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다시 찾은 뉴욕 (2)
2018.04.18.
문 앞에 바로 애런이 서 있었다.
“무, 무, 무슨 일이세요?”
갑작스런 애런의 방문에 목욕으로 녹진했던 그녀의 몸에 뾰족한 긴장감이 올라왔다.
한국에서 보았던 고객이 뜬금없이 뉴욕에서, 그것도 자신의 방 앞에 서 있으니 놀랄 수밖에.
그녀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여유로웠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요?”
그는 두 팔 벌려 캐주얼한 포옹까지 하며 그녀와의 만남을 반가워했다.
아직까지도 그가 왜 자기 방 앞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는 지연은 마냥 그를 반길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우연이라니까요? 좀 전에 로비에서 봤어요.”
“제 룸 번호를 직원들이 알려줬어요?”
이런 고급 호텔에서 미리 양해된 손님도 아닌데 허락 없이 룸 번호를 알려줄 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예외는 있었다.
“제가 이 호텔 VIP다 보니 알려주더라고요. 워낙 신분도 확실하고.”
“그래도 이렇게 찾아오시면…….”
“뭘 그렇게 경계를 해요? 한국에서 만난 사람을 뉴욕에서 우연히 봤으면 인연인 거지.”
“그래도…….”
“전 반가운데, 지연 씨는 별론가 봐요?”
계속되는 지연의 난감한 반응에 애런은 얼굴에 살짝 섭섭함을 내비쳤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그를 몰아세운 건 아닌가 싶어 미안했다.
어쨌든 그는 큰 실적을 올려줬던 고객이니까.
그녀는 경직됐던 얼굴의 긴장을 풀고 웃음을 보여주었다.
“아닙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애런은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긴장을 풀자마자 바로 공략에 들어갔다.
“반가우면 우리 술 한잔할래요?”
하지만 지연은 그 공략에 넘어가지 않았다.
“죄송한데 전 고객과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반가운 것과 영업 원칙은 다른 거니까.
애런은 그녀의 정색을 한 거절이 더 귀엽게 느껴졌다.
‘특이한 여자네? 감히 나한테 튕기다니.’
하지만 그녀가 거절할 걸 예상치 못한 애런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녀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준비해 왔다.
“따로 술을 마시자는 게 아니라 제가 아는 숍이 있는데 거기 가면 웰컴 샴페인을 주거든요. 그 숍에 가서 그걸 얻어 마시자는 얘기였어요. 사실 지연 씨한테 산 그 화장품들, 다 그 숍에 팔았거든요. 알고 보면 그 숍이 진짜 지연 씨의 고객인 거죠.”
자신이 판매한 화장품 얘기가 나오니 지연도 솔깃해졌다.
“제가 판 그 많은 화장품들이 그럼 다 그 숍에 있어요?”
“숍 고객들한테 주는 기프트용으로 쓰는 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그 숍에 가서 제품 설명 같은 걸 해줘도 좋지 않을까요? 애프터 서비스 차원에서?”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고객이 제품 설명을 해달라는데 안 갈 순 없고, 그런데 예정에도 없는 외출은 부담스럽고.
그녀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안 애런은 한 번 더 그녀를 흔들었다.
“지연 씨를 못 봤음 모를까 본 이상은 한 번 가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다음에 또 지연 씨한테 구매하고 싶지 않을까요?”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지연도 거절할 순 없었다. 그의 말이 맞기도 하고.
지연은 잠깐의 고민 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로비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곧 내려가겠습니다.”
애런은 윙크로 대신 답변을 하고 그녀를 떠났다.
그런데 막상 나가려니 지연은 수현이 걸렸다.
‘내가 밤에 외출한다는 걸 모를 텐데.’
하지만 어차피 그는 내일 아침에 온다고 했다.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벗어두었던 옷을 다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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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준비를 마친 지연은 한 손엔 제품, 한 손엔 브로슈어를 들고 애런이 기다리고 있는 로비로 내려왔다.
저 멀리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애런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완전 촌년이잖아?’
그녀는 최고급 호텔을 드나드는 세련된 여성들과는 달리 패션 기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다 낡은 청바지에 평범한 코트 차림이었다.
명품 클러치 대신 손에 든 화장품 봉지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했고.
‘형은 저런 여자가 왜 좋은 거야? 기가 막혀.’
아무리 지연이 맑고 투명한 피부, 적당히 볼륨 있는 몸매, 동양 여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까맣고 깊은 눈망울을 가진 여자라 해도 이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화려한 뉴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저 흔한 동양 여자였다.
