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19화 (19/77)

제19화. 누구냐 넌

2018.04.07.

수현은 지연의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녀의 종착역은 그의 가슴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 안쪽으로 끌어당긴 것.

“지연 씨가 가져가야 할 게 있어.”

영문을 모르는 지연은 까만 눈동자를 동그랗게 확장했다.

“뭐요?”

수현은 턱짓으로 침대 프레임에 걸려 있는 지연의 청바지를 가리켰다.

“어머! 왜 저게 여기에…….”

그렇게 찾던 바지가 상상도 못 한 곳에서 발견됐다.

부끄러운 그녀의 얼굴이 와인 빛보다 붉어졌다.

“혹시 제가 취해서 이 방에…….”

절대 아니길 간곡하게 바라는 눈으로 지연은 그를 올려보았다.

‘맞아, 그날 밤, 내 품을 파고들었던 너의 흔적.’

하지만 수현은 솔직하게 얘기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일은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으니까.

“복도 끝에서 발견했어. 바로 주려고 했는데 줄리 없을 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엄마가 칠칠치 못해 보이잖아.”

“아…….”

그렇지, 칠칠치 못하지. 술만 마시면 바지 벗어 아무 데나 던지는 버릇.

다행히 강력한 귀소본능 덕에 단 한 번도 집 외의 다른 곳에선 그런 적이 없었는데 매번 수현에게만 이런 모습을 들키고 만다. 뉴욕에서도, 지금도.

‘아이, 창피해.’

지연은 딱히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들릴 듯 말 듯 소심한 사과를 한 후 청바지를 들고 후다닥 방을 나갔다.

수현은 그녀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는 방문을 보며 혼잣말했다.

“저렇게 숙맥이면서.”

순간 씁쓸한 궁금증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저런 숙맥이 어떻게 애런이랑 살아갈 수 있을까?

매일매일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긴장과 불안의 연속일 텐데.

동시에 또 다른 궁금증도 생겼다.

‘그래서 짜릿한가? 그래서 애런을 좋아한 건가?’

걱정과 질투…….

묘하게 두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피어올랐다.

“휴…….”

저도 모를 뜨거운 한숨이 잇새로 퍼져 나왔다.

오늘 밤도 편한 잠을 이루긴 힘들 것 같다.

*

다음 날,

드디어 수현과 지연, 두 사람이 함께하는 첫 출근 날이었다.

뷰티 센터를 향하는 지연의 발걸음에 어제보다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수현 때문이 아니었다. 줄리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두 사람의 출근길에 줄리는 없었다.

어젯밤 늦게 지연이 줄리를 집에 데리고 왔지만 이른 아침 다시 금화댁이 데리고 간 것.

아침 일찍 시청 앞 스케이트장에 놀러 가기로 줄리와 약속을 했다고 했다.

‘아침 일찍 안 가면 줄 서야 해. 빨리 가서 아침 먹고 우린 놀 거야.’

평생 아이가 없던 게 가슴에 사무치듯 한이 서린 금화댁이라지만 이렇게나 줄리를 잘 봐줄 순 없었다.

심지어 봉수와 줄리 사이에 약간의 발전도 있었다.

그동안은 봉수가 퇴근하기 전 얼른 줄리를 지연에게 돌려보냈는데 어제 처음 퇴근 후까지 줄리와 함께 집을 지켰다.

봉수와 줄리가 마주치게 만든 것.

봉수는 딱히 줄리에게 눈길은 주지 않았지만 슬쩍 금화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우리 지연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보수가 부족하면 제가 더 드릴게요.’

지연이 줄리를 키워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금화댁을 통해 봉수의 얘기를 전해 들은 지연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빠가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나 그 마음은 어쩔까 싶어 가슴이 쓰렸다.

또 아빠와 줄리의 관계에 대한 노력을 자신이 아닌 제삼자, 금화댁이 해주고 있다는 것도 편친 않았다.

‘과연 내가 줄리를 키울 자격이 있을까?’

죄책감은 줄리의 엄마가 되기로 했던 그 단단한 결심까지도 흔들었다.

하지만 지연은 고약한 현실을 마냥 탓하고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빨리 현실을 인지하고 헤쳐 나갈 대안점을 찾는다.

그녀는 늘 그래왔고 그게 지연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동생 지우가 죽었을 때도, 줄리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도,

그녀는 슬퍼하기보단 극복하기 위해서 뼈와 살이 떨어져 가는 아픔을 참아냈다.

