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14화 (14/77)

제14화. 마주한 형제

2018.03.21.

수현과 지연의 입술이 만나기 직전,

그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듯 비껴버렸다.

‘이럴 순…… 없어.’

끝내 그의 이성은 애런을 놓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스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을 좀 더 사 오겠습니다.”

횡횡한 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비겁하지만 피해야 했으니까…….

.

.

.

지연을 그렇게 내버려둔 채 수현은 집을 나왔다.

점퍼도 걸치지 않았지만 화끈거리는 기분 때문인지 12월의 찬바람이 그다지 춥진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할 뻔한 거야?’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아무리 분위기에 취했어도, 심지어 여자친구하고도, 그의 인생에 우발적인 키스란 없었다.

진수현이란 남자에게 키스란 그냥 적시적소에서 여자에게 남자로서 해줘야 할 매너일 뿐이었다.

가방을 사주거나 자동차를 사주는 것과 다름없는.

그런데 조금 전 그녀와의 만남은,

로맨틱한 일루미네이션도 없었고

천만 원이 넘는 고급 샴페인에 취한 것도 아니고,

작정하고 유혹하는 여자의 페로몬 향기도 없었는데,

그는 왜 고작 뜨거운 모닥불과 싸구려 맥주와 그녀의 베이비로션 향에 홀려 그녀에게 다가갔을까?

사고는 피했지만 그렇다고 사고의 순간이 잊혀지는 건 아니다.

그녀의 입술과 스쳤던 그 찰나, 심장은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하며 요동쳤다.

바보같이……

요란한 심장 소리에 맞춰 걷다보니 어느새 가까운 마트를 지나 삼거리 모퉁이에 다다랐다.

‘술을 사간다고 했으니 사가야 하는데…….’

눈앞에 작은 편의점이 보였다.

생각 없이 편의점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나서야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어서 오세요.”

들어본 목소리. 지연에게 연립주택이 울리도록 소리 질렀던 사람.

그녀의 아버지였다.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를 쳐다보는 게 떳떳하지 못했다.

‘그냥 나가버릴 수도 없고.’

손님이라도 복작거리면 그 속에 섞일 텐데 늦은 밤이라 편의점의 손님이라곤 수현 혼자였다.

맥주 코너로 갔다가 쓸데없는 컵라면과 콜라로 바구니를 채웠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을 아는 것도 아닌데 여자의 아버지 앞에서 술을 산다는 게 좋은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계산대로 가 말없이 슬쩍 물건과 돈을 내밀고 내어주는 봉투를 받자마자 서둘러 뒤를 돌았다.

그런데 이내 묵묵히 계산을 해주던 남자가 물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뭔 소릴까 싶어 뒤를 돌았더니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

날 아시는 거야?

놀란 그의 표정을 읽은 봉수가 겸연쩍은 미소로 답했다.

“금화댁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우리 지연이가 아이랑 함께 그 집에 세들었다고. 집주인이 아주 훤칠하고 잘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송중기를 닮았다나? 그런데 제가 이 동네 사람들 다 아는데 그런 사람 없거든요, 허허. 들어오는 순간 그분인 걸 알았습니다.”

수현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아, 예…….”

술을 안 사길 다행이군.

몇 마디 더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봉수가 카운터에서 나왔다. 커다란 봉지 두 개를 들고.

“이거 원래는 새벽에 퇴근하면서 빨간 지붕 집 앞에 두고 가려 했는데 오신 김에 드리겠습니다. 지연이 좋아하는 동태전이랑 김치 뭐 그런 겁니다.”

“…….”

“아, 그런데 제가 줬단 말씀은 안 하셨으면 싶은데…… 그냥 어디서 얻었다고…… 아니다, 반찬 가게서 샀다고? 아니다…….”

“금화댁이 줬다고 하면 될까요?”

“맞다, 맞다, 그럼 되겠네요. 하하하, 나이 드니 머리까지 늙어서…….”