애런은 오랜만에 놀러 온 뉴욕에 이런 초라한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다.
‘같이 어딜 가기도 창피하네.’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쭉쭉 뻗은 모델들이나 불러서 클럽이나 가볼까?
잠시 갈등이 됐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뭔가를 얻기 위해선 그만큼의 고통도 요구되니까.
대신 매너 있고 친절한 미소를 장착하고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요. 무겁겠다.”
그녀가 든 짐을 낚아채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여자는 신사를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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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런이 지연을 데리고 향한 곳은 그의 단골 편집숍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고급 백화점을 압축시켜 놓은 것처럼 세계 명품 브랜드의 옷과 신발, 액세서리들이 세련되게 진열되어 있었다.
“우와, 정말 예쁜 옷들이 많네요.”
그녀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옷들을 보며 그 고급스러움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뉴욕에 5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구경할 수 없었던 그런 옷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숍 문을 닫으려는 거 아니에요?”
뉴욕 시간으로 밤 10시가 넘기도 했고 숍의 조명이 부분적으로만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의아함에 비해 애런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그러라고 했어요.”
“네?”
“사람 많은 시간에 쇼핑하는 거 싫거든. 등도 너무 밝은 거 싫고. 직원도 딱 한 명만 남기고 나가라고 했어요.”
그의 말대로 젊은 여자 직원 한 명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일반 숍과는 다른 분위기에 지연의 기분은 썩 깔끔하지 않았다.
‘괜히 따라왔나?’
하지만 여자 직원도 있고 슬쩍슬쩍 부딪친 애런의 눈빛이 그다지 나쁜 사람 같진 않아 그녀는 마음을 놓기로 했다.
직원은 공손하게 그들을 고급 소파로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두 사람을 위한 샴페인과 핑거 푸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직원은 아주 친절한 미소로 그녀에게 샴페인을 권했다.
‘아까 애런이 마시자고 한 술이 이 샴페인이었구나.’
고급 숍에 가면 VIP를 위한 샴페인을 제공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직접 그런 최고의 서비스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기에 그녀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한국 가면 미선이한테 자랑해야지.’
그녀는 직원이 권하는 샴페인으로 기꺼이 목을 축였다.
그리고 화장품 사용 설명을 위해 가지고 온 브로슈어를 꺼냈다.
그런데 애런이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뭐죠?”
“한국에 여자 친구가 있어요. 사실 그녀에게 옷을 한 벌 사주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어요?”
“골라달란 말씀인가요?”
“아뇨, 옷은 제가 골라요. 한 번만 입어줬음 하는 부탁이에요. 마침 체구가 지연 씨랑 비슷해요.”
사실 지연은 이런 부탁을 꽤 많이 받아봤다.
대학 때 과 선배들이 자신의 여자 친구들의 선물을 골라달라고 종종 부탁했던 것.
그리고 자세한 느낌을 알기 위해 그 선물들을 착용해준 적도 있고.
그녀의 키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하고 은근한 볼륨이 있어 피팅모델로서 아주 훌륭했기 때문이다.
지연은 흔쾌히 수락했다.
우수 고객을 위해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애런은 직원에게 뭔가를 요구했고 그녀는 곧 옷 한 벌을 가지고 왔다.
“저보고 저걸 입어보라고요?”
그녀가 들고 있는 드레스에 놀라 지연은 벌어진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직원이 가져온 드레스는 빨간 미니 드레스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연이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는 과감한 스타일이었다.
신축성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입으면 몸 라인이 다 드러날 정도로 타이트했고 치마의 길이가 아무리 손으로 당겨봐야 엉덩이 라인에서 고작 이십 센티 정도 내려오려나?
단순히 입어보는 거였지만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지연의 곤란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애런의 눈은 간절했다.
“그녀가 미니 드레스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부탁드립니다.”
할 수 없었다. 해주기로 한 건 해줘야 하니까.
지연은 직원을 따라 피팅룸에 들어갔다.
그런데 커튼으로 가려졌던 피팅룸은 일반적으로 지연이 다녔던 옷 가게의 그것과는 아주 달랐다.
단순히 옷을 갈아입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뷰티숍 같던 것.
완벽한 변신을 할 수 있는 메이크업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옷에 따라 맞출 수 있도록 색깔과 종류가 다양한 하이힐도 한 면 가득이었다.
지연은 그녀의 도움을 받아 빨간색 미니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옷을 입어보는 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친절한 직원은 그녀를 조명등 앞에 앉히고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워 거절하고 싶었지만 직원은 숍의 모든 손님들에게 하는 서비스라며 정중하게 권유했다.
