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우리 지연이
2018.03.10.
“안녕하십니까? 오드리 화장품 이사 강민흽니다.”
호기로운 눈으로 다가온 민희를 보며 수현은 올라오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이 여자가 나를 알아본 건가?
가능한 일이었다.
여자는 한국의 화장품 회사 이사.
같은 업계니 수현은 여자를 몰라도 여자는 진수현 즉 팀 몬테규를 알 수도 있었다.
그가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다행히도 미선이 끼어들었다.
“이사님, 이분은 제 친구는 아니고요, 제 친구는 바로 여기 송지연 씨…….”
하지만 민희는 철저히 미선을 무시했다.
“박 매니저는 가만히 있어!”
그러곤 어서 내 손을 잡으라는 듯 내밀고 있던 손을 더욱 수현 쪽으로 가까이 했다.
수현은 할 수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잡지 않는다면 오히려 미선이 곤란해질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진수현입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수현을 알아보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고객 카드 작성하신 걸 봤습니다. 오드리 화장품에 당부하고 싶은 코멘트가 인상적이어서요. 저희 회사에 관심이 많으셨나 봐요.”
수현은 그녀의 질문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뭐라고 썼죠?”
그녀가 자신을 알아봤을까 긴장해서 정신도 없었지만 정말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의 무심한 대답에 여자의 미소가 잠시 멈췄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고 수현이 쓴 카드를 읽었다.
“한국의 화장품은 과하게 종류가 많다. 서로 동질의 성분이 겹치거나 서로 성분이 상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수를 간소화시킨 라인(line)을 개발하는 것이 좋다, 맞죠?”
수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기억을 해냈다.
“제가 그렇게 썼었군요. 사실 오드리 화장품에 대해 잘 몰라 대체적으로 제가 느꼈던 한국의 화장품에 대해 쓴 것 같습니다.”
민희는 존경이라도 표현하려는 듯 과하게 박수를 쳤다.
“제가 딱 맞는 분을 찾은 것 같아요. 고객 카드를 보니 직업이 없다고 쓰셨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저희 회사의 남자 1호 뷰티 카운슬러가 돼주시겠습니까?”
“네?”
그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아무 제안이나 들이대는 그 오만함이 불쾌했다.
생각 같아선 응대는커녕 냉소적인 웃음 한 번 지어주고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는 지금 미국의 유명 인사 팀 몬테규가 아닌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한국의 진수현.
게다가 같이 온 사람들을 자신 때문에 곤란하게 만들 순 없었다.
대신 짧고 단호하게 그의 의사를 밝혔다.
“거절하겠습니다.”
그의 분명한 거절에도 그녀는 전혀 물러나지 않았다.
“파격적 제안을 하겠습니다. 원래 뷰티 카운슬러는 오드리 화장품 소속이긴 하나 자영업자나 마찬가집니다. 월급이 아닌 수익의 일부를 가져가는 시스템이죠. 하지만 진수현 씨가 해주신다면 회사 쪽 수익은 받지 않겠습니다. 상징적인 의미로만 있어주시면 돼요.”
그녀의 폭탄급 제안에 오히려 놀란 건 미선이었다.
“이사님, 그런 혜택은 여태 아무도 받지 못한 건데요. 다른 카운슬러들이 알면 사기 진작에도 문제가 있고 심적으로도 많이 서운해 할 텐데……”
수현에게 환하던 민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짜증을 동반했다.
“여자 카운슬러를 줄이는 대신 획기적으로 남자 카운슬러를 뽑아보자는 아이디어는 박 매니저가 낸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이분은 그거 하려고 오신 분도 아니고 제 친구가 그냥 모시고 온 고객일 뿐인데.”
“할 만한 사람이 있음 먼저 다가가서 스카우트하는 것도 박 매니저가 할 일이야. 지금 주변을 둘러 봐. 직원들 모두 이분을 보고 있잖아. 우리 고객들도 이분의 수려한 외모와 화장품에 대한 박식한 지식을 접하면…….”
민희의 구구절절한 설교를 듣고 싶지 않은 수현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됐습니다. 어차피 전 안 합니다.”
조금 전보다 더욱 힘이 들어간 그의 완곡한 거절에 결국 민희의 표정도 불쾌한 듯 식었다.
“그럼…… 할 수 없구요.”
그러곤 미선을 향해 들고 있던 수현과 지연의 카드를 훅 날렸다.
카드가 미선의 얼굴에 정면으로 부딪쳤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프단 소리 한마디 내지 못했다.
