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10화 (10/77)

제10화. 은밀하게 뻔뻔하게

2018.03.07.

애런은 언젠가 팀의 지갑 속에서 한 여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팀은 그 사진을 아주 소중히 생각하는 듯했다.

예전에 팀의 비서가 팀의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평소 냉소적인 표정을 고수할 뿐 절대 겉으로 화내는 법이 없던 팀이 그때 불같이 화를 내는 걸 처음으로 봤다.

영리한 애런은 바로 그게 ‘사진’ 때문이란 걸 눈치챘다.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구기에…….’

지갑을 찾은 후 예상대로 팀은 사진의 존재 여부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지금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서는 여자에게서 사진 속의 그녀가 떠오른다.

물론 그 여자는 아니다.

하지만 맑고 고혹적이며 밝지만 왠지 모를 연민이 가는 눈빛이 거의 흡사하다.

‘참 희한하네.’

저렇게 사진 속 그녀와 쏙 빼닮은 여자가 내 여자인 척 사기를 치고 다녔다니.

하지만 이건 별것 아닌 우연일 뿐 어차피 그녀는 팀의 여자가 아니다.

‘팀은 저 여자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애런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빨리 여자를 만나 이실직고를 시키고 왜 내 아이가 있다는 사기를 치고 다녔냐고 고소, 고발을 운운하며 협박하는 대신 다른 계획을 도모해야 한다.

애런은 여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숨어 있던 전봇대 뒤에서 나왔다.

막 그녀에게 다가가려는데 여자와 아이의 뒤로 호리호리한 키의 한 남자가 따라 나왔다.

“팀?”

머리 색도 변했고 늘 쓰던 선글라스도 없었지만 분명 팀이었다.

뭐야, 셋이 같이 가는 거야?

여자와 팀을 동시에 만날 수 없기에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뒷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다시 전봇대 뒤로 숨으려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나 또 목말.”

뭐? 목말?

애런은 아이가 하는 한국말을 알아들었다.

어릴 적 한국인인 팀의 아빠와 4년을 함께 살면서, 또 가끔 팀에게 배워 유창하게 한국말을 하진 못했지만 듣는 건 80% 이상은 이해할 수 있었다.

팀의 손을 잡아끄는 아이의 행동에 애런은 하마터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감히 바랄 걸 바라야지.’

팀은 형식적으로 보여야 할 자비나 친절조차도 꺼리는 냉혈인간이다.

그런데 목말이라고? 하하하.

막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는데 바로 다음 그는 아연하여 숨을 멈췄다.

너무도 충격적인 모습을 봤기 때문에.

여자아이가 팀의 손을 잡아끌자 얼음 같던 그의 표정이 환하게 풀리며 이렇게 말했다.

“높은 곳의 공기가 더 상쾌하지?”

단 한 번의 거절도,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번쩍 들어 목에 올렸다.

흥분한 아이가 발을 동동 굴러 그의 가슴을 차는데도 반듯한 이마에 불편한 주름 하나 생기지 않았다.

남들과 옷깃 살짝 스치는 것도 싫어하는 그가 아무리 아이라지만 발로 가슴을 차는데도 가만있어?

오히려 여자가 나섰다.

“줄리, 버릇없이 굴지 말고 내려와.”

하지만 팀은 그녀의 말리는 손을 걷어냈다.

“괜찮습니다. 무겁지도 않은데요 뭘.”

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는 팀의 표정이 애런을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설마…… 팀?’

하하하하하, 머릿속에서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팀이 늘 똑같은 냉소적 표정을 짓고 있어 그가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런은 그의 작은 눈짓 하나, 입매의 움찔거림 하나에도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지금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화가 났는지, 아님 진짜 감정을 숨기고 아닌 척하는지.

이복형제로 어린 시절부터 한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애런은 남들은 모르는, 팀의 진짜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 애런이 봤을 때 비록 지금 팀이 여자에게 다소 냉담한 표정으로, 무심한 말투로 얘기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설렘과 자상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팀, 지금 뭐하자는 거야?’

내 여자라며? 내 아이라며?

설마 또 내 것을 뺏고 싶은 거야? 그 모든 걸 가져가고도?

더럽고도 불쾌한 감정이 심장으로 침투했다.

지렁이가 머리를 기어 다니듯 머릿속이 뒤죽박죽 꼬였다.

