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23화 (23/77)

제23화. 벗어

2018.04.21.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호텔 룸의 거실, 침실, 화장실까지 다 뒤져봤지만 지연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용한 흔적이라곤 욕실뿐이었고 침대도, 소파도 전부가 체크인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친구 만나러 갔나?’

그럴 수도 있다. 그래도 뉴욕에서 5년이란 세월 동안 유학을 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한편으론 뭔가 이상했다.

분명 어제 헤어질 때 수현은 오늘 아침에 오겠다고 말했다.

‘그걸 까먹을 리는 없는데…….’

지금까지 봐온 지연은 말도 없이 사라지는, 불투명한 행동을 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무슨 사고나 생긴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음습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봤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점점 더 짙어지는 불안감에 수현은 머리에 현기증이 일었다.

어디라도 찾으러 가고 싶은데 이 복잡한 뉴욕에서 그녀가 갈 만한 곳을 모르겠다.

“휴…….”

답답한 그는 호텔 컨시어지에 전화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호텔이었지만 뉴욕 최고의 셀럽 수현의 고객이니만큼 그녀가 언제 호텔로 들어오고 나갔는지 기억해줄 수도 있었다.

“49층 스위트룸 송지연 고객이 언제 외출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다행히 직원은 지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10시 좀 안 돼서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대답이 그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담당이 교대돼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손님이 찾아와서 나가셨다는 것 같은데요?”

“손님이요?”

“남자 손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손님이 누군지 모르고요?”

“알아봐 드릴까요?”

“네.”

수현은 전화기를 든 채 직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호텔까지 찾아올 만한 남자 손님이 누굴까 생각하면서.

갑작스럽게 찾은 뉴욕인데 언제 서로 연락이 됐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직원이 다시 전화를 들었다.

“확인됐습니다. 어젯밤, 송지연 고객님을 찾은 사람은…… 어!”

수현과 통화 중이던 직원이 뭔가를 보고 놀랐다.

“뭐죠?”

“지금 송지연 고객님이 지나가셨습니다. 막 엘리베이터를 타셨는데…… 그런데 모습이…….”

지연을 봤다는 직원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모습이 어떻다는 거지?

이상하긴 했지만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올라오고 있다니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그는 룸 도어와 정면으로 마주한 소파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어록 해제와 함께 그녀가 들어섰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지고 말았다.

“…… 지연?”

그는 왜 컨시어지 직원이 그녀의 모습을 얘기하다 멈췄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한마디로 엉망진창, 마치 거리의 여자 같았다.

일단 머리는 뭔가에 뜯긴 듯 산발이었다.

업스타일로 올리긴 했는데 록 그룹 멤버처럼 전체적으로 엉켜 있었다.

의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짧은 초미니 드레스는 밑단까지 찢겨 속옷이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했고 그 위에 걸친 망토는 누가 밟은 듯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얼굴이라도 멀쩡했으면 그나마 안심했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녀답지 않은 짙은 눈 화장은 너구리처럼 뭉개졌고 훤히 드러낸 하얀 목은 뭔가에 쓸려 빨갛게 부었다.

한마디로 강도나 강간이라도 당한 여자 같달까?

놀란 수현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야? 도대체 뭘 하다 온 거야?”

두서없는 질문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수현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다.

다소 눈동자가 충혈 되고 얼굴에 심한 피로감이 돌았지만 공포나 두려움은 없었다.

“일단 앉고 싶어요.”

꽤 높은 스틸레토 힐을 신은 그녀는 신발을 벗은 후 소파에 앉았다.

수현은 그녀의 건너편에 앉아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있다 온 거야?”

그의 되물음에 지연은 큰 쉼 호흡으로 숨고르기를 했다.

그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수현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병원에 있었어요.”

그녀의 어젯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맨해튼에 위치한 세인트 빈센트 병원 응급실의 한 침상.

수액을 맞고 있던 애런에게 의사가 다가와 상태를 체크했다.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괜찮으시면 병원을 나가셔도 됩니다.”

애런은 그제야 온몸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사람 많은 응급실에 누워 있다는 건 회복은커녕 더 질병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는 그에게 의사가 물었다.