수현은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봉지를 얼른 건네받았다.

봉수는 빠른 걸음으로 수현을 지나쳐 문을 열었다.

봉지를 양손에 들고 문을 열어야 할 수현의 수고를 덜어주고 싶은 배려였다.

“부탁드립니다.”

봉수는 죄인처럼 끝까지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 계십시오.”

수현도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편의점을 나왔다.

따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주제넘은 언행인 듯싶어 속으로만 읊조렸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는 봉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딸과 함께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겠지.

봉투에서는 고소한 동태전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거면 아까의 어색함이 조금은 풀리겠군.’

오르막길이었지만 발걸음은 산뜻했다.

어서 빨리 그녀에게 동태전이라는 아빠의 사랑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키스가 아니면 어때. 뭐라도 그녀가 행복하면 되지, 생각하면서.

.

.

.

“지연 씨!”

집에 도착한 수현은 좀 전보다 밝은 목소리로 그녈 불렀다.

그런데 다소 마루에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모닥불이 다 타 빨간 불씨만 남아버린 것.

그녀도 보이지 않았다.

‘올라갔나?’

바닥을 보니 수현이 나가기 전 한두 개 남아 있었던 캔이 모조리 비어 있었다.

혼자 마셨나 보군.

미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할 수 없지.’

수현은 받아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고 2층으로 올라갔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았지만 그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혹시?

‘술 취하면 귀소본능이 강해져요.’

그녀가 자신의 술버릇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정도의 맥주를 마셨으면 취했을 수도 있을 텐데.

그녀의 귀소본능은 혹시 그녀가 유학가기 전 묵었던 지금의 내 방일까?

들어가면 어제처럼 그녀가 누워 있을까? 아기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복도에 켠 불이 문틈을 뚫고 침대를 비췄다.

드러나는 침대의 형상에 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기분, 기대일까? 우려일까?

그는 활짝 문을 열었다.

*

한국보다 여덟 시간 이른 독일의 뒤셀도르프.

뒤셀도르프 대학병원의 VIP실엔 ‘PRINCESS’란 예명의 한 여인이 입원 중이다.

그녀의 이름은 로즈 몬테규, 세계적 패션 기업 줄리아나의 회장.

로버트는 막 수현과의 전화를 마치고 입원실로 들어왔다.

안대로 두 눈을 가리고 있던 로즈는 인기척을 느꼈다.

“로버트?”

의사 회진 시간이 아니니 당연히 로버트겠지.

그녀가 이곳에 입원 중이란 걸 아는 사람은 30년 동안 몬테규 집안의 고문 변호사이며 집사로 있는 로버트밖에 없었으니까.

“접니다, 회장님.”

“팀은 잘 있나요? 어디 아픈 덴 없데요? 낯선 나라라 불편할 수도 있는데.”

본인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입만 열면 팀을 걱정하는 로즈의 얼굴을 로버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회장님 걱정이나 하시지, 이제 1년밖에 안 남았는데…….’

로즈 몬테규는 2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이지만 유행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는 동물적 감각과 실험적인 마케팅, 냉철한 판단력으로 줄리아나를 세계 최고의 패션 회사로 키워낸 탁월한 경영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정신력을 흐리게 하는 알츠하이머 진단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슬픔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팀을 총괄경영팀 팀장으로 데려와.”

이제 막 대학원을 마치고 회사의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하고 싶어 하는 큰아들의 고집을 꺾고 바로 회사 핵심팀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정신이 멀쩡할 때 그녀가 믿는 아들에게 속성으로 경영 수업을 시켜야 했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팀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총괄경영팀에 들어 간지 2년 만에 공격적으로 타 회사들을 인수해 ‘브랜드 사냥꾼’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믿음직스러운 아들의 모습에 긴장감이 풀어진 걸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진행되던 그녀의 병세가 최근 들어 급속도로 심해졌다.