정말로 내 여자, 내 아이는 아니지만 갈취당한 느낌? 또 한 방 먹은 느낌?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질투와 분노의 감정이 이는 동시에 갑자기 주변의 빛이 사라지고 소음이 잦아들며 핀 조명이 그녀만 비치듯 오로지 그녀만 보였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차차 분노의 감정이 사라지고 대신 악마의 교활함이 그의 이성을 덮쳤다.

애런은 뒤로 물러나 그들 세 사람의 모습을 휴대폰에 담았다.

그리고 공생 관계에 있는 싸구려 타블로이드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휴대폰으로 한 한국 여자의 사진을 보냈어. 이 여자에 대해 알아봐줘. 불법이든 합법이든 모든 걸 동원해서 아주 은밀한 속옷 사이즈까지.”

상식이나 예의 따위는 없는 싸구려 언론지 기자는 불법 탐정과 다를 바 없다.

몇 시간 후면 기자는 그녀의 계좌에 꽂힌 1달러의 잔고까지도 캐내올 것이다.

애런은 마치 한 가족처럼 보이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의 머리에 치졸한 이성이 꿈틀댔다.

이곳으로 오며 그가 세웠던 계획은 여자와 도모해 팀에게 돈을 뜯어내는 것.

오로지 목적이 돈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

지연은 수현에게 잠시 연립 주택 건물 앞에서 기다려달라고 한 뒤 줄리를 데리고 봉수의 집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안 좋은 기억으로 나온 집이라 올라가는 발걸음도 철근을 얹은 것처럼 힘겨웠다.

벨은 또 어떻게 눌러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더 희한한 건 안으로 들어가니 그날처럼 동태전 냄새도 가득했다.

‘이상하다, 아빠 혼자 드시려고 동태전 만드실 린 없는데. 혹시 내가 올 줄 알았나?’

지연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을 덮고 있는 지글지글 고소한 소리와 냄새의 주인공은 동태전이 맞았다.

그런데 부침개로 익숙하게 전을 뒤집는 사람의 뒤태는 아빠가 아니었다.

당황한 지연이 알 수 없는 뒤태를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지연의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사람은 넉넉한 등살과 굴곡 없는 허리라인을 자랑하는 키 작은 아줌마였다.

그녀는 지연과 눈을 마주치곤 얼굴 반만큼이나 커다란 입술로 환히 웃었다.

“아가씨가 지연이지? 맞네, 맞아, 송 사장님이 매일 자랑하던 뉴욕에 있는 딸.”

아빠의 지인임을 확인한 지연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송지연입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허물없는 사이처럼 지연의 양 볼을 잡고 흔들었다.

“반가워, 아주 반가워. 그런데 송사장님이 왜 오늘 딸 온단 소리를 안 했지? 동태전만 부탁하고 나가셨네?”

“아빠는 안 계시나요?”

“오늘 쉬시는 날이긴 한데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지 일이나 하고 싶다고 가게 나가셨어.”

수더분한 분위기의 아줌마는 꽤 굵은 침을 튀기며 물어보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했다.

“난 바로 이 연립주택 1층에 살아. 남들이 금화댁이라고 부르니까 자기도 그렇게 부르면 돼. 가끔씩 이 집에 와서 청소랑 음식을 해드려. 아, 물론 용돈을 받고 말이지. 호호호.”

아빠에게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집안 일 도와주시는 분이 있다고.

금화댁은 꽤 넉살이 좋은 사람이었다.

지연이 어색해 하는 것도 모르고 호들갑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침 먹었어? 밥 줄까? 미국에서 왔으면 빵에다 버터 이런 거 줘야 하나? 그런데 그런 게 이 집에 있기나 하나? 내가 나가서 사 와야 하나?”

그냥 내버려두면 하루 종일이라도 쏟아낼 것 같은 입심의 금화댁.

하지만 심성 좋은 인상 때문인지 그녀의 호들갑과 수다가 그렇게 듣기 싫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금화댁의 작은 눈이 두 배로 확장됐다.

“어머, 쟤는 누구야? 웬 인형이 집에 있어?”

커튼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줄리를 발견한 듯.

“아…… 쟤는 제 딸 줄리…….”

그녀는 지연이 줄리의 소개를 마치기도 전에 줄리에게 달려가 번쩍 안아 올렸다.

“인형아, 말을 해봐. 너 말할 줄 알아?”

그러면서 줄리의 동그란 이마에 두툼한 입술을 쪽쪽대기 시작했다.

줄리의 이마에서 흥건한 침이 반짝였지만 말리고 싶진 않았다.