“여자친구분은 어디 가셨나요?”

“……여자친구요?”

“네, 생명의 은인이요. 그분 아니었음 큰일 날 뻔했어요.”

그렇지…… 죽을 수도 있었지.

애런은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씁쓸히 홀로 응급실을 나왔다.

가슴으로 불고 있는 스산한 바람을 느끼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

.

.

그는 수현에 대한 도발로 수현과 지연을 따라 뉴욕으로 왔다.

그가 호텔에 지연만 남겨두고 떠났다는 걸 알고는 그녀의 룸으로 올라갔다.

일을 핑계로 그녀를 룸 밖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자들이 가장 환장하는 뉴욕 최고의 편집숍에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명품 옷들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애런은 할 수 없이 여자 친구 선물을 핑계로 그녀에게 그 숍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어달라 부탁했다.

여기까지는 어쨌든 그의 예상대로 잘 흘러갔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또각또각-

그녀가 빨간 미니 드레스에 빨간 스틸레토 힐을 신고 수줍은 몸짓으로 그를 향해 걸어왔다.

순간, 그의 심장은 빨간 신호등을 본 것처럼 멈춰버렸다.

‘너 진짜…… 지연이야?’

그녀의 자태는 고혹, 그 자체였다.

장난 반, 희롱 반으로 모델들이나 소화할 수 있는 난해한 옷을 던졌는데 그 옷이 그녀의 하얀 피부와 매치되며 완벽하게 그녀의 옷이 됐던 것.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여자 때문에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샴페인 한 병을 거의 다 비운 그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주로 먹고 있던 호두를 꿀꺽 삼켰다.

아름다운 그녀를 에스코트해 이 세상 어디라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윽!”

급하게 넘긴 호두가 그만 목에 걸려버렸다.

삼키려고도 뱉으려고도 했지만 단단히 걸린 호두는 그의 목구멍에서 꿈쩍도 안 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상기도가 폐쇄되어 산소가 차단된 것.

온몸의 신경이 경직되고 가슴이 돌덩이처럼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윽! 윽!”

뭐라도 해보려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두 손으로 목을 쥐고 몸부림치는 것뿐이었다.

놀란 직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비명을 질렀다.

지연도 갑작스럽게 생긴 눈앞의 사고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당황은 잠시뿐이었다. 이내 눈동자가 또렷해지더니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직원에게 소리쳤다.

“Call 911!”

그리고 숨을 쉬지 못하는 애런의 뒤로 가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꽉 쥐었다.

“가만히 있어요. 목에 막힌 음식물을 빼내야 해요.”

두 손을 그의 배꼽 바로 위에 대고 애런의 몸 안쪽으로 힘차게 당겼다.

하지만 음식물이 나오지 않았다.

여자의 힘으로 압력을 주기엔 잘 발달된 복근으로 이루어진 그의 배가 너무도 단단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좁은 미니드레스 밑단을 찢어 두 다리로 안정된 중심을 잡았다.

두터운 그의 허리를 움켜쥐느라 양팔엔 스크래치가 났고 하얗게 드러낸 목은 그의 등과 쓸리며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서 그의 배를 잡아당겼다.

몇 번의 시도 후, 그의 목에선 엄지손가락만 한 호두가 튀어나왔다.

애런은 그 즉시 가쁜 호흡을 할 수 있었고 파랗게 질렸던 그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숨통이 트인 것이다.

그가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한 지연은 그제야 안도했다.

“이제 됐어요.”

하지만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던 그는 현기증으로 바닥에 뻗어버렸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눕히고 벨트와 넥타이를 풀어 몸의 긴장을 제거했다.

때마침 응급차가 도착했고 숍은 직원에게 맡긴 채 애런과 함께 병원 응급실로 이동했다.

응급실 침상에 누운 애런은 혼미한 상태에서 그녀와 의사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호두가 기도를 막아서 하임리히 요법을 썼습니다. 기도가 막힌 시간은 약 2분 정도였고요.”

환자의 상태를 기록하던 의사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빨간 하이힐, 빨간 미니 드레스, 빨간 립스틱.

