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오늘, 혼자 아니야
2018.04.11.
처음이었다.
수현이 지연이 애런의 여자라는 전제 자체에 의심을 품은 건.
애런은 자기 여자 지연을 이렇게 묘사했었다.
‘지연이가 보기보다 끼가 있어. 난 그냥 술이나 몇 잔 사주고 헤어질라 그랬는데 그날 밤 날 어찌나 유혹하는지. 온몸 투혼하더라니까.’
핫플레이스에서 남자 사냥을 하고 몸으로 유혹하는 여자.
‘여자가 그리울 때마다 한 번씩 한국에 와서 그녈 만났지. 지연이랑의 밤은 정말 임팩타클해. 아, 정말 자세히 설명할 수도 없고.’
유린에 가까운 대접을 받으면서도 남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몸을 허락하는 싸구려 여자.
‘딱 한 번 마주친 적은 있었는데 돈이 아니라 자꾸 사랑을 요구하기에 그냥 버렸어. 우리 같은 돈이 넘치는 부잣집 남자한테 사랑까지 바라는 건 멍청한 일이잖아?’
사랑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매달리는 자존심 없는 여자.
그런데……
긴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가 본 지연은 전혀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도움을 주려는 그에게 ‘남한테 민폐 끼치기 싫습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모든 여자가 유혹하고 싶어 하는 수현에게 단 한 번도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미선의 말에 의하면 이사인 민희 앞에서도 취직 불가를 불사하고 자기 자존심을 지켜냈다고 했다.
그리고 겨우 일곱 세트의 화장품을 팔면서 이렇듯 진심으로 노력을 한다.
그런데 이런 여자가 어떻게 애런이 말한 그녀란 말인가?
순간 로버트가 수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애런 도련님을 믿지 마십시오.’
당시엔 수현은 전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붓동생이지만 한집에서 20년을 넘게 살아온 동생이다.
그런데 어떻게 동생을 믿지 않을 수 있지?
‘세상사람 모두를 믿어도 애런 도련님만은 의심하셔야 합니다. 그는 수현 도련님과 핏줄부터 다른, 무서운 남자입니다.’
로버트가 이렇게까지 얘기했지만 수현은 한 번도 애런의 얘기들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조금의 과장이나 숨김이 있을지라도 자신에게만큼은 진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엄마 대신 늘 그를 감싸고 그가 친 사고를 수습해왔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해?
때문에 애런이 지연이 자기 여자라고 말했을 때도 일말의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믿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하지만 지금 애런의 얘기들이 의심이 간다.
지연은 애런이 말하는 그런 여자가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면 지연, 너는 누구니?
그녀를 보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 혼란이 오고 있었다.
그녀의 진짜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수현과 지연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재래시장을 나왔다.
수현의 머릿속엔 지연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했지만 그녀와 그런 얘길 나눌 시간이 없었다.
바로 미선이 안내해준 다음 고객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고객들은 미선이나 다른 카운슬러들이 알고 있는 고객들은 아니었다.
유명 성형외과 부인, 대학 교수 부인, 강남의 큰 건물 몇 개를 소유한 자산가의 부인 등 민희가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VVIP들.
일단 두 사람을 부른 장소도 좀 전 재래시장 같은 편안한 곳이 아닌 강남의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스파였다.
보증금 3억에 일 년치 운영비로도 삼천만 원을 넣어야 들어갈 수 있는 대한민국의 0.001%들만의 장소였다.
들어가는 과정부터가 쉽지 않았다. 철저한 신분 검사에 약속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장이 가능했다.
직원의 안내로 두 사람이 가게 된 곳은 고객들이 스파 후에 찾는 휴게실.
막 스파를 마친 사모들 다섯이 베스로브를 입은 채 마리아주 프레르의 블루 티를 마시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송지연입니다.”
“진수현입니다.”
두 사람의 공손한 인사에도 사모들의 고개는 조금도 내려가지 않았다.
“응…….”
짧은 답례와 함께 지연과 수현을 위아래로 훑을 뿐.
다른 분위기긴 하지만 조금 전 재래시장에서 아주머니들을 상대해봤던 지연은 조금 더 자신 있게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수현은 좀 전과 똑같은 패턴으로 한 발 빠져 뒤로 물러났다.