“박 매니저 나 좀 봐.”
민희는 오히려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며 예리한 스틸레토 힐 소리와 함께 접견실을 나가버렸다.
유리 너머 화가 난 듯 빳빳이 고개를 들고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미선의 얼굴엔 공포까지 스몄다.
.
.
.
수현과 지연, 미선은 회사 근처의 카페로 들어왔다.
미선은 커피 대신 맥주를 시키더니 삼십 분 만에 세 병째를 달리고 있었다.
“낮술은 사랑이지, 암.”
컵에도 따르지 않고 병째로 입안에 부으며 거나하게 취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프냐, 나만 아프다.”
지연은 미선이 곤경에 빠진 게 자기 탓인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미안해, 미선아. 내가 괜한 부탁을 해서.”
“아니야, 그냥 오늘 순번이 나인 것뿐이야. 하루에 한 명씩 저렇게 작살내거든. 난 차라리 나이나 동갑이라 괜찮아. 카운슬러들은 거의 나이가 사오십 대인데 그분들한테도 반말은 기본이고 쌍욕은 옵션이라니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수현이 툭 치고 들어왔다.
“나이가 동갑? 그럼 27세? 그 나이에 이삽니까?”
“그럴 리가요. 낙하산 중에서도 최첨단 고성능 낙하산. 회장님 딸이에요. 올가을에 이사로 부임 받았어요.”
“능력은 있습니까?”
“능력이 뭐래요? 외동딸인데 예전부터 하도 사고치고 다녀서 미국에 보냈다 이번에 데려온 거래요. 미국 간 지 5년이 넘었는데 어학연수만 했다나? 암튼 별명이 라이언이에요.”
“라이언?”
“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있잖아요. 그 여자는 일병이 아니라 회장의 딸이긴 하지만. 암튼 저 라이언 사고 친 거 수습하느라 회사 엘리트들이 얼마나 목숨 걸고 고군분투하는지. 보통 무식한 게 아니라니깐요.”
미선으로부터 얘기를 들으니 좀 전에 보였던 민희의 이해할 수 없는 막무가내의 행동들이 설명되었다.
아무리 직업이 없다고 썼기로 다짜고짜 자기 회사에 들어오라는 무례함 하며, 그걸 거절했다고 친구들 보는 앞에서 미선의 얼굴에 카드를 던져버리는 상식 없는 만행까지.
지연도 여자에 대해 듣고는 미선이 더 걱정되는 듯했다.
“아까 너 불러서 뭐라고 하든?”
지연의 질문에 미선의 눈에선 서글픔이 맺혔다.
하지만 수현의 눈치를 보면서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눈치 빠른 수현이 넘겨 집었다.
“제 얘길 하던가요?”
그녀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꼭 데리고 오라고. 안 그럼 저 자른다고요.”
말해놓고 서글픈지 그녀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지연아, 나 잘리면 어떡하지? 3년 고생하다 겨우 구한 직장인데. 나 학자금 대출도 아직 남았고 월세도 꼬박꼬박 내야 해. 지난달 암보험은 또 왜 들어가지고. 그거 해약할까? 해약하자마자 암 걸리진 않겠지?”
지연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미선아. 내가 괜한 부탁 해가지고.”
울상이 된 두 여자의 표정을 보고 수현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그의 잘못인 거 같으니까.
‘괜히 거긴 왜 따라 들어가서는…….’
그의 뒤엉킨 머릿속을 미선의 한탄 소리가 새가 쪼듯 콕콕 찌어댔다.
“개털 돼서 월셋집 보증금 까먹음 나 어디 가야 해? 울 엄마 제주도로 이사 가셨는데 나도 거기 가서 해녀 할까? 멍게, 해삼 따는 것도 자격증 있어야 하니? 나 오래 숨 참긴 잘해.”
지끈지끈.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갔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의문의 죄책감에 불을 지르듯 폭탄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나 니네 집 가도 되니? 집주인님도 멋있고.”
그러고선 기대에 찬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더 무서운 폭탄이 터지기 전에 수현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 이사라는 여자, 아직도 회사에 있습니까?”
*
띠리리리리-
가회동 근처 광화문 포시즌 호텔 라운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애런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미국에 있는 싸구려 타블로이드 잡지의 기자.
그가 전화를 했다는 건 오전에 지시했던 지연에 대한 신상 조사가 벌써 끝났다는 얘기였다.
“역시 빠르군.”
그녀에 대한 엄청난 스토리가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됐다.
