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덫에 걸리다
2018.03.28.
“지연이랑 결혼하겠단 얘기지.”
지연이랑 결혼을……
내 아이를 갖은 여자니까……
당연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수현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귓속이 껄끄러웠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박수라도 쳐줘야 하는 결심인데.
헤어졌지만, 버리긴 했지만, 아이까지 있는 이상 돈으로만 해결하진 않겠다는 생각.
오히려 애런이 싫다고 해도 형으로서 설득했어야 할 방법.
그런데 왜 ‘결혼하겠다’는 말이 ‘버리겠다’는 말처럼 불편하게 들리는지……
이 기분이 뭔지 설명할 순 없지만 반대할 논리는 없었다.
수현은 땅으로 내려앉은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했어. 그래야지. 지금 지연 씨한테 전화해볼까? 니가 왔다고?”
그런데 애런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형은 내가 지연 씨랑 어떻게 만났는지 안 궁금해?”
그러고 보니 그걸 묻지 않았다.
애런이 지연을 언제 만났고 아이는 언제 낳았고 언제 버렸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좋지 않은 기억이란 건 분명하다.
지연은 줄리의 아빠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고
줄리는 언젠가 아빠 얘기를 꺼냈을 때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심지어 두려움에 떨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내가 알고 싶지 않았을 수도…….
지금 이 순간에도 별고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꼭 들어야 하나? 그냥 앞으로의 계획만 얘기하면 안 될까?”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녀와의 추억, 나한텐 소중하거든.”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듯 눈빛까지 애잔히 빛내는 그를 더 이상 막긴 힘들었다.
“그래, 해봐.”
“6년 전이었어.”
애런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와의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일본에 놀러갔다 잠시 경유하는 개념으로 서울에 들렀지.”
그가 들려준 이후의 스토리는 이랬다.
당시 가장 핫한 클럽에서 놀고 있을 때 지금 만났던 여자와는 다른 한 여자를 보게 됐다. 얼굴이 하얗고 눈빛이 맑은.
그녀의 이름은 송지연.
그의 얘기를 들으며 수현의 머릿속엔 당시의 그녀가 그려졌다.
‘그래, 참 하얗지, 세상의 더러움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을 만큼.’
하지만 애런은 전혀 다른 단어로 그녀를 묘사했다.
“그런데 지연이가 보기보다 끼가 있어. 난 그냥 술이나 몇 잔 사주고 헤어질라 그랬는데 그날 밤 날 어찌나 유혹하는지. 온몸 투혼하더라니까.”
애런의 얘길 듣고 있는 수현의 주먹에 저도 모를 힘이 들어갔다.
꼭 이런 얘길 해야 할까?
불편하고 불쾌한 쓴물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런데 애런의 노골적인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지연과 불같은 밤을 보냈어. 그런 얘기 알지? 순진한 여자가 밤에 더 피어오른다는. 그녀는 그런 여자였어.”
“…….”
애런은 지연과의 스토리를 지어내며 수현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수현을 보며 애런은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형도 알면서. 지연이가 밤에 어떤지. 함께 밤을 보낸 사이잖아.’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비아냥거림을 꾹 눌렀다.
그는 점점 흙빛으로 변해가는 수현의 얼굴을 즐기며 비열함의 강도를 조금 더 올렸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는데 미국에 돌아가서도 그리운 거야. 특히 밤에. 그래서 여자가 그리울 때마다 한 번씩 한국에 와서 그녈 만났지. 지연이랑의 밤은 정말 임팩타클해. 아, 정말 자세히 설명할 수도 없고.”
“애런!”
수현은 더 이상은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됐고 그럼 6년 전에 아이가 생겼단 거지? 혼자 낳았어? 넌 지켜봤어?”
그는 끝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분노를 드러냈다.
‘더 하면 테이블도 엎겠는데?’
애런은 팀의 불편한 표정을 읽으며 더 이상 나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를 폭발시킬 타임은 아니니까.
“임신했다는 연락 받고 한국에 오니까 유학을 핑계로 반대로 미국으로 갔다더라. 못 낳게 할까 봐 도망간 거겠지. 딱 한 번 마주친 적은 있는데 돈이 아니라 자꾸 사랑을 요구하기에 그냥 버렸어. 우리 같은 돈이 넘치는 부잣집 남자한테 사랑까지 바라는 건 멍청한 일이잖아?”
“개새끼.”
