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12화 (12/77)

제12화.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2018.03.14.

“우리 지연이, 혹시 같이 있어?”

애런의 목소리였다.

수현이 아무 대꾸도 못 하자 그가 다시 물었다.

“우리 지연이 같이 없어?”

그가 두 번이나 질문한 후에야 수현의 하얬던 머리에 하나둘씩 생각이란 것이 돋아났다.

“아…….”

일단 운은 띄웠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지연 씨와 같이 있냐고?

그의 눈동자가 지연을 향해 빠르게 돌아갔다.

있지. 같이 있지. 웃고 있지.

“취직해서 너어무 좋다. 헤헤.”

그것도 아주 사랑스럽게.

그런데 그녀와 같이 있기에 같이 있다고만 하면 되는 그 쉬운 대답이 왜 하지도 못하는 아랍어로 시를 한 편 지으라는 것처럼 어려운지.

그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응, 같이 있어.’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입은 다른 말을 해버렸다.

“없어, 같이.”

“…….”

서로의 휴대폰 사이로 12월 밤공기만큼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짓말에 익숙지 않은 수현은 이어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문제로 가득 찬 시험지를 받은 학생처럼 머릿속이 텅텅 비었다.

고맙게도 애런이 먼저 이 썰렁함을 깨주었다.

“그렇다면 부탁이 있어.”

“뭐?”

“내일 아침 로버트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갈게. 우리, 할 얘기 있잖아?”

그렇지, 할 얘기가 있지. 그것도 아주 많이.

“……어.”

“그런데 내가 형을 만나기 전까진 지연이한테 내 얘긴 하지 말아줘. 아, 만약 서로 얘기를 하게 된다면 말이야.”

서로 얘기를 하게 된다면…….

찔리는 게 있으니 뼈가 있게 들렸다.

하지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은 사람은 수현이었으니까.

“어, 그럴게.”

“그럼 낼 아침에 봐.”

“어.”

몇 달 만에 통화가 된 동생과의 대화는 이렇게 끝나버렸다.

어색하고 허무하고 썰렁하게.

애런과 전화를 끊은 수현은 미선의 거듭된 부추김에도 입에도 대지 않았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았으니까.

.

.

.

미선을 보낸 후 수현과 지연은 함께 택시를 타고 가회동 봉수의 집 앞에서 내렸다.

줄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금화댁은 이미 줄리의 손을 잡고 연립 주택 앞에 나와 있었다.

하루 종일 줄리를 돌본 게 힘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얼굴은 아침보다 더 생기가 넘쳤다.

“더 있다 와도 된다니까. 자고 낼 아침에 데려가도 되고. 나 여기 아빠 집 1층에 살잖아.”

우려했던 줄리도 금화댁과 있었던 게 싫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엄마, 나 오늘 한국 드라마 되게 많이 봤어. 아줌마 드라마 광녀래.”

물론 또 말실수를 했지만.

“줄리야, 광녀가 아니고…….”

그녀의 말실수를 지연이 고쳐 잡으려 하자 금화댁이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나 광녀 맞아. 하루 종일 드라마만 보고 있거든.”

그러더니 지연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줄리와 내일을 기약했다.

“줄리야, 우리 내일 또 드라마 보자. 내일은 김수현 오빠 나오는 걸로.”

줄리도 장단을 맞췄다.

“앗싸, 김수현!”

그들 사이엔 이미 두 사람만의 인사도 생겼다.

줄리는 작은 엉덩이를 뒤로 빼며 그녀의 입술 앞으로 이마를 가져갔고 금화댁은 그녀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줄리, 안녕.”

“아줌마, 안녕.”

금화댁과 줄리는 꽤 오래된 인연이었던 사람들처럼 끈끈함이 묻어 있는 인사를 나누었다.

어쨌든 줄리가 하루 종일 행복했었다는 게 증명되었다.

지연은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좀 신기했다.

‘어떻게 금화댁과 저렇게 잘 지낼 수 있지?’

