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2018.05.05.
“저 진수현 씨 동생입니다.”
고객으로만 알았던 애런이 수현의 동생이라고 하자 지연은 잠시 멍했다.
진짜?
일단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인 애런이 까만 머리 까만 눈의 완벽한 한국인 수현의 동생이라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의 멍한 표정에 애런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었다.
“의붓형제예요. 형의 아빠와 제 엄마가 결혼한?”
그제야 지연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아하! 그렇군요.”
그녀는 애런이 수현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불편했던 그가 반가워졌다.
지연의 얼굴이 밝아지자 애런이 한 발 한 발 그녀에게 다가왔다.
“형이…… 제 얘기 안 하던가요?”
“안 하던데요?”
수현은 형제 얘기뿐 아니라 가족 얘기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풋!”
애런이 알 수 없는 실소를 뿜었다.
실소의 의미를 몰라 가만히 보고만 있는 지연을 향해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저랑 하실 얘기가 많은 거 같은데요?”
지연은 왠지 그의 미소가 유쾌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
월요일 아침.
수현은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전세기엔 지연을 태워 보냈기에 할 수 없이 일반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시간이 꽤 많이 지체됐다.
도대체 어떻게 기업인 모임에 참석했는지 모르겠다.
온통 그의 머릿속엔 지연과 줄리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다행히 줄리의 상태가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지연이 겪었을 불안과 공포를 생각하니 함께해주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기업의 후계자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인천공항에 도착해 줄리가 있는 병원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초조하고 다급했다.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계속 지연에게 전화했는데 신호는 울리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할 얘기도 많은데…….’
그는 오는 내내 그녀에게 해야 할 얘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알파인 공원에서 그녀와의 키스 후 그는 모든 걸 얘기해줄 생각이었다.
그가 누구고 왜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그녀가 설사 애런의 여자고 줄리의 아빠가 애런이라 해도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나는 상관없다고.’
선택은 그녀의 몫이니까.
그런데 줄리의 사고 소식을 들으며 기회를 놓쳤다.
지금 병원으로 가서 바로 얘기할 순 없겠지만 그녀가 진정이 되면 빨리 털어놓고 싶다.
그녀와 나 사이, 더 이상의 비밀은 싫다.
한 번 더 그녀에게 전화했으나 여전히 받지 않는다.
‘줄리랑 같이 잠이 들었나?’
답답하긴 했지만 그사이 벌써 병원에 도착했다.
‘만나면 엉덩이라도 때려줘야지.’
그는 이제 곧 만날 지연을 상상하며 뛰는 가슴으로 병실로 향했다.
.
.
.
수현은 지연과 연락이 안 된 관계로 병원 안내센터로부터 줄리의 병실을 알아냈다.
알려준 병실 앞으로 오니 병실 문엔 ‘줄리아나 문’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줄리아나 문? 줄리가 문 씨인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빠가 없을 경우엔 엄마 성을 따르는데.
잘못 왔나 싶어 문을 열었는데 줄리가 있었다.
‘자고 있구나.’
다행히 혈색도 좋고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지연은 어디 갔나? 왜 아무도 없지?’
그때 그녀의 담당으로 보이는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수현을 발견하곤 서류를 확인하며 반갑게 웃었다.
“아이 아빠세요? 문태규 씨?”
문태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 아빤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 엄만 어디 갔나요?”
“문태규 씨가 아니에요? 보호자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거 참 난감하네.”
“왜요?”
“보험 문제 때문에요. 아이가 시민권자라 확인해야 할 게 있거든요. 문태규 씨가 와야 하는데…….”
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수현도 난감한 건 마찬가지였다.
문태규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자꾸만 그를 찾으니 말이다.
그때 금화댁이 들어왔다.
“집주인 총각!”
그녀는 수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의사는 할 수 없다는 듯 줄리의 얼굴만 한 번 확인하고 병실을 나갔다.
수현이 금화댁에게 물었다.
“지연인 어디 갔어요?”
“애 엄마는 회사 갔지. 오늘 아침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던데? 그런데…….”
갑자기 금화댁이 말을 하다 멈췄다.