그저 그런 재벌도 아니고 감히 몬테규가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던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고운 얼굴로 남자 몇 명을 사기 쳤을까?
사기 전과가 한 5범은 되겠지?
어떤 인맥과 어떤 경로로 내가 아닌, 나보다 더 접근 불가능한 팀에게 접근했을까?
그녀의 영악함과 주도면밀함이 도대체 어디까지 뻗쳐 있을까 궁금해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Hello? 여자에 대해 알아봤어?”
하지만 애런의 기대와는 달리 기자의 목소리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보내주신 사진으로 이름과 나이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여자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일반적인 신상 외엔 알아내기 힘들었습니다.”
애런은 그의 대답에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의문스러웠다.
‘인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낸 여자가 어떻게 나와 팀을 알고 접근했지?’
참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조사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건 이해가 됐다.
어차피 타블로이드 기자도 미국 사람, 한국 여자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낸 한국 여자에 대해 어떻게 많이 알겠어?
하긴, 그녀에 대한 조사가 쉬웠다면 철두철미한 팀이 그냥 넘어가진 않았겠지.
그녀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아채고 벌써 법적인 응징을 했을 테니까.
“이름이랑 나이라도 알려드릴까요?”
싸구려 타블로이드 기자의 아이큐는 이럴 때 드러난다.
“당연한 거 아니야!”
애런은 들고 있던 휴대폰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아, 예, 이름은 송지연, 나이는 27세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와서 아트스쿨을 7학기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학교에 가서 수소문해보니 그녀의 친구들도 그녀가 장학금을 탈 정도로 아주 성실한 학생이라는 거 외엔 아는 게 없더라고요. 늘 바빴다고 합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몇 개 안 되는 정보지만 들을수록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실한 학생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런 사기까지?
기자의 정보는 금방 바닥나고 말았다.
“오늘 알아낸 건 일단 여기까집니다.”
주도면밀한 애런은 지금의 이 정보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팀이든 여자든 이용하려면 그들에 대한 모든 걸 알아야 하니까.
“알았어, 더 알아봐.”
“아, 잠시 만요.”
막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얘기를 전했다.
“팀에 대해 이상한 얘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파파라치들에 따르면 한 달 전, 팀의 맨해튼 아지트에서 한 여자가 하룻밤을 보내고 나왔는데 제가 혹시 몰라 그 여자 사진을 보여주니 그 여자가 맞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그 여잔, 팀의 여잔가요?”
“!”
뭐? 팀과 하룻밤을 보내?
들었던 정보 중 제일 심장이 벌렁거리는 얘기였다.
애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와 팀의 스토리가 점점 더 흥미로워지기 때문에.
*
수현과 지연, 미선은 본사 11층에 위치한 민희의 집무실 앞에 도달했다.
미선의 연락에 민희는 기쁜 마음으로 수현을 다시 만나겠다고 했다.
민희의 집무실까지 오면서 수현은 그녀를 왜 만나려 하는지 미선과 지연에게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다만 집무실로 안내되기 전 지연에게 한 가지를 확인했다.
“지연 씨는 이 회사 뷰티 카운슬러로 꼭 일하고 싶습니까?”
지연의 표정엔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으로선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미 일반 회사들의 공채 시즌은 지났거든요. 내년 준비를 하면서 그사이 뷰티 카운슬러로 있으면 돈도 벌 수 있고 또 오히려 정규직이 아니라서 줄리를 돌볼 수 있는 시간도 많고.”
그녀의 대답에 수현은 별다른 반응 없이 집무실로 앞장서 들어갔다.
세 사람이 들어가자 민희는 ‘그럼 그렇지’라는 도도한 표정으로 수현을 맞았다.
“다시 봬서 반가워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미선과 지연은 빼고 수현만 앉으라는 듯 그만 보며 손짓했다.
수현은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그녀의 사치스런 취향을 보여주는 최고급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유혹하듯 다리를 꼰 그녀의 눈빛엔 승리감이 가득했다.
그렇게 차갑게 거절하던 수현이 먼저 연락을 해왔으니까.
그녀는 지금의 승리감에 우월감도 장착하고 싶었다.
“미선 씨, 비서한테 여기 루악 커피 두 잔 가지고 오라 해요. 어제 아빠가 인도네시아 출장 가셨다가 사 오셨는데…….”
최고급 커피로 그를 기죽게 하려던 것.
하지만 세계적 기업의 황태자인 수현에겐 가당치 않은 시도였다.
철저히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의 호의를 잘랐다.