수현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뱉어버렸다.
감정 조절 완전 실패.
더 이상 애런의 쓰레기 같은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 지연 씨를 어떻게 책임질지만 말해. 니가 원하는 거,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거, 그대로 다 해줄게. 뭐든지!”
“뭐든지 다?”
“그래, 뭐든지!”
덫에 걸려버렸다. 완벽한 냉혈남 진수현이.
바보, 함께 밤을 보내면서 마음도 줘버렸구나.
역시 형의 핏줄엔 상류 사회 인간들의 피는 없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허울만 명문가 자제일 뿐.
우리 같은 진짜 명문가 인간들에겐 여자는 딱 두 종류야.
가문을 이어줄 여자, 아님 잠시 안아주고 버릴 여자.
진심 같은 건 애초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지.
어쨌든 애런은 수현의 냉철함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뭐든지 다 해주겠다는 말을 들은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할까?
이쯤에서 애런은 그녀를 핑계로 큰 수표 하나를 요구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천만 불짜리 로또를 이렇게 쉽게 긁어버릴 순 없지.
쪼는 맛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는 조금 더 수현을 괴롭히기로 했다.
함께 밤을 보낸, 심지어 마음까지 있는 여자를 동생에게 보내야 한다는 괴로움을 조금 더 극대화 시키고 싶었다.
“일본에 여자가 있어. 일단 그 여자 정리하고 올 테니까 그전까진 형이 지금처럼 지연일 데리고 있어줘. 마찬가지로 나에 대해 얘기하지 말고. 그녀를 책임질 준비가 필요하거든.”
“무슨 말이야? 책임지려면 지금 당장 책임져. 일본에 있는 여자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계속해서 억제하지 못하는 감정.
수현은 냉철한 이성도, 감정을 숨기는 인내심도 놓쳐버린 것.
“나 사실 일본에 있는 여자 사랑해. 전화 한 통으로 끝낼 수 있는 여잔 아니라고.”
“그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지연 씨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애런은 미소를 머금은 상태로 물끄러미 수현을 보았다.
수현의 흔들리는 모습을 즐기며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지막 한 방을 날릴 때다.
“여자한테 꼭 사랑을 줘야 하나?”
수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불끈 쥔 주먹의 강도로 그의 어깨까지 흔들었다.
꽉 다문 어금니로 그의 입매는 굳어버렸다.
수현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비난의 소리가 이제 곧 폭발할 것이다.
“너…… 정말!”
그런데 애런이 그의 폭발을 막았다.
“형은 내가 지연일 책임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내가 지연이한테 갖는 감정이 어떻든지, 결혼만 해주면 되는 거 아냐?”
“…….”
“아마 지연이도 그걸 원할걸? 여자들한테 재벌과의 결혼은 로망이잖아?”
참패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에서 수현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지연을 위해서.
“그래,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와.”
그녀가 다른 여자 때문에 또 애런에게 버림받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비록 진실한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형제의 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절반의 성공이었다.
아니 기대 이상의 성공이었다.
수현의 방에서 발견한 청바지로 애런은 수현과 지연이 이미 연인 사이라는 걸 확인했다.
이제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수현을 상처 주고 그의 돈까지 받아내는 일만 남았다.
애런은 일본에 있는 여자 친구를 핑계로 시간을 벌었다.
사실 SNS 한 통으로 끝내도 되는 여잔데.
그 시간 동안 수현 모르게 지연에게 접근할 것이다.
지연을 만나 어떤 경유로 내 여자라는 사기를 치게 됐는지 알아낸 다음 공모를 해서 수현에게 돈을 뜯어내면 게임 끝!
쉽진 않겠지. 그녀도 이미 수현에게 몸과 함께 마음을 줬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이 부분이 걱정스럽긴 하다.
지금까지 이별 협상을 위해 수현을 만났던 애런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처음엔 수현의 냉정함을 비난했다.
“애런보다 더 냉정한 남자는 처음이야. 나더러 뭐라는 줄 알아? 애런의 맘이 진심일 거라고 착각한 것도, 끝났다고 돈을 요구하는 것도 당당한 행동은 아니라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재벌이랑 만나는 여자한텐 그런 보상 정도는 이 바닥 정석 아닌가?”
그러다 꼭 마지막엔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애런의 형은 여자친구 있어? 없으면 난 어떠냐고 물어봐줘. 만나주기만 하면 돈은 안 줘도 된다고. 왠지 그하고는 진짜 사랑을 하고 싶네?”
