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내일은 없다고
2018.03.17.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훅 날아온 줄리의 화살이 수현의 심장에 정확하게 꽂혀버렸다.
‘지금 뭐라 그런 거야?’
그는 한국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줄리의 말이 그냥 내뱉은 말인지, 드라마 속에서 송중기가 송혜교에게 한 말인지 알 턱이 없다.
‘나한테 그런 거지?’
지연의 발등을 데게 했으니 사과하라고.
지연의 손을 잡고 있으니 고백하라고.
줄리의 말이 짐짓 수현에게 던진 말처럼 들려버렸다.
수현은 자신의 속마음을 줄리에게 들킨 거 같아 말문이 막혔다.
지연이 미역국을 먹여주면서, 그녀의 손을 잡게 되면서, 그가 설렜던 건 사실이니까.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들이 찔리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오는 첫 번째 행동은 화를 내는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순간 발끈했지만 당당하지 못한 목소리는 혼잣말처럼 허공으로 증발해버렸다.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지연이 줄리가 던진 대사에 환한 웃음으로 받아쳤다.
“사과하세요!”
드라마 속 송혜교의 대답을 똑같이 따라 한 것.
하지만 그 말 역시 자신에게 한 말이라 생각한 수현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그러곤 잡고 있던 지연의 손을 툭 내려놓았다.
손을 치우니 뜨거운 국물에 벌겋게 된 지연의 발등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냐고, 아프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괜한 오해 받을 필요 없지.’
수현은 지연 앞에 무릎앉아 하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상기되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부엌을 나갔다.
화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가는 뒷머리가 불편했다.
사고 치고 도망 가는 사람처럼.
*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진수현이란 남자.
지연은 잠든 줄리의 얼굴을 보며 오늘 하루 있었던 형형색색의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참 여러 가지 일과 감정이 광폭으로 널뛰던 날이었다.
오늘 아침 수현은 줄리에게 목말을 태워주며 지연이 바라던 자상한 아빠상(想)을 보여주었다.
처음으로 그를 보며 가슴이 반응하던 순간이었다.
새삼스럽게 그의 외모에 반하기도 했다.
미선을 비롯한 뷰티 센터의 수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받는 그를 보며 그녀의 심장도 전염처럼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오드리 화장품 회사의 이사 민희에게 ‘송지연 씨한테 사과하시죠.’라고 당당히 요구했을 땐 그녀 가슴의 설렘 지수는 절정에 이르렀다.
‘누군가 나를 위해 그렇게 나서준 적이 있었던가?’
어릴 적 동네 남자애들에게 ‘빨간 지붕 집 공주’로 통하며 여왕벌 행세를 했을 때를 빼놓곤 적어도 성인이 되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마른오징어 쥐어짜듯 돈을 아끼느라 뉴요커는커녕 할렘가의 루저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대접받을 만한 곳을 간 적도, 대접받을 만한 신분에 있었던 적도 없다.
그래서 강민희 이사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고 건방지단 걸 알았지만 따져 물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비굴함도 버릇이 되어가고 있었네…….’
그런데 그가 보란 듯 민희를 박살내주었다.
착각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혹시 수현 씨가 나를?’
좋아한다는 착각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옆에 앉아서 그의 건장한 팔뚝과 슬쩍슬쩍 스치며 미선과 맥주를 마실 때는 마치 그가 내 남자처럼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맥줏집 말미에서부터 그의 표정이 화난 사람처럼 굳기 시작했다.
‘오늘 수현 씨가 많이 피곤한가?’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줄리 핑계로 미역국을 끓였는데 그 결과도 그리 좋지 않았다.
수현은 발등을 데게 하는 실수는 자기가 해놓고 본인이 더 화가 난 사람처럼 올라가버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일까?’
호감까진 아니더라도 그 사람한테 미움을 받고 싶진 않은데…….
지연은 줄리가 잠든 걸 한 번 더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점퍼를 가지고 방을 나왔다.
이런 요망한 기분으론 잠이 오질 않을 것 같아서.
*
방으로 들어온 수현은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을 침대로 던져버렸다.
부끄럽고 어색하고 당황스런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철저히 이성만 가지고 살아왔던 그의 32살 인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깟 미역국 한 수저 먹는데 혼자 무슨 의미를 그렇게 부여한 거야? 유치하게.’
후회는 자책을 낳았고 또 자책은 자학으로 치환됐다.
두 손으로 부드럽게 내린 검은 머리를 꾹 움켜쥐고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으니까.
그때 던져버린 휴대폰이 진동으로 울렸다. 멀리서도 확인되는 이름은, 로버트.
