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15화 (15/77)

제15화. My girl

2018.03.24.

“Hell, 팀.”

“어, 안녕.”

두 형제가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했다.

수현이 여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열한 살 때 수현의 아빠와 애런의 엄마가 재혼했으니 두 사람은 이십 년을 넘게 한집에서 살아온 형제다.

비록 같은 피는 1%도 섞이지 않은, 법으로 맺어진 형제였지만 친형제 못지않게 죽고 못 산 적도 있었다.

수현은 네 살 어린 남동생을 누구보다도 챙겼다.

바쁜 엄마로 인해 유모 손에서만 자란 애런도 몸으로 부대껴 놀아주는 수현을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녔다.

덕분에 애런도 수현에게 한국말을 배울 수 있었고 애런 덕분에 수현도 미국의 실질적인 상류 사회의 문화를 빨리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친근한 형제애는 애런에게 사춘기가 오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계기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애런이 슬슬 수현을 피했다.

수현은 애런이 유독 티가 나도록 자신을 편애하는 새엄마 로즈 때문에 섭섭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또 과한 음주와 약물, 카지노에 빠지며 반듯한 수현과 괴리감을 느껴서일 수도 있고.

박탈감에 종류가 있다면 상대적 박탈감은 가장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애런은 모든 걸 다 가진 부잣집 둘째 아들이었지만 형에 비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수현은 그걸 알기에 무조건 애런을 감싸고 엄격한 로즈 몰래 동생이 친 사고들을 수습해주었다.

그때부터 두 형제는 애정 어린 관계에서 마치 범죄자와 변호사 또는 망나니 동생과 해결사 형 같은 사이가 됐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꽤 좋은 형제 사이를 유지해 간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애런이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수현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소원한 감정의 골이 생겨버렸다.

몇 달 만에 마주했다는 게 어떻게 보면 크게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닌데 지금 수현과 애런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은 세상에 태어나 두 번째 보는 사람들보다 강렬했다.

한 여자 때문에.

물론 수현은 지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애런에게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지연은 동생의 여자니까.’

또 애런이 지연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 여자도 아니니까.’

그는 안다. 그가 잘할 거라는 걸.

감정을 숨긴다는 건 그가 누구 못지않게 잘해오던 일이니까.

수현은 허공에 흐르는 싸늘함을 극복하기 위해 일단 안부 인사를 화두로 던졌다.

“한국엔 언제 왔어? 어제?”

“응, 오자마자 팀한테 전화한 거야.”

“여기선 팀 대신 수현이라고 불러줘.”

“알았어, 그렇게 부를게. 어차피 새아버지 살아 계실 때 형을 수현이라고 불렀으니까 나한테도 아주 어색한 이름은 아니야.”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여자랑 아이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길 바라지?”

보상이라……

애런은 자신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원래는 지연을 이용해 수현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같은 몬테규가의 아들이지만 로즈 몬테규의 눈밖에 벗어난 애런은 수현을 거치지 않고 쓸 수 있는 돈이 단 한 푼도 없었다.

반면 수현은 로즈 몬테규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집안의 재력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였다.

따라서 애런은 자신의 여자도 아니면서 대범한 사기를 치고 있는 지연을 혼내주는 대신에 그녀와 공모하기로 했다.

지연과 줄리아나가 자신의 버려진 여자와 아이가 맞다고 인정하고 보상금 명목으로 수현에게 큰돈을 요구하는 것.

그 돈은 지연과 나누면 되는 것이고.

여기까지도 아주 훌륭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수현이 지연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는 생각을 조금 더 키웠다.

돈도 뜯어내고 수현에게 상처도 주는 것.

그런데 막상 수현의 예리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은근히 계획이 흔들렸다.

생각보다 수현이 너무 담담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여자랑 아이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길 바라지?’

그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예상으로는 지연과 어떻게 만났냐는 둥, 아이는 언제 태어났냐는 둥 은근한 질투심이 섞인 질문들이 나와야 하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을까?