문태규가 자신과 줄리를 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도 그녀는 딱 하루의 만취로 슬픔을 끝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줄리를 잘 챙기지 못한다는 죄책감으로 하루하루를 살 순 없다.

대신 빨리 돈을 벌어 안정을 찾는 것이 줄리를 위하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가슴에 각인시켰다.

그녀는 수현의 팔을 끌며 발길을 재촉했다.

“오늘 우리 잘해봐요!”

지연은 의지를 불태우며 뷰티센터로 향했다.

.

.

.

힘찬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왔지만 좋지 않은 소식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선이 오늘 판매를 위해 만나야 할 사람들을 소개하는데 그녀 왈, 거의 최악이란다.

“사실 뷰티 카운슬러들이 거의 포기한 분들이에요. 굉장히 인심 좋고 친엄마처럼 따뜻한 분들이긴 한데 그분들한텐 만 원짜리 토너 하나 팔기도 힘들어요, 엉엉.”

도대체 어느 정도로 지갑을 열지 않는 고객들이면 미선이 저렇게까지 앓는 소리를 할까?

수현과 함께하는 일정이기에 지연은 더 걱정스러웠다.

‘어제처럼 한 번에 반 트럭이나 되는 화장품을 사주는 고객은 흔한 게 아니구나…….’

하지만 고생스럽게 돈 버는 거에 대해선 이력이 난 지연이었다.

그녀는 뉴욕 벼룩시장에 가끔 자신이 직접 제조한 화장품을 판매하곤 했었다.

하나에 3달러도 안 하는 물건을 팔기 위해 한 시간을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친 적도 있다.

그런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됐다.

“걱정 마! 완판시켜 올 테니까.”

어려운 고객이라니 오히려 의욕이 솟구쳤다.

두 사람은 함께 미선이 안내한 곳으로 향했다.

.

.

.

수현과 지연이 도착한 곳은 종로 근처의 한 재래시장이었다.

그곳에서 빈대떡, 족발, 김밥을 파는 분들이 고객이었던 것.

상인 일곱 명이 두세 달에 한 번씩 오드리 화장품의 카운슬러를 불러 화장품을 구매해 오고 있었다.

수현과 지연은 상인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는 한 빈대떡집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지연이 밝게 웃으며 인사하자 정겨운 표정으로 아주머니들도 그녀를 반겼다.

하지만 분위기는 화장품과는 관계없는 동네 곗날이나 야유회였다.

제품을 펼칠 공간도 없이 단상에는 빈대떡과 김밥, 족발, 막걸리가 가득했다.

아주머니들은 화장품 구매를 구실로 매달 한 번씩 가게 음식들을 가지고 모여 아침부터 막걸리를 마시는 것.

이미 막걸리 두 병은 동이 나 있었고 그녀들의 얼굴도 거나하게 붉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지연이 멀거니 웃고만 있자 그녀 앞으로 수현이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줄리아…… 오드리 화장품 직원 진수현입니다.”

하마터면 줄리아나 총괄경영팀 팀장 팀 몬테규라는 소개가 습관적으로 나올 뻔했다.

그의 공손한 인사 한 번에 아주머니들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그가 주는 차갑고 담담한 포스가 아주머니들의 어수선한 수다를 제압한 것.

하지만 수현은 더 이상의 무엇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의욕에 찬 지연과는 달리 이곳에 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까.

취직이 그가 한국에 온 목표도 아니었고 그걸 떠나서 그는 이미 세계적 기업 줄리아나의 후계자다.

그런데 굳이 이곳에서 비즈니스에 힘을 쏟아야 할까?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심지어 재래시장이란 장소, 낮부터 한 잔씩 걸친 상인 아주머니들이 편하지도 않았다.

그는 세계적 기업의 포스트 CEO로서 맨해튼 최고의 사무실,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입혀준 고급 정장을 한 사람들과 수백만, 수천만 달러를 두고 협상을 해왔다.

마음속으론 칼을 갈면서 겉으론 알 수 없는 미소를 품고서.

그런데 후덕한 옷차림, 이미 막걸리 몇 잔 걸친 달아오른 얼굴들, 치열한 비즈니스가 아닌 아줌마들끼리 마실 나온 분위기 가득한 이곳은 그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딱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수현은 일단 빠져 있기로 했다.