수현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Hello? 로버트,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연락도 안 되고.”
늘 그렇듯 로버트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담담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심부름으로 독일에 있었습니다.”
“한 달쯤 걸릴 일이라더니 다 끝났어?”
“사실은…… 한 달보다 더 걸릴 거 같습니다.”
“왜? 무슨 일인데? 회사 일이야? 내가 필요한 건 아냐?”
“아닙니다. 일단은…….”
일단은, 이란 말이 걸리긴 했지만 로버트는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정확히 구분하는 사람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끝까지 하지 않겠다는 것.
“그래 됐고, 용건을 말해봐.”
“애런 도련님이 가신다고요?”
“어, 내일 온다네.”
“여자를 인정하시던가요?”
불행히도.
“맞나 봐. 그 여자가.”
우리 지연이, 라고 했는데 더 이상 무슨 확인이 필요할까?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여자에 대해 조사해봐야 합니다. 협상에 들어가기 전 그녀의 약점을 알아내 쥐고 있어야죠.”
협상 전 당연한 과정이었다.
겉으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뒤로는 상대의 뼛속까지 파악한다.
막상 협상에 들어가 상대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 싶을 때 뒤통수를 갈기듯 그들의 약점을 보여준다.
협박 같은 협상은 승률 90%를 가져온다.
팀 몬테규의 냉철한 협상 방법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번엔 그걸 놓치고 있었을까?’
한국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 벌써 들어갔어야 할 뒷조산데.
‘왜 나는 그녀의 약점 대신 상처를 보고 있었을까?’
그녀의 약점을 쥐기 위해 샅샅이 그녀를 뒤진다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반대할 수도 없었다.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
“그래, 시작해.”
“투 트랙으로 진행하죠. 수현 도련님은 거기서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조사를 하시죠. 저는 여기서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걸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낼 애런과 여자가 만나더라도 협상을 빨리 시작해선 안 됩니다. 조사가 완벽히 끝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끄세요.”
협상, 협상, 협상……
왜 이 소리가 그렇게 심장을 꾹꾹 찌르는진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통화된 로버트와의 대화도 불편함에 이만 마치고 싶었다.
“알았어, 혹시라도 회사에 일이 생기면 연락하고.”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동시에 한숨이 흘렀다.
한숨과 함께 현실 자각 타임이 돌아왔다.
지연의 태생적 밝고 맑은 얼굴과 순수함에 홀려 잊고 있었던 본분.
‘나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사고 친 동생의 뒷수습이다.’
내일 애런과 연결해주고 금전적, 법적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다시 단단히 마음을 잡고 애런과 나눌 불편한 대화에 대해 시뮬레이션 해보았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묻기 전, 지연의 낭랑한 목소리가 문을 넘었다.
“안에 계시죠?”
안에 있는 걸 알고 물어보는데 없는 척할 순 없었다.
수현은 할 수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 대신 두 개의 캔 맥주가 그의 눈앞으로 들어왔다.
“짜잔~~. 우리 맥주 한잔해요. 제가 나가서 사 왔어요. 이가 시리도록 아주 시원한 걸로.”
현관문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그녀가 나갔다 온 모양이군.
그런데 솔직히 지금의 기분으론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다.
난 이미 내 본분을 찾았으니까.
조용히 혼자서 혼란스러운 감정들은 내보내고 냉철한 이성을 되돌리며 이 밤을 보내고 싶었다.
수현은 최대한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막 자려던 참이었습니다.”
그가 거절하자 그의 눈까지 올라왔던 두 개의 맥주 캔이 스르르 내려왔다.
“어, 벌써 땄는데.”
그녀의 기분도 내려왔는지 문을 열 때와는 다르게 광대 위에 붙어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그녀에겐 참 희한한 특징이 있다.
줄리를 위해 아빠에게 맞설 때나 줄리 앞에서 슬픔을 참을 땐 이십 대란 나이에 비해 독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을 잘 숨기면서 평소에 보면 얼굴 전체에 기분을 담고 있다.
아이처럼 실망한 표정이란……
머리는 동하지 않았는데 그의 손은 이미 그녀가 내민 맥주 캔을 들고 있었다.
“딱 한 캔만 하죠.”
한 캔의 시간 동안 그의 이성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
.
.
언제 피웠는지 모를 모닥불이 제법 훈훈하게 마루를 데우고 있었다.
“제가 맥주 사러 나가기 전에 피워놓고 갔어요. 따뜻한데 앉아서 찬 맥주 마시는 거, 재밌잖아요.”
