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와인 빛으로 물든 밤
2018.04.04.
“안녕하십니까? 부사장 문태귭니다.”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마주했다.
수현은 참 이런 상황이 껄끄러웠다.
민희도 성가신데 또 다른 성가신 남자가 또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민다.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더라도 비즈니스를 위해선 기꺼이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아는 수현이다.
하지만 이 화장품 회사에 온 건 비즈니스를 위함이 아니다. 오로지 지연을 위함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통성명을 해야 하는지.
하지만 내민 손을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할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진수현입니다.”
태규는 빳빳한 그의 고개와 시선이 맘에 들지 않았다. 감히 부하직원 주제에.
나는 부사장! 너는 평직원! 이렇게 알려주고 싶어 유치한 시도를 했다.
“1층 사무실에 있는 걸 보니까 뷰티 카운슬러? 내가 고객 좀 소개시켜줄까? 아니다, 나 부임하면 여기저기 인사 다닐 곳 많은데 의전 좀 해주겠어? 덩치도 좋아서 듬직해 보이네.”
갑자기 시작된 반말, 자신에게 잘 보이면 고객이 생긴다는 과시, 자신을 의전하라고 하면서 은근히 강조하는 상하관계.
수현은 그의 수작을 다 읽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부사장이라도 부하 직원에게 이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않나?
무시하는 게 그의 스타일이지만 딱 한마디는 해주고 싶었다.
“제가 바빠서…….”
영광이라며 굽실거릴 걸 예상했던 태규는 목까지 색을 붉히며 화를 냈다.
“지금 부사장 지시에 바쁘다고? 아니 무슨 직원이…….”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는데 때마침 수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연의 문자였다.
-수현 씨, 집에 계세요? 안 계시더라도 집에 일찍 와주실 수 없을까요?
수현은 휴대폰을 태규 눈앞에 들어올렸다.
“바쁜 거 보셨죠? 그럼 이만.”
나가면서 미선에게만 살짝 속삭였다.
“내일은 꼭 지연 씨랑 출근하겠습니다.”
그는 민희의 아쉬운 눈빛과 태규의 분한 눈빛, 미선의 하트 넘치는 눈빛을 받으며 빠른 발걸음으로 접객실을 나왔다.
*
지연이 돌아간 후 애런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몬테규를 모른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인 듯했다.
아무리 영악하고 여우같은 여자들의 연기를 수없이 경험해본 애런이라지만 저 정도로 맑은 눈빛으로 ‘몬테규가 누구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는 없다.
그는 그녀에게 아이에 대해서도 물었다.
‘혹시 아이가 있으세요?’
그녀는 큰 상장이라도 탄 학생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머, 저 애엄만 거 티 나요? 하하, 신기하다.’
‘혹시 이름이…….’
‘줄리아나요. 줄리아나 문. 한국 나이로 여섯 살이에요.’
줄리아나 문이라…….
그럼 성씨가 문?
‘아빠가 한국 사람이에요?’
이 부분에서 그녀가 살짝 미간을 흩트렸다.
아이 아빠의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임엔 분명하다.
금방까지 다정하고 발랄했던 그녀의 음성에도 뾰족한 뼈가 느껴졌다.
‘사생활 얘기를 너무 깊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긴…… 실례지. 이 여자의 말대로 이 여자가 나에 대해 모르는 여자라면.
그녀는 자꾸 사생활 얘기를 꺼내는 그를 피해 다시 비즈니스로 화두를 돌렸다.
‘화장품 구매하실 건가요? 혹시 다른 사람을 저로 착각해서 부르신 거라면 할 수 없지만 그런 게 아니시면 저한테 구매해주셔도 돼요. 제가 샘플도 많이 챙겨드릴게요.’
열심히 무언가를 해보려는 그녀의 노력이 느껴졌다.
그때 애런은 확신했다.
‘이 여자는…… 아니다.’
내 여자인 척, 내 아이가 있는 척 사기 쳐서 몬테규가의 돈을 뜯어내려는 여자가 이 여자는 확실히 아니다.
그럼 형은 어떻게 된 걸까? 어떻게 이 여자를 그런 여자로 알고 있어?
미스터리를 풀어보려고 지연을 불렀는데 미스터리가 더더욱 치밀하게 꼬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송지연이란 여자는 한 번 더 만나볼 필요가 있었다.
미스터리를 어떻게든 풀어야 하니까.