‘지연에게 방해만 되지 않으면 되지.’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한쪽 벽에 서서 굳게 팔짱을 끼었다.

다행히 지연도 그에게 의지할 생각이 없었다.

수현이 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회사에 취직했다는 걸 아니까.

그가 아주머니들의 분주했던 시선을 깔끔한 인사 한 번으로 정리해준 것만도 감사하며 홀로 모든 걸 해결하기로 했다.

그녀는 적극적인 몸짓으로 아주머니들 앞에 다가섰다.

“자, 우리 사장님들~. 이제부터 제가 오드리 화장품에서 새로 나온 패키지 소개해드릴게요.”

행사 진행자처럼 시원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그녀는 제품 소개를 시작했다.

“이 세럼은 천연 성분으로 만들어진 건데요, 비타민 C, E 그리고 페룰릭 성분이 함유돼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친근했지만 그 내용은 전문가의 지식을 담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차분하고 섬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수현의 눈썹이 찡긋 올라갔다.

‘제법인데?’

어제 밤새 공부를 하겠다더니 그냥 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 외우고 익혔는지 조금의 막힘도 없이 제품의 성분뿐 아니라 기대할 수 있는 효능과 효과에 대해 막힘없이 풀어냈다.

심지어 중간에 넣는 코멘트는 재치 있고 유머러스했다.

“처음 바르시면 따가워서 욕 나와요. 그래서 이름하여 욕세럼. 남편 미울 때 남편 얼굴에 발라주세요.”

“까르르르~”

덕분에 아주머니들의 어색했던 표정들이 점점 풀리며 집중도는 높아갔다.

지연은 그렇게 30분 이상을 제품 설명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고객들이 완전히 그녀의 설명에 빠져들었다 싶을 때 눈빛을 반짝이며 마무리로 들어갔다.

“원래는 세 제품 포함한 패키지로 21만 원인데 사장님들에겐 특별히 16만 원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두 개 하시면 만 원씩 빼드리고요. 대박이죠?”

마치 화룡정점을 찍듯 ‘대박’ 소리에 힘을 주면서.

그런데 그녀의 쾌활한 화술의 효과는 딱 ‘시선 집중’까지였다.

막상 돈 얘기가 나오고 제품을 권유하니 아주머니들의 엉덩이가 슬금슬금 뒤로 빠지는 것.

지연의 얘기는 재밌고 솔깃했지만 지갑을 여는 건 힘들다, 그 뜻이었다.

서로 서로 눈치를 보며 자기 앞의 제품을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슬쩍 밀어놓기까지 했다.

뭔가 잘못했나 싶어 의기소침해진 지연에게 한 아줌마가 입장을 전달했다.

“사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고가의 제품을 사긴 좀 그래. 옷이나 신발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기껏 발랐는데 피부가 다 먹어버리는 화장품은 사기에 좀 꺼려지더라.”

이건 모두의 뜻인 듯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줬는데. 담달 곗돈 타면 하나 살게.”

지연의 열띤 설명으로 후끈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그녀의 입술도 소심하게 닫혔다.

더 밀어붙일 수도, 빠질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

그때 한 아주머니가 얼굴에 미안함을 잔뜩 품고서 지연 앞으로 빈대떡과 마약 김밥을 밀어주었다.

“대신 이거 먹고 가, 수고했는데.”

참 허무한 결과였다.

기껏 사겠다고 불러다가 열심히 제품 설명을 했더니 음식만 먹고 가라니…….

지연의 손이 음식 쪽으로 선뜻 나가지 않았다.

음식을 먹기 시작하며 분위기를 끊으면 다시 제품 얘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몇 걸음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수현은 궁금했다.

‘지연이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낼까?’

아주머니들 곤란하게 좀 더 강하게 권유할까?

아님 지체했던 시간이 아까워 음식을 거절하고 일어날까?

사실 그녀가 저 음식들이 당길 정도로 배고플 린 없다.

아침 식사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줄리가 남긴 음식까지 싹싹 비우는 걸 수현이 보았으니까.

‘그냥 포기하고 나가자고 해볼까? 못 판 제품은 내가 사주는 걸로 하고.’

민망한 그녀가 안쓰러워 막 수현이 나서려는데,

“잘 먹겠습니다!”

지연이 자기 앞으로 밀어준 음식을 앞으로 당기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침도 못 먹고 왔는데 잘됐네요.”

