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러브 메신저
2018.02.28.
수현과 지연의 동침 16시간 전.
지연은 주택 운영을 위한 경비 절약 차원으로 빨간 지붕 집의 세입자가 되어달라는 수현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집주인인 수현과 줄리의 원만한 동거를 위해 줄리의 안 좋은 버릇들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기로 했다.
줄리를 미워하지 말길 바라는, 딱 그 정도의 바람을 가지고 말을 꺼냈는데 생각보다 수현은 이해심이 많은 남자였다.
줄리가 수현의 침실에 들어가 장난을 치는 행위가 아빠의 따뜻한 품을 느끼고 싶어서라고 얘기하자 기대보다도 더 흔쾌히 그녀를 감싸주었다.
‘줄리에게 전해주세요. 잠이 안 오면 언제든지 건너오라고.’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그리고 가끔 어디 가실 데 있으면 저한테 맡기셔도 됩니다. 저도 줄리랑 놀아보니까 재밌더라고요.’
진짜?
예상을 뛰어넘는 자상하고 배려 깊은 대답이 나오자 지연은 뻔뻔한 줄 알면서도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지금부터 딱 두 시간 만 맡아주실래요?”
*
지연은 수현에게 줄리를 부탁하고 급하게 집을 나섰다.
맡기라 그랬다고 진짜로 그러는 건 경우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사람이 급하면 뻔뻔해진다.
오늘 꼭 친구 미선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줄리가 잠든 사이에 나갔다 오는 거니까.’
스스로 합리화를 시키며 친구 미선이 기다리는 종로의 한 커피전문점으로 향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미선은 지연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송지연, 여기!”
지연의 초등 5학년 때부터 단짝 친구였던 미선.
유학을 간 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딱 5년 만이다.
너무나 긴 세월 만에 만난 두 친구는 격한 감정으로 서로의 머리를 껴안았다.
고새 미선의 눈에는 작은 이슬이 맺혔다.
“기집애,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5년 동안 한 번도 안 나오는 경우가 어디 있니?”
그녀가 이렇게 섭섭해하는 건 당연했다.
그녀는 지연이 중학교 시절, 돌아가신 엄마 대신 지우를 업고 놀이터를 돌아다닐 때 ‘니가 엄마냐?’며 놀리는 친구들과는 달리 지우와 함께 놀아주고 돌봐주던 유일한 친구였다.
아무리 현실이 버거웠다고 하지만 소원하게 대했던 건 사실이기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연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답했다.
앞으로 할 얘기가 더 미안했으니까.
“비행기표가 한두 푼이냐? 생활비 충당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지연에 대한 그녀의 배려심은 여전했다.
“그래도 오자마자 나한테 연락 줘서 고맙다. 결혼 준비로 나왔으면 시간 내기 어려웠을 텐데.”
미선은 아직 그녀의 결혼이 처참하게 깨졌다는 걸 모른다.
지연은 수습을 위해 그녀의 옆구리를 툭 쳤다.
“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한 걸음에 달려왔겠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앞으로 꺼내야 할 여러 진실들에 마음은 무겁고 복잡했다.
사실 미선이 많이 보고 싶었던 건 맞지만 급하게 줄리를 수현에게까지 맡기면서까지 그녀를 찾은 이유가 있었다.
“니가 말했던 그때 그 일자리…… 아직 가능하니?”
두 달 전, 그러니까 문태규가 도망가기 전 지연은 미선과 통화를 했다.
지연이 마지막 학기를 마치면 한국으로 올 거라 생각한 미선은 한국에 오면 자신이 다니는 화장품 회사로 들어오라고 했다.
지연의 전공은 팝아트였지만 그녀는 돈을 아끼려 글리세린과 향수 등 화장품 재료를 사서 직접 화장품을 만들어 쓰는 재주가 있었다.
미선은 그녀의 그런 재주도 그녀가 화장품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의 눈에 띄게 도드라지는 깨끗한 피부.
