.
이놈, 이놈, 설레발은.
드디어 문이 열렸다.
“지연아!”
일부러 큼직한 목소리로 실내를 울렸다. 반가움에 대한 표현이었다.
“아저씨다!”
어, 줄리도 함께 왔구나.
좋지만 좋지만은 않은?
흠, 그래도 할 수 없지. 그녀의 딸이라면 나에게도 소중한 아기 공주니까.
두 사람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다가가는데,
그녀의 뒤로 커다란 형체가 쓱 나타났다.
“형, 안녕?”
“…….”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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