자신들의 옷을 빛나 보이게 하기 위한 숍의 방침이라고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직원이 이끄는 대로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이왕 돕는 거 완벽하게 도와주고 싶었다.
고객은 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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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변신하는 사이 애런은 앞에 있는 샴페인의 마지막 잔을 따르고 있었다.
술이라도 안 마시면 버티기가 힘들었다.
지연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너무나 지루하니까.
애런은 정보원으로부터 수현과 지연이 바카라 호텔로 갔다는 걸 들었다.
호텔 룸으로 지연을 올려보내고 수현은 혼자 호텔을 빠져나갔다는 것도.
수현이 없는 동안 지연을 잠시 가지고 놀 참이었다.
수현은 아직 지연이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한다.
비록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로 만들어버리면 되잖아?
그래서 그녀를 이 숍으로 데리고 왔다.
다년간 화류계에 몸담으면서 그가 여자에 대해 깨달은 진리가 있다.
럭셔리한 매너는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것.
옷 몇 벌 사주고 요즘 유행하는 핫플레이스 클럽에 데려가 여왕 한 번 만들어주면 그날 밤, 모든 여자는 그의 침대로 들어온다.
여자란 아주 쉽지.
그런데 그녀가 지금 모든 예상을 뒤엎고 있다.
‘이런 숍에 데려오면 눈이 뒤집히는 게 여자로서의 본능 아니야?’
지금까지 데리고 온 여자들 모두가 그랬으니까.
그녀들은 이것도 예쁘다, 저것도 예쁘다 감탄하면서 그곳의 옷과 구두, 액세서리를 은근 슬쩍 입어보고 신고 착용했다.
애런을 향해 사달라는 눈빛을 쏘아대고 몇몇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졸라댔다.
그런데 지연은 계속해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물론 지연도 아름다운 옷들을 보며 감탄했다.
‘와, 너무 예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숍 내부만 한 번 훑고 나서 막 바로 자리에 앉아 화장품 사용 설명을 위한 브로슈어를 꺼냈다.
‘뭐야? 진짜 일만 하고 가겠다는 거야?’
이 보석 같은 옷들과 이것들을 모두 사줄 수 있는 애런 몬테규를 앞에 두고?
바본지 숙맥인지 아니면 일부러 순진한 척하는 건지.
지연 같은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도저히 그녀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자 친구 선물을 빙자해 그녀에게 드레스를 입어보라고 권유했다.
스스로 입을 맘이 없으면 그가 입힐 수밖에.
‘일단 입고 나서는 갖고 싶겠지. 그게 사람의 본능이니까.’
대신 그녀와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소화하기 힘든 옷으로 골라주었다.
이 숍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가장 강렬하고 가장 뇌쇄적인.
여자는 자신과 어울릴 수 없는 옷들에 더 큰 욕망을 느낀다.
가질 수 없는 남자에 더욱 환장하듯이.
지연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그에게 이런 눈빛을 보낼 것이다.
‘저 이거 하나 사주시면 안 돼요?’
욕망을 갈구하는 애절한 눈빛.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사실은 지연, 여자 친구가 아닌 당신을 위한 옷이야.’
게임 끝!
결과는 뻔히 그의 승리겠지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으니 그녀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참을 수 없이 지루하다.
샴페인 몇 잔을 마시니 그 짜증은 더욱 배가되고.
‘오랜만에 뉴욕에 와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지금이라도 당장 저 촌스러운 여자를 버리고 뉴욕 최고의 모델들을 부르고 싶다.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겨우 진정시키며 마지막 샴페인을 따랐는데,
또각또각-
예리한 스틸레토 힐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녀가 그를 향해 오고 있다는 신호.
별 기대 없이 고개를 돌렸는데…… 그는 그만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놓칠 뻔했다.
예측을 찢어버리는 그녀의 눈부신 자태로 인해.
일단 그녀는 레드 그 자체였다.
빨간 미니 드레스에 맞춰 빨간 하이힐을 신고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이런 강렬한 컬러를 그녀가 소화해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빨간색은 섹시와 촌스러움 그 경계선에 있는 컬러다.
당연히 그가 생각한 그녀의 모습은 촌스러움.
하지만 그의 예상은 틀렸다. 그녀의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가 그 레드와 완벽히 매치된 것.
일단 낡은 청바지에 가려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던 그녀의 다리가 오롯이 드러났다.
그녀의 다리는 하얀 모래로 만든 쭉 뻗은 고속도로처럼 희고 길고 매끈했다.