지조라곤 없는 텅텅 빈 머리의 소유자들.
그녀들은 수현을 이렇게 얘기했다.
냉소적이지만 치명적인, 싸늘하지만 불같은 매력의 소유자라고.
한 번쯤 유혹해보고 한 번쯤 정복하고 싶은 남자라고.
그런데 지연이라고 수현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을까?
심지어 이렇게 매력적인 남자가 함께 밤을 보내고 마음까지 주었는데?
하지만 그녀가 수현을 좋아하든 말든 애런은 상관없었다.
사기 친 이유를 알아내고 벌을 주겠다고 협박하는 대신 수현에게 돈을 받아오라고 으름장만 놓으면 되니까.
그녀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으니까.
돈을 받아낸 후에는 이 더러운 삼각관계를 상류사회에 퍼트릴 것이다.
동생의 여자를 형이 건드렸다는.
이 스캔들은 호사가들이 두고두고 우려먹을 세기의 스캔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타격은 수현 혼자만 입게 된다.
원래부터 흙탕물이었던 애런의 인생은 흙탕물 한 잔 더 붓는다고 더러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깨끗한 일급수 수현의 인생은 한 잔의 흙탕물이 큰 파장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인생까지 망쳐버릴 수 있는.
“하하하하하하하.”
애런은 수현 앞에서 꾹꾹 참고 있던 웃음을 맘껏 터뜨렸다.
더러운 소문으로 얼룩진 수현의 얼굴과 종교처럼 그를 신뢰하는 엄마 로즈 몬테규의 절망한 얼굴을 상상하면 신이 나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애런은 이용하는 심부름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송지연이란 여자,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주고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아봐주세요.”
한국에서의 생활이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마약보다 더 중독성 짙은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
이렇게 더러운 기분은 처음이었다.
애런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전 애런이 그의 머릿속을 검은 물감으로 물들이며 그를 더 깜깜하게 만들었다.
‘난 일본에 있는 여자를 사랑해. 지연은 사랑하지 않아.’
그럼 단지 노리갯감으로 취급하며 그녀와 결혼하겠단 거야? 그게 진정한 책임이야?
“후…….”
그따위 싸구려 사랑을 받아야 할 지연을 생각하니 심장이 쓰라렸다.
그녀가 얼마나 더 불행해져야 할까?
해결은커녕 더 뒤죽박죽 그의 머리가 헝클어져버렸다.
하지만 자기 여자 자기가 만난다는 걸 방해할 수도 없고,
다른 여자를 정리하고 오겠다고 기다려달라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고.
조금의 몸부림도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진흙탕에 빠진 기분이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지연은 혼자 잘 출근했을까?
혼자 왔다고 그 싸가지 없는 여자한테 타박이나 받지 않을지……
그런데 이 와중에 지연 걱정을 하고 있다.
‘내가 미친 거지.’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못 보던 전화번호.
확인해보니 미선이었다.
-입사 카드 보고 지연이 몰래 문자 드리는 거예요. 지연이 아마 잘릴 거 같아요. 오늘 집주인님 안 오셨다고 이사님이 또 ㅜㅜ. 제가 이런 문자 보낸 건 비밀이에요.
“이런 미친 여자를 다 봤나!”
민희가 지연을 괴롭히고 있는 게 확실하다!
화는 나지만 애런까지 만난 이상 어떻게 더 나서 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를 위해 자꾸 나서주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퉁퉁 불은 컵라면과 다 식어버린 동태전처럼 버리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버렸다.
천하의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냉혈남 진수현이.
*
점심시간, 지연은 민희의 방 앞에 섰다.
옆에서 하얀 파우더를 덧칠한 듯 질려 있는 미선을 보면 도대체 그동안 민희한테 얼마나 당했으면 저럴까 싶다.
그녀는 지연에게 협박처럼 말했다.
‘점심시간까지 내 방으로 오세요. 단, 혼자 올 거면 영원히 이 회사에 오진 말고.’
이 말은 곧 수현과 함께 올 게 아니면 이 회사에 앞으로 나오지 말란 뜻.
어제에 이어 또 지연의 취직을 이용해 괴롭히고 있는 것.
‘취직이 장난도 아니고.’
하지만 미선을 위해서 한 번만 더 참고 고개를 숙여보기로 했다.