암묵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법칙이 생긴 듯했다.
지연이 나서고 수현이 지켜보는.
지연이 그녀들 앞에 서서 적극적으로 제품 소개를 하려 하자 한 사모가 손가락을 까닥 튕겼다.
저리 비키라는 신호였다.
영문 몰라 멀거니 보고 있는 지연을 향해 한 사모가 실소를 보냈다.
“눈치 없긴. 우린 강민희 이사가 남자 뷰티 카운슬러가 있다고 해서 오라고 한 거야. 아가씨는 저리 빠지고 그쪽이 와요.”
제품을 잔뜩 들고 그들 앞에선 지연은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필요 없는 짐짝이 되었다.
‘어떡하지?’
사실 지연도 이런 상황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뭔가 시도라도 하고 무안을 당했음 다시 시도를 하든 변명을 하든 뭐라도 해볼 텐데 한 거라곤 밝은 인사밖에 없는데 외면을 당하다니.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설명은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저분은 오늘 처음 나오셔서…….”
하지만 지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조금도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참 말귀 못 알아듣네……. 우리가 겨우 이깟 국산 화장품 사겠다고 여기 부른 줄 알아? 강민희 이사가 엄청난 직원 하나 들어왔다고 하니까 한 번 보겠다고 한 거잖아.”
심지어 수현에게도 손가락질을 했다.
“어이, 총각이 이리 와봐.”
“듣던 대로 최고네. 화장품 판매원으로 있긴 아까워.”
그들은 마치 남자 도우미를 고르듯 수현의 전신을 훑었다.
그녀들의 희롱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자기도 스파 할래? 제품은 스파 끝나고 술 한잔하면서 사줘도 되고. 어차피 가지고 온 건 우리가 다 사줄 테니까.”
“총각이 언제 이런 고급 스파 받아보겠어? 그것만으로도 오늘 일당은 챙긴 거다.”
“스파 혼자 하기 심심하면 우리랑 같이하든지.”
“어머, 그거 좋다!”
자기들끼리 깔깔대며 재미있어 했다.
지연은 이 상황에서 수현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들이 수현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전 재래시장의 상인들과는 달랐다.
그분들은 생전 처음 보는 고급스럽고 훤칠한 수현을 마치 연예인 보듯, 동경하는 의미의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곳의 여자들은 아니었다.
질척하고 끈끈하고 무례하게 수현을 취급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왔는데 이런 봉변까지 당하게 할 수 없지.’
대신에 화를 내고 잘못을 지적하기보단 부드럽게 그들의 행동을 멈추기로 했다.
그래도 고객이니까.
지연은 두 손을 모으고 애교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고객님들~. 진수현 씨 욕심내지 마세요, 제 남자예요. 하하. 오늘 제품 설명은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술도 제가 더 잘 마실 수 있어요.”
‘내 남자’라고 하면서 경계심을 주고 싶었다. 그래도 품격 있는 사모들이 남의 남자에게 지분거릴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건 지연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녀들은 지연의 말에 오히려 더 수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머! 난 남의 남자 뺏는 게 제일 재미있더라.”
“우리 남자 사원 실망이네. 그 정도 외모로 겨우 사내 연애야?”
“한 달 얼마 벌어? 내가 세 배는 줄 수 있는데. 대신 조건은 이 아가씨랑 헤어지는 거, 어때?”
하하하하하-
지연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객이라도 아닌 건 아니니까.
“저기요, 고객님들!”
그녀는 조금 전 보였던 애교 있는 얼굴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정색을 하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때,
“잠깐!”
한 발 뒤에서 아무 소리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수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큰 걸음으로 지연을 재치고 그녀들 앞에 섰다.
“알겠습니다. 저랑 말씀하시죠. 저를 그렇게 원하신다면.”
그는 사모들을 향해 예의를 갖추듯 짧은 목례를 했다.
공손한 몸짓이었지만 훤칠한 그의 키가 만든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들을 덮자 목젖을 내보이며 웃고 있던 사모들은 입술을 꾹 닫았다.
순간적으로 그가 뿜는 강한 기운에 여자들이 얼어버린 것.
수현은 긴 팔로 지연의 어깨를 두르고 그녀 귀에 바짝 입술을 댔다. 속삭이듯이.