그게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지만 수현은 그녀가 미리 준비해놓은 모닥불 앞 담요에 앉았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거리감 없는 태도로 그의 옆에 꽤 가까이 앉았다.
그녀의 살가움이 싫지는 않았으나 냉정해지기로 맘먹은 이상 그녀의 살이 닿는 게 신경 쓰였다.
그는 살짝 엉덩이를 고쳐 앉았다.
‘난 당신을 조사하고 당신의 약점을 파내 잔인한 협상에 들어가야 할 사람입니다.’
거리를 두는 그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엔 무안함이 올라왔지만 이내 다시 환하게 웃었다.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어요.”
무슨 할 말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이 자리를 만든 이유를 털어놓았다.
“오늘 취직도 시켜주시고 제 체면도 세워주시고 했는데 제대로 된 인사를 못 드려서요.”
‘맞다, 취직했지?’
애런과 로버트의 연달은 전화로 그전에 있었던 모든 일이 순식간에 기억에서 소멸됐었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어차피 함께 다녀주진 못할 것 같지만.
그의 무심한 대답에도 그녀는 친해지려 작정이나 한 사람처럼 다시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보증금도 못 드리고 참, 경우가 없었죠?”
“뭐…….”
“돈이 좀 모아지면 꼭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뷰티 카운슬러는 실적대로 돈을 버는 시스템이니까 열심히 하면 금방 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계속되는 성의 없는 대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또 검질기게 발랄했다.
“줄리 귀여워해주시는 것도 감사해요.”
“네…….”
굳이 그녀를 무안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 길어지니 무성의한 대답도 길어졌다.
그녀는 그의 표정 없는 응수에 속으론 힘이 들었는지 손에 든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훅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맥주 좀 더 가지고 올게요. 왜 이렇게 목이 타지?”
다다다다-
심부름을 시킨 것도 아닌데 다람쥐처럼 좁고 빠른 걸음으로 부엌에 가서 두 팔 가득 맥주를 안고 왔다.
그 모습에 굳었던 수현의 입술이 삐죽 올라갔다.
‘일부러 귀엽게 구는 건가?’
여자가 술을 들고 오는 게 그다지 특이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행동은 늘 특별함을 동반한다.
“저는 왜 이렇게 지금 맥주가 당기죠? 수현 씨도 드시고 싶으면 더 드세요. 헤헤.”
맥주를 한가득 가져온 제 모습이 무안한지 변명처럼 맥주를 권했다.
다시 시작된 그녀의 수다.
“오늘 미선이가요…….”
참 뜬금없고,
“하하, 맞다, 그 여자 표정. 오늘 그 이사님 표정 정말 웃겼어요. 수현 씨 땡큐 베리 감사.”
뒷북이고,
“줄리는 금화댁이 왜 그렇게 좋을까요? 진짜로 남자 취향이 서로 맞아서? 하하하.”
큰 이슈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핵심도 포인트도 결론도 없고 기승전결 앞뒤 좌우 들어맞지도 않는 그녀의 얘기들.
이렇게나 무심하게 피드백이 없는데도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밝고 경쾌하게 웃어대는 그녀.
그녀는 지금 어떻게 해서라도 내 기분을 풀어보겠다고 막강한 결심을 한 사람 같았다.
내일이 이별의 날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그녀의 그 노력이 효과가 있었을까?
그저 딱 맥주 한 캔의 시간만 갖겠다고 작정한 수현의 눈동자는 어느새 또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
“하하하하하.”
웃으면 보이는 목젖과 하얗고 고른 치아, 찡그리면 생기는 귀여운 코주름,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유난히 빨게 보이는 그녀의 입술, 살짝살짝 보이는 흐릿한 보조개까지 놓치지 않으며.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좀 전 자신이 저지른 거짓말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이거였군.’
그가 왜 애런에게 그녀와 함께 없다고 거짓말을 했는지.
바로 이 웃음을 조금 더 보기 위해서.
취직의 기쁨으로 미선과 세상을 다 가진 승리자처럼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차마 애런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오늘만이라도 그녀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그랬다.
그녀와 함께 있지 않다고.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내 옆에서 웃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잘못된 행동에 타당성을 얹으니 뻔뻔함이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마지막 밤이야. 함께 술 좀 마시면 어때.’
내일부턴 애런과 있을 테니.
딱 맥주 한 캔의 시간을 갖기로 한 그의 생각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저도 한 캔 더 하죠.”
수현도 새 맥주 캔을 시원하게 땄다.
축하주든 이별주든 그녀와 술 한 잔의 추억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모닥불 앞에 맥주 캔이 차곡차곡 쌓였다.
