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저, 그 사람 동생입니다
2018.05.02.
수현과 지연의 행복하지 않은 추억의 그곳에서 두 사람은 깊고 긴 숨결을 나누었다.
그렇게 그녀의 마지막 추억은 바뀌었다.
아스라이 황홀한 추억으로.
그리고 어느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뜨거워진 두 사람의 숨결이 마지막 향연을 향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데 지연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수현의 품에서 빠져나와 전화를 확인했다.
액정에 뜬 긴 번호로 봐선 한국에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그런데 전화를 받는 지연의 눈동자가 점점 초점을 잃어갔다.
미세하게 손을 떨기 시작하더니 비명처럼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수현이 놀라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전화를 한 사람과 마무리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그녀는 스르르 전화기를 내렸다.
“어, 어, 어떻…….”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수현이 언성을 높였다.
“정신 차려! 무슨 일인데 그래?”
그녀는 까만 동공을 불안하게 떨며 거친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줄리가…… 줄리가…….”
그리고 기어이 눈을 감았다.
*
기도가 막혀 숨통이 끊어지는 지옥을 경험했던 애런은 응급실을 나와 공항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과는 달리 다시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다.
그의 원래 계획은 하루는 수현 몰래 지연과 보내더라도 하루 정도는 한때 약도 술도 같이했던 친구들과 어울리며 억눌렸던 욕망을 폭발시키는 것.
그래야 지연같이 재미없는 여자와 함께하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던져버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죽음의 고비를 넘겨설까?
지연과 함께한 시간이 그의 인생 최고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온정을 받은, 감동적인 시간.
그리고 그 시간으로 인해 성수(聖水) 속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머릿속이 맑고 단단해졌다.
머릿속이 깨끗해지니 교활한 욕망도 사라졌나?
지연을 이용해 수현에게 돈을 뜯어낸다는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다.
일단 그녀를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녀는 그에게 엄마도 주지 않았던 온정을 보여준 여자다.
아무리 그가 쓰레기라지만 그런 여자를 어떻게 이용해?
그리고 이용하려고 한들 송지연이란 여자는 자신과 함께 공모해 수현의 돈을 뜯어낼 수 있는 그런 영악한 여자가 아니다.
만약 그런 여자였다면 이미 어제 그에게 넘어왔겠지.
고가의 옷, 고가의 구두, 고가의 액세서리에 영혼을 팔면서.
그의 계획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허무하고 허망하고 초라하게.
그런데 계획을 허무는 대신 새로운 욕망이 생겼다.
‘지연이 정말 내 여자였으면 좋겠다.’
왠지 그녀와 만나면 그의 인생도 달라질 것 같다.
어쩌면 남들이 말하는 진짜 사랑을 하게 될 수도.
그가 가진 돈과 배경에만 환장했던 여자들과는 다른, 서로의 아픔, 서로의 상처까지도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랑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형과 함께 있다.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완벽한 그의 의붓형과 함께.
머릿속이 깨끗해졌다고 가슴까지 깨끗해진 건 아니다.
그에 대한 질투심은 가슴 속에 여전히 꼬물거리고 있다.
오히려 더 굵은 몸통으로 가슴 정 중앙에 똬리를 틀어버렸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바보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녀의 마음을 뺏을 단 하나의 카드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현실이 살 끝을 도려내듯 쓰라렸다.
비행시간을 기다리며 먹먹한 눈으로 뉴욕의 거리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한국의 심부름센터로부터 온 전화였다.
받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업데이트 시켜주는 수현과 지연에 대한 정보.
‘이젠 별로 소용도 없는데.’
그는 전혀 의욕 없는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말씀하세요. 간단하게.”
그런데 심부름센터의 직원이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송지연이란 여자의 아이, 그 여자 친딸 아니에요. 문태규라는 남자의 아이예요. 그런데 그 남자는 오드리 화장품의 외동딸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지연의 아이가 지연의 아이가 아니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데 왜 송지연이 다른 여자랑 결혼할 남자의 아이를 키워요?”