‘혹시 수현이 지연을 좋아한다는 건 내 오핸가? 정말로 내 여자와 내 아이라 챙긴 거야?’

확신했던 생각이 흔들리니 섣불리 무슨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괜히 말도 안 되는 큰돈 불렀다가 역효과가 나면 어떡하지?

지연과 결혼하라는 둥 아이와 같이 살라는 둥…….

‘더 큰 증거가 없을까? 정말로 형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애런은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큰 협상을 앞에 두고 섣부른 행동으로 일을 그르치고 싶지도 않았고.

시간을 좀 끌기로 했다.

“형, 나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을까? 일단 뭘 좀 먹고 생각해보고 싶어.”

대화를 하다 말고 갑자기 먹을 것을 찾는 애런이 수현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수현은 지금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애런을 상대하고 있다.

그녀가 어떻게 애런 같은 놈을 만나게 됐는지, 어떻게 버림을 받은 건지, 얼마나 상처를 준 건지 따져 묻고 화를 내고 싶지만 있는 인내심을 다 쏟아내며 꾹! 꾹! 꾹! 참고 있다.

그래서 이 불편한 얘기들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 시간 지체 없이.

하지만 자신의 감정 때문에 배가 고프다는 사람에게 어서 빨리 결론지으라고 재촉할 순 없었다.

그래도 동생이니까.

“그래, 그럼 마루에서 쉬고 있어. 먹을 것 좀 꺼내볼게.”

수현은 애런을 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몇 달 만에 만난 동생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으니까.

*

동생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수현이 부엌으로 간 사이, 애런은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왔다.

‘형 방을 뒤지다 보면 뭐가 나와도 나오지 않을까? 지연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도.’

복도에 진입하자마자 2층을 둘러보았다.

‘형의 방은 어딜까?’

화장실로 보이는 문을 빼놓곤 한쪽 방향으로 나란히 있는 방문 두 개가 보였다.

분명 수현은 마스터 룸을 쓸 것이고 마스터 룸은 보통 복도 끝이다.

애런은 첫 번째 방을 지나 마스터 룸으로 향하다가, 다시 뒷걸음을 쳐 첫 번째 방 앞에 섰다.

‘이 여자 방도 궁금하네.’

수첩이나 일기장이라도 볼 수 있을까?

그럼 이 여자가 어떤 여잔지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

애런은 호기심을 장착하고 지연의 방으로 보이는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응?’

걸려 있는 옷가지나 책상 위의 물건들이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형이 작은 방을 쓰는 거야? 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방.

뉴저지의 알파인 저택에선 손님용 욕실 사이즈 정도?

세계 굴지의 기업 황태자가 이런 방에서 묵고 있다는 것이 황당했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난리 칠 텐데. 사랑하는 아들이 이런 누추한 곳에서 지낸다고.’

어쨌든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방이 작으니 뒤져볼 것도 없었다.

‘시시해.’

애런은 방을 나가기 위해 문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막 한 발을 밖으로 내딛는 순간 소름처럼 무언가가 그를 잡았다.

획 고개를 돌려 다시 방 쪽으로 시선을 주니 수현의 침대 프레임에 걸려 있는 어떤 것이 보였다.

“!”

그의 방에 있으면 안 될, 그녀의 방에 있어야 할, 그 어떤 것이.

*

지연은 뷰티 센터로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수현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어젯밤, 술기운을 입은 두 사람에게 숨 막히는 키스의 순간이 생겼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지만 입술이 마주하는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분위기에 취한 것뿐이니까.

오늘 아침엔 수현과 함께할 출근길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가 냉정히 거부했다. 집에서 할 일이 있다는 이유로.

이런 일들로 지연은 둘 사이에 그래도 특별한 어떤 감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착각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실망감으로 현실을 차치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니까.

지연은 힘찬 발걸음으로 뷰티 센터의 문을 열었다.

“내 주제에 남자는 무슨! 아자, 아자, 아자!”

기합을 한 번 주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미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선아, 안녕?”

“어, 지연이 왔어?”