그러더니 김밥은 손으로 집고 빈대떡은 젓가락으로 쭉쭉 찢어서 입에 넣기 시작했다.

입안 가득 음식을 넣는 모습이 흡사 이틀은 굶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게걸스럽고 추하다기보단 상당히 귀엽고 복스러웠다.

먹방 찍는 예쁜 유튜버 같달까?

아주머니들도 기대 이상으로 잘 먹는 그녀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음식을 권하긴 했지만 제품을 못 사주는 게 미안해서였을 뿐, 이렇게까지 맛있게 먹어줄 줄은 몰랐던 것.

그녀는 그녀에게 집중된 아주머니들을 향해 흡입 중간 중간 수더분한 추임새까지 넣었다.

“이건 마약이야, 마약.”

그녀를 보는 아주머니들의 입가에 슬슬 엄마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파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고 게다가 마약이라는 표현까지 하며 극찬하니 고맙기도 하고 예뻐 보일 수밖에.

아주머니들은 지연에게 음식을 더 밀어주며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우리 딸도 전자제품 영업하는데 맨날 이렇게 굶고 다니더라고.”

“보니까 쫄쫄 굶고 다녔네. 우리한테 잘 왔지?”

“하루 종일 다녀도 우리 같은 고객은 없을 거야. 제품은 못 사줘도 밥은 주잖아.”

아주머니들의 귀여운 생색에 지연은 입안 가득 음식물을 넣은 채 큰소리로 외쳤다.

“밥값으로 샘플 왕창 드리고 가겠습니다!”

“이야~~~~~~~”

아주머니들의 박수소리가 터졌다.

제품도 안 사줬는데 샘플을 많이 주고 간다니 신날 수밖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수현도 하마터면 함께 박수를 칠 뻔했다.

‘아주 똑똑한 여자네, 지연은.’

경영의 이론부터 실무까지 세계 최고의 교육을 받은 수현에게도 지연의 이 대응 방식은 적절했다.

아주머니들이 구매를 꺼려 하는 상황에서 지연이 부담스럽게 계속 권유를 했다면 한두 개 정도는 팔았을지 모르겠지만 일회성이었을 것이다.

부담되는데 미안해서 사게 만드는 건 단 한 번의 판매밖에 이루지 못하니까.

하지만 지연은 그들이 미안해하지 않게끔 대접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고 오히려 자신이 신세 져서 보답하는 양 샘플을 주겠다고 했다.

고객에게 미안함이나 부담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대신 고생하는 딸 같은 친근감을 준 것.

이제 슬슬 한두 명의 고객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수현은 예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아주머니가 손을 들었다.

“고생도 하는데 내가 하나 살게. 마침 토너가 똑 떨어졌으니까.”

한 명의 고객을 움직이면 다른 고객들의 마음도 흔들린다.

“그럼 나도 그 욕세럼인가 하나 살까? 남편이랑 같이 쓰게?”

두 명의 움직임은 전염처럼 퍼진다.

“나도 하나.”

“나도 하나.”

일곱 명의 고객들이 경쟁자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연은 그제야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프로 판매자로 변신했다.

“제가 소개한 라인이 조금 비싼 편이에요. 이 밑의 라인 보여드릴게요. 사실 제가 분석해보니까 성분은 비슷하더라고요.”

그들의 자존심도 긁지 않고 존중해주면서 다시 제품 쪽으로 이슈를 돌렸다.

‘저 여자한테 저렇게 현명한 면이 있었구나.’

수현은 그저 하나둘씩 드러나는 그녀의 매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의미 없이 따라왔던 이 자리에 슬슬 재미가 느껴졌다.

그녀의 판매 전략을 보는 것이 의외로 공부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설 생각은 없었다.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지연이니까.

그런데 그때 아주머니들의 고개가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들은 다짜고짜 합창을 하듯 그에게 물었다.

“사실이에요?”

“…… 뭐가요?”

“이 아가씨가 그러는데 총각은 이 화장품 쓰고 피부뿐 아니라 몸도 좋아졌다면서요?”

“…….”

수현의 눈동자가 빠르게 지연을 쏘았다.

그녀는 눈꼬리는 내리고 입꼬리는 올린 채 얄밉게 어깨를 들썩였다.

미안~~~ 하고 얘기하는 사람처럼.

‘뻥도 칠 줄 아는 구나…….’

화장품이 만병통치약이니? 바른다고 몸이 좋아지게?