“알아보니 송지연이 문태규란 남자한테 버림받았다고 합니다. 남자가 개새낀 거 같아요. 아이만 맡기고 튄 거죠.”
“…… 일단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지금까지 그가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옮겨보았다.
대충 이리저리 맞춰지긴 하는데 딱 하나의 조각이 부족하다.
지연과 문태규라는 남자의 관계가 어떻든지 간에 왜 내가 거기에 엮였을까?
왜 그 문태규란 생판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나의 아이라고 형이 오해했을까?
“!”
순간 쾅! 하고 하늘에서 번개처럼 마지막 퍼즐 하나를 내려주었다.
“그거였어!”
문태규와 몬테규, 바로 그게 이 복잡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었어!
“하하하하하하!”
애런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 잘난 진수현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해버리다니.
혹시 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자신이 얼마나 큰 착각과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만약 알았다면 날 가만두지 않았겠지. 지연이 내 여자라고 뻥을 쳤으니까.’
그리고 문태규라는 놈도 함께 죽였을걸? 지연이한테 상처 준 놈이니까?
문태규 그놈도…… 문태규, 문태규……
그런데 그때 암울한 밀실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듯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문태규야!’
그를 이용하면 지연의 마음을 뺏을 수 있을 거야!
그는 두 주먹을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계획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정면승부다.”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이 방법이 통할 것 같았다.
*
수현은 급하게 차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전세기로 그녀를 먼저 한국으로 보내야 한다.
그녀에게 아주 긴박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온 전화를 받고 쓰러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눈물을 쏟으며 토해낸 사연은 이랬다.
“줄리가, 줄리가 사고를 당했어요.”
금화댁은 주말 동안 줄리를 낚시 동호회의 정기 낚시회가 열리는 여수로 데리고 갔다.
동호회의 회원인 봉수가 낚시회에 참가하는 걸 알고 줄리를 봉수 옆에 붙여주기로 계획했다.
‘지가 별 수 있어? 2박 3일 동안 줄리랑 꼭 붙어 다닐 수밖에.’
봉수가 줄리가 지연이 책임져야 할 아이란 건 받아들였지만 아직 그녀를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수에 도착한 회원들은 커다란 낚싯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줄리도 금화댁의 손을 잡고 배에 올랐다.
그런데 봉수의 태도는 금화댁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 양반, 알고 보니 아주 정이라고는 씨가 마른 사람이더라고. 애기가 뱃머리로 가면 배 뒤로 가버리고 애기가 쫓아가면 다시 뱃머리로 팽 내빼는 거 있지?’
봉수가 줄리를 피해 다닌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회원들과 어울렸다.
‘낚시는 손맛이죠.’
비록 그녀를 봉수 옆에 두는 건 실패했지만 회원들과 잘 어울리는 줄리를 보고 금화댁은 아주 잠깐 정신줄을 놓았다.
‘사람들이 회친 고기 맛 좀 보라 그래서 몇 점 먹고 줄리 갖다 주려고 했는데 글쎄…….’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녀가 배에서 떨어진 것.
다행히 그녀가 입은 패딩의 공기로 그녀는 물에 뜰 수 있었고 금방 그녀를 바다에서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연이 들을 수 있는 내용은 딱 여기까지였다.
‘한겨울 바닷물이 좀 차? 체온이 떨어지고 애가 탈진을 해서…….’
이후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금방 의식이 돌아왔지만 놀란 맘이 진정된 건 아니었다.
“어떡해요, 어떡해요…….”
공항까지 가는 동안 같은 말만 반복하며 벌벌 떠는 그녀.
수현은 그런 그녀를 부축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기업인 모임을 빠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를 전세기에 태워 가장 신속히 줄리에게 보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단 가서 뭐든지 해요. 뭘 하든 내가 다 뒤처리는 해줄 테니까.”
그녀는 목까지 차오른 눈물을 꿀꺽 삼키며 뛰어내리듯 차에서 내려 공항을 향해 뛰었다.
비틀거리며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수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로 애간장을 태웠다.
‘이럴 때 꼭 모임에 가야 한다니…….’