사실 지연은 한국에 오기 전 과연 줄리가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해줄지 우려했었다.

줄리가 누군가에게 쉽게 맘을 주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려 일부러 되바라진 말대꾸를 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주목받길 원한 액션일 뿐 사실은 어른들과 그렇게 친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혹시나 지연이 그녀를 두고 갈까 봐.

엄마도 없고 유일한 혈육인 아빠까지 무관심한 속에서 자라며 그녀의 유일한 바라기는 지연이었다.

그런데 다른 어른들과도 잘 지내는 걸 보면 지연이 혹시나 안심하고 자기를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줄리가 꽤 설득력 있는 답변을 주었다.

“나랑 취향이 맞더라고. 남자 취향.”

여섯 살 아이와 쉰이 넘은 아줌마의 남자 취향이 같다고?

그런데 서로 남자 취향은 어떻게 안 거야?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지연이 물었다.

“서로 이상형 얘기했어?”

줄리가 우러르듯 하늘을 보며 양 볼을 핑크빛으로 물들였다.

“응, 송중기. 오늘 같이 태양의 후회를 봤는데 둘 다 송중기 멋있다 그랬어.”

“…….”

일단 태양의 후회가 아니라 태양의 후예겠지.

그리고 송중기는 모든 여자들의 로망이거든? 두 사람만의 취향이 아니고?

소리 내어 웃으며 그건 서로 취향이 맞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려다 말았다.

마치 그가 그녀만의 남자인 듯 송중기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순수한 모습을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희한하다. 금화댁 아줌마는 어쩜 그렇게 우리 줄리랑 취향이 맞을까?”

그녀의 말에 동의해주었다. 내일 또 맡겨야 하니까.

그러곤 진짜로 묻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할아버진 뵈었니?”

이 부분에선 줄리도 살짝 우울함을 비추었다.

“내가 아줌마한테 할아버지가 나 싫어한다고 말했어. 딸 인생 망친, 그리고 또 뭐더라?”

아이가 너무 똑똑해도 엄마는 힘들다. 별 걸 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줄리야, 그건 됐고 할아버지 뵀어?”

“아니, 할아버지는 늦게 오시니까 못 봤고 아줌마도 한동안 얘기하지 말래. 낼은 자기 집에서 놀자 그랬어.”

그래도 되나 싶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차라리 한동안은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일을 해서 생활이 좀 안정적이 되면 줄리를 좋은 유치원에도 보낼 수 있고 그런 후에 찾아봬도 될 것 같으니까.

괜히 지금 뵈었다가 역정 나서 금화댁까지 못 보게 하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하루일과를 정리하고 빨간 지붕 집에 가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데 갑자기 줄리가 지연과 줄리의 뒤에서 묵묵히 걸어오고 있던 수현을 불렀다.

“아저씨, 제 옆으로 좀 와보세요.”

줄리의 말에 수현이 큰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옆에 섰다.

“왜?”

줄리가 한 손으론 수현의 손을, 한 손으론 지연의 손을 잡았다.

“저 들어 올려주세요. 두 사람이. 그런 거 있잖아요, 비행기 태우듯.”

줄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지연이 놀랐다.

“줄리야,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안아줄게.”

지연이 수현의 눈치를 보며 말렸다.

하지만 그의 반응도 의외였다.

아침에 목말까지 태워주고 해서 흔쾌히 줄리의 응석에 오케이 할 줄 알았는데 우두커니 서서 줄리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 보았다.

하겠다, 못 하겠다, 아무 말도 안 한 채.

그의 반응에 더 무안해진 지연이 줄리의 손을 끌었다.

“그런 거 부탁하는 거 아니야. 자, 줄리 이리로…….”

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데려오려 하는데 순간 수현이 줄리의 손을 훅 잡았다.

“그럼 그래 볼까? 엄마랑 나랑 올리면 두 발을 하늘 높이 들어야 한다.”

그러더니 예고도 없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하나, 둘, 셋!”