미선은 어릴 적부터 늘 지연의 피부를 동경했다.
‘피부를 자산으로 따지면 넌 만수르 급이다.’
일일 일팩을 실천해도 지연의 맑은 피부톤과 작은 뾰루지 하나 없는 매끈함, 어떤 성질의 화장품을 써도 트러블 없는 건강함을 따라가기 힘들다며 늘 질투했다.
그래서 혹시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다니는 화장품 회사로 오라며 권유했다.
마침 회사 임원이 팀장급으로 스카우트할 유학파 출신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연은 당시에 태규와 결혼 계획이 있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두 달 만에 신세가 이렇게 되다니.
지연은 아직도 그 제의가 유효하기를 바라며 애절한 눈빛으로 미선을 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의 절실한 희망을 꺾어버렸다.
“이미 뽑았지. 니가 안 온다고 했잖아.”
그녀의 대답을 듣고는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절규하고 싶었다.
그땐 결혼이 깨질지 몰랐잖아!
이거 하나 믿고 있었는데……
오로지 이거 하나였는데…….
갑자기 믿었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단 생각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듯 머리가 아찔했다.
“휴…….”
저도 모르게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미선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송지연, 너 왜 그래?”
다음엔 눈치 빠르게 그녀의 상황을 꿰뚫었다.
“너…… 결혼 혹시 깨진 거니?”
지연은 대답 대신 맑은 피부를 파리하게 떨었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미선은 그녀 앞에 덩그러니 놓인 커피라떼를 치웠다.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이게 아닌 것 같다.”
15년 지기 친구는 그녀의 가는 팔목을 끌고 커피전문점을 빠져나왔다.
*
수현은 1층 서재에서 창문 너머 그려진 정원을 감상하며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모처럼 만에 갖게 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오감을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있으니 창밖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바람 소리도 선명하게 귀에 닿았다.
‘이 집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심지어 2층에서 울리던 쿵쾅거리는 발소리도 없다.
아하, 지연 씨는 나갔고 줄리는 자는구나!
고요한 분위기에서 이제 막 우려낸 질 좋은 홍차를 품으니 혀끝으로부터 퍼진 향기가 주는 편안함이 심장까지 번졌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게 원래의 내 모습이다.
홀로, 조용히,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고독한 것.
그런데 고독이 주는 희열도 잠시.
주변 소음이 사라지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특히 지연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줄리의 가슴 아픈 스토리가 고요 속 파장처럼 귓가를 울렸다.
아빠가 따뜻하게 안아준 기억이 없어 아빠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만 보면 그의 품을 궁금해한다는 줄리.
‘그런데 아빠가 안아줬던 적은 있는 거야?’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긴 했지만 지연이 촉촉한 눈으로 밝히고 싶지 않은 딸의 사정을 말하는 분위기에서 이것저것 물어보긴 곤란했다.
어쨌든 모든 건 애런이 와야 풀릴 문제군.
도대체 이 자식은 언제 오는 거야? 오긴 오는 거야?
마지막 문자 이후 로버트와 연락이 안 되니 뻑뻑한 바게트를 억지로 넘긴 것처럼 명치가 답답했다.
그런데 어쨌든 지금은 로버트나 애런을 생각할 타임이 아니다.
애! 를! 봐! 야! 한! 다!
2층에서 콩콩거리는 소리가 안 나는 걸 보니 줄리가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창밖을 보고 있어도 정신은 위로 가 있다.
고요한 평화를 즐긴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맘이 불편했다.
수현은 들고 있던 홍차를 내려놓고 서재를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가 커다란 덩치의 무게를 발끝에 주고 살금살금 줄리의 방문을 열었다.
“피유~~~”
동그랗게 벌린 입에서 평화로운 숨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아주 잘 자고 있군.