함께 할 수 없음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
수현이 내어준 전세기로 한국으로 돌아온 지연은 택시를 타고 줄리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머리를 가눌 기운도 없어 차창에 기댄 그녀의 눈에선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았기에.
어떻게 그 오랜 비행시간을 버텼는지 모르겠다.
지연은 앉지도 서지도 먹지도 못한 채 구토와 오열을 반복했다.
그런데 탈진 상태가 되어 막 쓰러지기 직전 금화댁의 전화를 받았다.
“큰 탈은 나지 않은 모양이야. 다행히 아이가 아주 강골이었지 뭐야. 그래서 방금 여수 병원에서 서울 병원으로 옮겼어. 지연이는 그리로 와.”
지연의 몸에 다시 피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으로 줄리의 안위를 확인할 때까지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디어 줄리가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뛰는 탓에 하이힐의 굽이 부러졌지만 그걸 의식할 새도 없이 그녀는 병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녀의 눈에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줄리가 보였다.
“줄리야!”
절뚝대는 걸음으로 그녀 옆으로 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얀 얼굴에 파란 핏줄만 도드라진 그녀는 지연의 소리에도 커다란 눈을 꼭 잠그고 열지 않았다.
“줄리야!”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는데 그녀 대신 다른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이제 잠들었다. 그냥 둬라.”
돌아보니 봉수가 건조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봉수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아빠,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줄리는 괜찮아요? 괜찮대요? 무슨 일은 없대요?”
쏟아지는 그녀의 질문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링거의 속도를 확인 한 후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몸을 놓았다.
답답한 그녀가 다시 한 번 봉수에게 물으려는데 뒤에서 금화댁이 잡았다.
“줄리 이제 괜찮아. 나가서 나랑 좀 얘기해.”
눈길이 줄리에게서 떠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나갔다.
금화댁은 그녀의 손을 잡고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미안해, 애 봐준다 그래놓고 이런 사고를 만들어서…….”
그동안도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덩이가 금붕어처럼 두툼했다.
줄리가 괜찮다는 걸 확인했기에 지연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봐야 할 아이를 대신 봐주었던 것이고.
“괜찮습니다. 어쨌든 애가 멀쩡하니 됐어요.”
“그런데 무슨 애가 참…….”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줄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왜요? 줄리가 뭐하다 그런 건데요?”
“세상에 애가…….”
그녀는 짓무른 눈가를 닦으며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줄리는 봉수와 꼭 친해지겠단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어린 마음에도 할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엄마를 내쫓은 것이 불편했던 것.
“할아버지, 낚시 잘하세요?”
넉살 좋게 먼저 다가갔지만 봉수는 무심한 눈으로 힐끗 시선 한 번 줄 뿐 아무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줄리는 실망스러웠다.
그때 낚시회 회장의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가장 큰 고기를 낚은 회원이랑 가장 많은 고기를 낚은 회원에게 상을 내리겠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할아버지의 물고기 박스를 살펴보았다.
“에게, 한 마리도 없네.”
텅 비어 있던 것.
순간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이거닷!”
뇌물을 주듯 할아버지에게 물고기를 주면 크게 기뻐할 거리고 생각한 것.
그때부터 그녀는 물고기 동냥에 나섰다.
“저 한 마리만 주시면 복 받을 텐데…….”
그녀의 애교가 귀여워 사람들은 한 마리씩 그녀의 작은 손에 그들이 잡은 고기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물고기를 할아버지의 박스로 나르기 시작했다.
사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러 왔을 뿐 정작 봉수는 물고기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걸 모른 채.
그러다 그만 사고가 터졌다.
아직 살아 있는 힘 좋은 물고기를 옮기다 손에서 놓쳤고 허공으로 튀는 그놈을 잡으려다 바다에 빠져버린 것.
지연은 아찔한 순간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래도 다행히 안전요원이 있었나 봐요. 줄리를 금방 구한 걸 보면.”
그런데 금화댁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할 소리가 나왔다.