아무리 봐도 파티걸로 보이는 여자가 어떻게 이런 알맞은 응급처치 법을 알고 있을까, 하는 신기한 눈초리였다.

의사의 눈빛을 읽은 지연이 수줍게 웃었다.

“제가 아이가 있거든요. 그래서 기본적인 응급처치 정도는 알아요.”

엄마였어?

그는 엄지를 내보이며 그녀의 처치를 칭찬했다.

의사는 정신이 돌아온 애런에게 물었다.

“수속을 해야 하는데 연락할 보호자가 있습니까? 부모님이나 형제나 아무라도 좋습니다.”

보호자라…… 그의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집을 나온 그는 엄마 로즈와 연락을 끊은 지 한참이었고 그렇다고 지금 수현에게 연락할 순 없었다.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애런은 누운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

그때 지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보호자 하겠습니다.”

이후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긴장이 풀리고 온몸에 약기운이 돌며 까무룩 정신을 잃은 것.

한참 후 그는 눈을 떴다.

응급실 창밖이 서서히 밝아지는 걸 보니 아침이 오고 있었다.

‘지연은 갔나?’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옆에 그녀가 있었다.

침대 위에 두 손을 포개고 그 손을 베개 삼아 엎드려 잠이 든 것.

그녀의 손 옆엔 젖은 수건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이 든 중간 중간 마치 꿈을 꾸듯 느껴졌었다.

누군가가 따뜻한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과 팔을 닦아주던 걸.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운 손짓이었다.

‘간호사가 아니고 지연이었구나.’

애런은 잠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응급처치를 하느라 산발이 된 머리, 찢어진 옷 그리고 다 뭉개진 화장.

피팅룸에서 막 나왔을 때의 화려한 모습은 사라지고 클럽에서 싸움이라도 한 여자 같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지금 자석처럼 그녀에게 끌리고 있다.

‘날 위해 밤새 여기 있던 거야? 정말로 보호자처럼?’

그의 심장에 묵직한 뻐근함이 느껴졌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손짓에 가슴이 반응하는 것.

물론 그는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으며 성장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최고의 주치의가 내방하여 진료를 해주었다.

하지만 한 번도 누군가가 밤새 그의 침대 옆을 지켜준 적은 없었다.

이따금씩 도우미가 들어와 차가운 손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줬을 뿐.

그런데 이 여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을 뿐 아니라 밤새 그의 곁에 있어주었다.

외롭지 않게.

“음~~~~~”

그때 지연이 뒤척였다. 잠에서 깨려는 듯했다.

애런은 자는 척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그녀와 눈을 마주칠 용기나 나지 않았다.

그녀는 부스스 일어나 시계를 확인하더니 잠이 덜 깬 눈을 번쩍 떴다.

“큰일이다!”

벌떡 일어나 벗어두었던 하이힐을 신고 망토를 걸쳤다.

급하게 나가려던 그녀는 다시 뒤돌아 메모지에 뭔가를 적었다.

애런의 머리 옆에 메모지를 올려 두고 서둘러 응급실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떠났다는 걸 확인한 후 애런은 눈을 떴다.

그녀가 남긴 메모를 확인했다.

-약속이 있어 먼저 갑니다. 의사에게 물어보니 아무 이상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몸과 마음이 많이 놀랐을 거예요. 며칠은 무리 없이 쉬시는 게 좋을 듯. 참, 음식은 꼭꼭 씹어 드십시다!

“…….”

애런은 메모를 손에 꼭 쥔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찬 겨울, 뜨거운 바람이었다.

*

바카라 호텔의 지연의 스위트룸에서는 아직 어제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지연이 어젯밤 벌어졌던 고객과의 일에 대해 수현에게 설명 중이었다.

“아기들은 가끔 기도에 음식물이 막힐 수 있거든요. 그래서 줄리 때문에 응급처치를 배워뒀는데 마침 그걸 딱 써먹을 날이 온 거예요.”

그녀는 나라라도 구한 사람처럼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그 사람이 기도가 막혀 괴로워할 때 전 전혀 당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런 생각을 했죠. 아하, 내가 나서야겠다.”

그녀의 영웅담은 점점 고조로 치달았다.

“저 아니었음 그 사람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사람 하나 살린 거죠.”