작은 참새 같은 입술로 되바라지게 톡톡 쏠 때는 여섯 살 아이가 아니라 분노를 주체 못 하는 열여섯 살 사춘기 소녀 같더니 자고 있는 모습은 막 세상에 나온 아기가 따로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아빠 미소를 그리며 방문을 닫았다.
띠리리리리리리리-
하필 그 순간 뒷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렸다.
두 시간만 줄리를 봐달라며 집을 나간 지연이었다.
혹시나 아이가 들을까 쏜살같이 복도 끝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줄리 깼나요?”
느낌상으론 깼다면 바로 집으로 올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직 깨지 않고 잘 자고 있는 걸 방금 확인했기에 자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녀는 아이가 깨면 바로 문자를 달라는 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뒤에서 들리는 작고 소름 돋는 음성.
“나 깼는데…….”
줄리였다.
뭐야…… 조금 전엔 헤비메탈 밴드가 와도 안 일어날 것처럼 침대와 한 몸 일체더니.
수현은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아이가 놀랄까 최대한 침착하고 자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는 볼일 있어 나갔어. 잠시 후에 돌아오실 거야.”
다행히 줄리는 엄마의 부재에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요구했다.
“그럼 아저씨가 저 밥 줘야겠네요.”
“…….”
그럼, 줘야지. 내가 줘야지.
수현은 줄리를 번쩍 안고 1층으로 향했다.
아침처럼 계란프라이로 놀림당하고 싶지 않아 로버트가 일꾼 시켜 채워놓은 컵라면을 주었다.
국물까지 쭉 마셔버린 줄리는 전날 소주 세 병 마신 아저씨 숙취 푸는 소리를 냈다.
“크아~~~ 시원하다.”
역시 범상한 아이는 아니다.
배가 차고 나니 그제야 엄마를 찾았다.
“울 엄마 어디 갔어요?”
“응, 잠시 나가셨는데 줄리 깨면 문자 달라고 했어.”
수현은 휴대폰을 들었다. 지연의 당부대로 줄리가 일어났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그녀에게 문자를 하고 있는데 줄리가 현관문을 물끄러미 보며 혼잣말처럼 오물댔다.
“엄마 없으니까 이상하다. 한국 오기 한 달 전부터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었는데.”
한 달 동안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어?
수현은 지연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다.
뭘 하러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녀에게 짐도 줄리도 없는 홀가분한 시간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그냥 그래주고 싶었다. 딱 오늘 하루만이라도.
대신 줄리가 엄마를 찾지 않도록 재미있는 시간을 주기로 했다.
“줄리야, 엄마 올 때까지 아저씨랑 놀까? 베개싸움 할까? 벽난로 피워줄까?”
그녀는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작은 머리를 이리저리 기울이더니 드디어 결정했는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벽난로 피워놓고 앞에서 베개싸움 해요!”
“…… 어, 어.”
줄리의 얼굴에 익살스러운 애런의 모습이 겹쳐졌다.
‘애런 이 자식, 똑똑한 아이를 뒀구나.’
휴대폰을 들어 지연에게 문자를 남겼다. 거짓말로.
-아이가 잠시 일어나더니 또 잠들었네요. 잠의 밀도를 봐선 아침까지 잘 거 같습니다.
지연은 휴대폰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아, 그래요? 그럼 오늘 조금만 늦겠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짐과 줄리를 내려놓은 지연의 홀가분함이 문자로도 느껴졌다.
그사이 줄리는 벽난로와 베개싸움 이벤트에 신이 나 콧노래를 부르며 베개를 가지러 2층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 행복하구나.’
지연과 줄리, 두 사람의 행복한 미소를 상상하니 뭔가 큰일을 한 사람처럼 뿌듯했다.
적자 브랜드를 인수해 대박 브랜드로 만든 것만큼 보람찬?
그런데 한편으론 또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나에게도 이런 인간적인 면이 있었나?
남의 행복에 내가 기쁘다니.
내 여자도 아닌데, 내 딸도 아닌데.