애런은 자상하고 친절한 손님 모드로 바꾸어 그녀에게 핸섬한 미소를 보냈다.
‘화장품은 다 구입하겠습니다. 단, 제가 사용법을 모르는 게 있음 연락드리죠.’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은 이만 그녀를 보내주기로 했다.
*
지연의 문자를 받고 집으로 오며 수현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수현씨, 집에 계세요? 안 계시더라도 집에 일찍 와주실 수 없을까요?
무슨 일이 생겼나?
문자라는 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서 좋기도 하고 또 그래서 헷갈리기도 한다.
나를 봐야 할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게 혹시 애런과 관련된 일인가?
그런데 참 희한하다.
동생의 여자로 대하면 그뿐, 내가 사생활 부분까지 책임져줘야 할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게 그녀가 부르면 달려가게 된다.
아까 애런을 본 후, 그녀와 애런의 과거 스토리를 생각하며 그녀와 벽을 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미선이 보낸 문자에 이미 몸은 입고 나갈 코트를 찾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보러 갔는데 그녀가 없으면 그냥 나와버리면 그뿐이다.
나간 김에 알아봐야 할 일도 있었고.
이제 슬슬 백수 진수현이 아닌 한국에 온 진짜 목적을 떠올리며 행동에 나서야 할 때도 됐으니까.
그런데 집에 일찍 와달란 그녀의 메시지에 또 이렇게 집으로 달려가고 있다.
‘내가 왜 이러지? 왜 그녀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고 있지?’
그녀에게 생긴 감정이 단순하게 동생의 여자에 대한 감정이 아니란 건 인정한다.
그래도 오늘 애런을 만나 그녀와 애런의 관계를 징글징글하게 확인했으면 접어둘 만도 한데 그게 또 그렇게 쉽지 않다.
아무래도 그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일은 그녀를 보지 않는 일일지도…….
‘나가 달라 그럴까? 돈을 준다고. 어차피 애런이 오면 나가게 돼 있으니까.’
그래도 이 집을 좋아하는 거 같아서 마음에 걸리는데…….
‘그럼 내가 나갈까? 지연이 나가기 전까지 호텔에 가 있으면 되니까…….’
집에 가까이 갈수록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녀를 보지 않는 게 자신을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최상의 방법이라고.
수현은 담담한 표정, 하지만 단단한 눈빛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
.
.
“어서 오세요~~~.”
집에 들어가자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수현을 맞았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높은 톤으로 천장 끝까지 울리며.
“무슨 일입니까?”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표정엔 근심이 서렸고 목소리는 뾰족했다.
이상하게 지연이 평소와 다르면 먼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불행이 그녀를 덮쳤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맑은 웃음소리를 빵 터트렸다.
“무슨 일은요, 오늘 좋은 일 있어서 제가 한 턱 쏘려고요. 헤헤.”
“무슨 좋은 일?”
“저 오늘 화장품 엄청 팔았어요. 반 트럭도 넘게요.”
“진짜? 오늘 처음 갔는데도?”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저를 꼭 집어 찾았데요. 일시불로 계산 딱 끝내고 나오는데 그래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줄리랑 수현 씨더라고요. 그래서 한우로다가, 그것도 특수 부위로다가 살치살 사 왔어요.”
그녀에게 좋은 일이 있었다니 수현의 얼굴에도 안도감이 돌았다.
그런데 줄리가 안 보이네?
“줄리는?”
“아…… 금화댁 아줌마가 본격적으로 아빠와 제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나선 듯해요. 오늘 줄리랑 아빠랑 만나게 해줄 거라고……. 어쩌면 그 집에서 재울 수도 있다고 저한테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녀의 얼굴은 근심 반, 기대 반이었다.
과연 아빠가 줄리를 받아줄 수 있을지 싶은.
수현도 줄리가 궁금하긴 했다.
“줄리는 괜찮대요?”
“줄리는 요즘 금화댁 아줌마 영향을 받아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진 거 같아요.”
“드라마?”
“오늘은 저한테 전지현과 김수현 흉내를 내더라고요.”
“전지현? 김수현?”
수현도 두 사람은 얼핏 파리의 패션쇼에서 본 듯했다. 물론 어떤 드라마를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다짜고짜 줄리의 연기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여자 주인공처럼 목소리를 앙칼지게 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다시 남자 목소리로 바꿔 말했다.
“내 눈앞에서 안 보였으면 좋겠어.”