지연은 엉겁결에 수현의 카운트에 따라 줄리의 손을 들어 올렸다.

수현과 지연이 줄리의 양쪽 손을 잡고 동시에 올리며 그녀의 두 발이 공중으로 붕 떴다.

“까르르르르르.”

그녀의 웃음소리도 날개를 단 듯 솟아올랐다.

발을 대롱대롱거리며 장난치는 줄리의 손을 수현과 지연이 단단히 맞잡았다

뒷모습만 본다면 누가 봐도 행복한 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찰칵찰칵-

그 행복한 순간을 누군가는 사진에 담고 있었다.

*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 매번 전쟁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 단 한 방의 기습으로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으니까.

애런 몬테규의 생각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전형적인 부잣집 사고뭉치로 알길 바랐다.

자신을 우습게 알아야 경계도 하지 않을 테니까.

‘팀이 나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마음 놓고 있을 때 난 그의 심장에 칼을 꽂으리라.’

그럼 원래 그의 거였던 모든 걸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진 그는 그냥 팀에게 용돈이나 받아내는 멍청한 동생 연기나 하면 그뿐.

그런데 그에게 칼을 꽂을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온 듯하다.

바로 송지연이란 여자 때문에.

낮에 타블로이드 기자에게 그녀에 대한 신상을 들었던 애런은 그 정도의 조사에 만족할 수 없었다.

파고 파도 계속해서 의문이 쏟아졌다.

정보가 충분치 않았던 애런은 한국의 심부름센터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히 로버트에게서 받은 오십만 달러가 있었다.

팀과 지연의 사진을 돈과 함께 보여주니 몇 시간도 안 돼서 두 사람을 찾아냈다.

그런데 불행히 심부름센터도 타블로이드 기자와 똑같은 말을 했다.

“송지연 씨의 한국 생활은 조회가 되는데 미국 생활은 저희가 알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선 그냥 참하고 성실한 대학생이었던데요? 별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이런!

미국에선 한국 사람이라 모른다고 하고 한국에선 그녀가 미국에 가서 모른다 하고.

도대체 언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 아빠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애는 어떻게 낳은 거야? 하늘에서 떨어졌어?

그런데 그녀의 과거만 알 길이 없을 뿐 현재의 그녀는 시시각각 알 수 있었다.

심부름센터 사람들은 팀과 지연을 찾아내 금세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금방 팀과의 전화를 끊은 애런에게 문자로 수신됐다.

-보여주신 사진에 있던 남자와 여자는 함께 있습니다. 또 다른 여자와 함께요.

팀과 지연, 미선이 함께 있을 때의 사진을 보낸 것.

문자를 본 애런의 입술이 비열하게 일그러졌다.

‘없어, 같이.’

팀은 지연과 함께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같이 있으면서 아닌 척해?”

분명 평소의 팀과 다른 게 확실하다.

팀이 거짓말을 하다니…….

그런데 잠시 후 또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팀과 지연이 아이를 비행기 태워주며 마치 한 가족처럼 화목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의.

“분명 뭔가가 있어, 팀. 이건 절대 팀의 모습이 아니야. 설마, 진짜로 좋아하는 거야? 내 여자를?

촉이 빠른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를 이용하면 왠지 팀의 약점을 잡을 수 있다는.

그는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내일 그는 팀을 만날 것이다.

이건 그가 세운 계획의 첫 스텝이 될 것이다.

첫 스텝은 중요하다.

특히 이렇게 거대한 음모의 첫 스텝은.

*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연과 줄리의 모습을 보면서 수현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후회와 미련.

일단 후회가 되었다.

내가 왜 애런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그녀와 함께 있지 않다는.

나답지 않은, 쓸데없는 거짓말.

그와 동시에 미련이 남았다.

이 여자와 아이에게 해준 것이 너무 없다.

이렇게 빨리, 아니 생각보다 훨씬 늦어진 결말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애런을 쉽게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잘해줄걸.

아니다. 바뀌었다.