스스로도 자신의 심장의 반은 얼음일 거라 생각할 만큼 타인에 대한 감정이 없는 그이기에, 지금 이 모습이 참 낯설었다.
하지만 뭐, 애런 대신 해야 할 일을 한 거니까.
늘 하던 대로 애런이 친 사고를 내가 해결한 거니까.
익숙지 않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며 그냥 오늘 하루 정도만 희생하자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 한다.
냉정한 사람은 그냥 살던 대로 냉정하게, 자상한 사람은 살던 대로 자상하게.
감히 생긴 대로, 성정대로 살지 않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새끼 고양이가 아니고 그 엄마가 내 품에서 잠들다니!’
잠만 같이 잤나? 더한 것도 했다.
새벽녘쯤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그르릉 그르릉-
사이드 등을 켜고 이불을 들춰 정체를 확인하려다…… 말았다.
낮에 지연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줄리에게 전해주세요. 잠이 안 오면 언제든지 건너오라고.’
새끼 고양이의 정체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따뜻한 아빠의 품을 느끼고 싶어서 찾아온 불쌍한 내 조카일 게 뻔하니까.
품안의 이것이 줄리의 덩치보다 부피가 크다고 생각했지만 몇 개의 베개가 침대 위에 엉켜 있어서 베개인가 싶어 별 의심 하지 않았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보드랍고 포근한 게 질 좋은 베개의 그것과도 같았으니까.
예고 없이 찾아온 고양이가 성가시긴 했지만 일단 해놓은 얘기가 있으니 오늘 밤은 꼭 안아줄 생각이었다.
‘대신 내일부턴 문을 잠그고 잘 테다.’
딱 오늘 하루만이라고 또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슬금슬금 위로 올라오는 새끼 고양이를 끌어 올렸다.
길고 단단한 두 팔로 마치 베개를 끌어안듯 꼭 껴안아주었다.
새끼 고양이는 기다렸단 듯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래, 그래, 오늘은 우리 이렇게 자는 거야. 날 아빠라 느끼며.’
그녀의 이마에 쪽 뽀뽀도 해주었다.
마음을 다해 가여운 줄리에게 따뜻한 아빠의 품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따뜻한 품을 느낀 정체가 새끼 고양이가 아니라 어미였어?
아마도 늦게 들어온 지연이 옆방을 이 방으로 착각한 듯.
‘아, 진짜!’
그건 그렇고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지?
당황스러움을 넘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그의 속도 모르고 지연은 아랫입술이 흔들릴 정도로 시원하게 숨소리를 뿜었다.
“푸우~~~~”
그녀가 뿜은 숨결에 수현의 머리가 어질!
뭐야? 술 마셨어?
맨해튼의 오피스텔에서 경험했던 똑같은 냄새가 진동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얄밉게도 빙긋 미소까지 지으며 다시 한 번 시원하게!
“푸우~~~~”
이번엔 기가 차서 정신이 아찔!
어깨를 잡고 흔들어 깨우려는데 밖에서 더 아찔한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울 엄마 없어서 그런데 저 잠시 들어가도 돼요?”
뭐, 뭐, 뭐 뭐라고? 여길 들어온다고?
들어왔다가 자기 엄마와 내가 한 침대에서 누워 있는 걸 보면 어쩌려고!
지연을 소리 내어 깨우지도, 그냥 두지도 못하고 우왕좌왕 불안한데 갑자기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줄리가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안 돼!”
수현은 다이빙하듯 침대에서 점프해 문으로 내달렸다.
철컥!
문을 잠그고는 문밖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줄리야, 엄마 여기 없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줄리는 수현의 외침에 혼잣말처럼 답했다.
“누가 엄마 여기 있다 그랬나? 잠시 들어간다고 그랬지?”
이런…….
한국말에 이런 게 있었지?
도둑이 혼자 발 저리고 어쩌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굴리는 와중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방 밖을 향해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야! 마당으로 가 있을래? 눈 하얗게 쌓인 거 봤지? 아저씨랑 눈싸움하고 엄마 찾자.”