설상가상 원인 모를 병까지 겹치며 시력까지 잃어가기 시작했다.

주치의가 단죄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이 정도 속도면 1년 후엔 완전히 정신을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시력도…….”

이번에도 그녀는 슬퍼하지 않았다.

대신 로버트를 통해 서둘러 지분 인수인계 작업에 들어갔고 이사들이 반발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든 후 팀에게 의논도 없이 발표해버렸다.

“1년 후 줄리아나는 제 아들 팀 몬테규가 맡을 것입니다.”

일단 팀이 반발할 수 없도록 발표부터 해놓고 그동안 로버트 외에 극비로 부쳤던 그녀의 건강 상태를 팀에게 고백할 참이었다.

“아들아, 사실 나…….”

그런데 아들의 입술이 조금 더 빨랐다.

“회사를 맡기 전 딱 1년만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너무나 그를 붙들고 있었으니까.

“그래, 대신 1년 후엔 꼭 돌아와야 한다.”

병세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럼 그가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가 한국으로 떠난 걸 확인한 후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애런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으로 다시 가려던 로버트는 급하게 연락을 받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독일의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

아직 회사 보유 주식 인계, 재산 상속 절차가 다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의 병환을 사람들에게 노출시킬 순 없었다.

이 큰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하는 로버트는 모든 게 염려스러웠다.

“팀에게 지금이라도 이곳으로 오라고 할까요?”

그녀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안 돼. 이 냉혹하고 잔인한 상류사회에서 나와 내 회사와 내 집안의 명예를 위해 한 번도 자유롭게 살아보지 못한 아이야. 아마, 진정한 사랑조차 해본 적이 없을걸? 그에게 주는 한국에서의 1년은 이 모든 짐에 대한 내 선물이야.”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렇게 편안하진 못하실 겁니다.”

“왜?”

“내일이면 애런이 팀에게 갈 겁니다. 한국으로.”

“무슨 일로?”

“자세히 아실 건 없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애런이 사고를 쳤고 팀이 수습을 도와야 합니다.”

담담한 대화를 이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격분하며 고개를 들썩였다.

“안 돼. 나도, 로버트도 없는 상황에서 애런을 팀 곁에 둬서는 안 돼. 그 아이가 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로버트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런이 사고뭉치지만 그런 식으로까지 표현을 하다니.

“왜 그렇게 애런을 미워하시죠? 사실 애런이야말로 회장님의 친아들인데…….”

그녀는 마른 손을 떨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 친아들이니까.”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이어갔다.

“살인자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안대 사이로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보며 로버트는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

“어서 일어나세요.”

아침 공기만큼 신선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수현의 잠을 깨웠다.

‘지연 씨군.’

소리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지만 그녀의 음성이 그를 더 잡아끌었다.

“일어나시라고요.”

‘집요하군.’

친절한 음성은 딱 두 번까지였다. 그녀는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바꾸었다.

“일어나라, 어서. 이 늦잠꾸러기 공주님아!”

수현의 방과 벽 하나를 둔 큰방에서 지연이 늦잠 자는 줄리를 깨우는 소리였다.

생생하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수현도 함께 눈꺼풀을 올렸다.

어제, 그의 방엔 지연이 없었다.

그의 방문은 그가 모르고 열어 놓았던 것이고 지연은 수현의 방을 제 방으로 착각할 정도로 취하지 않았던 것이고.

‘다행이네. 또 내 방으로 왔음 큰일이게.’

혹시나 하며 문을 열 때 느껴졌던 긴장감은 기대가 아닌, 우려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이미 그의 눈빛엔 졸음이 사라졌다.

어차피 그녀에게 할 말도 있으니 서둘러 일어나는 게 좋을 듯했다.

수현은 미적거림 없이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구 정리를 하려 덮었던 이불을 툭 터는데 돌돌 말려 있던 뭔가가 이불 안에서 떨어졌다.

청바지였다.

‘누구 거지?’