“어떻게 하는지 봐. 니 남자가.”
좁은 공간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그의 속삭임은 사모들 귀까지 전해졌고 그의 나긋한 중저음에 그녀들의 눈빛에 설렘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수현이 마치 자기 귀에 속삭인 것 같은 착각까지 했다.
‘저 남자가 내 남자 되면 나한테도 저렇게 해주나?’
기대를 품고 상상하면서.
지연을 뒤로 보낸 수현은 자상했던 말투를 풀고 본격적인 비즈니스를 위한 담담하고 단단한 음성으로 바꾸었다.
“화장품 구매를 원하신 게 아니라면 제가 고객님들께 뭘 해드리면 될까요?”
한껏 희롱을 일삼던 그녀들은 막상 수현이 원하는 걸 묻자 심장에 지진이 난 듯 벌렁거렸다.
무슨 얘길 해야 하나?
은근 그의 냉랭한 표정에 겁이 나기도 하고.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피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으니까.
“제가 스파에 매일 오는데도 피부가 건조하네요. 최고 비싸단 화장품은 다 써보는데.”
“전 한 달에 한 번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다닌다는 일본에 있는 피부과를 가요. 그 돈만 천만 원이 넘는데 그래도 연예인 피부는 안 되던데요? 가는 횟수를 늘려야 하나?”
“젊을 땐 하얗단 소리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자꾸 피부색이 칙칙해져요. 골프를 많이 다녀서 그런가? 선크림으로 무장하고 다니는데도 그러네.”
사모들이 의사에게 상담받는 환자들처럼 얌전하고 공손한 말투로 자신의 문제점을 얘기하자 수현은 정말로 의사처럼 그녀들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의 응시에 그녀들은 사랑의 시선이라도 받은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예쁘게 보이려고 눈도 깜박이고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고 꼬았던 다리 위치를 바꾸기도 하면서.
관찰을 끝낸 수현은 그녀 모두를 향해 선고하듯 짧은 답변을 내놓았다.
“끊으시죠.”
아무 설명 없이 툭 던진 그의 말에 그녀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뭘요?”
선고를 끝낸 수현은 판결의 이유를 설명했다. 배려 없고 온정 없는 말투로.
“술도 끊고 담배도 끊으세요. 두 가지는 피부의 적이니까.”
“!”
“아무리 얼굴에 수천만 원 퍼부어도 생활 습관이 안 좋으면 피부가 좋아질 리 없습니다. 술 드시고 화장 안 지우고 그냥 주무시죠? 피부 재생은 밤에 됩니다. 노폐물 덕지덕지 쌓인 얼굴에 재생이 되겠습니까?”
무차별한 공격을 받은 그녀들은 소심하게 항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언제 그랬다고…….”
하지만 수현의 상담을 가장한 공격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런 스파도 자주 하지 마시고요. 몸에 수분 다 빠집니다. 차라리 운동을 하세요. 그래야 노폐물이 땀으로 배출되니까요.”
그리고 제일 부자연스러운 얼굴을 가진 사모에게 시선을 옮겼다.
“보톡스, 필러, 그런 것도 많이 하지 마세요. 마취 크림 그렇게 발라대면 피부에 좋겠습니까?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
수현의 적나라한 지적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모두를 향했다.
“비싼 제품, 소위 진액이라고 부르는 제품들 오래 쓰지 마세요. 피부가 내성이 생겨서 점점 더 고농도의 제품을 쓰지 않으면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단백질제 바르지 말고 스테이크 한 장 더 드시고 비타민제 바르는 대신 레몬주스 한 잔 더 마시세요. 그럼 지금처럼 추하진 않습니다.”
지금처럼 추하진 않다……. 그럼 지금 추하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런 인신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녀들의 입은 풀로 붙인 것처럼 붙어버렸다.
한마디도 틀린 게 없었으니까.
제대로 박살난 것이다.
그녀들은 이제 수현이 이 자리를 떠나줬으면 했다.
더 이상 함께 있어봤자 희롱은 불구하고 체면조차 차리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툭툭 서로의 발을 차며 눈치만 보던 사모들 중 한 명이 용기 있게 고개를 들었다.
“상담…… 고마웠습니다. 이제 그만 가주셔도 될 거 같네요.”