미선은 오돌오돌 입술을 떨며 자꾸만 지연의 휴대폰을 보았다.
“혹시 집주인님한테 뭐 문자 온 건 없고? 출근하신다든지 뭐 그런…….”
“없어! 없고 나 그런 신세 지고 싶지 않아. 어제 하루면 됐지.”
단호한 지연의 목소리에 미선의 입술도 쏙 들어갔다.
지연과 미선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향했다.
민희는 지연이 들어오는 문소리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으나 수현이 보이지 않자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혼자면 내가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온다고 해서 같이 오는 줄 알았잖아.”
당당하게 맞서자는 심정으로 들어왔는데 역시 민희는 사람의 기분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준비한 할 말이 목구멍에 턱 막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지연이 머뭇거리는 사이 민희는 핸드백을 들었다.
“됐고 그럼 나 볼일 끝난 거니까 이제 밥 먹으러 갈게. 안 그래도 우리 그이가 내가 좋아하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대로 그녈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미선이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이사님, 이미 송지연 씨 서류는 인사팀에 넘어갔습니다. 사인 어제 다 했어요. 진수현 씨 안 오더라도 송지연 씨는…….”
그때 지연이 미선의 앞을 막고 민희의 시선과 직선으로 맞섰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 입사 취소하겠습니다. 친구가 있는 회사라 좋게만 생각했는데 최소한의 상식이나 예의조차 없는 이사님이 계신 회사라면 제가 거절하겠습니다.”
지연의 반격에 미선의 하얗게 뜬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너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민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정심을 유지했다.
오히려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욱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지연을 보았다.
“아침부터 좀 거슬렸는데 내가 요즘 바빠서 넘어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먼저 기어올라 주시니 고맙기만 하네?”
지연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경영인 협회 회장이야. 그 말은 웬만한 기업의 회장들은 다 안다는 얘기지. 안 그래도 내 뒷담화나 하면서 날 만만하게 보는 직원들한테 언제 한 번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잘됐어.”
여기까지도 그녀가 얼마나 사악한 여잔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의 다음 말이 핵심이었다.
“이제 당신을 그 어느 곳에도 취직하지 못하게 하겠어.”
“…….”
이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회장의 딸, 회사의 이사라지만 직원들이 왜 필요 이상으로 그녀에게 벌벌 떠는지.
왜 미선이 얼굴색이 하얗게 질리도록 그녀를 무서워하는지.
바로 이런 사악한 뒤끝 때문이었다.
게다가 말뿐 아닌, 그녀에겐 진짜로 그렇게 할 힘도 있었고.
그런데 그녀의 사악함의 끝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화난 얼굴보다 더 소름 끼치는 웃는 얼굴로 지연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나한테 무릎을 꿇고 빈다면 또 모르지.”
미선이 그녀의 손을 툭툭 쳤다.
지금이라도 수습을 하란 의미였다.
하지만 그 순간 지연의 머리엔 아버지가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빌어먹더라도 잘못 없이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지는 말아라. 우리 딸 무릎은 백만 불짜리 무릎이다.’
지연은 그녀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면을 직선으로 쏘아보며 이렇게 얘기했다.
“내 무릎은 내 아이를 위해서만 꿇어요, 이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야.”
“……뭐? ……뭐? 뭐?”
생전 들어보지 못한 면전에 댄 악담에 민희의 발목이 휘청거렸다.
기막힘에 탁 막혀버린 숨통을 겨우 진정시키고 막 지연을 향해 소리를 지르려는데 주책없이 미선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그녀는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민희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사님 죄송합니다. 급한 콜이라 받아야 해서…….”
그녀는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네, 박미선입니다. 팀장님.”
자연스럽게 민희도 지연도 그녀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그런데 휴대폰을 통해 팀장의 얘기를 들은 미선의 작은 눈이 세 배로 확장되었다.
“그게 정말이세요?”
전화를 끊은 그녀의 고개가 지연에게 향했다.
“지연아, 벌써 너한테 화장품을 주문한 사람이 있대.”
“……정말?”
오늘 처음 뷰티 카운슬러로 회사 홈페이지에 이름이 추가됐다.
그래서 홍보도 안 했고 누군가의 소개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누가?
놀라운 건 미선의 다음 말이었다.
“그런데 그 주문한 양이 반 트럭은 된다는데?”
“뭐?”
지연, 미선, 민희 세 사람의 시선이 서로서로 엉켰다.
이게 뭔 일?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