“전 루악 커피 별롭니다. 블루마운틴만 마셔요. 그러니까 본론부터 갑시다.”
수현에게 한 방 크게 당한 느낌에 민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반격할 말을 잃은 그녀는 맘을 진정시키고 그의 말대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 오드리 화장품 남자 뷰티 카운슬러 1호, 하시기로 했다고요?”
“조건 하나만 맞으면요.”
“조건이?”
“송지연 씨도 같이 들어오길 바랍니다. 그 조건 딱 하나예요.”
미선과 함께 부하 직원처럼 소파 옆에 서 있던 지연이 깜짝 놀랐다.
“아니에요, 저기 수현 씨 아니에요.”
두 손을 허공에 휘휘 저으며 말렸지만 수현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남자 뷰티 카운슬러를 뽑아 여성 고객들에게 호감을 높이겠다는 발상은 신선하나 뷰티 카운슬러라는 직업의 장점은 고객의 집이나 일하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는 겁니다. 본 적도 없는 남자가 찾아가면 경계심이 생기지 않을까요? 익숙해질 때까진 여성 카운슬러와 함께 다니는 게 무리가 없습니다.”
지연을 함께 취직시켜야 하는 꽤 설득력 있는 그의 설명에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으나 그뿐이었다.
“그 말씀 들으니 맞는 말이군요. 하지만 저희는 이미 숙련된 여성 카운슬러들이 많습니다. 그중 제일 베테랑 한 명을 뽑아서…….”
수현은 민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전 낯을 가리는 편입니다. 송지연 씨가 아님 안 하겠습니다.”
단호함을 넘어 명령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수현의 단단한 목소리에 민희의 두 주먹이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남자 뷰티 카운슬러를 뽑아보자는 미선의 제안을 마치 자신이 아이디어 낸 프로젝트로 둔갑해 성사시키려면 그 중심엔 수현처럼 남성 화장품 모델에 뒤지지 않는 매력적인 남자가 필요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아쉬운 건 자신, 그녀는 빳빳이 올렸던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대답은 했지만 자신의 제안을 수현이 받아들인 게 아니라 수현의 제안을 자신이 받아들인 모양새가 된 것이 자존심 상했다.
그 불쾌감의 화풀이는 미선의 몫이었다.
그녀는 매우 성가시고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미선에게 얘기했다.
“나갈 때 누구? 송 누구? 암튼 저분 카드 작성해서 인사실에 넘겨. 제대로만 못 해봐!”
미선은 지연의 손을 잡으며 방긋 웃었다.
“네, 이사님.”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현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볼일 끝났음 가겠습니다.”
수현은 아주 형식적으로 목례를 한 뒤 문을 향해 걷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민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는데 잠시 놓쳤습니다.”
민희는 순간적으로 그게 ‘돈’이라고 생각했다.
스카우트를 수락했다면 당연히 돈 얘기가 나와야 하니까.
“아, 수익금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지만 수현의 입에선 그녀가 인생을 살며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 나왔다.
“돈은 됐구요, 사과하시죠.”
“무슨…….”
그는 어리벙벙한 그녀의 눈빛을 일직선으로 쏘아주었다.
“송지연 씨한테 사과하라고요. 지금까지의 무례에 대해서.”
민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
.
“브라보!”
수현과 지연, 미선이 함께 맥주병을 부딪쳤다.
미선은 목울대가 넘실댈 정도로 맥주를 입에 부었다.
“끄윽~ 시원하다. 고년 얼굴 봤지? 열 받아서 새까매지는 거.”
아무리 기분이 좋다지만 사람들 앞에서 우렁차게 트림을 내뱉는 말괄량이 미선.
수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지연처럼 성숙한 여자한테 참 어울리지 않는 친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수현만의 착각이었다.
여태 보지 못했던 지연의 이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 사실 니 상사라니까 참은 거야. 내 주먹 봤어? 움찔대는 거? 옛날 버릇 나올 뻔했어.”
미선이 맞장구쳤다.
“아우, 난 니 주먹 터지면 어떡하나 걱정했잖아. 강민희 그 여자 옥수수 다 털리고 잇몸은 검은색 됐다.”
“나 잘 참은 거지?”
“물어줄 돈도 없는데 잘 참았지. 미국에선 누구 안 때렸니? 레오나르도랑 디카프리오 이런 애들 말이야.”
“레오나르도랑 디카프리오는 안 건드렸고 대신 톰이랑 크루즈, 안젤리나랑 졸리는 좀 때렸지.”