“안전요원은 무슨! 송 사장님이 뛰어들어갔지. 그래서 구한 거야, 줄리.”
“네?”
그녀의 온몸에 가시처럼 소름이 돋았다.
아빠가 줄리를 구했다고?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어서?
그녀가 알기론 태어나서 한 번도 수영을 배워본 적 없던 아빠가?
“오히려 송 사장님이 큰일 날 뻔했어. 줄리는 입고 있던 패딩 때문에 둥둥 떴는데 송 사장님이 오히려 꼬르륵…… 아이고 주책이셔. 수영도 못하시면서.”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아빠의 형색도 정상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젖어 있진 않았으나 누가 봐도 바닷물에 쩐 쾌쾌한 형상.
그런데 줄리에게만 신경을 쏟다보니 아빠의 상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안부 한마디를 못 물었네…….’
금화댁은 봉수를 염려했다.
“저 양반은 괜찮은지 모르겠네. 줄리 돌보느라 제 몸은 신경 안 쓰더라고.”
지연은 그 즉시 다시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빠를 봐야만 했다. 목숨 걸고 줄리를 지킨 아빠의 모습을.
그런데…… 봉수는 있지 않았다.
대신 줄리의 머리맡에 작은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나 간다. 애 엄마 왔으니 할비는 가야지.
“아빠…….”
지연은 가슴에 쪽지를 품은 체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쪽지 위로 후두둑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너무 많은 의미를 담은 쪽지 위로 떨어진,
너무 많은 의미를 담은 눈물이었다.
.
.
.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좋다고 했다.
조금 전 아빠와 통화를 했다.
“줄리라고 했지? 전해줘라. 물고기 고맙다고.”
줄리도 깨어나 지연의 목을 꼬옥 끌어안아주었다.
“엄마, 나 내 키만 한 물고기도 만져봤어.”
그리고 수현의 전화도 받았다.
“다행이다. 걱정돼 죽을 뻔했는데. 나 이제 한국으로 출발해. 병원으로 바로 갈게.”
그런데 전화를 끊으려는 그녀를 그가 다시 잡았다.
“가서 해줄 말이 있어. 사실은 여기서 해주려 했는데……. 어쨌든 잠시 후에 봐.”
무슨 말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큰일을 당하고 난 직후라 그다지 그의 말이 머리에 들어오진 않았다.
오히려 굽 부러진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지연은 줄리가 잠든 사이 병실용 슬리퍼를 신고 병원 로비로 나왔다.
편의점에 가서 아무 신발이나 하나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지연?”
돌아보니 애런이었다.
“내 참…….”
지연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난 애런을 보고 저도 모를 실소가 나왔다.
놀랍고 반갑다기 보단 좀 황당한?
뉴욕에서도 갑자기 호텔로 찾아오더니 여긴 또 무슨 일일까?
아무리 고객이지만 너무 잦은 우연은 반갑지 않다.
지연은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한국에 금방 오셨네요. 몸은 괜찮으세요?”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저 애런 몬테규입니다.”
누가 뭐래……
뜬금없는 그의 소개도 반갑지 않았다.
“네, 고객님. 그럼 안녕히 가세요.”
형식적인 목례 후 몸을 돌렸는데 그가 빠른 몸짓으로 지연의 앞을 막았다.
“저 애런 몬테규라고요.”
이쯤 되니 지연도 짜증이 났다.
“고객님, 왜 이러시죠?”
“저 몬테규라니까요? 저한테 관심 없으세요?”
기가 차서……
지연의 참을성도 한계에 다다랐다.
“고객님, 큰 고객님이시니까 감사는 한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저 당신한테 관심 없어요.”
그런데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뒤통수로 그가 외쳤다.
“그럼 팀 몬테규한테 관심은 있으세요? 아니다, 한국 이름은 진수현!”
“!”
진수현이라는 이름에 그녀는 가려던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진수현 씨요? 그 사람을 어떻게 아세요?”
그녀의 반응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입매를 올렸다.
“저, 그 사람 동생입니다.”
수현 씨의 동생?
그녀의 눈빛에 오묘한 의구심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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