왠지 그녀가 진심으로 줄리를 예뻐하는 것 같아서.

.

.

.

지연은 줄리를 금화댁에게 맡기고 봉수의 집을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줄리를 꼭 봐주고 싶다며 눈물까지 그렁거렸다.

‘불임이라 젊을 때 애를 낳지 못했어. 그래서 애만 보면 환장해. 에휴, 내가 참 복이 없지.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그러다 보니 손주도 없고.’

이렇게 과거까지 고백하며 읍소하는데 거절하기 힘들었다.

줄리도 금화댁의 농도 짙은 뽀뽀에 힘든 표정이었지만 결국은 승낙했다.

‘버텨볼게.’

지연은 그렇게 금화댁에게 줄리를 맡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꺼려질 만도 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연립 주택 건물을 나오니 수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줄리 없이 홀로 나오는 걸 보고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아버님이 승낙하셨어요?”

지연은 대략의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다행이긴 한데 그분이 줄리를 잘 봐주실지 걱정은 되네요.”

무심한 듯 덤덤한 말투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봉수의 집 쪽을 힐끗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지연의 가슴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우리 줄리를 걱정해주는 건가?’

사실 이 묘한 감정은 아침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수현이 마치 친아빠나 삼촌처럼 줄리와 적극적으로 놀아주는 모습을 본 후부터.

까르르 까르르-

아직까지도 그와 함께하는 줄리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 장면, 그 소리를 목격하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 남자,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집주인과 세입자 관계지만 든든한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제 취직만 하면 만사 오케이!

지연은 수현에게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을 뒤로하고 감사의 인사를 표현했다.

“취직할 때까지만 민폐 끼칠게요. 취직만 되면 줄리를 아빠 집이 아니더라도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네.”

“줄리는 오늘 아빠 집에 있을 거니까 수현 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도 돼요.”

수현은 혹시나 줄리가 아빠에게 쫓겨나면 데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금화댁이 봐주기로 한 이상 계속 그 앞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수현에게 짧은 인사를 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그가 지연을 잡았다.

“어디로 가세요?”

“종로요.”

“그럼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그쪽에 볼일이 있어요?”

“아뇨, 사실 한국을 잘 몰라요. 지연 씨 따라 여기저기를 좀 다녀보려고요.”

“같이 다녀드릴 순 없는데. 전 친구랑 약속이 있거든요.”

“상관없습니다. 가시는 곳까지 가서 저는 제 볼일 보겠습니다.”

“그럼 그러세요.”

두 사람은 처음으로 줄리 없이 나란히 걸었다.

수현은 살짝살짝 스치는 그녀의 손이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걷고 싶진 않았다.

어색해도 싫지 않은 상황은 있었다.

.

.

.

지연은 미선이 일하는 종로의 뷰티 센터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미선은 오드리 화장품 회사에서 운영하는 뷰티 센터의 뷰티 카운슬러들의 매니저였다.

뷰티 카운슬러란 고객의 집으로 찾아가 화장품을 판매하는 이른바 화장품 방판 사원.

지연이 취직이 절박하다고 하자 그녀는 이런 제안을 했다.

‘당장 니가 정규직 사원으로 들어올 순 없겠지만 일 배우는 셈 치고 뷰티 카운슬러로 일해봐.’

지연은 이 일을 정규직 취직 전까지 임시로 할 생각이었다.

수현과 지연이 탄 버스가 종로의 오드리 화장품 뷰티 센터 앞에 섰다.

“전 이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수현 씨랑 여기서 헤어지면 될 것 같은데.”

수현은 지연이 들어간다는 뷰티 센터 건물을 흥미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여기가 화장품 판매하는 곳입니까?”

“스토어는 아니고 오드리 화장품 본사예요. 뷰티 카운슬러들이 근무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오드리 화장품이요?”

수현의 귀가 쫑긋 열렸다.

그는 세계적 패션 기업 ‘줄리아나’의 후계자다.

줄리아나에서도 화장품을 생산하고 그 매출액은 회사 전체의 30%가 넘는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서 한국에서의 매출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한국은 해외 브랜드보다 자국 화장품에 대한 선호도가 아주 높은 곳이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 건지 사업가의 본능으로 한국의 화장품 회사가 궁금해졌다.

“미안하지만 저도 들어가 볼 수 있을까요? 일에 방해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지연은 잠시 고민하다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미선을 고객 접대실에서 보기로 했으니 수현과 같이 들어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럼 그러실래요?”