그런데 정작 그녀의 얘길 듣는 유일한 관객 수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어, 뭐.”

사실 말하는 그녀와 듣는 그의 포커스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했던 응급처치의 행위를 시전 했다.

“다리를 11자로 벌리고 허벅지에 힘을 꽉 줘야 해요. 그래야 환자를 당길 때 몸이 흔들리지 않아요.”

생생한 전달을 위해 일어서서 다리를 살짝 벌리고 종아리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수현은 다른 생각을 했다.

‘다리는 언제부터 예뻤지?’

항상 청바지 차림의 모습만 봤으니 맨 다리를 볼 기회가 없었다.

물론 만취해 두 번의 하의 실종을 보여줬지만 그 때는 긴박한 상황이라 다리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런데 오늘 보니 그녀의 다리는 적당한 근육의 허벅지와 매끈한 종아리가 일직선으로 연결된 미니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리는 다리였다.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지연은 응급처치 이야기에 더욱 흥이 났다.

그녀는 애런의 복부를 자극했던 상황을 설명하며 두 팔로 뒤에서 허리를 안는 퍼포먼스를 했다.

“배꼽 바로 위를 들어 올리다시피 눌러야 해요. 그래야 압박을 가하며 음식물을 토해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수현의 포커스는 다른 쪽이었다.

‘백허그를 했단 말이야?’

상상을 해보니 기분이 불쾌해졌다.

더 이상 그녀의 섹시한 응급처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얘기하면 할수록 머릿속엔 다른 생각만 들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랑 저런 옷을 입고 저러고 있었다니……’

사실 수현이 처음부터 다른 초점을 가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던 건 아니다.

그녀가 룸에 들어왔을 때 그의 신경은 바짝 날이 섰었다.

그녀의 흐트러진 몰골이 불길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으니까.

‘범죄 현장에 있었나?’

하지만 그녀에게 아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확인됐고 몇 군데 긁힌 것 외엔 아주 멀쩡하다는 걸 알고 나니 긴장의 날이 무뎌졌다.

그러면서 그녀의 영웅담보단 지엽적인 곳으로 시선이 갔다.

그녀의 옷, 구두, 그리고 입술.

흐트러진 몰골일 땐 상처만 보였는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그녀가 입은 의상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

‘혹시 이놈 변태 아니야?’

지연이 미리 설명했었다.

지금 그녀가 입은 의상은 그녀를 위한 게 아니고 고객의 여자친구를 위해 자신이 대신 피팅한 거라고.

하지만 남자의 촉도 여자의 촉만큼 예민하다.

‘여자친구 선물을 가장해서 지연에게 저런 야시시한 옷을 입혀봤군!’

도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애런을 피해 뉴욕으로 왔더니 더한 늑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걸 바로 쓰레기차 피하려다 뭘 만났다고 하는 건가?

그의 머릿속에 질투라는 괴물이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그 질투란 감정을 분출할 수 없으니 더욱 답답하고 화가 나고.

그러면서 갑자기 지연이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몰골로 아침에 들어온 것도 혼날 짓인데 미안해하기는커녕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그녀가.

그런데 그녀에게 화를 낼 수도 없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행동에 대해 화를 낸단 말인가?’

하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도 몰랐던 그의 성격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뒤끝!

‘가만두지 않겠어.’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히기로 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영웅담에 취해 있는 그녀를 향해 담담하게 외쳐주었다.

“그만하지, 이제.”

“아, 재미없어요?”

없지 있겠니?

그녀의 말을 끊은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며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밀고 그녀는 쫓기다 보니 어느덧 벽에 부딪혔다. 즉,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수현은 그녀 앞에 바짝 다가섰다.

키가 큰 수현은 힐을 벗고 맨발인 그녀를 위에서 내려 보았다.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민망한 그녀가 두 손으로 살포시 그곳을 가렸다.

“뭘 그렇게 보세요?”

당황하는 그녀의 시선에 그는 매서운 시선으로 맞섰다.

그리고 짧고 굵은 한마디를 던졌다.

“벗어!”

순간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갈피를 잃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질투는 도발을 부른다는 걸.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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