또다시 여자 주인공 흉내.
“그런데, 나는 왜 니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지연은 실컷 혼자 흉내 내 놓고 본인이 무안한지 깔깔 웃는다.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 전지현이랑 김수현이 한 대환데요 줄리는 이 부분에서 울었데요. 김수현이 전지현 좋아하면서 어차피 떠나야 하는 상황이라 마음을 숨기고 내 눈앞에서 니가 안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슬펐다나?”
“…….”
수현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드라마 속 상황극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지금 그의 마음을 읽고 있는 거 같아서.
어차피 수현은 지연을 애런에게 보내야 하는 사람.
그런데 자꾸 그녀에게 마음이 가는 걸 주체할 수가 없고,
그래서 차라리 지연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오늘쯤 집에서 그가 나가거나, 그녀가 나가거나 하자고 할 계획이었는데.
그런데…… 혹시 나의 그런 마음은 거짓말일까?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했던 말처럼?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였다.
“전 드라마를 잘 몰라서…….”
실컷 줄리를 떠올리며 연기까지 했는데 썰렁하게 응답하는 수현을 보며 지연의 볼은 동그랗게 붉어졌다.
하지만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럼 투 뿔 한우 드시러 갈까요?”
.
.
.
지연이 맛깔나게 구운 살치살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녀는 레드 와인도 한 병 준비했다. 하지만 본인은 마시지 않고 수현에게만 따라주었다.
“전 이따 늦게 줄리를 데리러 가야 해요. 아쉽지만 이거 수현 씨 다 드세요. 아, 비싼 와인은 아니에요. 죄송해요, 하하.”
고급 와인만 마시던 수현에겐 그녀 말대로 참 가당치도 않은 싸구려 와인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향이 부드럽게 그의 코를 자극했다.
혼자 마시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마시지 않으면 그녀가 실망할 것 같아 마시기로 했다.
지연은 생수로, 수현은 와인을 채워 쨍, 하고 잔을 부딪쳤다.
그녀는 생수 한 모금 입에 넣고는 축사를 드는 사람처럼 신나 했다.
“저 오늘 돈 벌었어요.”
애런의 정체를 모르는 지연은 화장품 판매를 성공한 후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성취감이라는 걸 느꼈다.
혼자도 아니고 줄리를 키우며 살아가기 위해선 돈은 필수였다.
무릎을 꿇어라 마라 하는 민희의 갑질에 취직을 포기할 생각까지 하며 맞섰지만 이후 감내해야 할 경제적 궁핍을 생각하면 사실 미래가 회색빛이긴 했었다.
그런데 때마침 이런 행운이 찾아들었다.
첫 판매를 성공하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물론 줄리였다.
봉수도 떠올렸지만 일단은 아빠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지금은 다시 한 번 봉수와 부딪치는 대신, 금화댁의 도움을 받아 줄리를 봉수의 근처에서 뱅뱅 돌게 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귀여운 줄리를 자주 보다 보면 아빠도 생각이 달라지실 거야.’
그런데 희한하게 다음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수현이었다.
오늘 아침 첫 출근을 하면서 그에 대한 감정을 정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혼자만 품고 있었던 일방통행식 설렘.
다행히 그 감정을 안 들킨 것 같으니, 또 뭔가 진척된 것도 없었으니 홀로 묻고 홀로 삭이면 끝!
남자로서의 감정이 아니면 어때, 집이 필요할 때 구해준 은인으로 대하면 되지.
그래서 줄리와 수현, 두 사람을 위해 큰맘 먹고 소고기를 사 왔다.
안타깝게 줄리는 주지 못했지만 그에게 이런 식사를 대접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그녀는 이 시간을 그와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으니까.
“수현 씨는 몇 살이에요?”
“한국 나이로 32살?”
“아, 그럼 나랑 네 살 차이네. 그럼 앞으로 말 놓으세요.”
“말을 놓다니?”
“지금도 은근히 말을 놓고 있네요. 이렇게 편하게 놓으시라고요. 반말하면서.”
“아…… 내가 반말을 했나?”
수현은 그때 깨달았다. 지금 지연에게 말을 놓고 있다는 걸.
‘내가 왜 말을 놓고 있지?’
그는 사귀던 여자한테도 항상 극존칭을 쓰곤 했다.
적당한 거리를 두기엔 참 좋은 방법이니까.