그러곤 슬쩍 수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애 엄마랑 무슨 일 있었어?”
“왜요?”
“애 엄마가 나가면서 그러는 거야. 혹시나 총각 오면 병실에 들이지 말라고. 혹시 싸웠어?”
“안 싸웠는데요?”
그녀는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지? 조금 전에도 전화 와서 그러던데? 총각 오면 들이지 말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래? 병실까지 와준 손님한테.”
“조금 전이요? 지연이 전화가 돼요?”
“응, 나 방금 애 엄마 전화 받으러 나갔다 온 거야.”
“…….”
내 전화는 그렇게 받지 않더니 금화댁한테는 전화를 해?
게다가 나를 병실에 들이지 말라고?
수현은 도대체 지연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병실 한쪽에 놓여 있는 쓰레기통이 들어왔다.
“저 옷은…….”
수현이 지연에게 준 줄리아나의 정장이었다.
막 쑤셔 넣은 듯 정갈하지 못하게 쓰레기통에 박혀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뭔가 일이 생긴 건 분명하다.
*
오드리 화장품으로 가는 버스 안.
“열하나, 열둘, 열셋…….”
지연은 차창 밖에 보이는 가로수를 의미 없이 세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뭔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떠오를 것 같았다.
애런이 해준 충격적인 말이.
“기가 막혀.”
그런데 가로수를 세는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하늘에서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제대로 한 방 맞은 기분인데 가로수 따위가 도움 될 리 없지.
‘형은 오해하고 있어요. 지연 씨가 제 여자고 지연 씨 아이는 제 아이로.’
처음엔 애런이 무슨 소설을 쓰나 했다.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애런의 여자고 줄리가 이 남자 딸이야?’
그런데 그가 오해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이름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지연 씨가 문태규라는 사람 얘기한 적 있죠? 몬테규랑 이름이 비슷하다고. 형이 그 두 이름을 착각했나 봐요.’
‘문태규를 몬테규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문태규가 도망갔다는 걸 확인하고 만취한 날.
그날 알파인 언덕에서 그녀는 문태규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그때 갑자기 수현이 와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몬테규를 어떻게 알아?’
그녀는 분명 문태규라 그랬는데 만취 상태로 혀가 꼬였고 그래서 그는 그걸 몬테규라 오해한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이는 없지만 그래도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발음이 문제였고 미국 사람이나 다름없는 그로선 그렇게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그 이후다.
한국에서 다시 우연히 만났고 심지어 한집에서 살게 됐는데 왜 그는 한 번도 확인을 하지 않았을까? 아이의 아빠가 누구냐고?
그 이유에 대해선 애런이 설명해주었다.
‘형은 지연 씨랑 합의를 보려고 했어요. 돈을 주고 그 아이가 몬테규가의 아이라는 걸 감추는 거죠. 그런 큰 거래를 하려면 신중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좀 더 확실한 거래를 위해 간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아주 철두철미하죠. 아마 지연 씨 뒷조사도 했을걸요?’
‘제 뒷조사요? 왜요?’
‘형은 협상의 귀재예요. 상대방의 약점을 알아야 유리한 합의를 이끌 수 있죠. 말도 안 되게 지연 씨가 줄리를 빌미로 엄청난 요구를 할 수도 있잖아요?’
협상을 유리하게 하고자 사람의 뒷조사를 하다니.
심지어 나를 줄리를 내세워 돈이나 뜯어내려는 여자로 봤다니.
온몸의 힘이 빠지며 바닥으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수현 씨는 고작 나를 그렇게 본 거야?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면도 있었다.
‘그런데…… 수현 씨는 저한테 참 잘해줬어요. 단지 저를 거래상대로만 봤다면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건…….’
애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형은 저한테 커다란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사실 몬테규가의 진짜 핏줄은 저니까. 그래서 항상 저를 의식하고 질투했어요. 그러다 보니 마음 한구석에 동생의 여자를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만!’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순간 어제 있었던 그와의 키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연에게 그 키스는 인생 최고의 키스였다.
그녀 인생의 최고로 달콤하고 황홀했다.
아득했고 아련했고 기절하고 싶을 만큼 아스라했다.