그렇게 지연과 수현은 미선이 근무하는 뷰티센터로 들어가 사방이 유리로 된 고객 접견실로 들어갔다.

유리 너머 지연을 발견한 미선이 안으로 들어왔다.

“지연아!”

그녀의 입은 지연을 불렀지만 그의 눈은 호리호리한 키와 체격을 자랑하는 수현에게 꽂혔다.

“누구…….”

함부로 눈길도 주기 힘든 수현의 수려한 외모에 그녀는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지연이 간단히 그를 소개했다.

“이쪽은 진수현 씨. 내가 사는 집 주인이셔. 잠깐 여기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셔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닌데 미선의 가는 눈이 세로로 확장됐다.

“집주인?”

누군가 지금의 미선을 봤다면 집주인이라는 단어가 왕자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

이 세상의 사람이라곤 수현만 있는 듯 그를 우러렀다.

지연은 혹시 수현이 그녀의 그런 시선을 부담스러워할까 신경 쓰였다.

‘기집애, 어릴 적부터 남자만 보면 그냥!’

넋 나간 미선을 말리려는데 순간 그를 바라보고 있는 건 미선뿐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고객 접견실 안의 수현을 한결같이 보고 있던 것.

지연은 저도 모르게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그를 보았다.

그런데 순간 전염처럼 그녀의 입술도 스르르 벌어졌다.

화장품 회사의 특성상 고객 접대실의 조명은 사람의 얼굴을 예쁘게 만들어주는 채도 놓은 주황빛이었다.

수현의 얼굴에 그 밝은 빛을 모조리 흡수한 듯 정수리부터 턱 선까지 광채가 흘렀다.

‘이렇게까지 잘생겼었나?’

지연도 뭔가에 홀린 듯 새삼 수현의 몸과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처음이었다. 그의 외모를 자세히 보고 있는 건.

그동안은 줄리와 함께 있거나 그의 외모에 집중할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일단 전체적인 것부터 살펴보자면 모델 못지않게 호리호리한 키, 가까이 서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은 어깨, 운동을 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단단한 팔 근육이 도드라졌다.

얼굴로 올라가면 머리를 바짝 깎아놓았는데도 두상이 동글하니 매끈했고 특히 반듯한 이마에서부터 이어지는 조각처럼 내리 깎인 콧날은 숨이 막힐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무심한 듯 툭 걸친 니트와 코트는 심플했지만 그래서 그의 잘생긴 얼굴을 더 부각시켰다.

‘이렇게 잘생겼었구나.’

그녀의 심장이 수줍게 콩닥거렸다.

아침에 그에게 느껴졌던 오묘한 감정이 줄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남자에 대한 감사함에서 비롯됐다면, 지금은 오롯이 이 남자 수현 자체로 인해 설렜다.

홀린 듯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순간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지연은 급하게 다른 곳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불콰해진 얼굴을 그가 볼 수 없도록 괜히 미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선아, 서류 줄 거 있다며.”

전후 사정도 자르고 다짜고짜 미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선도 지연이 내민 손을 보고서야 ‘잘생긴 집주인’에 대한 시선을 접었다.

막 정신을 차린 그녀가 지연에게 빈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 프로필 카드. 작성해주면 돼.”

그러곤 수전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현에게도 뭔가를 내밀었다.

“집주인님은 이거 하나 작성해주세요. 회원 관리 카든데 저희 센터에 방문하는 고객 모두에게 드리는 겁니다. 해주시면 샘플 드려요.”

수현은 반사적으로 카드를 밀어내려다, 다시 받았다.

오드리 화장품에 대해 알려면 샘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현과 지연은 각자에게 주어진 카드를 작성해 다시 미선을 주었다.

미선은 그들이 준 카드들을 가지고 나가며 지연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이거 이사님께 드리고 올게. 이사님이 우리 센터장님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런데 이미 어제 내가 너에 대해 말씀드렸고 입사해도 된다는 허락 받았어. 서류는 형식이나 마찬가지야.”

미선이 나간 후 지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뿜었다.

“휴, 다행이다. 취직 못 하면 어떡하나 잠도 못 잤는데.”

그녀의 말에 수현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잠도 못 자긴, 떡실신 돼놓고.’

어제 내 품을 그렇게 파고들어놓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보는 걸 보면 뻔뻔스러운 면이 있단 말이야.

수현은 순간 어제 자신의 침대를 침범하는 큰 사고를 쳐놓곤 세상에서 제일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얄미워졌다.