두 캔이 세 캔 되고 어느새 바닥엔 열두 캔이 뒹굴었다.
“역시 술은 두 번째 날이죠.”
지연은 어젠 미선과 함께, 오늘은 수현과, 연속 이틀째 술을 마시는 게 은근한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다.
“미국에선 거의 술을 마시지 못했어요. 그때 뵀던 그날이 5년 동안 진짜 처음이었다니까요. 아깝긴 해요. 세계의 모든 것이 다 있는 뉴욕인데 학교에 알바에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으니까. 또 갈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녀의 푸념에 수현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뱉어버렸다.
“그럼 낼은 뉴욕 가서 샴페인 마실래요? 맨해튼 빌딩 숲 보면서.”
자신의 말에 자신이 놀라버렸다.
저도 모르게 한국의 직업 없는 진수현이 아닌 전세기로 하루씩 나라도 바꿔가며 다녔던 팀 몬테규가 튀어나온 것.
하지만 지연이 그 말을 곧게 들을 린 없었다.
“하하하, 요 앞에 호프집 뉴욕뉴욕 보셨어요?”
그래, 상상이 안 가겠지.
그는 내일 당장이라도 지연을 뉴욕 아닌, 세계 어디라도 데려갈 수 있는 남자란 걸.
수현은 순간 이 여자랑 딱 한 번만 뉴욕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가서 눈물의 추억 대신 청청한 추억을 주고 싶단 생각.
화려한 맨해튼 숲을 보며 술 한잔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내일 그녀를 보내야 한다. 애런에게.
찬찬히 그녀를 응시하는 와중 발등에 붙인 밴디지가 보였다.
“아, 다친 데는 괜찮아요?”
수현이 자신의 발등을 보자 그녀가 쓱 다른 발로 데인 발등을 가렸다.
“괜찮아요. 걍 대충 밴디지 며칠 붙이면 낫겠죠.”
진짜로 대충 붙인 티가 나는 밴디지였다.
줄리는 어디 하나 다칠까 크리스털 다루듯 조심하면서 자기 몸에는 인색하군.
“잠시 만요.”
수현은 긴 다리로 금세 응급 키트를 가지고 왔다.
“다친 즉시 치료 안 하면 흉터 생겨요. 피부도 하얀데 흉이 지면 티 나잖아요.”
그녀의 발을 만지려 하니 그녀가 발을 옆으로 비꼈다.
“나 발 못생겼는데.”
발이라도 못생겨라, 제발.
하나라도 싫은 곳을 찾고 싶다, 제발.
수현은 묵묵히 그 발을 가져와 자신의 눈앞에 놓았다.
알코올로 살살 닦아 소독을 하고,
“아, 따가워, 따가워.”
연고를 면봉으로 얇게 발라주고,
“쓰라려요. 아 진짜.”
그녀가 붙인 밴디지보다 조금 더 질이 좋은 밴디지로 바꿔 붙였다.
예쁘게 붙은 밴디지를 보니 수현의 입매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 됐다.”
치료를 끝낸 후 그녀 발등에 두었던 시선을 무심히 올렸는데,
그녀가 좀 전까지 보였던 웃음을 풀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그윽한 눈빛에 수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이십 센티도 안 되는, 조금만 다가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는 웃음이 아닌 긴장감을 유발한다.
모닥불의 흔들림이 눈동자에 비치며 그녀의 눈빛도 요란해졌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수현을 응시하며 그녀가 물었다.
“저한테 왜, 잘해주세요?”
그녀의 질문에 그의 머릿속에도 Question Mark가 생겼다.
‘당신한테 왜, 잘해줄까, 나는?’
내 여자도 아닌데.
순간 모닥불과 한 잔 술과 그녀의 그윽한 눈동자가 마법을 부렸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버린다.
그녀의 빨간 입술 사이에서 풍기는 달큰한 맥주 향에 그의 심장도 취해버린다.
타닥타닥 모닥불 소리는 사랑을 갈구하는 음악으로 바뀌어버린다.
그 마법에……
그녀의 발등 위에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두 볼로 올라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사이엔 아무 방해가 없다.
술기운이 그의 귀에 속삭인다.
내일은 없다고…….
거대한 중력이 하늘과 땅이 아닌, 그와 그녀의 입술 사이에 생겨버렸다.
그가 그녀를 잡아끄는지, 그녀가 그를 잡아끄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사과가 바닥에 뚝 떨어지듯,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온한 대지처럼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
눈을 감아도 힘과 힘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3센티, 2센티, 1센티……
이제 곧 평온한 대지는 사과를 만난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