그런데 그에겐 그런 게 아니었다니.
오로지 동생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니.
동생의 여자를 뺏어보겠다는 더러운 마음에서 다가온 키스였다니.
그녀는 손등으로 제 입술을 거칠게 닦았다.
‘역겨워!’
토악질이 나오려 했다.
참을 수가 없었다. 희롱을 당했다는 게.
애런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제 형의 일방적인 오해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형 대신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그다음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아무 영혼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쁜 새끼!”
조용한 버스 안, 그녀가 뱉은 분노가 주변을 울렸다.
사람들이 힐끗거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지.
.
.
.
충격, 슬픔, 좌절, 실망, 배신의 아픔, 더러움, 역겨움…….
지금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세상 최악의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과 그녀의 현실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녀는 또 그렇게 오드리 화장품에 들어가야 했다.
하필 아무 상관도 없는 부사장 취임식도 봐야 하고.
미리 사무실에서 지연을 기다리고 있던 미선은 잔걸음으로 달려와 지연을 맞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좀 일찍 와서 맨 앞자리에 앉으면 생색도 내고 좋을 텐데. 그런데 너 옷이랑 신발이…….”
말을 하던 미선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쭉 훑어 발끝까지 내려갔다.
지연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자신의 옷과 신발로 향했다.
옷은 수현이 준 고급 옷 대신 청바지에 칙칙한 코트, 신발은 줄리에게 달려가느라 굽 떨어진 하이힐 대신 병원 앞 마트에서 산 운동화.
그녀가 봐도 한심했다.
촌스러움과 초라함의 콜라보라고 할까?
하지만 아무리 옷이 엉망인들 지금의 그녀의 마음만큼 비참할까.
“어차피 맨 뒤에 앉아 있을 거야. 끝나면 바로 갈 거고.”
조금은 뾰족해 보이는 그녀의 말투에 미선도 금방 꼬리를 내렸다.
“그래, 앞자린 됐고 적당히 뒤에 가서 서 있어.”
두 사람은 부사장 취임식이 열리는 회사 전체 회의실로 향했다.
*
태규에게 오늘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날이다.
드디어 오드리 화장품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을 위해 내가 참아온 수모를 생각하면…….’
그 수모를 생각하면 잘 드는 가위를 가지고 민희의 수천만 원짜리 의상을 다 잘라버려도 속이 풀리지 않을 듯.
태규가 멋진 슈트를 입고 변호사 명함을 보여주고 지연에게서 받은 돈으로 멕시코 칸쿤으로 날아가 로맨틱한 프러포즈할 때, 민희는 이렇게 말했었다.
“저랑 같이 한국으로 가요. 가면 제가 뭐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우리 아빤 제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딸바보니까.”
그 말만 믿고 지연도, 줄리도, 커리어도, 다 버리고 한국으로 왔다.
처음엔 민희의 말처럼 민희의 아빠 강 회장도 그를 반겼다.
“난 다 필요 없네. 똑똑한 사위면 돼.”
그런데 그가 미국 변호사긴 하지만 한국 로펌에 취직할 능력도 안 되고 하물며 집 한 채 마련할 돈도 없다는 걸 알고는 자기 딸에게 빌붙는 거머리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자네?”
하루하루를 언제 쫓겨날까 불안하게 보내던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자궁에 이상이 있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한다는 건 나쁜 일이지만 할 수 없었다.
그도 절박하니까.
‘일단 민희와 결혼은 하자. 그리고 한 재산 뜯어낸 다음 이혼하자. 그 돈으로 다시 미국에 가서 지연이와…….’
그는 강 회장에게 그녀의 비밀을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회장님이 원하는 남자들이 민희의 결함을 알고도 결혼해줄까요?”
그리고 그 협박은 통했다.
“원하는 게 뭐야?”
그렇게 그는 오드리 화장품의 부사장 자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취임식을 위해 태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슈트 중 제일 비싸고 좋은, 지연이 사준 슈트를 꺼냈다.
그녀가 한국에 있는 아빠를 보러 갈 때 입으라고 사줬던 슈트.