“전치 8주?”
“아니, 전치 2주로 끊어줬지. 뉴욕 감방은 더 춥다더라고.”
옆에서 가만히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현의 입이 황당함에 스르르 벌어졌다.
이 여자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너무 정색을 하고 대화를 하니 이게 진심인지 실환지 농담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감히 끼어들지도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를 보곤 지연과 미선이 동시에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특히 지연은 동그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반달눈이 되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수현 씨 놀랐나 봐요. 그냥 농담이에요. 저 주먹 안 써요.”
하지만 미선은 두 손을 허공으로 올려 가위질했다.
“아니에요, 옛날부터 지연인 동네 날라리 남자애들 엄청 때렸어요. 여자애들 치마 들추는 애, 등 뒤에서 브라 끈 잡아당기는 애, 여자한테 욕하는 남자애들 보면 꼭 쫓아가서 때렸다니까요.”
“그래서 그것들 엄마나 누나들한테 나 엄청 혼났잖아. 깡패 같은 기집애라고.”
“야, 사실 그 남자애들, 다 너한테 관심받으려고 여자애들 괴롭힌 거야. 그래야 얻어맞더라도 니가 상대해주니까. 그 엄마들은 그것도 모르고 왜 여자애한테 맞고 다니느냐고 분해하셨지.”
“내가 어릴 때 예쁘긴 예뻤지?”
“빨간 지붕 집에 사는 공주님이었지.”
까르르르-
여고생들처럼 그녀들의 웃음이 또 터져버렸다.
수현은 눈물까지 반짝거리며 웃고 있는 지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원래는 이렇게 밝은 여자구나. 이렇게 웃음도 많고.’
그런데 뭐가 그렇게 그녀를 힘들게 했을까?
이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아는 그녀의 눈에서 서러움과 두려움의 눈물이 흐르도록 말이다.
그런데 빨간 지붕 집 공주? 지연 씨가?
그의 눈에 의구심이 서리자 지연이 눈치채고 고백하듯 입을 열었다.
“말씀 안 드렸었는데 지금 수현 씨가 사시는 집, 제가 어릴 적 살던 집이에요. 잘 모르는 사이에서 굳이 말씀드리기도 이상해서 안 드렸어요.”
“아…….”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싶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안내하지 않았는데 창고며 다용도실이며 척척 알아서 활용하는 것도 그랬고 집 안에서의 움직임도 낯설어 보이지 않고 편안했다.
미선도 그녀가 지금 빨간 지붕 집에 산다는 건 몰랐던 것 같다.
“그럼 집주인님의 집이 니가 예전에 살던 빨간 지붕 집이고 지금 니가 거기에 세들어 산단 말이야? 대박! 대박! 그럼 니 방은? 니가 썼던 2층 작은 방?”
“아니, 수현 씨가 고맙게도 큰 방 주셨어. 그 방은 지금 수현 씨가 쓰고 있어.”
“우리 대학 때, 나 술 마시고 니 방 가서 엄청 많이 잤었는데. 너 혹시 방 헛갈려서 어제 수현 씨 방 가서 자고 그랬던 건 아니지?”
어젯밤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 그녀는 이내 입매를 광대 쪽으로 시원하게 올리며 웃었다.
“나도 술김에 옛날 생각나서 그 방으로 갈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깨보니 지금의 내 방이더라고.”
아닌데……
하지만 그녀가 어제 수현의 방으로 왔던 행동이 이해가 됐다.
귀소본능. 그녀의 몸은 아직도 작은 방을 자신의 방으로 기억하는 것이었다.
저런 덤벙거림까지 참 귀엽다.
그의 눈동자가 또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여자, 이렇게 웃으니 너무 예쁘다.
여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저 미소.
취직이 그녀에게 이런 기쁨을 선사한 건가?
아님 친한 친구와의 한 잔 술이 그녀를 기쁘게 해준 걸까?
아무래도 좋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심장도 더 크게 두방망이질 친다.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일까?’
또다시 가슴이 복잡해온다. 익숙지 않은 감정으로 인해.
지리리리리릭-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올랐다.
설마 떨려서?
그런데 그건 아니었다. 뒷주머니에 넣어 놓은 휴대폰이 울린 것.
액정을 확인하니 전혀 모르는 번호였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로버트와 지연, 딱 두 사람인데, 누구지?
경계의 날을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 누군가가 자기소개도, 안부 인사도 없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우리 지연이, 혹시 같이 있어?”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우리 지연이……
그 한마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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