그런데 미선은 지연을 보자마자 집주인 타령을 했다.

“왜 혼자 왔어? 집주인님은?”

지연은 섭섭해 역정을 냈다.

“으이그! 넌 꼭 내가 그 사람이랑 같이 있어야 하냐?”

하지만 미선은 오해 말라는 듯 고개를 크게 가로 저었다.

“그게 아니라 이사님이 아침부터 니네 집주인을 찾으셔서. 난리다 난리.”

“왜?”

“내가 아냐? 느낌으로 봐선 어제 일 때문인 거 같아.”

“수현 씨가 나한테 사과하라고 한 거? 혹시 화가 나신 거야? 그러면 어제 말을 하지 왜…….”

“아니! 그 반대. 오히려 홀딱 반한 거 같더라.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 남자는 니가 처음이야, 뭐 이런 건가 봐. 수현 씨 가고 나서 뷰티숍 가고 백화점 가서 기사가 들 수 없을 정도로 쇼핑질 했다더라. 미쳐.”

“그냥 열 받으니까 스트레스 풀려고 한 거 아닐까?”

“그건 니가 그 이사님에 대해 몰라서 하는 말이야. 남성 편력이 아주 끝내줘. 소문엔 하도 남자관계가 문란해서 국내에선 결혼이 불가능해 미국 보냈다는 말이 있어.”

“그 정도야?”

“그런데 운 좋게 미국에서 남잘 물었다더라. 내년 봄에 약혼한다나?”

“약혼자도 있는 사람이 왜…….”

“야, 집주인님을 보고 사심 안 가질 여자가 어디…….”

미선의 민희에 대한 뜨거운 성토가 무르익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며 콧등이 싸해질 정도로 짙은 향수 내음이 온 방을 물들였다.

민희가 등장한 것.

그녀는 지연을 발견하자마자 어제와는 달리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큰 몸짓으로 다가왔다.

“미스 송! 진수현 씨는 어디 있어요?”

무례한 여자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보자마자 또 아무 인사 없이 수현을 찾다니……

지연은 무례한 그녀를 응시하다 고개를 숙였다. 예의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그녀는 지연이 예의 바르게 먼저 인사한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어, 됐고 진수현 씨 어디 있냐고, 미스 송.”

지연은 어제와는 달리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단단한 눈빛으로 당당한 시선을 보냈다.

“일단 전 미스 송이 아니라 송지연입니다. 지연 씨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녀의 뼈 있는 지적에 민희는 잠시 당황하더니 코웃음을 쳤다.

“어제 진수현 씨가 편 좀 들어줬다고 믿고 까부는 거 같은데 알아봤더니 별 사인 아니라며? 집주인과 세입자? 하여간 상식 없는 사람들은 좀만 잘해주면 기어올라와. 배려를 특권인 줄 안다는 말, 맞는 말이었네.”

아무리 부하 직원이라지만 거침없이 토해내는 모욕에 지연은 발끈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그때 지연이 발끈할 거라 예상한 미선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미선이 잡은 손의 악력으로 메시지가 전달됐다.

‘제발 참아, 날 봐서.’

그녀의 무례에 맞서고 싶었지만 친구의 절절한 메시지가 담긴 손을 뿌리칠 순 없었다.

그냥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진수현 씨가 언제 오실 지 저는 모릅니다. 저에게 묻지 마세요.”

그녀의 굴하지 않는 태도에 민희는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 피식, 비웃듯 실소를 내뱉곤 한쪽 입술을 비뚤게 올렸다.

“예의 갖추라니까 예의 갖출게. 점심시간까지 내 방으로 오세요. 단, 혼자 올 거면 영원히 이 회사에 오진 말고.”

꼭 수현을 데리고 오라는 말.

“그 말씀은 저 혼자라면 또 취직을 번복하시겠다는…….”

지연이 맞서려는데 민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자기야~~ 자기야~~자기야~~♬

벨소리를 들은 민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엉, 자기야!”

그녀는 지연을 무시한 채 전화를 받으며 나가버렸다.