그런데 심지어 말을 놓으라고도 안 했는데 먼저 지연에게는 말을 놓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이성이 아닌, 그의 감성은 그녀를 친근하게 느끼고 있었나 보다.
평소 같으면 ‘저 말 잘 못 놓습니다.’라고 정색을 했을 텐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애런은 지연 씨한테 지연이라고 불렀었지?’
과거를 가진 연인들끼리 충분히 할 수 있는 반말인데도 그냥 그게 거슬렸었다.
그래선지 수현도 지연을 편하게 부르고 싶었다.
이런 게 질투인가?
그는 와인을 쭉 마신 후 촉촉이 젖은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편하게 말 놓을게. 지연 씨라고 하면서.”
왠지 지연이라고까지 부르면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해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피하고 싶었다.
지연은 수현에게 와인 한 잔을 더 따르며 귀엽게 으스댔다.
“미선이한테 얘기 들으니까 내일부턴 일하신다고 했다면서요? 그럼 지금부터 제 얘기 잘 들으세요. 제가 하루 먼저 판매에 성공한 선배로서 조언을 좀 해드릴게요.”
“조언?”
“일단 이 사람이 꼭 날 찾은 게 아니더라도 포기하면 안 돼요. 끝까지 붙들고 판매해야 합니다.”
그녀의 표정은 영웅이었다.
“상대가 자꾸 화장품이 아닌 사생활을 막 물어요. 사실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얼굴 철판 딱 깔고 미소를 잃지 않았죠.”
그녀의 미소는 세상을 다 가졌다.
“그래서 제가 은근히 본론으로 화제를 돌렸죠. 그리고 도장 쾅!”
나라를 구했구나, 지연 씨는.
“다음에 또 저한테 구입할 거 같아요.”
이렇게 예쁜 그대를 보며 누가 안 그렇겠어?
수현은 또 그녀의 얘기가 아닌 그녀 자체를 보고 있다.
그러면서 애잔하게 가슴이 아파온다.
이렇게 밝은 여자를, 이렇게 착한 여자를, 이렇게 어여쁜 여자를 애런은 왜 싸구려 노리갯감으로만 표현했을까?
‘순진한 여자가 밤에 더 피어오른다는 말 들어봤지? 그녀는 그런 여자였어.’
이렇게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여자를.
수현은 또 한 잔의 와인을 입에 품었다.
맥주처럼 벌컥벌컥 목 안으로 넣어버렸다.
그렇게라도 위를 쓰리고 하고 싶었다.
그럼 마음이 쓴 게 묻혀질 거 같아서.
하지만 막 영웅담을 끝낸 지연은 수현이 내려놓은 빈 와인잔을 보곤 다르게 생각했다.
“낼부터 일할 생각 하니 술 들어가죠? 막 겁이 나죠?”
겁이 났다.
이 마음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가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했던 얘기가 떠올라서.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내 눈앞에서 안 보였으면 좋겠어.
-그런데, 나는 왜 니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
마지막 대사가 꼭 내 마음 같아서.
결국 꺼내지 못했다.
이 집을 나갈 수 있냐는 말, 싫으면 내가 나가겠다는 말,
내 눈앞에서 당신이 안 보였음 좋겠다는 말.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 길 없는 지연은 흐릿해지는 수현의 눈동자를 취기라 오해했다.
“피곤하신가 봐요. 오늘은 일찍 올라가 주무세요. 전 제품에 대해 공부 좀 하다가 금화댁 아줌마 연락 오면 줄리 데리러 갈 거예요.”
그렇게 그녀와의 식사자리는 끝나버렸다.
아쉽게도.
.
.
.
지연과 수현은 부엌을 정리하고 함께 2층으로 올라왔다.
2층에 오르면 제일 처음 보이는 수현의 방 앞에서 그녀는 갑자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민지 몰라 멀뚱히 그 손을 보는 수현에게 그녀가 씩씩하게 말했다.
“낼부터 우리 잘해봅시다!”
파이팅을 다지자는 악수.
피식.
끝까지 귀여운 여자.
수현은 그 손을 잡았다.
물 한 번 묻혀보지 않고 자란 보드랍고 촉촉한 손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의 심장을 실크로 감싼 듯 야릇하게 에워쌌다.
취기는 더 번졌다.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손을 당긴다면…….’
넌 어쩔 거니?
와인 빛으로 물든 밤.
그곳엔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수현은 그 손을 당겨버렸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