수현의 제안에 그녀의 목소리에 흥분이 올라왔다.
“눈싸움이요? 와! 신난다.”
“미리 마당에 나가서 눈뭉치 만들어 놔. 아저씨 옷 입고 내려갈게.”
다행히 눈싸움이 엄마 생각을 덮은 듯.
“알겠습니다.”
콩콩콩-
아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휴…… 다행이다.”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트럭을 간신히 피한 기분이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또 왜 이런 일을 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알파인의 언덕에서와 똑같은 일을 나는 지금 해야 한다.
업고 뛰자!
.
.
.
까르르 까르르-
아이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2층으로 올라왔다.
창을 두드리고 한 여자의 깊은 잠을 깨웠다.
꿈속에서도 제 아이의 청아한 웃음소리는 엄마를 미소 짓게 만든다.
‘우리 줄리가 잘 놀고 있구나.’
아이를 놓고 늦게 들어왔단 생각에 자면서도 죄책감이 가득했는데 저 웃음소리가 작게나마 안도가 됐다.
고맙다, 줄리야. 혼자서도 잘 놀아줘서.
혼자서도……
혼자서도?
“헉!”
지연은 침대에서 직각으로 벌떡 상체를 세웠다.
“혹시 또 아저씨 괴롭히고 있는 거야?”
급한 일이 생긴 사람처럼 조금의 지체도 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제, 미선은 지연에게 거의 협박에 가까운 술 권유를 했다.
‘이거 안 마심 너랑 친구 안 해.’
딴에는 결혼 깨진 친구를 위로하려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지연은 불편했다.
수현이 줄리가 낼 아침까지 잘 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늦게 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또 미선에게 줄리 얘기를 꺼낼 수도 없고.
한 잔 한 잔이 모래를 삼키듯 껄끄러웠지만 어느덧 대학 시절 단골주점으로 3차까지 가게 됐다.
겨우 미선을 떼어내고 어찌어찌 집까진 왔는데 그다음부턴 주점 변기에 쏟아낸 오바이트처럼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관자놀이는 지끈지끈, 머리는 욱신욱신, 천장은 뱅뱅 돌았다.
문밖에 나가기 전 몰골을 살펴보니 어제 입고 외출 나갔던 하얀 셔츠 하나 달랑 입고 있다.
‘술 취해 코트만 벗고 잠에 들다니.’
그런데 바지는 어디 있지?
술김에 벗은 건 분명한데 침대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바지가 없다.
이리저리 방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는데 창문 너머에서 줄리의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여기요, 여기!”
뭐지? 왜 줄리 소리가 1층이 아니고 밖에서 들려?
지연은 딸의 소리가 이끄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 너머 줄리를 확인한 순간 충격적인 장면이 머리를 관통한 듯 멍해졌다.
“수현 씨?”
수현이 목말을 태운 줄리의 손을 잡고 눈 덮인 마당을 뛰고 있었다.
“꽉 잡아!”
줄리는 그의 목 위에서 디즈니랜드라도 온 것처럼 흥분했다.
“꺄아~~ 꺄아~~”
“재밌어?”
“아저씨 조금 더 빨리! 빨리! 꺄아!”
줄리의 재촉에 수현은 조금 더 빠르게 뱅뱅 돌았다.
속도가 오르는 것만큼 그녀의 웃음지수도 최고치로 올라갔다.
까르르 까르르-
거짓이나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순도 백 퍼센트의 수현과 줄리의 행복한 표정.
순간 지연의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저 아름다운 모습은, 줄리의 저 예쁘고 행복한 미소는, 진짜 아빠 문태규는 한 번도 주지 못했으니까.
그때까진 알지 못했다.
줄리가 부르는 그 웃음소리가, 그녀가 짓는 그 행복한 표정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이어주는 러브 메신저가 될 줄은.
#dark