길이로 보나 품으로 보나 그의 것은 아니었다.

수현이 청바지를 들어 올리는 순간 주인이 밝혀졌다.

지연의 목소리가 벽을 넘어 들어왔다.

“줄리, 엄마 청바지 못 봤니? 그저께 입은 건데 보이질 않아.”

“!”

이 방에 왜 그녀의 청바지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제, 미선과 술을 마신 그녀가 귀소본능에 의해 유학 가기 전 그녀가 묵었던 지금의 수현 방으로 들어왔고 자기 방인 줄 알고 바지를 벗었고.

그날 그녀를 안고 제 방으로 옮겨줄 때는 너무도 긴박하고 긴장된 순간이라 그녀가 뭘 입고 벗었는지 자각이 안 됐었는데 이 바지를 보니 생각이 났다.

그녀가 상의만 입고 있었군. 뉴욕의 그날처럼.

“술버릇도 참…….”

절절하게 바지를 찾는 그녀를 위해선 당장이라도 갖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일단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이 그의 품에서 잠들었다는 걸 모른다.

혹 안다 해도 줄리 앞에서 그녀에게 청바지를 돌려줄 순 없었다.

수현은 그녀의 바지를 들어 침대 프레임에 걸쳐두었다.

이따 몰래 방으로 갖다 놔야겠다, 생각하면서.

.

.

.

아침 샤워 후 1층으로 내려오니 지연이 줄리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

쓱 반찬을 스캔하니 어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동태전과 김치는 안 보였다.

아침 인사 겸 음식 이야기를 꺼냈다.

“금화댁이 음식 주라던데.”

그가 뒤에 있다는 걸 모르는 지연이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아!”

대답인지 감탄산지 구분할 수 없는 외마디만 내뱉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뒤통수 옆으로 보이는 그녀의 귓불이 발그스레한 걸 보니 어제 일이 맘에 걸리는 듯했다.

그도 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는 아니었다.

“지연 씨, 줄리 밥 다 먹이고 저 좀 보시죠.”

그의 말에 지연이 줄리 입으로 넣으려던 숟가락을 멈췄다. 놀라서.

“엄마, 넣어줘, 아!”

줄리가 재촉하자 그녀는 허둥지둥 다시 숟가락을 그녀의 입으로 넣었다.

손을 떨었는지 밥풀이 우수수 떨어졌다.

“에이, 밥 다 떨어졌네. 내가 먹을게요. 엄마 오늘 좀 이상하네.”

아이의 눈에도 오늘 엄마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나 보다.

수현은 지연의 허둥지둥거리는 행동이 어제 생긴 ‘그럴 뻔’한 일 때문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서로 묻고 지나가야 할 수밖에 없다.

조금 있으면 애런이 올 테니까.

“지연 씨, 얘기 좀 할까요?”

수현이 한 번 더 물어보자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가 잔걸음으로 서서히 몸을 틀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내린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이따 같이 출근할 때 하시면 안 될까요?”

무슨 얘기가 나올지 두려운 모양이었다. 피하고 싶고.

하지만 수현의 할 말은 그녀가 생각하는 얘긴 아니었다.

“제가 출근을 함께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리려고요.”

예상했던 얘기가 아니자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 이거였어요?”

“집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나중에 가든지 하겠습니다.”

“아…….”

의외라는 듯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래졌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애런이 부탁했었다.

‘내가 갈 때까지 내 얘긴 하지 말아줘.’

그렇다면 그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그럼 출근 잘하십시오.”

수현은 불친절하게 얘기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이 모든 사건의 근원인 애런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

금화댁에게 줄리를 맡긴 지연은 홀로 버스에 올랐다.

오늘은 그녀가 그렇게 꿈꾸던 첫 출근 날이다.

그런데 기분은 해고라도 당한 사람처럼 내려앉았다.

‘도대체 난 뭘 기대한 거야?’