그리고 한 치의 여유도 허용치 않는 타이트한 핏은 그녀의 볼륨감을 훨씬 더 강조했다.
한 마디로 그녀는 빨간 미니 드레스를 위해 태어난 여자 같았다.
그녀의 고혹적인 모습에 그의 심장이 성난 파도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여자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처럼.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그 앞에 섰다.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옷 어때요? 여자 친구한테 어울릴 거 같아요?”
예측 못 한 반전은 두 배의 감동을 선사한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그의 두 눈동자는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형, 이거였니?’
그는 이 밤, 놔주고 싶지 않았다.
바로 이 여자, 송지연을.
*
메트로폴리탄의 밤을 밝혔던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하나둘씩 꺼져갔다.
영원할 것 같은 뉴욕의 밤이 가고 화창한 아침이 찾아온 것.
수현은 맨해튼의 빌딩 숲 한가운데 자리한 자신의 오피스텔 창가에 서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꼭 그날 아침 같군.’
문득 지연을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는 뉴저지 알파인 공원에서 만취한 그녀를 업고 이 오피스텔로 왔었다.
잠시만 재운 후 보내려 했는데 그만 함께 하룻밤을 보내버렸다.
그날은 참 이런 악연이 어디 있나 싶었는데 지금 그는 그 악연을 스스로 데리고 다시 뉴욕을 찾았다.
‘그렇다면 우린 악연일까, 인연일까?’
지금은 뭐든 상관없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그녀와 운명이고 싶을 뿐이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끝낸 그는 팀 몬테규로서의 변신을 시작했다.
까만 그의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다.
한동안 입지 않았던 최고급 슈트를 꺼냈다.
그가 고른 슈트는 네이비색의 기본이지만 하얀 스트라이프가 들어가 품격이 있으면서도 올드하지 않았다.
익숙한 손동작으로 넥타이도 장착했다.
작은 도트 패턴이 들어간 버건디 넥타이는 하얀 셔츠의 V 라인 위에 고급스럽게 포인트 되었다.
오늘 그의 패션은 그 어떤 자리를 가도 빛날 수밖에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는 팀 몬테규로의 변신을 위한 마지막 소품을 꺼냈다.
선글라스.
채도 낮은 까만 선글라스는 그의 그윽하고 예리한 눈빛을 가려주었다.
그는 이제 다시 팀 몬테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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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몬테규로 변신한 수현은 지연이 묵고 있는 바카라 호텔로 향했다.
그녀가 묵고 있는 룸으로 올라가며 그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을 했다.
‘지연에게 내가 왜 다시 이런 모습으로 바꾸었다고 해야 하나?’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보여줬던 모습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설명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모습보다 중요한 건 그의 이름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다니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팀 몬테규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몬테규라는 걸 그녀가 알 수밖에 없을 텐데.
계속해서 숨길 순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방법은 하나다.
오늘은 그녀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만 다니는 것.
생각해보니 데리고 갈 곳이 많았다.
팀 몬테규라는 이름에 지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을 때 찾았던 차이나타운의 작은 음식점도 있었고,
뉴저지의 작은 공원 뒤에 숨은 테이블 세 개가 전부인 카페도 있었다.
잠시 모임에 갔다 온 후에는 그녀의 룸으로 뉴욕의 최상급 스테이크를 주문해줘야지.
살짝 흥이 오르면 모자 푹 눌러쓰고 다운타운의 클럽으로?
생각해보니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동안은 왜 이런 소소한 방법들을 찾지 않았을까?
그가 만났던 모든 여자들이 그의 이름을 감추기보단 내세우고 싶어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오늘 하루 그녀와 함께할 생각을 하니 시작도 하기 전에 온몸으로 작은 전율이 올라왔다.
‘최고의 추억을 만들어줘야지.’
그녀가 줄리를 키우느라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뉴욕을 보여주면서.
그녀의 룸을 향해 엘리베이터가 높이 오를수록 그의 기대도 한껏 올라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는 그녀의 방의 벨을 눌렀다.
주어진 두 개의 룸 키 중 하나를 갖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허락 없이 열고 싶진 않았다.
딩동-
한 번 더 울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늦잠을 자나?’
분명 아침에 온다고 했었는데.
그는 다시 한 번 더 벨을 울렸다.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혹시 갑작스러운 여행으로 아픈 건 아닐까?
수현은 카드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지연 씨?”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마지막으로 침실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한 번도 누운 흔적이 없이 침대는 깨끗했다.
“지연…….?”
그녀는 전날 밤, 그곳에 없던 것이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