그녀는 완벽한 영업사원이었다.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적절한 과장도 할 줄 아는.

수현은 할 수 없이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증명할 순 없지만 그런 거 같습니다. 오드리 화장품을 쓴 이후 아침에 일어나기가 수월하더라고요.”

아주 살짝만 도와주려 그랬다. 아주 살짝만.

그런데 의도치 않게 포인트가 다른 곳으로 흘렀다.

“팔뚝 봐…….”

“허벅지 봐…….”

“가슴은 태평양이네…….”

아주머니 일곱 명의 시선이 순식간에 일곱 대의 스캐너가 되어 그를 훑었다.

이 시선만도 부담스러운데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부끄러움을 가득 담고 수줍게 입을 열었다.

“나, 우리 영화배우 총각이랑 사진 한 번 찍어도 돼?”

“!”

수현의 숨통이 턱 막혀버렸다.

갑자기 무슨 사진……

수현은 솜털까지 바짝 선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제가 사진 찍는 걸 싫어해서…….”

사실 수현은 사진 찍는 걸 경멸을 할 정도로 싫어한다.

몬테규가의 의붓자식으로 크면서 기자들이나 파파라치들에게 수도 없이 바라지도 않는 사진들을 찍혀왔다.

때문에 사진 찍는 게 즐겁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소스라치도록 끔찍해졌고.

공식적인 사진도 딱 컷을 정하고 몇 장 찍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현이 두 손을 저으며 정중히 거절하려는데 지연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찍어드릴게요!”

그러더니 휴대폰을 들고 수현의 정면에 섰다.

당황하는 그에게 그녀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수현 씨가 연예인처럼 잘생겼대요. 좋은 마음으로 그러시는 거니까 찍어드려요.”

이걸 어쩌지…….

수현은 순간 사진을 찍자고 요구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참 간절하고도 간곡하고도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한 눈빛이었다.

할 수 없지.

“이리 오세요.”

수현은 할 수 없이 그녀가 올 수 있도록 곁을 내주었다.

한걸음에 달려온 아주머니는 한 참 차이 나는 높이의 그를 동경하듯 올려보았다.

“영광입니다.”

빨갛게 볼을 붉히며.

이후의 사태는 예측 가능했다.

남은 여섯 명의 아주머니들이 몰려와 그의 곁에 섰다.

지연은 한 술 더 떠 줄을 정렬했다.

“줄 서세요, 새치기하시면 안 찍어드려요.”

그녀의 호령에 아주머니들은 군대 온 신병처럼 또 각을 져 줄을 서고.

‘도대체 몇 장의 사진을 찍는 건지…….’

그런데 사람이 뭔가에 홀린다는 건 이런 것 같다.

수현은 파파라치들에게 치여 살며 사진 찍는 일 자체를 끔찍이 여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순박한 아주머니들이 연예인처럼 그를 바라보며 살포시 팔짱을 끼니 어느새 그는 또 아주머니들에게 팔을 내주고 있다.

심지어 지연이 ‘치즈!’ 하면 입꼬리까지 올리면서.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그 상황이 싫지가 않다.

그의 비즈니스 세계에선 느끼지 못했던 사람 사는 정이 느껴진다고 할까?

반성도 되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가 잘나서 이들을 낯설어했을까?

알고 보면 수백억 자산가들이나 이들이나 똑같은 클라이언트들인데 말이다.

은근히 아주머니들이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이런 사람 냄새 나는 곳에서 일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송지연, 그녀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진수현을 진수현이 아니게끔 만드는.

지금도 지연은 일곱 명의 아주머니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받아 사진들을 전송해주고 있다.

“사장님은 이게 더 잘 나왔네요. 이걸로 보내드릴게요.”

“이 사진은 바깥 사장님 몰래 보관하셔야 해요. 사장님이 지금 수현 씨 가슴에 얼굴 거의 묻었어요. 아시죠?”

“사장님은 앞으로 사진 찍을 때 고개를 좀 내리세요. 그래야 브이자 얼굴로 보이죠.”

한마디 한마디 참 정이 있고 진실 된 코멘트까지 섞어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수현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저렇게 순수한 여자가 애런을 탐했을까?

과연 저렇게 맑은 여자가 애런의 아이를 가졌을까?

과연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정말로 애런의 여자일까?

처음으로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송지연, 그녀 자체에 대한 의문이.

‘누구냐 넌!’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