어제 그녀는 이랬다저랬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동과 태도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어쩔 땐 키다리아저씨나 흑기사처럼 황홀하게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쌀쌀맞다.

‘정체도 모르겠고…….’

그가 그녀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설레는 마음은…… 그녀 혼자라도 된다.

약혼자에게 버림도 받았는데 짝사랑도 아니고 잠시 설렌 것 따위 꼭 쌍방통행일 필욘 없잖아?

그런 자존감 따윈 알파인 언덕 아래로 던져버린 지 오래다.

그녀는 그냥 단지 한집에서 살아야 하는 집주인과 어색해지는 상황이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맥주라도 마시면서 허심탄회한 얘기를 해보려 방문을 두드렸다.

생각해보니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없었다.

미국에서 왜 한국에 오게 된 건지, 왜 그 큰집에 혼자 살게 된 건지, 정말로 직업도 없고 돈도 없다면 그 집은 왜 구입한 건지.

분위기를 좀 띄워보려 맥주를 들고 그의 방문을 두드렸는데 그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서로의 사이는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친해져 보려고 술기운을 빌려 노력했다.

취직시켜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하고 쓸데없이 미선이 얘기도 꺼내면서.

그런데…… 의도한 게 아닌데……

그의 손길이 그녀의 발등을 휘감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고 달큰한 그의 향기가 코끝이 닿았을 때,

절실하게 궁금해졌다.

‘저한테 왜, 잘해주세요?’

그는 대답 대신 아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가 바라는 게 뭔지 아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기다렸다. 감히.

입안은 촉촉해졌다, 이미.

카운트를 세고 있었다. 함부로.

그런데…… 그의 입술은 매정하게 비껴나가 버렸다.

‘술 좀 더 사 오겠습니다.’

술 핑계를 대면서.

그가 나간 후 그녀는 모닥불 앞에 덩그러니 혼자가 됐다.

남은 맥주를 입안으로 홀짝홀짝 넣고 있으니 그가 있을 땐 훈훈했던 모닥불은 싸늘했고 코끝을 자극하던 참나무 향은 매캐했고 손에 든 맥주는 비렸다.

자정이 넘어 마법이 풀려버린 신데렐라처럼 그렇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초라하고 처량하고 불쌍하게……

뭐…… 이게 내 모습이지.

‘아직도 남자한테 기대하니?’

정신 못 차리고.

마법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한 조각 희망은 가지고 있었다.

‘맞다. 내일 함께 출근하지? 그때 어색함을 풀어내야지.’

어쨌든 집주인과 세입자로 지내야 하는데 데면데면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런데 그 작은 바람도 이뤄지지 않았다.

‘출근 같이 못 할 거 같아서요.’

그럼 그렇지.

‘계획에도 없던 뷰티 카운슬러라는 걸 하고 싶겠어?’

어제는 그냥 불쌍해서 그래 준 거지. 동정이지.

‘나는 27살의 변변한 직업도 집도 남편도 없는 싱글맘인데 뭐.’

첫 출근을 이렇게 갈기갈기 찢겨진 기분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엉망진창이 된 마음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버스는 이미 처해진 현실 앞에 다다랐다.

“오드리 화장품 앞입니다. 하차하실 분 준비하세요.”

마음을 다스릴 잠깐의 여유도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 따위로’ 절망하지는 않는다.

‘난 엄마니까.’

지연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님, 내리는 사람 있어요.”

그녀의 힘찬 목소리가 버스를 울렸다.

*

딩동-

현관벨 소리가 2층까지 높다랗게 터진 마루를 울렸다.

수현은 먼저 비디오폰으로 방문자를 확인했다.

화면에 비친 남자는 금발 머리, 파란 눈, 높은 콧날, 비릿하게 올라간 입매의 소유자,

“나야, 형.”

동생이었다.

화면을 사이에 두고 두 형제가 마주했다.

한 여자에 대한 협상이 시작될 타임이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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