수현은 주머니에서 한 장의 명함을 꺼냈다.
“할 말이 있으신 분은 이리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사모들은 그의 연락처라고 생각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그래도 본심은 계속 우리랑 연락하겠다 이거지?
서로 명함을 가지려 앞다투어 손톱의 날을 세우던 와중,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게 뭐예요? 로버트 앤 앤더스? 로펌?”
수현은 지금까지 보였던 공손함에 차가움과 싸늘함, 딱딱함을 더해 그녀들을 내려 보았다.
“제가 이용하는 로펌 연락처입니다. 아까 저한테 하셨던 발언들 기억하시죠? 엄연한 성희롱입니다. 이 자리에 나가는 즉시 고소 들어갈 테니 할 말이 있으시면 제 변호사한테 하시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제 담당은 로버트 알리입니다. 그 로펌 대표죠.”
한 사모가 덜덜 떨며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이 로펌 미국에서 되게 유명해. 한국에도 파견 나온 변호사도 있고. 우리 남편이 국제 변호사라 이 정도로 유명한 곳은 다 알지.”
그녀의 확인에 사모들의 낯빛이 방금 스파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후끈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기들끼리 우왕좌왕하는 사이 수현은 조금 전 지연이 들고 있었던 제품들을 챙겼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무심하게 뒤돌아 지연을 보았다.
“나가자. 덥다.”
지연은 그냥 이렇게 나가도 되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함께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 사모가 수현을 잡았다.
“잘못했어요!”
거의 무릎을 꿇듯 두 무릎을 움츠렸다.
한 명이 사과하자 다른 한 명도 나섰다.
“저도 잘못했어요. 우리 애 아빠가 이런 걸로 고소당한 거 알면 나 죽어요.”
다음엔 다섯 명 전원이 다 일어나 두 손으로 빌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저 제품들 다 사드릴게요. 아니 더 살 수도 있어요.”
“우리 애 아빠 명성에 고소당하면 신문에 나요. 용서해주세요. 합의해드릴게요.”
고고했던 자세는 어디 가고 절박하고 절실하게 수현에게 빌고 있었다.
수현은 지연의 어깨를 잡고 빌고 있는 그녀들 앞에 세웠다.
“정중히 사과하시죠. 제 여자한테. 그 모습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고소할지, 용서할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섯 명의 사모들이 지연 앞에서 무릎을 꿇기까진.
.
.
.
수현과 지연은 뷰티 센터로 돌아왔다.
VVIP 고객들을 상대로 한 판매는 사과를 받고 합의 대신 제품을 팔며 조용히 마무리됐다.
하지만 지연은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이사님이 직접 관리하는 VVIP들이라 그랬잖아요. 뒤탈은 없을까요?”
수현은 별걱정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걱정은 덜어주고 싶었다.
“무례한 건 나였으니까 내가 책임질게. 지연 씬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뭘.”
“그래도 우리는 팀인데…….”
우리는 팀…… 내 남자……
사실 지연이 큰 뜻을 담고 뱉은 말이 아니라는 걸 수현도 안다.
수현을 여자들의 희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내 남자라 했던 것이고, 일적인 관계로 볼 때 정말로 팀이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한 것이고.
하지만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은근히 그의 심장을 흔들어놓는다.
별말 아니라는 걸 알면서……
어디 가서 무슨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 잘하는지.
오전부터 시작된 그녀의 정체에 대한 의문, 그녀가 내뱉는 오묘한 단어들로 수현의 마음속엔 인생 최대의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연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정말 미국 최고의 로펌 변호사가 수현 씨의 변호사?’
지연도 재력가나 명망가에는 평소에도 만일을 대비한 고문변호사나 로펌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수현이 그 정도의 재력이나 명예가 있나?
미국 최고의 로펌의 대표를 변호사로 둘 정도로?
분명 수현은 돈이 필요해서 지연을 그 집에 들이는 거라고 말했다.
혼자 집을 유지할 정도의 돈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비싼 변호사를 두고 있을까?
그냥 해본 말인가?
아니면…… 정말로 뭐가 있는 사람인가?
지연은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 그 유명한 로펌이라는 데 말이에요. 정말 수현 씨 변호사가 거기 있어요?”
수현은 아차 싶었다.
‘그것까진 생각을 못 했군.’