후회는 그녀와 아이에게 너무 지나친 관심을 줬다는 것이다.

미련은 몇 달 만에 통화된 동생과 그렇게 허무하게 전화를 끝내버린 것이고.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후회는 쓸데없이 1년이란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겠다고 한 자신의 무모한 결심에 대한 것이고,

미련은 그녀에게, 그녀에게, 그녀에 대한…….

모르겠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뭐가 후회고 뭐가 미련인지 그렇게 냉철하게 구분하고 컨트롤 할 수 있었던 자기 생각조차도 뭐가 뭔지 모르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스스로가 막 미치게 원망스럽고 스스로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있을 때 갑자기 줄리가 그를 불렀다.

‘저 들어 올려주세요. 두 사람이 같이.’

티끌 하나 없는 호수 같은 눈을 하곤 나한테 ‘두 사람이 같이’라는 말을 하는 줄리!

아, 진짜 미치겠다.

그래서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도대체 나를 왜 이렇게 늪으로 빠트리는 거야!’

원망의 눈으로.

그런데…… 그 늪에 또 내 발로 들어가고 있다.

‘그럼 그래 볼까? 엄마랑 나랑 올리면 두 발을 하늘 높이 들어야 한다.’

내 손으로 늪을 더 깊숙이 파고 있다.

지연과 함께 줄리의 손을 번쩍 들어 하늘로 올리면서.

마음은 한없이 땅 구멍을 파고 있는데 팔로는 줄리를 하늘 위로 들어 올리며 집까지 와버렸다.

내일이면, 애런이 오면 다 끝나버릴 이 미친 짓을 하면서.

어쨌든 후회든 미련이든 내일까지는 이 감정들을 다 정리해야 한다.

난 그럴 수 있다.

난 심장의 반이 얼어붙어버린 진수현이니까.

미국에서 최고로 성공한 동양 아이가 되기 위해 쓸데없는 감정 따윈 태평양 바다에 던져버린 지 오래됐으니까.

집으로 들어온 수현은 지연과 줄리에게 별 인사도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인사 따위는 낼 해도 된다. 영원한 이별의 인사를.

그런데 그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저 모녀는 그대로 두지 않았다.

“엄마, 송중기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말을 했는데 그게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나. 나 그거 물어보러 아줌마한테 전화해도 돼?”

“지금 너무 늦었으니까 안 돼.”

“엄마, 나 배고파. 아줌마가 동태전 해줘서 먹었는데 그게 다 뱃속이 가져간 거 같아.”

“그럼 뭐라도 좀 해줄까? 밥 먹고 잘래? 그런데 줄리야, 엄마 바지 못 봤니? 어제 입었던 바지가 없어졌어.”

“엄마도 참, 술 마시고 바지 아무 데다 벗어 놓는 거 내가 고치라 그랬지?”

진짜 미치겠네……

듣고 싶지 않은 저 두 사람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집 안을 울려대니 도대체 진중한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고소한 냄새가 1층에서 올라왔다.

‘응? 이 냄새는?’

.

.

.

잠시 후 수현은 혹시나 해서 1층으로 내려왔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그를 이끈 냄새의 정체는 뉴욕에서 맡았던 제대로 된 미역국.

역시 예상대로 부엌에 있는 사람은 지연이었고 그녀는 앞치마를 두른 채 마지막 간을 보고 있었다.

수저로 국물 한입 떠 맛을 보고는 스스로도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으로 들어온 수현은 차마 말을 걸지 못한 채 그녀의 뒷모습만 응시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지연은 그를 발견하고는 부끄러움 반, 반가움 반을 품은 미소로 말했다.

“마침 부르러 올라가려고 했는데 내려오셨네요.”

수현은 속으로 대답했다.

‘냄새가 대신 불렀죠.’

지연은 새로 한 수저 떠서 수현을 향해 내밀었다.

“맛을 좀 봐주시겠어요? 제가 크게 할 줄 아는 건 없는데 미역국은 좀 잘 끓여요.”