그 얄미운 감정이 장난기로 치환됐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젯밤 이야기를 꺼냈다.

“어젠 늦게 들어오셨나 봐요?”

수현의 속뜻을 알아채지 못한 지연은 건성처럼 넘겼다.

“네, 쫌.”

“술 드셨어요?”

“네, 쫌.”

“많이 드셨어요? 어디서 잔 지 모를 정도로?”

그녀는 그의 말뜻을 파악하려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샐룩한 표정으로 웃었다.

“뉴욕에서의 일 말씀하시는 건가 봐요. 그건 정말 어쩌다 그런 건데. 저 취하면 죽어도 제 방 찾아가는 천부적 귀소본능 있어요. 헤헤.”

풋, 천부적 귀소본능?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다시 한 번 물었다.

“혹시 잠버릇 있어요? 예를 들면 옆에서 자는 사람한테 막 안기거나 파고들거나.”

그런데 벙글거리던 그녀의 미소가 툭 멈췄다.

뭐야? 기억하는 거야?

기억하면 나도 곤란한데…….

장난이 너무 길었나 싶어 막 다른 말로 넘기려는데 그녀가 익살스러운 미소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제 잠버릇은 줄리 품을 파고드는 거예요. 작은 품이지만 파고들면 줄리가 절 꼭 안아주더라고요. 그땐 도리어 자기가 엄마처럼 느껴져서 좋나 봐요.”

“…….”

그럼 뭐야, 내 품이 줄리의 품인 줄 알고 파고들었다는 거야?

말이 돼? 줄리 가슴이 120cm가 넘는 건장한 가슴이니?

여섯 살 난 아이의 가슴팍이 이렇게 단단해?

말도 안 되는 핑계라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지연이 품으로 파고드는 걸 줄린 줄 알고 꼭 안아줬으니까.

그녀와 나는 잠결에, 술김에 그렇게 서로를 오해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줄린 줄 알고.

어이가 없긴 했지만 자꾸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피식 실소가 터졌다.

아이 품을 파고드는 그녀를 상상하니 너무 귀여워서.

귀여운 아이를 보면 장난을 걸고 싶듯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날 밤의 일을 캐물을까 하다, 그냥 멈추기로 했다.

그녀의 뻔뻔함을 지켜주고 싶기도 했고 나중에라도 그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그런 은밀한 비밀 하나는 갖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현이 혼자서 은밀하고 뻔뻔한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카드를 들고 나갔던 미선이 나갈 때완 아주 다른,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왔다.

“지연아, 어쩌니…….”

그녀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 짐짓 상황을 읽은 지연이 벌떡 일어났다.

“왜? 무슨 일인데?”

미선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손바닥을 쓱쓱 비비며 마른침을 삼켰다.

“요새 뷰티 카운슬러들이 좀 줄어드는 추세긴 하거든. 블로그나 유튜브를 통해 판매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그래도 니 스펙이 너무 좋아 이사님이 허락하신 줄 알았는데…….”

마무리를 짓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취직이 안 됐단 말이지?’

너무 큰 실망은 두려움까지 동반했다.

지연의 하얀 피부가 큰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어떡하지? 나 이제 어떡하지?”

그때 접견실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

눈에 띄는 미인이긴 한데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과한 화려함을 장착한 여자였다.

그녀의 표정도 외모와 마찬가지로 건방지고 고고했다.

“박미선 매니저 친구분이 이분인가요?”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지만 미선은 고개를 숙이는 걸 너머 허리까지 굽실거리며 쩔쩔맸다.

“이사님이 직접 오셨어요?”

그녀는 그런 미선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카드에 시선을 꽂았다.

“이름이…….”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줄 안 지연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송지연이라고 하…….”

그런데 여자가 지연의 어깨를 스쳐 그녀의 뒤로 걸어갔다.

그녀의 높은 하이힐이 멈춘 곳은 수현의 정면.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른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렀다.

“성함이…… 진수현 씨?”

무심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수현의 눈동자도 그녀를 향했다.

“왜 그러시죠?”

그녀는 수현의 얼굴과 몸 전체를 고혹적인 눈빛으로 훑었다.

그리고 물 한 번 묻혀보지 않아 보이는, 하얗고 고운 손을 내밀며 도발적으로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드리 화장품 이사 강민희입니다.”

수현과 민희의 시선이 직선으로 부딪혔다.

한 사람은 긴장의 눈빛으로 한 사람은 유혹의 눈빛으로.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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