못된 아줌마들 혼내주겠단 생각만 했지 자신의 변호사를 밝히는 게 지연의 의심을 살 거란 생각은 못 했으니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나 고심하는 찰나 고맙게도 수현의 휴대폰이 울려주었다. 로버트였다.
그는 지연을 피해 밖으로 나갔다.
“어, 로버트. 무슨 일이야?”
“오늘 밤, 인천공항에 전세기 한 대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그걸 타고 주말은 뉴욕에서 보내시죠.”
“왜?”
“옥스퍼드 출신 기업인 2세와 3세들의 모임이 내일 밤 뉴욕에서 열립니다. 줄리아나 후계자로 지목되시고 처음 있는 모임입니다. 꼭 참석하시라는 회장님의 분부입니다.”
1년이란 자유의 시간을 받긴 했지만 해야 할 건 해야 했다.
“알았어.”
오늘 밤 그는 뉴욕으로 가야 한다.
다시 팀 몬테규가 되어.
.
.
.
한 번 끊긴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진 않았다.
지연은 더 이상 로펌 변호사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수현도 모른 체했다.
대신 다른 말로 돌렸다.
“오늘 밤부턴 혼자 있겠네, 집에.”
“네?”
오늘 밤 인천공항에 전세기가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팀 몬테규를 위한.
하지만 그걸 지연에게 말할 순 없었다.
“어디 갈 데가 있어.”
정체 모를 사람.
그녀는 별다른 질문 없이 발랄하게 대답했다.
“주말에 집 싹 청소해놓고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내가 물어볼 자격은 없으니까, 생각하면서.
*
수현은 뉴욕으로 갈 간단한 짐을 쌌다.
모임을 위한 슈트나 구두는 뉴욕에 가서 준비하면 되지만 늘 보던 책이나 집기류는 챙길 필요가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애런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애런은 설명 없이 그의 스케줄에 대해 얘기했다.
“오늘 밤 뉴욕에 간다며? 기업인 2, 3세들의 모임.”
예전 같으면 별생각 없이 대답해줄 질문이었지만 이번엔 그의 질문이 불쾌하게 귀에 걸렸다.
내 스케줄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하지만 순진하게 그걸 애런에게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수현도 이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경계하기로 했으니까.
“그래야 할 거 같아. 회장님 지시야.”
“잘 다녀와. 줄리아나 후계자로서의 첫 공식 행보, 성공리에 끝내길 바랄게.”
진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알 수 없는 말투.
하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고맙다. 별말 없음 끊을게. 서둘러야 하니까.”
꺼림직 한 촉이 있을 땐 최대한 대화를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수현이 막 전화를 끊으려는데 애런이 그를 잡았다.
“잠깐!”
“왜?”
“그럼 오늘 밤 지연이 혼자 있겠네? 집에?”
“!”
지연이 집에 혼자 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애런은 또 아무 설명 없이 일방적인 인사를 했다.
“그럼 뉴욕 잘 다녀와.”
그리고 뚝 끊긴 전화.
수현은 전화를 든 채 한참을 내려놓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들이 썩은 담쟁이처럼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지연이 혼자 집에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불길했다, 찝찝했다, 애런이 남긴 한마디가.
짐을 챙기던 그의 손에 힘이 빠져버렸다.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냥 참고 넘어가려 했다. 애런에겐 늘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순간 ‘지연’이란 이름이 그의 머리에 공명했다.
그 공명은 분노라는 감정을 일으켰다.
동생이지만, 안쓰럽지만, 계속해서 참고만 있을 순 없다고 그의 심장에 외쳤다.
지키고 싶은 건 지켜야 한다고.
그는 다시 애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형, 서둘러야 된다더니 왜?”
수현은 딱 한 가지를 먼저 확인했다.
“너, 지연 씨 사랑하니?”
“풋!”
1초의 틈도 없이 애런은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사랑한대? 결혼한댔지?”
차마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아니, 듣고 싶은 말이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수현은 지연이 있는 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고하듯 애런에게 말했다.
“오늘 혼자 아니야, 지연이.”
“뭐?”
“나하고 뉴욕 가.”
“!”
두 형제의 싸늘한 숨결이 휴대폰 사이로 엉켜버렸다.
한 여자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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