수현은 누군가가 자신의 입으로 뭔가를 주는 행위가 어색했다.

‘설마 저 수저를 직접 내 입에 넣겠다는 건 아니지?’

그건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누군가가 떠오를까 두려우니까.

그녀에게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어느새 그는 느릿하게 그녀 앞으로 가고 있었다.

지연은 한 손으로 수저를 바치며 그의 입을 향해 들이밀었다.

“드셔보세요.”

수현이 입을 벌리지 않으니 그녀는 더 수저를 입 쪽으로 밀었다.

“자, 어서요.”

그녀가 재촉하는 순간 예상대로 떠오를까 두려웠던 추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몇 개 떠오르지 않는 친모와의 추억.

‘수현아, 이리 와서 맛 좀 봐봐. 얼마나 맛있는데.’

음식을 떠서 그의 입안으로 쏙 넣어주었던 기억.

미국으로 간 이후엔 한 번도 경험해볼 수 없었던 애절한 기억.

그런데 지연의 똑같은 행동을 통해 가슴속 깊이 숨겨버린 어릴 적 기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내 참…….’

미역국이든 수저를 내미는 그녀의 행동이든 자꾸 친모와의 추억을 엮는 스스로가 황당했다.

아니면 지연을 기억하기 위해 자꾸 친모랑 엮게 되는 것일까?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옅은 실소만 뿜는데 지연은 눈치 없이 더욱 재촉했다.

“얼른 드셔보세요.”

그로선 한 번도 친모외의 그 어떤 여자 앞에서도 해본 적 없는 행동,

얼음 같은 가슴을 가진 남자로선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

그 부끄러운 행동을 그녀 앞에서 하고 말았다.

“아~”

그녀가 수현의 입으로 수저를 쏙 넣었다.

지연은 어떤 얘기가 나올까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맛이 어때요?”

기가 막혔다.

뉴욕에서 맛보았던 한국의 맛, 바로 그 미역국.

이 미역국을 먹고 그는 결심을 굳혔었다. 한국으로 가겠다고.

한국으로 가서 완벽한 미국인처럼 살고 있지만 사실은 가슴 한쪽을 커다랗게 짓누르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겠다고.

그런데 정체성을 찾기는커녕 동생의 여자와 한집에서 점점 말도 안 되게 찐득한 추억을 하나하나 쌓고 있다.

애런의 형이라는 정체성을 오히려 망각하면서.

“모르겠다. 나도.”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대답을 들은 그녀가 그의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모르겠어요? 그럼 한입 더 드셔보실래요?”

그녀가 다시 수저로 미역국을 뜨더니 수현의 입 앞으로 가져왔다.

“여기요.”

예쁘고, 예쁘고, 예쁘고 또 예쁜 눈을 깜박이면서.

입이 벌어지며 저도 모른 한숨이 터져버렸다.

“휴…….”

그런데 수현의 그 한숨이 수저에 있던 미역국을 불어버렸다.

미역국 국물이 그만 그녀의 발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앗 뜨거!”

그녀가 소리치며 주저앉았다.

수현도 놀라 무릎앉아 자세를 하며 그녀의 발등을 손으로 잡았다.

“괜찮습니까?”

그녀도 그녀의 발등을 손으로 잡았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손이 그녀의 발등 위에서 겹쳐버렸다.

“아…….”

“아…….”

서로의 손이 겹친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가까이서, 이마가 닿을 듯 은밀한 거리에서, 아주 친밀하게.

수현은 이 순간에도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괜찮냐, 이런 상태를 먼저 물어야 할까?

아니면 잡아버린 이 여자의 손을 먼저 놓아야 할까?

아무것도 못 한 채 손도 그대로, 시선도 그대로,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잡고 있는 순간, 갑자기 줄리가 뛰어 들어왔다.

“엄마, 나 생각났어. 태양의 후회에서 송중기 오빠가 했던 멋진 말!”

두 사람이 동시에 줄리를 쳐다보는데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낭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가 수현의 심장을 찌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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