미안하긴 하지만 미안함도 습관이 되면 무감각해지는 법.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넥타이를 조였다.
“여직원들이 많다고 했지?”
애교 있는 직원들에게 부사장님 소릴 들을 생각하니 팔뚝에 힘이 쭉쭉 들어갔다.
*
지연은 홀로 복도에 기대 커피 한 잔으로 넋 나간 정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귀로 사내 방송이 들렸다.
“이제 곧 문태규 부사장님의 취임식이 시작될 예정이니 직원들은 모두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제정신일 리 없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말은 오직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을 겨우 움직여 취임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미선에게 말했듯 임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가장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한 삼십 분 정도만 참으면 되겠지?’
취임식만 끝나면 바로 자리를 뜰 생각이다.
누가 부사장이 되든 말든 그녀의 이 참담한 인생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잠시 후, 드디어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부사장님 오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앉아 있던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임식장 단상 쪽으로 민희와 태규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맨 뒤에 앉은 지연에게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민희와 태규가 착석한 후 직원들도 자리에 앉았다.
고개만 들면 태규가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지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닥과 정면으로 고개를 떨군 채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이어 문태규 신임 부사장님의 취임 인사가 있겠습니다.”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충격을 받고 그러면서도 해결해야 할 일들로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그녀의 머리에 듣지 말아야 할 이름이 들렸다.
문…… 태규?
그녀는 떨궜던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턱 끝에 무거운 추를 매단 듯 올라가지 않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에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낯익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공부를 하며, 줄리를 돌보며, 틈틈이 번역 알바를 하며 모은 돈으로 명품 아울렛에서 그녀가 직접 고른 슈트.
‘아빠한테 인사드리러 갈 때 입으세요.’
누군가는 아울렛 거라고 불평을 했지만 그녀에겐 인생 처음 사본 명품 슈트.
그런데 지금 막 단상에 오른 남자가 그 슈트를 입고 있다.
지연은 거친 손길로 마른세수를 했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사람이 너무 힘들고 지치다 보면 헛것이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의 음성이 그녀의 심장을 때렸다.
“안녕하십니까, 새로 부사장 자리에 부임한 문태규라고 합니다.”
문. 태. 규.
그가 맞았다.
프러포즈를 해놓고, 자신의 딸 줄리를 맡겨놓고, 그녀의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받아서 한국으로 튀어버린 개새끼, 문태규.
지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없던 그녀가 번쩍 팔을 뻗어 그를 향했다.
그리고 하얀 얼굴에 파란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야! 문태규!”
취임식의 모든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
한 시간 후.
지연은 회사 화장실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찬물로 얼굴 전체에 얼룩진 눈물 자국을 닦고 종이 수건도 뽑지 않은 채 젖은 손을 옷에 쓱쓱 문질렀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몰골을 보았다.
피부는 파리했고 입술은 찢겨 피가 말랐으며 옷은 사방으로 구겨졌다.
한마디로 참담했다.
하지만 매무새 따위에 신경이 쓰일 리가 없었다.
이 순간 숨을 쉬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니까.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지연은 화장실을 나왔다.
물 위를 걷듯 발소리조차 고요하게 고객 접견실로 향했다.
그곳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 모든 사람들이 안을 볼 수 있는 공개된 장소나 다름없는 곳.
접견실 안에는 태규와 민희가 있었다.
태규는 불안한 몸짓으로, 민희는 팔짱을 끼고 고압적인 자세로 들어오는 그녀를 맞았다.
그들은 다가오는 지연의 몸짓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그녀가 앞으로 뭘 할지 지켜보겠단 의미였다.
지연은 그들 앞에 섰다.
세 사람이 마주했다.
사람들은 유리벽에 붙어 숨죽이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명장면을 기대하며.
지연은 시선을 내리고 그들을 보지 않았다.
민희는 살짝 턱을 들어 그녀를 내려 보았다.
“해봐. 하고픈 말.”
지연은 두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내렸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어금니를 부딪쳐 흐르려는 눈물을 다부지게 참았다.
그리고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피맺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태규의 얼굴은 환해지고 민희의 얼굴을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지연의 얼굴은 참혹해지는 순간이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