지연의 단단했던 눈동자가 힘을 잃었다.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

수현은 로버트가 한 박스 가득 사다놓은 컵라면을 꺼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인스턴트 음식을 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뭐 더 없을까? 요리를 할 줄 모르니 원.’

봉수가 준 동태전과 김치가 떠올랐다.

지연에게 주라고 한 음식이니 함부로 꺼내긴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봉수와 애런이 아무 사이가 아닌 건 아니었다.

‘사위는 아니지만 손녀의 아빠이니 이 정도는 줘도 되겠지.’

수현은 냉장고에서 동태전과 김치를 꺼냈다.

김치는 애런도 뭔지 알 테고 동태전은 먹어본 적 없을 테니 좋아할지 궁금했다.

‘좋아해주겠지 뭐. 내가 차려주는 거니까.’

그냥 내어줄까 하다가 그래도 따뜻한 한국의 음식을 주고 싶었다.

그는 한쪽 끝에 걸어놓은 앞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기름 자글자글 올라오는 따뜻한 동태전을 주기 위해 프라이팬을 인덕션 위에 올렸다.

순간 줄리가 계란프라이도 제대로 못 뒤집는다고 놀렸던 기억이 났다.

‘오늘은 성공해야지.’

뒤집개를 단단히 쥐고 그는 동태전을 구웠다.

내 나라에 방문한 내 동생을 위해서.

.

.

.

수현과 애런이 다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좀 전과는 다르게 테이블 위엔 막 데운 동태전과 김치 그리고 뜨겁게 김이 오르는 컵라면이 있었다.

생각보다 동태전을 뒤집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수현은 노릇하게 잘 데워진 동태전을 애런이 잘 먹어줄 걸 기대하며 접시를 그의 쪽으로 밀어주었다.

“애런, 이제 먹어.”

애런이 포크로 어떤 걸 제일 먼저 집을까 기대하고 있는데 그는 좀 전 배고프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포크를 들지 않았다.

대신 중단됐던 대화를 일방적으로 시작했다.

“나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 My girl과 My kid를.”

“!”

그의 기습 공격 같은 발언에 수현의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그대로 애런에게 속마음을 전달했다.

‘하하, 싫지? My girl과 My kid라는 말이?’

조금 전 애런은 수현의 방에서 그의 방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보았다.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청바지.

이 집 안에 성인 여자라곤 지연밖에 없으니 당연히 그 청바지는 그녀의 것.

‘그녀의 청바지가 왜 형의 방에 있을까?’

사실 그 청바지는 며칠 전 지연이 미선과의 과음 후 예전에 자기가 썼던 지금의 수현의 방을 자신의 방인 줄 오해하고 들어가 벗게 된 것.

수현은 기회를 봐서 그녀에게 돌려주려 했는데 늘 줄리와 함께 있으니 아직까지 주질 못했다.

그런데 그 청바지를 보고 애런이 오해한 것이다.

‘둘은 이미 한 방에서 자는 사이군.’

애런은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같이 찍은 사진 정도만 바랐는데 그것보다 더한 것이 걸렸네?

백만 불짜리 로또를 원했는데 천만 불짜리가 걸렸달까?

‘더러운 형!’

티끌만큼 가지고 있었던 형에 대한 죄책감도 사라졌다.

너도 똑같은 놈이니까.

잠시 회색빛으로 희미해졌던 그의 계획이 분명하게 머리에 잡히며 황홀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수현은 애런의 비열한 머릿속도 모른 채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며 천천히, 진중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래, 지연 씨와 줄리아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의 흔들리는 눈빛, 긴장된 숨소리, 마른 입술을 보며 애런이 말했다.

“책임질 거야. 지연이를.”

“!”

“즉 지연이랑 결혼하겠단 얘기지.”

순간 싸늘한 공기가 두 사람을 휘감았다.

식탁 위의 컵라면은 불고 있었다.

동태전은 식어갔다.

형이, 동생을 위해, 처음 차린 음식들이.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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